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2018년 12월 2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9 ✦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사도행전 13장 13~25절)
[들어가는 말]
제가 처음 신학교에 입학하고 전도사가 된 것이 겨우 나이 스물네 살 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릴 때였는데 그때 벌써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한인 교회들이 모일 때나 특히 목사님들이 은퇴하실 때 보면 소위 ‘성역 30년’ 또는 '40년’이라고 하면서 은퇴하셨는데, 저도 벌써 ‘성역 29년차’이니까 얼마 멀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가서 전도사가 되니까 여러 가지로 미숙했습니다. 처음에 청소년을 맡았는데, 열심히는 했지만 그다지 큰 열매가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졸업반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집안에 어려움도 있었고 굉장히 분노가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따로 이상한 데 가서 성경공부도 하는 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성경공부 때 예수님의 재림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와 다른 의견이 나오니까 격분하면서 밖으로 나가다가 교회의 화분을 발로 차서 깨뜨리고 그 후 교회에 안 나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전화를 하고 다독거리면서 다시 나오게 했지만, 결국은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며 ‘내가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제대로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2년을 사역하고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나갈 때 자연스럽게 사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금 죄송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7, 8년 후 플로리다에서 부목사가 되어 청소년들을 데리고 미국장로교 소속 한인 교회 연합수련회에 학생들을 데리고 참석했다가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가 되어 가르쳤을 때 7학년과 8학년 여학생 둘이 있었는데, 굉장히 조용하고 수줍어하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련회에 가서 보니까 그 두 여학생이 대학생, 청년이 되어서 그 수련회 찬양 팀의 리더가 된 것입니다. 저를 보면서 굉장히 반가워하고 고마워했습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고 실패한 사역이었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오히려 제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너무 고마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제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 보면 실패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또 전혀 예상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는데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힘들게 되고 고생도 하는데, 나중에 보면 그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내 인생에 아주 귀한 결과를 얻게 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고,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 일행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1. 새로운 여정
1) 마가 요한이 돌아감
바울 일행은 구브로(키프로스) 사역을 마치고 서쪽 항구인 바보에서 배를 타고 북쪽의 육지로 나옵니다.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으로 온 것입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3절)
여기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3절 맨 앞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바울이 파송 받을 때는 “바나바와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있고 거기에 바나바의 조카라고 생각되는 ‘마가라 하는 요한’이 있어서, 이 세 사람이 함께 일행이 되어 떠났습니다. 그때 순서는 바나바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사울입니다. 그러다 중간에 사울이 바울로 이름이 바뀝니다.
물론 사울은 ‘큰 자’,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작은 자가 되겠다’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의미도 없지는 않겠지만, 헬라 지역에서는 헬라식 이름이 더 잘 통하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바울이 되고 또 바울이 앞으로 나옵니다. 여기서는 바나바의 이름도 안 나오고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나옵니다.
어느새 이름의 순서가 바뀐 것을 보면 선교의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훌륭한 점입니다. 자기가 리더인데, 키프로스에 와서 보니까 자기 고향이기는 하지만 헬라 지역에서는 바울이 자기보다 훨씬 더 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네가 앞에서 해라. 나는 네 뒤에서 따라가겠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때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배를 타고 키프로스 섬에서 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인 밤빌리아의 버가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마가 요한이 전도여행을 중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왜 이때 마가가 중도 이탈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전혀 말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학자들의 의견들을 참조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그 중 첫 번째 견해는 마가가 향수병에 걸려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고향이 너무 그리웠던 것입니다.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귀신 들린 사람도 만나고 몸도 너무 힘들고 해서, ‘엄마~~’ 하면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선교 활동에 있어 바울이 주도권을 잡게 되자 이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사촌동생’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사본 단어의 차이로 그런 것입니다. 어쨌든 확실히 친척이었습니다. 처음에 일행에 동참했을 때는 자기 아저씨가 팀장이었는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바나바가 그렇게 해준 것이지만, 바울이 주도권을 잡고 앞서 나가는 것이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가 젊은 혈기에 그것에 기분이 나빠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선교 팀이 가게 될 버가부터 비시디아 안디옥까지의 여정이 아주 험난했는데, 그런 험한 산길을 아무 이동 수단 없이 걸어서 넘어야 했기 때문에, 젊은 마가가 보기에 ‘이 산을 넘어가다가는 큰일 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갔다는 설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견해는, 바울이 풍토병에 걸렸고 그것이 말라리아라는 말도 있지만 정확히 무슨 병이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병에 걸리는 것을 보고 마가 요한이 겁이 나서 자기도 저렇게 병에 걸리기 전에 빨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떠났든지 간에 떠난 것은 확실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2)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함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4절)
사실 이 14절만 갖고도 설교 한 편이 될 정도의 내용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냥 보면 금방 읽고 넘어갈 내용이지만, 사실 여기에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버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의 다음 목적지가 비시디아 안디옥인데, 그곳은 고원지대이고 산지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비시디아'라는 지역에 있는 '안디옥'이라는 도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 받은 교회가 있는 곳은 '수리아(시리아) 안디옥'이고, 이곳은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안디옥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왕의 이름을 따서 많이 지었던 것입니다. 콜럼버스가 여기 오하이오에도 있고, 조지아 주에도 있고, 바로 옆인 인디애나 주에도 있는 것과 같이, 안디옥이라는 도시들도 여기저기에 많이 있었습니다.
