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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kwPDgZo5Iik?si=TkQJ7WBZ7jfV4Ggs&t=128

 

 

2024918일 수요예배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3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학개 21~9)

 

1.   2 성전의 건립

 

지난번에 고레스 칙령을 살펴봤는데, 그것의 31~32행을 다시 보겠습니다.

 

31. 구티움 땅 부근과 옛적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던 티그리스강 건너편 도시들에 이르기까지

32. 나는 거기에 거했던 신상들을 원래의 처소로 돌아가게 하고, 그들의 영원한 처소를 세웠다. 나는 그 거주민들 전체를 통합하여 그들의 거처를 다시 세웠다.

 

여기서 티그리스강 건너편지역이 나오는데, 이곳은 페르시아에게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또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사실 유대 전쟁 이후, 주후 2세기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지정된 명칭입니다. 페르시아 때에는 강 건너편지역이었고, 알렉산더 대왕 시대 이후의 공식 명칭은 코엘레-시리아로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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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코엘레-시리아 >>

 

페르시아 시대에 코엘레-시리아의 위치는 제국이 볼 때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아시리아나 바벨론이 이집트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 지역을 포함해서 메소포타미아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곡창 지대를 비옥한 초승달지역이라고 부릅니다. 아마겟돈으로 알려진 므깃도도 여기에 위치합니다.

 

그리스와 페니키아(두로, 시돈)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을 위해 이곳을 거쳐서 내륙으로 들어왔으니까, 강 건너편 지방은 군사, 경제, 교통의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이 지역을 독립된 속주로 분류하며 중요하게 여긴 겁니다. 고레스 왕이 유다 사람들을 돌아가게 한 것도 사실은 거기 돌아가서 열심히 일하여 세금을 내라는 의도였습니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20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페르시아인들은 그것을 사트라페이아라고 부른다. 그는 행정 구역을 정한 다음, 그곳에 태수를 임명하고 민족 별로 세금을 바치게 했다.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이웃에 사는 민족들을 한 단위로 묶었고, 외곽의 부족들은 필요에 따라 이 민족 또는 저 민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헤로도토스, <역사>, 3.89)

 

페르시아는 행정 구역을 나누어 강 건너 지역에도 태수(satrap), 즉 총독을 파견했습니다. 그 총독 중 하나가 스룹바벨이었고, 주전 516년에 그의 주도로 제2성전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 당하고 또 성전도 다 파괴되었는데, 정확히 70년 만에 제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건립된 겁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페르시아의 속주로서 유대 지역의 이 성전이 페르시아 제국의 입장에서는 어떤 정책 중 하나였는지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 침공 이전처럼 정치 체제가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 아래에서 총독을 중심으로 자치권을 가진 성전 공동체가 주전 51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번에 우리가 살펴본 다니엘서에 나오는 것처럼,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연회를 벌이고 있는데 페르시아가 그냥 들어와서 바벨론을 접수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루 아침에 나라가 망하는가 하지만, 그 뒷배경을 지난번에 살펴봤습니다. 벨사살의 아버지인 나보니두스 왕이 아시리아가 망했는데도 자기 어머니가 아시리아 여인이니까 아시리아 신상들을 가져오고 아시리아 신들을 섬기며 바벨론의 마르둑 신을 배제하니까, 바벨론 제사장들과 다수의 백성들이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페르시아는 종교 관용 정책으로 유명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각자 자기 종교를 믿게 해준다는 게 다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이 오히려 손을 벌려서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해줬습니다. 그래서 고레스가 쉽게 들어와 벨사살이 있던 바벨론을 가볍게 제압해 버린 것입니다. 그 후 고레스가 이 칙령을 내려서 유다 사람들은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11 , 은 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1:8, 11)

 

유다의 왕자로 불리는 세스바살(1:8)이 유다 총독으로, 그리고 유다 지파 출신 스룹바벨이 행정관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다 세스바살은 성경에서 사라지는데, 아마도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고, 그 후 스룹바벨이 총독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독 계열의 혈통을 가진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통성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사독 계열은 구약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대제사장의 정통 혈통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오기 때문에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윗 때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섬겼는데, 솔로몬 때 아비아달은 줄을 잘못 서서 파면당하고, 사독 계열이 제사장 계보를 이어갑니다. 그 사독의 후손들로 대제사장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포로기 이전 상태로 회복되었고, 2성전을 중심으로 한 민족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었습니다. 성전이 재건되었으니 하나님의 존재감도 눈에 보일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2성전이 유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종교적인 구심점 기능을 했을까요?

