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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87일 수요예배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 1

신구약 중간사란 무엇인가

(예레미야 2910~11)

 

오늘부터 새로운 말씀 시리즈인 <신구약 중간사의 세계>를 시작합니다. 한국에 귀한 분들이 많은데, 그중 제가 최근 들어 알게 된 <교회교육연구소>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박양규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중간사 수업>이라는 책을 썼는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잘 쓰셨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두면 우리가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말씀의 삶>을 여러 번 하면서 늘 아쉬웠던 게, 다뤄야 할 내용의 분량은 많은데 시간이 항상 모자랐다는 점입니다. 특히 신구약 중간사를 다룰 때 내용이 많은데 간단히 넘어가서 아쉬웠습니다. 그때를 잘 알면 구약과 신약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리즈를 통해 구약과 신약 사이 시기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성경을 보는 눈이 더 넓어지고 더 정확해지는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해서, 이번 기회에 이 내용을 살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1.   역사를 보는 관점

 

먼저 아주 기초적인 질문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역사란 무엇입니까? 신구약 중간사도 역사의 한 분야라는 점에서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가의 과제는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사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했다는 것과, 1945년에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그냥 알면 됩니다. 조선 왕조도 태정태세문단세라고 외우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목적을 위해 역사를 배운다면, 암기 위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에 반기를 들었던 역사가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이처럼 역사의 한 시대를 살아가던 보통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그 시대의 의미를 오늘에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역사는 영웅들이나 권력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흔적인 것입니다. 이 시각의 차이는 현실을 대할 때 차이를 만듭니다. 역사의 영웅을 대할 때는 지식으로 다가오지만, 보통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그들의 눈물과 감정과 삶의 애환을 알게 해줍니다.

 

이전에 <명량>이나 <노량> 같은 영화가 나오면 우리는 흥미를 가지는데, 폰 랑케가 말한 대로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해전들을 다 이기고 한 번도 안 졌다고 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노를 젓는 사람들과 지휘관들과 이순신 장군과 그의 휘하의 장수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치밀하게 싸웠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역사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볼 때 위대한 인물 위주로 살펴봅니다. 또 구약 39, 신약 27, 도합 66권이라는 식으로 정보를 가지고 성경을 파악합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현실을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성경을 볼 때는 광야의 영웅들만 봅니다. 광야를 지나 홍해를 건넜던 2백만 명의 나그네들, 오병이어 당시 광야에 있던 5천 명의 남자들을 비롯한 굶주린 군중들과 소통한 적은 없습니다. 개인은 사라지고, 모세와 오병이어와 그들을 위대하게 하는 숫자만 남습니다.

 

이런 시각에 익숙하다 보니까 광야는 판에 박힌 단어가 되고, 우리는 광야의 모세처럼 영웅이 되기를 꿈꿉니다. 사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숫자는 능력의 척도가 됩니다. 그 교회는 몇 명이 모이고 예산이 얼마냐에 가치가 매겨지면서 이것이 부흥이라고 여겨지고 간증의 핵심이 된다면, 성경은 더 이상 우리 현실에 와닿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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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1599-1600)

 

카라바조의 그림 <성 마태오의 소명>에는 이런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라는 영웅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세리 마태를 부르셨지만, 카라바조의 그림에는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5백 년 전 이탈리아의 도박판에 앉아 있습니다.

 

이 마태는 단순한 그림의 한 부분이 아니라 당시의 보통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녀들을 부르셨지만, 5백 년 전 로마교회는 집시, 빈민, 노름꾼, 매춘부, 유대인들을 혐오했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성경의 마태는 외칩니다. 그들을 혐오하면서 세리와 창녀의 친구라고 외치는 것은 말장난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카라바조가 위대했던 이유는 빛과 어둠을 통해 예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테네브리즘(명암)’ 기법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 때문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집시와 빈민과 노름꾼과 매춘부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다.”

