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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F_IS0CFyXYo?t=2151

 

 

2022831일 수요예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5

신실한 사역자 디모데

(디모데전서 11~11)

 

바울과 디모데는 원래 완전히 남남이었지만 디모데는 바울에게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 될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2). 두 사람의 만남은 사도행전 16장에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2차 전도 여행 때 바울이 루스드라에 도착했는데, 디모데는 그곳 지체들에게 칭찬받는 제자였습니다(16:1-2). 이미 제자 즉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1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듣고 믿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마침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다툰 후 갈라선 바울의 눈에 디모데가 들어왔고, 바울은 그렇게 디모데를 데리고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때가 주후 49년쯤이며, 이때 바울은 중년이었고 디모데는 청년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같이 드로아로 갔다가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6:11-12)

 

여기 보면 우리라고 하는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거기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안디옥을 떠났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합류하여 드로아로 왔는데, 거기로 누가도 와서 만난 겁니다. 그래서 우리라고 씁니다. 그 후 그들 4명은 빌립보에서 함께 머물다가,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로 떠날 때 빌립보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16:40)

 

여기서 두 사람은 바울과 실라인데, 그들은 데살로니가로 떠나고 누가와 디모데는 빌립보에 그대로 남은 겁니다. 그 후 다음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 믿는 사람들이 나오자 유대인들이 시기하며 소동을 일으킴으로 인해서 바울이 베뢰아로 갑니다. 그때 디모데도 빌립보에서 그곳으로 옵니다.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7:14-15)

 

그 후 아덴으로 혼자 간 바울에게 합류했다가 그의 보냄을 받아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후(살전 3:2)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로 갑니다(살전3:6; 18:5).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3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살전 3:1-3, 6)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아덴으로 간 후 거기서 고린도로 갔을 때 써서 보낸 편지입니다. 바로 얼마 후 데살로니가후서도 보냈습니다. 데살로니가 초신자들을 돕도록 디모데에게 부탁해서 그를 보내어 그들을 훈련한 겁니다. 그리고 6절에 의하면, 이때는 고린도로 와서 바울과 함께 있다는 것을 봅니다.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18:1, 5)

 

아테네에 혼자 갔던 바울이 고린도로 갔고, 거기에 실라와 디모데가 왔습니다. 아테네에 바울이 있을 때 디모데가 아테네로 왔고, 거기서 다시 데살로니가로 갔다가 바울이 고린도로 갔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함께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로 온 겁니다.

 

이후 디모데는 바울과 실라와 함께 고린도에서 써 보낸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공동저자로 등장합니다(살전 1:1; 살후1:1). 또한 3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이 에베소에 3년 동안 머물고 있을 때, 디모데는 바울의 보냄을 받아 고린도로 갑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전 4:17)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서 디모데와 함께 있다가 그를 고린도로 보냈다는 겁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고전 16:10)

 

디모데가 떠나고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떠난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하면 잘 영접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그 후 마케도니아에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19:22)

 

그래서 바울이 마케도니아(빌립보)에서 고린도후서를 쓸 때 디모데가 공동저자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고후 1:1)

 

그 후 고린도로 간 바울이 거기서 로마서를 쓸 때도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6:21)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면서 나의 동역자 디모데가 문안한다.’라고 하니까, 거기 바울과 함께 있다는 겁니다. 또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구제헌금을 들고 아가야에서 예루살렘으로 떠날 때도 디모데는 바울의 일행 중 하나로 동행합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20:4)

 

디모데는 이렇게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바울과 동행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디모데는 교회의 대표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주후 57년 봄으로 바울을 만난지 8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후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로마로 가기 전에 가이사랴에 2년 동안 구금 상태로 있었는데, 그때 디모데는 그의 명령을 받아 또 움직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옥중서신인 골로새서와 빌립보서의 공동저자로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1:1)

 

이것을 보면, 골로새서를 디모데와 같이 써서 보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1:1)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의 1차 로마 감옥 수감(실제로 가택연금 상태) , 디모데가 로마에서 바울 곁에 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후 바울이 잠시 풀려나게 되는데, 풀려나기 직전에 디모데는 빌립보로 보냄을 받습니다.