 

당시 유다 사람들은 강 건너 지역에만 거주했던 것이 아니었고,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2성전이 건립되었을 때, 이집트에 살던 유다인들은 자기들도 자체적으로 성전을 세우기를 원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것을 반대했고, 이집트의 유다 공동체는 그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등장하는 <엘레판틴 문서>인데, 이 문서는 예루살렘이 흩어진 유다 사람들의 구심점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렇게 성전과 지방의 회당이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다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2.   성전을 통한 회복

 

2 성전이 건립되는 맥락 안에서 성경을 읽어 보면 유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이것을 깊이 다룬 선지자가 바로 학개입니다.

 

“3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찬란하던 그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4 그러나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바로 그 언약이 아직도 변함이 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3-5, 새번역)

 

여기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이란 바벨론 침공으로 무너지기 이전의 그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을 말합니다. 그것을 본 세대는 70년이 지나 이제 백발이 된 노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스룹바벨에 의하여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그들의 눈앞에 세워진 제2성전은 이전 성전과 비교하여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건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위축되고 슬펐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마음을 굳세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복과 미래의 영광에 대해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6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머지않아서 내가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어 놓겠다. 7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8 은도 나의 것이요, 금도 나의 것이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9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바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게 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6-9, 새번역)

 

솔로몬 성전의 영광에 비교하면 지금 세워진 제2성전이 아주 보잘것없는 건물이지만, 나중 영광이 더 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그분과 소통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회복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고레스 칙령을 통해 예레미야의 70을 경험했던 유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회복은 정치 체제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선지자들도 이것이 가장 큰 영광이고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28 고레스를 보시고는 너는 내가 세운 목자다. 나의 뜻을 모두 네가 이룰 것이다하시며, 예루살렘을 보시고는 네가 재건될 것이다하시며, 성전을 보시고는 너의 기초가 놓일 것이다하신다. 1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에게 말한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놓겠다. 네가 가는 곳마다 한 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않게 하겠다. 고레스는 들어라!” (44:28-45:1, 새번역)

 

이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칙령을 내렸기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가리켜 내가 세운 목자라고 하시고 심지어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라고까지 언급합니다.

 

사실 구약에서 기름 부어 세운 사람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고레스를 가리켜 메시야라고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고레스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것을 몰랐을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러한 그를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분명 고대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바벨론 신에게 패배했습니다. 그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에게는 아주 굴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별로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더 큰 가치로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화려한 성전과 값비싼 헌금을 바라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500년 전 말씀이지만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3.   돌아온 자들과 남은 자들

 

예레미야의 70이 실제로 성취되는 것을 목격했던 유대인들은 기적처럼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포로들의 이름을 지루하리만큼 나열하며 기록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왜 그들의 이름을 전부 다 기록한 것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바벨론에 잡혀 있다가 페르시아 시대를 경험했다면, 다시 말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과 페르시아에 남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무엇을 택하셨겠습니까? 솔로몬 성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제 백발의 노인들뿐입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하여 성전이 파괴될 때 10대였다면 이때는 80대가 된 겁니다. 그때 20대였다면 90대가 되었고, 그때 어린아이였더라도 70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태어난 바벨론 2, 혹은 1.5세들입니다. 고향 예루살렘은 돌아와 보니 성벽도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고, 황무지로 변해 먹고살기가 힘들었습니다. 생존 조건이 너무 불확실한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강 건너편 지역에는 이미 그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방해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한 번에 뚝딱 지을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건축이 10년 넘게 중단될 만큼 예루살렘은 위험하고 암울했습니다(2:16~30).

 

반면 페르시아 땅은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안전했습니다. 관용 정책을 취했던 페르시아는 신분의 제약 없이 누구든 고위 공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 출신 다니엘은 바벨론 시대의 관리였지만 페르시아에서도 중용되었습니다. 유다 지파 스룹바벨이 총독이 되었고, 느헤미야는 왕의 술을 맡은 관리로서 경호실장처럼 높은 지위였고, 심지어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신약 시대 예수님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언어가 아람어인데, 아람어는 페르시아어의 방언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페르시아의 잔재는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주전 5세기 느헤미야의 기록을 보면 당시 많은 유대인이 율법을 낭독할 때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자신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렸습니다(8:8). 이것이 서기관들이 등장하는 배경입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성경을 필사한 사람들입니다.

 

에스라 2장에서 밝히는 귀환자 수는 42,360명입니다. 학자들은 이렇게 돌아온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안전, 출세, 성공, 자녀 교육 등의 가치를 놓고 봤을 때, 결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가 온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부촌이고 학군이 좋은 곳에 살다가, 위험하고 학군이 아주 나쁜 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당시의 보통 사람들의 본심이며, 사실 우리의 본심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 사는 땅을 등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본국으로 귀환하는 행렬에 동참했을까?’ 이것은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아마도 스룹바벨 때는 백발이 된 원로들이 동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전 458년 에스라의 2차 귀환, 주전 445년 느헤미야의 3차 귀환 때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들은 솔로몬 성전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대였는데도 돌아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둔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회복으로 여기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둔 사람들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진정한 회복이라고 생각하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려운 시절에는 원하는 것을 얻으면 행복할 것 같고, 그것을 회복이고 축복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원하는 지위, 소유, 성공은 행복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갈증으로 작동합니다. 인간은 더 크고 많은 것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좋겠다고 하다가 그것이 생기면 더 큰 것을 바랍니다. 욕심에 끝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은 사라지고, 기도의 골방은 자취를 감춥니다. 자녀의 진학 문제로,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로, 인간관계 문제로 새벽마다 부르짖을 때, 회복을 주시고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가 무엇인가에 심취하는 사이에 아차 하며 진짜 회복과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루할 만큼 기록해 놓은 귀환자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위대한 이름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고 축복입니다.

