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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4일 수요예배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6 ✦
“거짓 교사를 분별하라”
(유다서 1장 1~10절)
오늘 본문은 갓 태어난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교사들의 문제와 그들의 운명을 지적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이 인생의 숲을 걷는 도중에 마주치는 거짓 안내자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거짓 교사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신자들을 이탈하게 만드는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신앙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1.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1-2절)
이 편지를 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서, 야고보의 동생이기도 했습니다. 유다는 수신자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편지를 보내게 된 이유를 언급하는데, 신자들을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아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도 이 ‘자비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기를 바랍니다.’라는 축복을 서로에게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표현에 이 유다서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편지를 받는 신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키심을 받았는데,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은 거짓 교사들이 신자들을 유혹하여 신앙의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가는 신자들을 22절에서도 언급합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2절)
여기서 ‘의심하는 자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넘어간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의심하는 자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올바른 가르침에서 이탈한 사람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은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므로 위치를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위치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생기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3절)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앙의 위치를 지킬 수 있다고 설명합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절)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란,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말하며, 그것은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받은 계시를 뜻합니다. 이 ‘도’는 기록된 성경에 이미 들어 있으며, 더 이상의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믿음의 도가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고치고 거기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런 거짓 교사들을 가리켜 유다는 ‘가만히(비밀리에) 들어온 자들’이라고 하며 경계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4절)
거짓 교사들은 진짜 정체를 숨기고 좋은 교사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거짓과 진리를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의 도를 지키려면 치열하게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단번에 받은 믿음의 도’는 ‘받은 구원’(칭의)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힘써 싸우라’는 것은 ‘받는 구원’(성화)의 과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은 사람들은 싸워야 하는데, 동시에 성도들은 믿음의 도를 흔드는 자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믿음의 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심판받게 됩니다. 그들의 삶은 경건하지 않고 방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을 채우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교회 밖이 아니라 안에서 활동하고,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합니다. 입술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더라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존중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욕망으로 이어지고, 욕망은 잘못된 가르침을 만들어냅니다.
2. 구약의 세 가지 비극적인 이야기
유다는 구약의 세 가지 예를 통해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출 32장; 민 14장).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5절)
하나님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지만, 구원을 얻은 백성을 ‘가데스 바네아’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은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뢰와 헌신의 자리를 이탈한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늘의 천사들이 타락한 이야기입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6절)
이 내용은 창세기 6:1-4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 6:2)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사건을 하늘의 천사들이 타락해서 벌인 비극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각자의 위치와 임무를 주시면서 특히 파수꾼의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6장의 비극은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위치를 벗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해석이고, 이 말씀의 핵심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가 이 편지를 쓸 1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창세기 6장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타락한 천사들은 하늘의 처소를 떠난 죄로 인해 흑암에 영원히 결박되었습니다. 흑암은 타락한 천사들이 갇힌 감옥의 특징이며, 거짓 교사들은 타락한 천사들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치를 떠났으므로 흑암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7절)
음란한 소돔은 ‘다른 육체’를 따라갔기 때문에 불 심판을 받았습니다. 극단적 음란에 중독된 소돔 사람들은 이성을 넘어 동성을 통해 성욕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성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남자의 모습으로 그곳을 방문한 두 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성욕을 채우고자 한 결과는 인간이 아닌 다른 육체를 탐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세 가지 예를 들면서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위치 이탈을 죄로 규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의 길에서 이탈했습니다. 천사들은 파수꾼의 임무에서 이탈하여 땅으로 향했습니다. 성적 쾌락을 즐기려던 소돔 사람들은 올바른 성적 원리를 떠나 죄의 욕망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창조 질서를 거스른 죄를 지은 결과로 불 심판을 받았습니다.
3. 죄는 자기 위치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유다는 5-7절에서 거짓 교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약의 세 가지 사건을 언급한 후 8-10절에서 그 세 가지 사건의 의미를 해석합니다.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8절)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될 무렵 유대인들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여러 기록에는 사람들이 꿈을 통해 하늘에 올라가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내용이 자주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꿈을 통한 계시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경건한 의인들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해주신다고 생각하며 경건한 사람들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에게 참된 계시가 있다는 식으로 선전하면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폄훼하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꿈을 통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기가 쉬웠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꿈을 통한 계시를 전했습니다. 8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며 비윤리적인 행위를 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행위가 하늘의 계시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은 꿈을 통해서 계시를 받을 만큼의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이런 주장은 교회가 믿고 따르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죄를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권위’는 예수님의 주 되심 또는 주권을 의미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사람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판결하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죄인 겁니다.