 

"19 나는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곧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도 여러분의 형편을 앎으로써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20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21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2:19-22, 새번역)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내는 이 시점은 주후 62년경으로 두 사람이 만난지 13년 되던 때입니다. 그런 후 디모데는 바울을 만나 그와 함께 에베소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는 주후 63-64년경이었을 것이고,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가면서 디모데에게 에베소 사역을 맡긴 겁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3)

 

3절의 상황을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특정 시점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사건을 바울의 1차 투옥 이후로 생각하는 것이더 타당해 보입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 남고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가는 정황을 사도행전에서 발견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밀레도 설교(20:18-35)의 내용을 생각하면 디모데전서에 언급된 문제가 주후 55년 당시 에베소 교회의 문제라고 보는 것도 어렵습니다.

 

바울은 이제 중년을 지나 노년이 되어 "나이가 많은 나 바울"(1:9)이라고 할 정도가 되었고, 디모데도 어느덧 중년 초입에 접어드는 나이로, 바울은 60대 초반이고 디모데는 40대 초반 정도였을 겁니다. 14~15년 동안 함께 교제하고 동역하는 가운데 디모데는 바울의 손발과 입이 되었습니다.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다녀오라고 하면 다녀오고, 남아 있으라 하면 남아 있었습니다.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이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의 상황이 어려워짐에 따라 그를 멀리할 수도 있었고, 마가처럼 너무 힘들어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한결같이 바울과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친자식도 이러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제자를 찾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주후 55년경에 쓰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4:17)이라고 하고, 그로부터 2년쯤 뒤에 쓰인 로마서에서는 "나의 동역자"(16:21)라고 소개합니다. 또한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가 디모데후서인 것도 의미가 있고,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찾은 사람도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딤후 1:3-4)

 

바울은 항상 디모데를 생각했고, 디모데는 바울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서로를 너무 사랑하며 간절히 서로를 위해 기도했던 관계였습니다. 또한 디모데는 바울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딤후 3:10-11)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 맞아 죽을 뻔했을 때 벌떡 일어났는데, 그것을 디모데가 목격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당시 디모데는 바울의 그런 고난을 통해 이미 주님의 구원을 목격했다는 말입니다. 1차 여행 때가 주후 46-47년경이었으니까, 바울이 세상을 떠날 때 둘이 알고 지낸 기간이 19년 정도 되고 동역한 것은 16년 정도 된 시점이었습니다. 바울이 순교하지 않았다면 둘의 관계는 더 지속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관계를 맺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믿음 안에서 참 아들, 참 딸, 참 아버지, 참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 말입니다. 이 시대에 모든 관계가 계약과 이익을 토대로 세워지고 있어서 이해관계가 없어지면 만남도 희미해지는 시대이기에, 바울과 디모데 같은 관계가 그리운 때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에 기초한 나눔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친구 같은 관계, 아니 친구를 넘어 형제자매의 관계,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지속될 수 있는 관계를 넘어 천국까지 이어지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바로 그런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느 한쪽에만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도 충실했고, 바울도 진실했기 때문에 그런 관계가 가능했던 겁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고 부족한 점도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고 놀라운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에 대해 힌트를 줍니다. 그러한 그들의 비결은 바로 바울과 디모데가 하나님 및 예수님과 맺은 관계에 있습니다.

 

"1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2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2, 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나 타인의 뜻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자기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택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을 사도 되게 하신 하나님은 바울과 디모데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하나님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 지금도 바울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 장차 바울의 구주가 되실 하나님이 그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바울을 사도가 되게 하신 분이 또 계시는데,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은 바울과 디모데의 소망이십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이들을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두 사람이 연결되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근본적으로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었고, 디모데는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자녀입니다. 디모데를 낳기 위해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믿음의 수고가 필요했습니다. 신실한 관계는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해산과 양육의 수고가 있어야만 영적인 부모가 됩니다.