 

예루살렘에 귀환한 사람들이 제2성전을 완공했지만 황폐한 땅, 황무한 곳, 황량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낙심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들의 하나님이신지, 자기들이 여전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는지 질문했습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아서에 소개된 귀환자들의 목록처럼, 이제 역대상의 족보와 마태복음의 족보가 무엇을 드러내는지도 그런 맥락에서 더 이해가 됩니다. 나라 없이 수백 년간 곤고한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 족보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물론 그들은 소수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갈망하고 회복을 갈망해서 왔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는 진짜 증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회복이라고 여기지 않고, 현실 속에서 물질의 풍요를 회복이며 축복이라고 여겼던 신약 시대의 종교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3:9)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도 그냥 읽을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배경을 알고 읽으면 훨씬 이해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말로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정말로 자기의 목숨을 걸고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이 척박한 땅으로 오직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왔던 그 사람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너희같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종교적인 위선을 떠는 사람들이 아브라함 자손인 게 아니다.’라고 하면서 통렬히 선포하는 겁니다. 이것이 족보와 세례 요한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직접 만나기 위해서 오셨고, 그것이 임마누엘(1:23)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수백 년이 이렇게 연결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제2성전이 그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세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 예수님이 성전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학개 선지자는 이 성전(2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결국 그 이전 영광은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모신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심으로 더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지만 선지자 학개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스스로 굳세고, 담대하고, 당당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4.   렘브란트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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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2: 렘브란트, “벨사살의 연회” >>

 

앞에서 렘브란트의 <벨사살 왕의 연회>를 살펴보았는데,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1630년대에 그렸지만, 그림의 사건은 주전 53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바벨론 왕인 벨사살이 머리에 왕관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터번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페르시아어로 터번이 놀랍게도 튤립입니다. 하나님 대신 바벨론의 신을 섬기는 벨사살을 1630년대의 네덜란드로 의도한 그림입니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황금기로 불리며 가장 번영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1630년대에 튤립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튤립 한 뿌리에 무려 3,000~4,200플로린(Florin)까지 치솟았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의 연봉이 300플로린이었습니다. 10배 이상 값이 뛴 겁니다. 튤립 한 뿌리가 노동자 연봉의 10~15배 되니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튤립을 보유한 사람들은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집을 팔아서 튤립에 투자했습니다. 그렇지만 거품이 빠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올인해서 튤립에 투자했다가 거품이 빠지고 가격이 폭락하니까 비관해서 죽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네덜란드에서 장로교의 ‘5대 교리라고 알려진 칼뱅주의 신학이 확립되었다는 겁니다. 도르트 회의(1618~1619)의 결정으로 비()칼뱅주의자들에게 대한 종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장로교가 아니면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할 정도로 엄격하게 변질된 겁니다. 사람들에게 교리를 들이댔던 기독교 사회였지만 튤립 파동에 무너지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기독교인데 어떻게 사회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다니엘서에서 벽에 기록된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5:25)입니다. 이 그림을 잘 보면 히브리어 맨 마지막 알파벳을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알파벳은 영어의 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숫자 7에 해당하는 자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7’은 네덜란드 7개 주 연합을 상징한다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통해 하나님이 그 시대를 주시하신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회복을 외면하고 튤립에 열광하는 당시 사회를 바라보면서 렘브란트가 신앙으로 이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하나님은 그 손가락으로 한국 교회의 벽면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기록하시는 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진정한 축복, 진정한 회복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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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요한계시록 해석 2 (계 12:1-6, 13-17)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23 (6/26/24) file admin_p 2024.06.27 69
423 요한계시록 해석 1 (계 13:11-18)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22 (6/19/24) file admin_p 2024.06.20 96
422 재림의 징조 4 (마 24:30-35)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21 (6/12/24) admin_p 2024.06.13 83
421 재림의 징조 3 (마 24:17-29)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20 (6/5/24) admin_p 2024.06.06 88
420 재림의 징조 2 (마 24:7-16)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19 (5/29/24) file admin_p 2024.05.30 104
419 재림의 징조 1 (마 24:1-8) - 이단 돌발 질문에 대한 답변 18 (5/22/24) admin_p 2024.05.23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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