버가에서 술탄(Sultan) 산맥의 남쪽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타우루스(Taurus)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험한 타우루스 산맥은 옛날부터 강도와 산적의 소굴이었고, 보통 사람이 그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해발 2천 미터에 달하는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는 타우루스 산맥은 그 길의 험하기가 얼마나 심한지, 가보신 목사님에게 들었는데 130마일 정도의 길을 차로 가면 3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험한 산지입니다. 그래서 자동차 뒤쪽에 앉은 사람들은 길이 꼬불꼬불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때문에 다 멀미를 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 길을 2천 년 전에 걸어서 산맥을 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젊은 마가도 두려워서 포기한 그 험한 길을, 바울과 바나바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로마제국의 속주였던 밤빌리아는 당시의 소아시아 반도, 즉 지금의 터키 남쪽 지중해 연안 지역이었는데, 바울 일행이 도착한 버가라는 도시는 밤빌리아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도시였습니다. BC 12세기경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건설된 도시인 버가는, BC 334년 헬라제국의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그 후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1947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버가의 유적터를 보면 그 도시가 엄청난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외경기장도 있었고, 야외극장도 있었고, 시장도 있었고, 신전도 있었고, 2천 년 전 그 도시가 얼마나 번성한 도시였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상하게도 이처럼 인구가 밀집해 있는 대도시 버가, 밤빌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버가를 그냥 지나치고 곧장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다고 나와 있습니다. 너무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참 이상한 일입니다.
버가에서 130마일 정도 북쪽으로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험산준령을 이루고 있는 타우루스 산맥을 걸어서 넘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 데다가, 산맥 곳곳엔 강도들의 소굴이 있어 정말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 26절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강도의 위험”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타우루스 산맥을 넘을 때의 경험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첫째, 구브로 섬에서 애써 버가를 찾아간 바울 일행이 왜 그 크고 중요한 도시 버가를 그냥 지나쳐 버렸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할 일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바나바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버가를 찾은 하나님의 종이었고 복음의 일꾼이었습니다.
