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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78 10/12/22(수요예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9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순종의 삶

(히브리서 41~11)

 

이 시대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달고 삽니다. 무엇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인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피로에 사무친 인간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찬송가 내용처럼, 이 세상엔 근심된 일이 많으나 참 평안이 없고, 곤고한 일은 많으나 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행으로, 먹는 것으로, 아니면 사는 것으로 쉼을 얻어보려고 애씁니다. 특히 여행을 통해 평소에 하지 못하던 활동을 통해 쉼을 얻으려 합니다. 하지만 여행할 때는 좋은데 돌아오면 똑같다는 겁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은 똑같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안 믿는 사람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머리로는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가정, 직장, 심지어 교회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교회도 싸우고 갈라지고 분열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까? 안식은 그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입니까? 죽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무엇이 있습니까? 오늘 히브리서 3-4장을 함께 살펴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안식에 대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   히브리서의 배경

 

히브리서가 주장하는 안식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이 책의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바울이 썼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문체도 다르고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바울이 쓰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볼로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야고보가 썼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확실한데, 특정인에게 보낸 건 아니지만 책 제목에 암시된 것처럼 수신자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라고 고백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초를 겪은 이들은 너무 힘드니까 다시 예전의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와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다고 하면 집안에서 내보내고 무엇보다 물물거래를 막았습니다.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와야 먹고사는데 크리스천에게는 팔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히브리서가 쓰인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달리, 당시 다양한 유대 종파들은 로마에서 공인한 민족 종교였기 때문에 모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 백성들이 그들의 민족 신을 섬기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는 한 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히브리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12:12)과 같은 상황에 있었는데, 이것은 자포자기 하고픈 심정을 나타내는 유대식 표현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냈습니다(10:32). 또한 그들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거나, 그런 일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10:33). 그들 중엔 신앙의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소유를 빼앗기는 위험에 처하더라도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할 각오를 하고 견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10:34).

 

그러나 박해가 지속되면서 지쳐갔고, 낙심과 불안을 느끼던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다시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믿던 예수를 향한 신앙을 부인해야 했고, 그것은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배교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고통과 핍박 가운데서 불안감에 시달림에 따라 신앙에 영향을 받게 된 사람들을 향해 히브리서는 참 안식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안식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았던 이스라엘조차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들이 들어가려고 하는 유대교를 대표하는 지도자 모세와 구약이 말하는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을 비교함으로써 후자의 우월성을 나타냅니다. 이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철저하고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이 안식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2.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

 

1)  모세보다 높으신 예수 (3:1-6)

 

히브리서 3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3:1-19), 먼저 신실한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합니다(3:1-6).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여기서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나 사도 바울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사도는 어떤 특정한 인물로부터 정해진 임무를 수행하라는 목표 아래 전권을 위임받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10:40; 10:16; 13:20).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그분의 공생애를 증거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임받은 이들이기 때문에 열두 사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물론 넓은 개념으로 교회가 선교 사명을 위해 선택한 선교사들을 지칭할 때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13:1-3).

 

그런데 예수님은 유일한 사명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차원에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또한 그분은 대제사장이십니다(13:1). 제사장은 이스라엘과 모든 제사장을 대표하여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를 총괄 지휘하는 가장 높은 제사장입니다.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3:2-3)

 

예수님은 모세처럼 신실한 대제사장이시지만 모세 이상이신 분입니다. 여기서 모세와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이 집을 지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집을 지으신 분이 당연히 집보다 더 영광스럽습니다. 이어서 3:4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만드셨으며 하나님께서 만유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3:4)

 

이것은 건축자이신 예수님의 역할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역할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만드신 분이라는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이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종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신 분입니다. 모세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예수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히브리서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가장 큰 권위인 구약을 인용합니다.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3:5-6)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민수기 12:7에서는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칭찬합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12:7)

 

예수님은 위대한 모세보다 위대하고 뛰어나신 분입니다. 모세는 집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은 집주인의 아들로서 성실했습니다. 종과 아들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또한 둘은 섬기는 위치도 달랐습니다. 종인 모세는 온 집안에서 충실한 자였지만, 예수님은 집 위에서 섬기신 분입니다.

