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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4일 수요예배
✦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4 ✦
“충성스럽게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삶”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4절)
[들어가는 말]
다미선교회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다미선교회는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성도들의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던 단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로 그때 한국에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당시 신학대학원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 있던 저는, 1992년 10월 27일, 그러니까 다미선교회가 예수님 재림하실 거라고 선포한 10월 28일 바로 전날 어딘가 외출했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들어와서 “내일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빨리 믿으세요.” 하며 전단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저씨가 화를 내며 “이봐, 아가씨, 내일 예수님이 안 오시면 어떡할 거야?” “오십니다. 꼭 오십니다.”라고 쩔쩔 매며 대답하는데, 굉장히 불쌍해 보였습니다. “글쎄, 안 오시면 어떡할 거냐니까? 전화번호 알려주고 보상해줄 거야?” “아닙니다, 오십니다. 꼭 오십니다.” 바로 그렇게 다들 어색해하던 순간 “신문이요!” 하고 들어온 청년 덕분에 다 와 하고 웃으며 끝난 기억이 납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미혹되어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과 가정마저 팽개치고 그 단체에 전 재산을 헌납하는 등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사건은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일인데, 한국은 물론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교회 대표가 사기를 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표는 구속되고 수감되어 징역형을 살고 나왔습니다. 나온 다음 다 사기였기에 회개한다고 발표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그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부 교인들이 종말을 잘못 이해하면서 게으르고 무질서하고 방종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 서신이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사역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선교사로서 특별한 사명을 감당한 것을 봅니다. 또한 바울의 신학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종말 신앙에 관한 말씀은 한 세대 이후에 주어진 사도 요한의 말씀과 함께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의 내용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 문제는 초기 교회에서도 자주 제기되던 문제이고, 아마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도 계속 논의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마지막 때에 이단들을 경계하며 조심해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3-4)
특히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5-16)
바울이 썼다고 하는 편지 속에는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들(전서와 후서)이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라고 한 것은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시기의 계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2차 여행 중에 쓴 편지는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특별한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5)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며 그들을 굳건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과 예수님을 본받아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바른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주변 각처에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8)
또한 바울은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진실하게 섬기며 배운 것을 실천하는 신앙을 가졌다고 칭찬하면서(살전 1:9), 한 걸음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주는 신앙의 특징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말 신앙과 재림 신앙입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 1:10)
오늘 본문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종말 신앙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철저한 종말 신앙, 재림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대부분 믿은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처럼 몇 십 년을 믿은 것도 아니고 겨우 몇 달 믿은 사람들인데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올바른 신앙 태도에 대해 도전받습니다.
즉, 종말 신앙, 재림 신앙은 몇 십 년 교회 다니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주어진 신앙의 기본자세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 이전에 주어진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3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요 14:1-3, 새번역)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부터 자신이 다시 살 것이고 승천하실 것이며, 이 땅에 다시 오실 거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올바른 종말 신앙과 재림 신앙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여러 가지 칭찬받은 중요한 것들을 부정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근본을 흔들고 있는 거짓 교사들에게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3장 전체의 결론으로 제시합니다. 이들은 2장에서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대적하는 자’라고도 불리는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6절)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4절)
악한 자들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사주를 받고 움직이는 자들이기에, 사도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종말 신앙을 교묘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그들로부터 분리되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는 맞서 싸워야 하지만, 여기는 맞서 싸우지 말고 그들에게서 분리되라고 합니다.