 

바울은 믿음의 수고로 낳은 아들 디모데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은혜와 긍휼과 평강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누리길 원했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재물과 지위와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은 바라는 것이 다릅니다. 그들은 같은 믿음과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같이 갑니다.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므로 감출 것이 없습니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3-4)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로 갔는데, 아마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에베소로 갔던 것 같습니다. 드로아를 거쳐서 갔을 수도 있는데, 그곳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갈 때 들렀던 도시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들었지만, 특히 3차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울의 설교가 길어질 때 너무 피곤했던 유두고가 높은 데서 떨어져 죽었다가 바울이 살린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2차 때 바울이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가게 된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후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결심하고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밀레도에 머물며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말씀을 나눕니다(20:15-16). 그래서 디모데에게 에베소는 익숙합니다. 3차 전도 여행 당시에 머물렀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마케도니아로 가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할 때 디모데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지도자들도 디모데가 익숙합니다. 빌립보 교회와도 익숙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성품도 좋고 인간적으로도 아주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새롭게 직면한 문제를 디모데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바울은 그에게 일을 맡기고 새 일을 찾아 떠났습니다. 바울은 이미 가진 것이나 깨달은 것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새로 나눠줄 것을 얻고자 떠납니다. 쉬지 않고 나아가는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에베소의 문제는 변질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르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하나님보다 인간 중심인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누가 더 많이 아느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나오는 교훈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5)

 

교훈의 목적, 즉 복음에 근거하여 주어진 가르침의 목적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출처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인 겁니다. 쉽게 변하는 마음이나 정직하지 않은 생각 또는 욕심으로 꽉 찬 믿음에서는 사랑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아닌 말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능력이 아닌 생각에 도취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듭니다.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6-7)

 

사람들은 지식이 쌓일수록 사랑보다 지식을 중시하면서 말만 더 많아집니다. 그러나 말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뭐라고 했습니까?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로만 가르치신 게 아니라 친히 고난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계속 따지는 사람들이 있고, 말로 사람을 추켜세우며 아첨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말만 하고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디모데의 고향인 갈라디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2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3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6:12-13, 새번역)

 

이들은 자랑거리를 만들어서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이고 진실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또한 어려움이 닥치면 자기 몫만 싹 챙겨서 도망갈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자기보다 못한 말씀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율법이 의도하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고 적용하면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기본적으로 의인보다는 죄인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부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8 우리가 알기로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9 율법이 제정된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라, 법을 어기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와,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않은 자와, 속된 자와, 아비를 살해하는 자와, 어미를 살해하는 자와, 살인자와, 10 간음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를 하는 자와, 그 밖에도,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훈에 배치되는 일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11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8-11, 새번역)

 

에베소의 디모데는 훈련된 제자이며 신실한 사역자입니다. 그는 남갈라디아 지방,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아시아 및 로마에서 교회를 섬기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 사조와 풍조를 경험했습니다. 어떤 형편과 상황을 만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기준이며 해답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면서 나아갔습니다.

 

디모데가 사역한 에베소는 당시 세계 3대 혹은 4대 도시로 꼽히는 주요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인구가 20만에서 25만이나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중산층이 많았고, 로마 권력층과 연결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로마 속주 중 아시아 주의 수도였기 때문에, 아시아 총독이 바로 이 에베소에 머물렀습니다.

 

무역으로 인해 큰 돈이 흐르는 곳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돈 때문에 온갖 문제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아데미 신전도 있었고, 그 아데미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 파는 은장색 데메드리오 일당도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이처럼 말에 빠진 자들의 어긋남을 밝히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사명을 받아서 그리로 가 사역을 한 겁니다. 그가 이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설교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32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20:29-32, 새번역)

 

사나운 이리가 들어오고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바울의 해결책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디모데에게 제시하는 바울의 해결책도 같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년 반이나 어려움을 겪으며 세상의 변화를 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맞서는 우리의 해결책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붙들고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붙들고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거나 핍박이 와도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관계가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예배하고 열심히 말씀을 붙들지만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오히려 공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공정에 민감하고 정직을 중요시합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동시에 자유를 원하며, 옭아매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들보다 나아야 합니다. 더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이 통하지,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느끼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맺는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13:34-35, 새번역)

 

거꾸로 이야기하면, 크리스천들이 서로 이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세상으로부터 주님의 제자라고 인정받으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열심히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서로 사랑할 때, 디모데와 같이 훈련된 제자, 신실한 사역자, 믿음의 참 아들딸이 되어서, 말씀 위에 굳게 서고 그래서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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