또한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꿈꾸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영광을 비방’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헬라어 원어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영광들’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영광스러운 존재들’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하늘의 뜻을 땅에 전달하고 창조 세계의 질서를 지키신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천사들보다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실행하는 천사들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거짓 교사들은 진짜로 하늘의 계시를 받았습니까? 꿈에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 사실입니까?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0절)
여기서 유다는 거짓 교사들이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한다고 평가하는데, 비방하는 것은 모욕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하늘의 세계를 잘 알며 하늘의 비밀을 이해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입니다. 천상 세계를 보지 못한 그들은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꿈과 환상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기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천사들의 세계를 이해했다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서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알고 있는 것은 하늘의 세계가 아니라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 즉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음란의 죄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아는 것처럼 경건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들이 천사들보다 우월하다고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짐승처럼 인간 이하의 수준에서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이처럼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계시를 받은 선지자인 것처럼 하늘에 올랐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땅의 정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며, 그 결과 짐승처럼 멸망의 구덩이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그러한 거짓 교사들의 태도(8, 10절)를 천사장 미가엘의 겸손과 대조합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9절)
이 내용은 우리가 성경에서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에 없고 유대교 문헌에 기록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4:1-6은 모세가 죽은 뒤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묻혔다고 기록할 뿐,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과 마귀가 다툰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9절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모세의 유언서>라고 하는 유대교 문헌에 들어 있습니다. 유다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미가엘의 이 이야기를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도 이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이것을 쓴 것입니다.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놓고 마귀와 다툰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와 함께 느보산에 올랐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돌려보내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의 죽음을 알리도록 명령한 후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죽자 하나님은 미가엘 천사를 보내어 그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셨습니다.
마귀는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출 2:12) 명예롭게 매장되는 대신 살인죄로 기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마귀는 모세를 사람들이 추앙하는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미가엘과 마귀는 모세의 시체를 놓고 논쟁했다는 겁니다.
왜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에게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한 것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판결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9절은 하늘 법정에서 일어난 일인데, 거기서 마귀는 검사처럼 모세를 기소하려 하고, 미가엘은 마귀가 고발하는 목적과 태도가 잘못된 줄 알지만, 마귀의 행위에 대한 판결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미가엘의 행동은 사탄에게 예의를 갖추거나 사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가엘은 하늘 법정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와 역할을 잘 알고 있으며, 현재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판결의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가엘은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마귀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미가엘의 이러한 말은 스가랴 3장에 기록된 것으로서, 하늘 법정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2)
판결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고유한 권한입니다. 이처럼 미가엘은 마귀에 대한 판결을 하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맡깁니다. 미가엘은 자기가 재판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켰습니다. 이처럼 미가엘이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 태도는 거짓 교사들의 교만과 대조됩니다.
4. 가르침과 삶으로 드러나는 거짓 교사들의 실체
지금까지 거짓 교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또한 그들이 결국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살펴보았는데,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도 그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5)
양의 옷을 입고 활동하는 늑대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거짓 교사들은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교회 안에서 활동했습니다. 유다가 설명하는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한 위치 이탈은 그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위치를 벗어난 것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제를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가르침’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받은 ‘믿음의 도’를 무시하면서 자기들이 꿈을 통해 받은 계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꿈을 통해 하늘의 세계를 보았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그런 신비로운 체험을 이용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위치를 하늘에까지 높이며 마치 신비로운 진리를 아는 것처럼 외쳤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믿음의 도’에 순종하면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탁월한 능력으로 새로운 ‘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사의 위치를 이탈하는 행위입니다. 교회의 교사는 꿈이 아니라 이미 기록되고 검증되어 성도들이 배운 ‘믿음의 도’를 겸손히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기술을 이용한 소통의 수단이 다양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신천지처럼 교회 속에 들어와 거짓 가르침을 전하기도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멋진 말과 경건한 표정과 체험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교회를 오염시킵니다. 교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교훈에 넘어가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기록된 구약과 신약을 배우고 겸손히 가르치는 것뿐입니다.
둘째,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삶’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욕망의 추구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자기들의 행위를 옳다고 판결하면서 비윤리적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환상을 보았거나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득을 챙기는 교사들은 흑암에 던져질 가짜 별들입니다(13).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그들의 삶입니다. 욕망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선생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채워줄 사람을 따르려고 합니다.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정치인을 지도자로 뽑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하도록 재촉하는 가르침은 교회를 오염시키는 무서운 누룩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아니라 귀에 즐거운 것만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유다는 1절에서 성도를 정의함에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얻은 신자는 ‘믿음의 도’에 만족하고 그것을 배울 때 ‘지키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가르침이며,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성경 외에 새로운 계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길은 하나님께서 복음의 증인들을 통해 주셔서 지난 2천 년 동안 검증된 성경을 겸손한 자세로 배우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한국에 가서 보니까 역시 성경의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성경의 종류가 많이 줄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면 ‘품절’이나 ‘절판’된 것이 많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종류도 많고 많이 팔렸는데, 지금은 안 팔려서 절판시키거나 다 팔리면 더 이상 찍어내지 않아서 품절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겁니다.
요즘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다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도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성경을 읽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바른 위치를 잘 지키고 살아가려면 성경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도를 기준으로 삼고 겸손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살아감으로써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