그 목적,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이 버가는 정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버가는 바울이 지금까지 거쳐 온 구브로 섬의 살라미나 바보보다 월등히 큰 도시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평소의 바울이라면, 자기가 애써 찾아간 그 큰 도시의 사람들을 향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거기에서 아무것도 했다는 기록이 없고, 거기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버렸습니다. 버가를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에 따른 두 번째 질문은, 바울이 버가를 어쩔 수 없이 지나쳤더라도 왜 그 다음 목적지가 하필이면 저 깊은 산너머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이었느냐는 것입니다. 버가 인근에는 앗달리아(Attalia)나 아펜도스(Apendos)나 시데(Side) 같은 큰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버가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면, 그 대신 버가의 주변 도시들을 찾아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전부 다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복음을 전하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굳이 바나바와 함께 목숨을 걸고 강도들과 산적들이 들끓는 저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130마일이나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험한 길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그 먼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갔는지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바울 자신이 직접 알려주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로마제국의 속주인 갈라디아 지방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성경에 갈라디아서가 나오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유일하게 도시가 아니라 지역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터키 중부 산악지역에 있는 곳이 갈라디아 지역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았다는 것은 갈라디아 지방에 그의 첫발을 내디딘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계속해서 갈라디아 지방의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와 같은 도시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갈라디아 곳곳에 믿는 자들이 나와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나중에 그 갈라디아의 교인들을 위해 바울이 써 보낸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바로 그 갈라디아서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갈 4:13)
“처음에”, 즉 지금 이 1차 전도여행 때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애써 찾아간 남부 밤빌리아의 버가를 그냥 지나치고 굳이 험한 산길인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갈라디아 땅의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갔던 것, 그 후에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로 갔던 것은 육체의 약함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약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질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바울이 버가를 지나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던 이유는 그가 병을 앓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에 걸린 사람이 무슨 험한 산길을 갑니까? 그냥 쉬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의 “육체의 가시”가 그 병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그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버가가 평소에 갖고 있던 지병(안질이나 간질병)에 해로운 곳이어서 바울이 버가를 포기해야 했다면, 그 다음 목적지를 구태여 험한 산길을 넘어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병이 있으면 안전한 곳이나 쉬기 좋은 곳으로 가야지, 왜 험한 산길로 가겠습니까?
또 나중에 자신의 병에 해로운 버가를 다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타우루스 산맥 너머의 갈라디아 지방에 전한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에는 지나쳤던 그 버가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14:25).
그러므로 그가 버가에서 걸린 병이 평소의 지병인 “육체의 가시”였다기보다는, 지형상 저지대이어서 온갖 전염병이 가득했던 버가에 당도한 바울이 즉시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에 감염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의견입니다. 2천 년 전의 의료 수준은 오늘날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낮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풍토병 환자에 대한 최선의 치료 방법 중 하나는, 풍토병을 일으킨 환경과 정반대의 환경으로 환자를 이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지대인 버가는 무덥고 습한 기후인데, 그와는 반대로 비시디아 안디옥은 선선하고 건조한 공기가 있는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원지대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버가에 도착하자마자 풍토병에 걸린 바울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저 험한 산길의 타우루스 산맥을 넘으면서까지 버가와는 정반대의 환경 조건을 지닌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는가가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이 돌아오는 길에 다시 버가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그가 갈라디아의 고원지대를 다니는 동안에 버가에서 걸렸던 풍토병이 다 치유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만약 버가에 도착한 바울이 그곳에서 풍토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저 험한 산길을 넘어서 저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경우 바울은 구브로 섬의 살라미와 바보에서 그랬듯, 먼저는 대도시 버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뒤이어 버가의 주변에 있는 도시들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버가에서 바울이 걸렸던 우리가 알 수 없는 풍토병이, 바울 자신의 고백처럼,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갈라디아 땅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또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로 그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2차 전도여행) 그곳에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버가에 도착하는 즉시 그곳 사람들에게 단 한마디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풍토병에 걸려서 너무 아픈 바울은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겠다’ 하고 육지로 왔는데 병에 걸렸으니 무기력함과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버가를 지나, 버가와는 정반대의 환경인 비시디아 안디옥을 향해 그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야 했을 때, 풍토병에 시달리던 그의 몸은 얼마나 아팠겠으며 또 그 마음이 얼마나 씁쓸했겠습니까? 정말 얼마나 지치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풍토병으로 타우루스 산맥 너머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복음이 그 갈라디아 지방에 전파될 수 있었고 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를 해주신 것입니다. 병을 통해서도 그렇게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구브로 섬에서 배를 타고 애써 버가를 찾아간 바울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토병을 얻었고, 그로 인해서 저 산맥을 넘어 갈라디아 땅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이며 인도하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까지의 인생을 돌아보시면, 내가 원해서 된 일보다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진’ 일들이 사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되어진’ 일들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삶이 지금 이 순간까지 쭉 이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이 콜럼버스 지역에 사는 것은, 그렇게 원해서 오신 분도 있겠지만 다른 데 갈 데가 없어서 그냥 온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와 보니까 놀랍게도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난 세월 동안 혹시 왜 내가 기도한 대로 하나님이 안 들어주셨는지 의문을 갖고 계십니까? 만약 내가 기도했던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 겁니다.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졌으면 저기 있는 어느 통치자도 죽어야 되고, 옆집 사람도 죽어야 되고,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죽어야 되고... 안 그렇습니까? 욕망에 눈이 멀어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때문에 혹시 실패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할지라도, 또 내가 원했던 그대로 일들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간증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지금 ‘나의 나 된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바울을 본받아서 ‘나도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의 전도
풍토병에 걸린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어디로 갔습니까? 요양원? 아닙니다. 또 어떤 숙소를 구한 다음에 두문불출하면서 오로지 건강 회복에만 집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사를 빨리 구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금방 안식일이 되었는데, 바울은 병든 몸을 이끌고 바나바와 함께 놀랍게도 회당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갔고, 또 전도하러 갔습니다. 게다가 설교까지 하게 됩니다.