 

 

2)  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약속된 안식 (3:7-19)

 

히브리서는 3:7-11에서 시편 95:7-11을 인용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청중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청중에게도 동일하게 계시되는 말씀, 늘 현재형인 성령님의 음성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성령님이 시편을 당시 수신자만이 이닌 지금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하신다고 여기고 그 말씀을 현재형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3:7)

 

여기 인용된 시편 말씀도 오늘을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금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4:12-13).

 

시편 95편의 내용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과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로 이루어져 있는데, 히브리서는 경고에 집중합니다. 이스라엘이 므리바와 맛사에서 물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시험하다가 망하게 됩니다(17:1-7; 20:2-3). 이는 가나안에 다녀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겁을 먹은 히브리 백성들이 자신들을 광야에서 다 칼에 맞아 죽게 하려는 것이냐고 모세와 아론에게 온갖 불만과 원망을 쏟아부으며 따졌던 일을 배경으로 합니다(14).

 

그런데 이 본문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역에서는 지역 이름인 므리바와 맛사를 그 어원적 의미를 살려 "반역""시험"으로 번역합니다. 이를 통해 이 사건을 영원한 현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3:8에서 이 번역을 그대로 따릅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3:8)

 

히브리서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사건의 배경을 출애굽기에서 민수기로 옮겨갑니다. 그 이유는 민수기를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히브리서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안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마음을 완고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맹세하셔서 그들을 절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3:12, 새번역)

 

여기서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은 충성스럽지 않은 마음, 불신앙과 불순종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불신앙과 불순종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3:13, 새번역)

 

바로 오늘’, 즉 매일매일 서로를 권면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묶어주셨고,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절대 혼자 하는 신앙생활이란 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권면해주고 섬겨야 하는데 어떻게 혼자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서로 권면한다는 표현은 누군가와 올바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혼자서 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잘못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입니다(9:27-28).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오늘이라는 건 없어집니다. 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권면하고 사랑하고 세워주는 게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격려하고 남을 돕는 것이 쉽지 않고 때론 귀찮은데, 사실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이 기회를 얻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 기회가 없어지기 전까지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처음에는 확신으로 시작했습니다(3:14). 그러나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확신을 끝까지 지켜야만 합니다(3:14). 처음 시작했다가 흐지부지해지면 안 되고 끝까지 지키라는 겁니다.

 

히브리서는 세 번에 걸친 질문을 통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위험에 관해 경고합니다. 아주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듣고 격노하게 하던 자가 누구냐?"입니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3:16)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던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입학은 하고 졸업을 못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이집트에서 나온 이들은 잘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의 목표인 안식에 결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3:11, 18, 19).

 

두 번째 수사힉적 질문은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입니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3:17)

 

이 진노의 기간은 실제로 은혜의 기간이기도 했습니다(16:35; 2:7). 이집트에서 나온 것도 감당할 수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감당이 안 되면 지옥인 겁니다. 이는 히브리서의 수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간을 감당하지 못하면 심판의 기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세 번째 수사학적 질문은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입니다(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3:18)

 

이것은 시편 95:11의 내용인데, 시편 구절에서 가나안 땅이 갖는 의미는 안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절대 들어가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의 믿지 않는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3.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 (4:1-1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1)

 

이 구절은 비록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이런 말씀을 반복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고난에 지쳐서 약속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2)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안 믿는 자까지 지켜주시는 법은 없다고 호소합니다. 구약의 백성도 모두 안식에 관한 기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지속적이지 못했던 까닭에 하나님은 그들이 결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3)

 

이때 사용된 안식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다시 뒤돌아보면, 이는 신자들이 종말에 누릴 안식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가 됩니다. 그럼 이 안식은 어떤 것일까요? 흥미롭게도 히브리서는 이것을 창조때의 일곱째 날과 연관시킵니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4)

 

히브리서는 시편 95:11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들어갈 안식이 출애굽 백성도 들어가지 못한 안식임을 강조함으로써, 이 안식은 창세기 2:2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당신의 사역을 쉬신(완결하신) 것과 연관이 있다고 말합니다(3).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참된 안식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때의 안식일은 안식의 원형이었으며, 가나안 땅은 안식의 모형(5)이었을 뿐입니다. 그럼 참 본질인 그리스도의 안식은 무엇입니까?

