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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16QQW85p2FA?t=2067

 

 

202283일 수요예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11

사도 바울의 소망

(빌립보서 317~21)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이 서신은 1세기 당시 빌립보 교회의 성도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그리스-로마의 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쉽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그리 풍요롭지 못했습니다(고후 8:1-5).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빌립보 성도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쁨은 그곳 성도뿐만 아니라 지금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삶의 희망을 보여줌으로써 당면한 여러 어려움을 넘어서도록 도와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견지하는 복음을 통한 구원의 삶과 그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 성도를 향한 사랑을 시대를 초월하여 전해줍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는 성도를 향한 바울의 소망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교회나 고린도 교회에 보낸 다른 서신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편지이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와 더불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에게 많은 사랑과 기도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빌립보 성도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우리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 특별한 메시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특별한 기쁨의 편지인 빌립보서

 

빌립보서는 특별한 기쁨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에서 기쁨이란 단어를 16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편지에 비하면 훨씬 많은 횟수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기쁨을 강조하는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마음 깊이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에게 보낼 글을 쓰면서 기쁨을 단순히 반복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기쁨을 반복적으로 권유한 데는 또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기쁨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을 수신하는 빌립보 성도들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기뻐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고 그 지역의 지배층도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내용을 보면 성도들은 오히려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바울의 처지도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울은 죽음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2:17)

 

전제즉 피의 제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기쁨은 이 땅의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에 구원받은 성도를 향한 바울의 소망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를 방문하게 된 배경은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16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지난 1차 전도 여행의 결과를 점검하고자 했던 원래 계획을 변경합니다. 바울이 본 환상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소아시아를 돌아보는 것이 목적이었던 전도 여행을 진행하던 중 환상 가운데 자신을 부르는 마케도니아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한 바울은 드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갑니다.

 

 

유럽의 첫 성 빌립보

 

사도 바울이 방문한 유럽의 첫 성 빌립보는 딩시 군사 도시로서, 마케도니아의 영웅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야만족이 거주하던 트라키아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정한 곳입니다. 성의 크기가 지름 약 4킬로미터(2.5마일) 정도니까 그리 큰 성은 아닙니다. BC 365년에 성이 세워졌고, BC 168년에 로마제국이 점령한 후 제국의 도시로 재건됐지만 이름은 그대로 빌립보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성의 지배층이 바뀌면서 군사 지역이 됩니다.

 

주전 42년에 일어난 로마의 내전과 악티움 해전(주전 31) 이후 퇴역한 군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지배층의 주류가 되어 그곳에 거주했으며, 지역의 공식 명칭은 율리아 아우구스타 필립의 식민지였고, 빌립보의 지배층은 모두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첫 성으로 들어가던 바울 일행은 그곳의 이정표가 그리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로도 표기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로마 본토 시민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특혜를 누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로마에 특별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이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매를 맞고 상처를 입은 채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날 때 로마 시민이라고 밝히니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유럽으로 전도 여행의 행로를 바꾸어 방문한 첫 도시인 빌립보에서 바울 일행은 늘 하듯이 기도처를 찾았지만 거기서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로마군이 주둔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남자 10명이 거주하기 쉽지 않아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성 밖으로 나갔다가 강가에 있는 여인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여자들로, 안식일에 강가에서 기도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지역 사람들과 결혼하면서 빌립보 외부에서 이주한 여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일행과 이 경건한 이방 여인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빌립보라는 생소한 도시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여인들 중 자색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최고급 옷감을 염색하는 염료는 바다 달팽이였는데, 루디아는 나무에서 나오는 염료로 염색한 옷감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루디아는 최상류층을 상대로 사업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옷감을 필요로 하는 중산층 이상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전도하여 빌립보 교회로 인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빌립보 행적

 

빌립보는 바울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는데, 도리어 그 고침 받은 여종의 주인들이 로마 사람이 받으면 안 되는 풍습을 전한다는 이유로 그를 고소하는 바람에 실라와 같이 투옥되었고, 결국 기도와 찬양을 하던 중 지진이 일어나 기적적인 방법으로 풀려났습니다(16:17-26).

 

빌립보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인 곳입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은 바울 일행은 용기를 가지고 마케도니아의 다른 도시들을 방문합니다. 이런 기억을 갖고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1:12, 새번역)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여기 1:12에 보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걱정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4:10, 새번역)

 

둘째로, 빌립보 출신인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감옥에 있는 자기에게 지원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자신의 필요를 해결하면서 사역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보내는 지원은 거절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서도 선교헌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귀한 마음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더불어 셋째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유대인들의 사악한 유혹에 대한 경계를 알리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에 분열이 일어난 것을 경계하면서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이 네 가지가 일반적으로 빌립보서를 쓴 이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한다면, 자기가 현재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자기를 위해 빌립보 교회에서 파견한 에바브로디도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겨 이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2:25-30). 사도 바울은 이런 다양한 목적을 갖고 빌립보서를 쓰면서, 그 안에 자신의 이력을 기록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바울의 과거 이력은 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과거 이력

 

오늘 빌립보서 3장 본문에는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자기소개는 사도행전(22)이나 다른 서신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빌립보서에서 작정하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3:5-6, 새번역)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배경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는데, 첫째로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유대인의 혈통임을 강조합니다.