회당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몇몇 이방인들, 즉 소위 경건한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이 설교는 주로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였고. 그 주제는 ‘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는가'(23)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15-25절, 26-41절). 오늘은 그 첫 번째 부분까지만 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5절)
이 구절의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회당 예배의 진행 방법과 회당의 구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각 회당에는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서에도 회당장이 많이 나옵니다. 그들은 회당 예배를 진행하면서 성경을 낭독하는 사람과 설교자를 선정하는 권한과 의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장들이 지정한 사람이 성경(당시에는 구약)을 낭독하면, 그날 회당 예배에 참석한 사람 가운에 회당장들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 율법의 교훈을 설교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당 내부는 일반 회중석이 있고 또 랍비들이 앉는 상석으로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최고의 율법 스승이며 힐렐학파의 수장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율법학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정통 유대인이었고 그것도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 랍비석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낭독자의 낭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랍비석에 앉아 있는, 처음 보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람을 보내 설교를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6절)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바울 일행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또 그들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을에 도착한 바울과 그 일행이 회당에 들어오니까 ’한 말씀 해주시죠.‘ 하며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설교 요청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 중에서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어섰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는 회중을 향하여 ‘손짓’을 했습니다.
손짓을 했다는 말은 자기 말을 경청해서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의미였습니다. 회중들이 조용히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중들이 웅성거렸다는 말입니다. 회당장들이 랍비석으로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바나바에게 설교를 부탁했을 때, 회중들은 당연히 둘 중에서 건강해 보이는 바나바가 설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병색이 완연한 몰골에 초췌한 모습의 바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중들이 깜짝 놀라며 서로 ‘저 사람이 뭘 한다고 그래?’ 하며 웅성거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손으로 그들을 조용하게 한 뒤, 그 병약한 몸으로 입을 열어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 간이라” (17-19절)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첫 번째 설교인데, 베드로의 설교가 있었고, 스데반의 설교가 있었으며, 그 다음에 바울의 설교가 나옵니다. 놀랍게도 바울의 설교는 자기가 죽이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스데반의 설교와 닮아 있습니다. 그만큼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했던 그 설교와 그의 모습이 강렬하게 바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의 첫 번째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전부 하나님이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바울이 사용한 첫 번째 동사는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역사하셨습니까? 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이스라엘 사람(유대인)으로 오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까? 그들이 가장 강하고 위대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까?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7장 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가장 작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시 세상 모든 민족 가운데 가장 약하고 가장 볼품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에서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까?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 유일한 이유는 조상(아브라함)을 잘 두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도 여러 민족들로 갈라졌는데, 그 중에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는 알아서 하라고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17~19절에서 주어인 하나님에 대해 바울이 연이어 사용한 동사들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높이시고, 친히 인도하시고, 참으시고, 기업을 주시고,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멸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셨고, 선택하신 것에 대한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한 사람은 바울이었으므로, 이 설교 내용은 사실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나 바울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소에서 안디옥 교회로 인도해주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통로가 되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 바울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을 참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도라는 귀한 직책을 주셨습니다. 다메섹과 예루살렘에서, 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를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높이시고, 인도하시고, 참으시고,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막아주셨습니까? 그것은 바울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어떤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그냥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바울은 원래 교회를 짓밟고 잔멸하던 박해자요 폭도 아니었습니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왜 선택하셨습니까? 이유가 없는 겁니다. 뛰어난 학자라서 선택하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냥 쓰려고 선택하셨습니다. 바울을 사랑하셔서 택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나서, 뭘 잘해서, 출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택하여주셨습니다. 사랑으로 불러주시고 ‘이제 너는 이것을 하면서 살면 좋겠다.’ 하고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브로 섬에서 버가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린 바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사실 거기서 멀지 않은 고향 다소로 가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었을 것입니다. 고향 다소가 속한 길리기아는 버가가 속한 밤빌리아에서 바로 동쪽에 있는 옆 지방입니다. 게다가 버가에서 다소까지 배 타고 아주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끌리는 곳이 가족들이 있는 고향 아니겠습니까?