 

역사가 에드워드 카와 미술가 카라바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구약 중간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신구약 중간사를 왕조, 정치, 영웅, 사건 중심으로 접했다면 우리의 머리를 채우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말라기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어떤 현실을 살았을까요? 느헤미야 시대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것을 주목할 때, 비로소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사실 신구약 중간사를 배우지 않아도 교회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고, 사는 데에도 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우리가 계속 공부해 나가면 이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를 통해 성경이 살아 숨 쉬는 역사라고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2.   신구약 중간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정은 무엇을 했고, 민중들은 어떤 현실을 겪었는지 보게 된다면, 그 사건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을 때 왜 불평등 조약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임금은 무엇을 했고, 백성은 왜 코와 귀를 잘려야 했습니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불평등 조약과 임금의 도피는 더 이상 과거에만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영화를 볼 때, 재미를 넘어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전쟁이 등장합니다. 그 시대를 보지 못하면 그저 게임에 등장했다가 없어지는 차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의 침공이나 바벨론 포로 생활은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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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포로기 (대영박물관)

 

이 사진을 보면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사로잡힌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두 손이 결박되어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포로도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로잡혀 간 우리 조상들과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포로의 현실은 같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타향으로 끌려간 구약시대 포로들의 감정에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포로 귀환은 여기서 저기로의 공간 이동이기만 합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외국인에 불과했습니까?

 

신구약 중간사는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신약에서 성취되었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확인하는 시대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신구약 중간사 연구의 핵심은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가를 도표 순서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 동안 그들이 어떤 질문을 던졌고, 하나님은 그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는가를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수많은 침공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이 외세의 침공을 받은 것은 외부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내부의 문제입니까? 외세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전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내부에서부터 약해질 때 이스라엘은 외세에 굴복하는 반복된 역사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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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a: 예후의 절

 

대영박물관에는 이스라엘의 예후 왕이 앗시리아 사신에게 절하는 굴욕적인 장면의 부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불과 4백 년 전, 조선의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대던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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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3b: 느부갓네살 연대기

 

또 대영박물관 55관에는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왕의 기록인 바빌로니아 연대기가 있습니다. 이 왕이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입니다. 그가 실제로 예루살렘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이 연대기에 새겨져 있습니다. 신화처럼 접했던 성경의 기록이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우리 눈앞에 되살아납니다.

 

이런 침공들로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었던 시간이 신구약 중간사 기간입니다. 이 시대의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면 포로기와 포로 귀환기를 성경 통독이나 <말씀의 삶> 공부에서 접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교훈 외에는 현실과 무관한 내용이 될 겁니다. 여러분은 바벨론의 침공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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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4: 렘브란트, <예루살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이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바벨론 침공으로 멸망당하는 예루살렘을 보며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절망하고 있고, 그 뒤로 예루살렘이 불타고 있습니다. 이 절망은 예레미야 개인을 넘어서는 그 시대의 절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처럼 현실에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사는 시대와 소통하게 해 준다는 겁니다. 흥미 위주로만 찾아다녀서는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말라기 시대에도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그들이 답을 발견했다면, 우리에게도 유효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그 시대를 배우는 진짜 이유이고, 그들이 기록한 책들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10 나 주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 년을 다 채우고 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 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11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10-11, 새번역)

 

절망의 시대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당신께서 주시려는 것은 번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신구약 중간사 공부의 의미가 분명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이 던진 질문은 무엇이었겠습니까?

 

 

3.   신구약 중간사를 관통하는 세 가지 질문

 

예루살렘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 당했습니다.

그때 성전이 파괴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으므로, 당시는 이스라엘의 야훼가 바벨론의 신보다 무능하다고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이 사라진 것은 하나님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는가?

    (2)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3)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은 무엇인가?

 

신구약 중간사를 살펴보는 가운데 이 세 가지 질문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들은 나라를 잃었던 유대인들이 5백 년 넘도록 끊임없이 던진 물음이었습니다. 성전이 사라지고, 이방 나라에 굴복당했으니 하나님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그러한 절망 속에서 물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는가?’ ‘만일 존재하신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처럼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회복은 무엇인가?’ 여기서 회복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맥락에서 축복으로 바꾸면 더 와닿습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신구약 중간사 공부를 통해서 끊임없이 이 3가지 질문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우리도 현실에서 이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와 회복을 직접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를 보는 안목이 생긴다면, 그것은 큰 유익이 됩니다.