 

1) 출생 8일 만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증명하는 수단인 할례를 받은 점

 

2) 이방인과 관련을 갖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인 점

 

3) 사울 왕을 배출한 가문인 베냐민 지파인 점

 

4) 히브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디이스포라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히브리어를 잊지 않고 사용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점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가진 배경을 통해 유대인으로서 이룬 성과를 언급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따라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유대인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지키고 있는 점

 

2) 하나님의 열심을 기억하며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는 비느히스와 엘리야의 열심을 따라서 교회를 핍박한 점

 

3) 스스로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보다 더 율법의 의를 따라서 흠이 없는 점

 

이런 소개 내용을 보면 바울이 그곳에서 물의를 일으킨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 이상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위에 언급된 바울의 자랑은 유대인으로부터도 인정받을 만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고상함

 

하지만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누리던 특별한 가치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고상함 때문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7-9)

 

여기서 그는 예수님을 아는 것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순간 자기가 과거 유대인으로서 추구했던 모든 가치의 내용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유익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예수님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안다고 말하며 모르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인으로 헌신한 바울은 예수님을 잘 알았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합당한 삶을 살았던 바울은 다른 편지들에서 종종 나를 본받으라하고 권면하는데(고전 11:1; 살전 1:6), 여기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7)

 

여기서도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면서 또한 자신을 따르는 눈으로 다른 성도를 주목해서 보라고 함께 요청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그런데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산다고 말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18-19)

 

바울은 십자가를 기독교 중심에 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바꾸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가 전하는 구원의 의미를 누누이 강조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반대하는 원수는 단순히 하나님의 원수로서 삶을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최후는 구원받지 못하는 멸망이며,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 또한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맹인이 다른 맹인을 인도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경우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아는 바울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이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다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 그런 유대주의자들은 알면서도 고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스른 원수가 행하는 일과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스른 원수들은 자신의 배를 섬깁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땅의 일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가치를 잊은 채 오직 이 땅의 이익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을 경계하는 바울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오늘 본문을 약간 다르게 번역하면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18 내가 여러 번 여러분에게 말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대항하는 원수로서 지금도 행동합니다. 19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속한 것만을 생각합니다. 20 하지만 우리의 나라는 하늘들 가운데 정말로 실재합니다. 우리는 그 하늘에서 오실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 그분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자신의 아래로 복종시키는 주인의 능력을 행사하시고, 비천하게 되어 버린 우리의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과 같은 모양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바울은 복음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최후를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성도들을 향해 참 신앙의 본질에 관해 당부를 남깁니다. 바울은 이 신앙의 본질을 품은 사람을 성도사랑하는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또한 바울은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신의 기쁨이며 면류관이라고 이야기합니다(4:1).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 안에 서 있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바울의 선포를 적용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주님, 빨리 오십시오.’라고 하거나 주님, 제가 곧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주님, 좀 천천히 오세요.’라고 하거나 저는 여기서 계속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죽기 싫어요.’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매일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경계하라고 하는, 십자가를 대항하는 원수들은 누구입니까? 왜 바울은 그들이 참 신앙에 위험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원수’(18)십자가의 적입니다. 바울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은, 모두 일관되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을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구원의 역사를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지만, 조금 더 해야 한다. 율법대로 행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지식으로는 예수님께서 주신 희생과 사랑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자기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당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안타까워합니다. 로마서 9:1-5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신앙 없음을 슬퍼합니다. 눈물을 흘리며”(18)라는 표현에는 그들을 향한 바울의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음으로써 멸망에 이르는 길을 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통해합니다.

 

그들은 삶의 목적과 가치 기준을 근본적으로 복음을 통한 구원에 두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자신들의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먹는 것에 집중한다는 말이 아니라 욕심을 부리며 탐욕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오직 자신들의 가치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자들을 경계합니다.

 

또한 그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자랑”(19)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할례를 뜻합니다. 딩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운동할 때 옷을 벗었는데, 그때 드러나는 유대인의 할례 증표가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이토록 무가치한 것을 뽐내고 정결법 등을 자신의 거룩함이라고 여겼으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진정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은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1-2)

 

이 고백은, 이 땅의 것은 다 필요 없으니 하지 말고 오직 천국만 생각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다 끝나는 것처럼 욕심부리고 탐욕을 부리며 살지 말고, 영원이 없는 것처럼 살지 말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에 주신 사명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시민의 삶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이것을 너무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위치했지만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았던 로마 시민들이었기 때문에 하늘의 시민권을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천국 시민권자다.’라고 잘 이해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도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은데, 이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욕심과 탐욕으로 무장한 채 이 땅의 재물에만 집중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거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노후대책은 있는데 사후 대책은 안 세우고 살아갑니다. 물론 노후대책도 세워야겠지만, 사후 대책은 더욱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후 대책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전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 땅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그것아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가졌던 소망이고 우리를 향한 소망입니다. 바로 이 소망으로 매일을 살아가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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