풍토병에 걸린 바울은 편안하게 배 타고 고향집으로 가서 얼마든지 마음 편하게 요양하며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버가에서 13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그 험한 산길을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으면서까지 풍토병에 걸리게 만든 버가와 정반대의 환경조건을 지닌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간 것은, 단지 병이 낫기 위해서나 요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풍토병에 걸린 상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저곳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병에 걸린 자기 몸보다, 비록 병든 몸이라도 자기 몸이 하나님의 도구로 계속 쓰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버가에서 병에 걸린 바울은 그렇게 험한 타우루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간 것은, 아무리 빨라도 그 병든 몸으로 일주일 이상 걸렸을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병에 시달리던 바울이 제대로 잠을 자거나 먹었겠습니까? 그래서 버가를 출발할 때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훨씬 더 약해져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쉴 겨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도착하자마자 안식일이 되었고 바울은 회당으로 갑니다. 회당장들의 요청을 받고 바울이 설교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 바울의 병색이 얼마나 짙었으면 사람들이 웅성거렸겠습니까? 그런 몸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해주신 그 은혜, 또 왜 택해주셨는지 그 사명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계속해서 바울은 무엇을 전합니까?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0-21절)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나 유대교에 들어온 경건한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 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첫 번째 왕이고, 다윗은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심으로써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선택된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브라함은 반드시 언급되는 주요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브라함 이야기는 별로 안 하고, 그 후 사사시대가 끝날 때까지 천 년 동안 요셉, 모세, 여호수아 등 중요한 지도자들이 많이 등장했는데도 그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통칭하고 있습니다. 20절에 사무엘의 이름을 나오지만, 그것도 사무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무엘 시대에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사울과 다윗을 주셨음을 전해주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의 이름은 사울과 다윗의 등장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천 년에 걸친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면서도 유독 사울과 다윗의 이름만 나온다는 것은, 그 두 사람의 삶을 대비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한 나라의 첫 번째 왕이 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투표로 선출한 왕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첫 번째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면, 사울은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신 지 40년 만에 그를 폐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관두게 하신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은 그를 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 역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2절)
우리 각자 다윗 대신 자기 이름을 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이름을 넣고 “내가 이 사람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는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서 ‘만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휴리스코)는 ‘관찰하여 발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윗을 관찰하시고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것은, 원문에 의하면 ‘내 마음을 뒤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찾아내신 것은 그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사람이었던지,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다윗의 후손 예수와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요한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려고 하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다윗에게서부터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그대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3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뜻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그 뜻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다윗의 족보를 통해 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그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 말씀대로 다윗의 족보를 통해 구원자를 보내주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오신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친히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은 바로 그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신경에서 외우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교회력의 순서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대강절로서 그 나심을 기다리고, 동시에 그것은 역사의 끝을 기다리는 것도 됩니다. 그러면서 성탄절이 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40일 기간(사순절)도 있고, 고난주간이 있고, 부활절이 있고, 그 후 성령강림절이 있으면서 교회력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핏줄을 타고나지 않은 임마누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온전한 대속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분의 구원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4-25절)
바로 지금 이 대강절 기간이 우리가 회개하며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는 기간입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설교의 앞부분을 보면서 굉장히 중요한 역사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아래 있는 역사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세계관이며 역사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실패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가 실패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했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이 실패를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실패까지도 합력하여 마침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히 실패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결코 포기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선한 계획과 섭리로 역사를 이끄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믿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런데도 우리의 삶을 보면 왜 그렇게 실망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책하고 있습니까?
나의 가장 약함을 통해서도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더욱 믿음으로 나아가는 귀한 대강절 기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