분리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데, 이것은 고립되고 완전히 떨어지라는 뜻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 즉 거룩함의 개념입니다.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선택받아 불려 나온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악한 자들에게서 분리(구분)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게으른 자’, ‘말씀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서 멀리하고 분리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시며 그것도 속히 온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사실 모든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결론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20)
이 말씀대로, 재림 신앙은 성경의 결론이자 그 결론에 대한 모든 성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에 대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조롱하고 거절하는 무리가 있었고, 그들이 바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악한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런 악한 자들에 관해 경고하며 가르쳤고, 그 전에 그들과 같이 있을 때도 그 점에 대해 말했습니다(살후 2:5). 이 악한 자들의 후예가 지금도 있어서 우리 재림 신앙도 점점 희미하게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 핵심은 ‘악한 자’내지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 ’또는 ‘대적하는 자’(살후 2:4)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런 거짓 교사나 악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받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교인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 바로 두 번째 편지를 보낸 목적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악한 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세우는 일도 중요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재림을 믿지 않는 악한 자들의 영향을 받음으로 바른 신앙생활의 길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채로 세상 쾌락에 빠져 세속적인 삶을 살기 쉽습니다.
특히 지금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더욱 그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모든 걸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자기 쾌락, 자기만족, 자기 즐거움에만 온통 집중하는 경향이 너무나 심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그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 이 시대 성도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메시지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구원 역사는 하나님이 맨 처음 세상을 창조하셨던 목적대로 우리가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창 1:2) 빛을 지으시고 질서를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는 질서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질서가 없다면 우리는 이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성령님의 거듭남의 역사로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새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악한 자들의 영향력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령의 질서를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존재하는 무질서의 대표적인 흔적이 바로 게으름이고 또한 말씀의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6절)
이 무질서는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게 됩니다. 바울이 늘 강조한 대로, 우리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데에 머물지 말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고, 목장으로 모이는 것이며, 어떻게든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훈련을 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주님의 마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의 본을 따르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말씀을 잘 기억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 2:3-8, 새번역)
3. 주님 안에서의 새로운 질서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우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경제적인 질서를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새 질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분명히 일한 대로 대접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희생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했으며, 그런 다음에 새 질서를 세운 것입니다.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무절제한 생활을 한 일이 없습니다. 8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그것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10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하고 거듭 명하였습니다.” (7-10절, 새번역)
믿음의 사람은 자기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는 않는지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는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데 중요한 원칙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정말로 믿는 사람이 아니든지, 잘못 믿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자신의 권리를 희생하면서까지 일하고 다른 사람을 섬긴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는 이 시대 성도로서 반드시 배워야 하는 중요한 자세입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반대로 문제만 만들어내는 교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바울이 경고합니다.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1-12절)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새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모든 권리를 희생하면서도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본을 반드시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는 바로 이런 동기로 데살로니가후서를 써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받는 것이야말로 즉시 오실 준비를 하고 계신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온전히 현실에 뿌리내리는 신앙인의 자세가 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장 오실 것이 확실한데도 계속 일해야 합니까?” 사실 다미선교회를 따라다니던 사람들도 똑같은 질문에 넘어가서 거기에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됐기 때문에 더욱 열심을 다해 일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 있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기록했던 오늘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기록한 고린도전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사역자가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모두 희생해야 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영혼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전 9:12)
어떻게 하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애쓰며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도 이런 마음이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사역자로서의 권리를 희생한 둘째 이유는, 언제라도 즉시 오실 주님 앞에서 하나라도 더 많은 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고전 9:18)
많은 성도들이 나중에 주님께 받을 상을 미리 당겨서 이 세상에서 엉성한 것으로 받고자 하는 어리석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진짜 상은 하늘나라에 계신 주님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으로 받아 영원토록 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끝없이 선을 행할 것을 강하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10, 새번역)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라고 지음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한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조금 돕는 정도의 선행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사는 것이 우리가 지음을 받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반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사는 인생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고귀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무지하고 연약하며 제대로 판단을 못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게으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루라도 주어진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사명을 다함으로써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충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편지들에 약간 앞서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갈 6:9-10, 새번역)
그리고 그로부터 바로 얼마 후 쓴 오늘 본문에서도 비슷한 말씀으로 격려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3절)
주님 오실 때가 정말 가까웠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주님 앞에 충성했던 것에 대해 반드시 상을 받게 됩니다. 좋은 소식은, 주님이 오시기 전 아직 기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섬기고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주님의 일에 충성하여 많은 상과 함께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