 

 

4.   신구약 중간사라고 부르는 이유

 

신구약 중간사는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말합니까? 성경을 보면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에는 한 페이지밖에 안 되지만, 사실 두 책이 기록된 시대 사이에는 5백 년이 넘는 엄청난 시간적 공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두 책이 붙어 있는 시대인 것처럼 한 페이지를 넘깁니다.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임진왜란이 5백 년도 안 된 사건입니다(432년 전). 사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던 때 사이의 시간은 5백 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라기와 마태복음의 간격은 그만큼 긴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의 한 페이지를 별 시간 개념 없이 다른 책 읽듯 넘기는 것도 아쉽지만, 마치 그 시기가 성경과 무관한 것처럼 그저 하나님이 침묵하신 암흑기라고 여기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일 어느 부부가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하여 약 10개월(40)이 지나 아기가 태어난다면, 이 임신 기간에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기는 엄마의 태 안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구약 중간사는 신약이라는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그 시간에 하나님이 얼마나 활발하게 일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간입니다. 구약에 언급되지 않는 많은 내용이 이 시기에 형성되어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중간사를 학술 용어로는 2성전기라고 부릅니다. 주전 957년경 세워진 제1성전(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포로기를 거쳐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두 번째 성전이 건립됩니다. 주전 516년에 건립된 이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 시대의 헤롯 대왕이 증축했는데, 주후 70년 제1차 유대 전쟁 때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따라서 제2성전기는 주전 516년부터 주후 70년까지의 시간을 말합니다.

 

만일 이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집중한다면 제2성전기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던졌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고, 그 과정에서 구약이 어떻게 신약에 이르면서 회복에 이르게 되는지 살펴본다면, ‘2성전기라는 말보다는 신구약 중간사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의 많은 책들이 주전 516년 제2성전 건축 이후 기록되었고, 주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 신약 성경의 사건들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유대교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약속때문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수백 년의 모진 시간을 살았던 유대인들이 세 가지 질문에 관하여 어떤 답을 얻었는지, 그런 관점에서도 신구약 중간사라는 이름이 더 타당합니다. 정리해 보면, 신구약 중간사는 주전 516년부터 주후 70년까지의 제2성전이 있었던 시기를 기준으로 합니다.

 

 

5.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와 희망

 

오늘 본문으로 예레미야 2910~11절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보면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신구약 중간사를 다루며 많이 접하게 될 인물이 요세푸스인데, 그는 예수님 시대의 유대 역사가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대인(Jews)’이라는 명칭은 유다 지파(the tribe of Judah)’에서 따온 것으로서, 유다 지파가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기 때문에 그 후로부터 그들과 그들의 땅을 유대(Jews)’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5.7.

 

요세푸스는 유대인이라는 명칭이 바벨론 포로 기간 중 생겼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예후다’, 아람어로 예후스’, 이것이 그리스식으로 유대인이 됐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가 지나고 주전 5세기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에는 더 이상 남유다라는 지리적, 민족적인 의미가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유대인들은 주전 586년에 나라를 잃고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연속적으로 지배받았는데도, 그들은 지리나 민족과 상관없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의 시기에 나라를 잃고도 자신들의 정체성인 유대교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나라를 잃은 지 5백 년이라면 주변에 동화되고 소멸해도 충분한 시간입니다. 어쩌면 헬레니즘이 확산하여 소수 민족들의 정통성이 없어진 시기에 유대교라는 토대를 만들고 버틴 것 자체가 해답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소멸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물었습니다. 그중 한 형태가 광야에서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 되길 갈망했던 세례 요한 주변의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신처럼 군림하려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실까요?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구해야 할 회복(축복)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들을 놓치고 살아간다면 그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신구약 중간사의 보통 사람들이 수백 년간 던졌던 질문입니다. 2성전을 재건했다고 해도 그들의 삶은 궁핍했고, 미래는 암울했고,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예레미야 2911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미래와 희망을 줍니까? 예레미야 2910절의 말씀처럼 예레미야의 70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습니까? 이것을 확인할 때, 우리는 소망과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신구약 중간사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배움과 깨달음과 결단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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