 

“10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0-11, 새번역)

 

히브리서의 안식은 복음서의 구원,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의 생명이나 영생과 같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회복에 대한 대망을 담은 용어입니다. 히브리서가 구원, 하나님 나라, 영생 대신 안식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결국 구원, 하나님 나라, 영생의 근본적이고 진실한 내용이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세대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줍니다. 처음에 확신으로 시작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반드시 종말의 안식에 들어가리란 보장이 없습니다(1, 11). 우리 그리스도인이 들어가야 하는 안식은 어느 특정한 날에 누릴 수 있는 육신의 쉼 너머 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14:27, 새번역)

 

한 번 구원받으면 절대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게 맞습니다. <생명의 삶>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변에서 믿다가 중간에 믿음을 떠난 것 같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비록 약속을 받았더라도, 최종적인 구원은 믿음을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선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잘못 생각하는 게 뭔가 하면,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하면 , 믿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아멘, 아멘.” 하고 구원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주로 받은 구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에도 세 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받은 구원’, ‘받는 구원’, ‘받을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받은 구원이후에 바로 받을 구원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의 받는 구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면 받는 구원의 과정, 혼의 구원의 과정,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화의 과정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고 믿음을 떠나고 교회를 떠났다면, 정말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남의 구원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받는 구원의 과정이 없는 사람이 받은 구원에서 그것을 뛰어넘어 곧바로 받을 구원으로 가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 아닙니까? 그게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걸 거쳐서 영원한 천국의 받을 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중간 과정 없이 바로 건너뛰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서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알 수가 없지만,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혈통으로 보면 이삭의 장자로서 장자권을 가진 큰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떠나 버렸습니다. 사실 애초에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헷갈리면 안 됩니다.

 

단박 구원이라는 것은 구원파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는 표현이 혼동을 줍니다.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단박 구원으로 이해되기가 쉬운 겁니다.

 

구원파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한 구원이라고 함으로써,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무슨 죄를 짓고 허랑방탕하게 살아도 결국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았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전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인데 구원받았다고 하기는 힘들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메시지입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구원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과거의 한 시점에 시작된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와 미래라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복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약속을 받았더라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끝까지 믿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없다면 정말 구원받은 것인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불순종을 눈감아주시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구원에 머무를 책임이 있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정리해보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이런 가르침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과 고난을 받아도,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서, 세상이 험하고 바람 잘 날 없어도 결국 우리에겐 영원한 안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표현된 영원한 생명 혹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과 하나님 나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생각하라. 예수를 바라보라. 그 예수를 따라가라.” 하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밤에 나와 예배를 합니까?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님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요한일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것은 참된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졌고, 그래서 이웃과 또 형제자매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마침내 때가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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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벧전 4:12-19)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1 (11/9/22) admin_p 2022.11.10 1294
351 행함으로 드러나는 믿음 (약 2:14-26)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20 (10/19/22) admin_p 2022.10.20 1176
»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순종의 삶 (히 4: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9 (10/12/22) admin_p 2022.10.13 348
349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때 (몬 1:8-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8 (10/5/22) admin_p 2022.10.06 755
348 영생 상속자의 삶 (딛 2:14-3: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7 (9/28/22) admin_p 2022.09.29 400
347 완전한 사랑, 완전한 승리 (에스더 8:3-13) - 조준오 목사 (9/21/22) admin_p 2022.09.22 234
346 당신은 제자입니까? (마 7:21-23) - 이기환 장로 (9/14/22) admin_p 2022.09.22 186
34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 3:15-4:5)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6 (9/7/22) admin_p 2022.09.08 2781
344 신실한 사역자 디모데 (딤전 1:1-1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5 (8/31/22) admin_p 2022.09.01 686
343 충성스럽게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 (살후 3:6-14)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4 (8/24/22) admin_p 2022.08.25 654
342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일들 (살전 4:13-18)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약 설교) 13 (8/17/22) admin_p 2022.08.18 879
341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골 1:24-29)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2 (8/10/22) admin_p 2022.08.11 1037
340 사도 바울의 소망 (빌 3:17-21)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1 (8/3/22) admin_p 2022.08.04 635
339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 (엡 4:17-24)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0 (7/27/22) admin_p 2022.07.28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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