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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3일 수요예배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11 ✦
“작은 야고보: 작지만 꼭 필요했던 사도”
(마가복음 15장 40~41절)
1. 작은 야고보에 대한 성경의 기록
한국 교회에서 큰 사랑을 받는 찬송가 중에서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 있는데, 3절 마지막 부분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 가사 그대로,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긴 제자가 바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물론 그가 이름은 있었지만, 그 이름이 사람들에게 별로 기억되거나 인정받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겼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사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작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있어야 열두 사도라는 팀이 완성될 수 있는, 꼭 필요했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 10:2-4)
이 열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두 명의 야고보가 있는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40-41절, 새번역)
이 말씀에서는 야고보를 ‘작은 야고보’라고 표기했습니다. 이 마태복음 10장과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구절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또는 작은 야고보에 대해 성경이 알려주는 정보의 전부인데, 정리해보면 모두 네 가지입니다.
첫째, 그의 이름은 ‘야고보’입니다.
둘째,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알패오’입니다.
셋째,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넷째, 그의 별명은 ‘작은 야고보’입니다.
2. 작은 야고보의 이름과 배경
성경에는 여러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에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며,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주 경건한 사람이어서 ‘의인 야고보’라고 불렸고 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낙타 무릎’이라고 불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야고보는 그들과는 다른 제3의 야고보입니다. 성경은 그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또는 ‘작은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그의 가족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버지 알패오
성경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알패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알패오의 아들이 또 한 명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인 동시에 우리에게 또한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막 2:14)
여기 등장하는 알패오의 아들은 레위인데,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레위의 다른 이름이 마태입니다. 마태의 본명이 레위였을 거라고 이전에 살펴본바 있습니다. 만약 레위의 아버지 알패오와 작은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가 같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야고보와 마태가 형제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름만 가지고 둘이 형제라고 확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알패오라는 이름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마태와 야고보가 형제였을 가능성이 전혀 무리한 추측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두 집안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였고,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였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와 야고보도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형제였다면, 이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서를 쓰신 분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을 작성할 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항상 가나나인 시몬, 다대오 유다, 그리고 가룟 유다와 함께 짝을 이루도록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열심당원이거나 열심당원에게 영향을 받은 일종의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레위)는 어떻습니까?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에 붙어서 동족 유대인들의 피를 빨아먹는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만약 열심당원들과 가까이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자기 형제 마태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형제가 있는데, 한 사람은 정치적으로 친 로마적인 세리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반로마적인 인생길을 걸어간 겁니다. 마치 일제강점기 때 형제가 있는데, 한 사람은 친일파로 일본의 순사가 되어 조선 사람들을 때려잡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군에 가담하여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싸웁니다. 그것과도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을 따르기로 결단하여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이것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입니까? 충분히 그렇게 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형제였을 경우 성경에 분명히 또 기록이 나왔을 텐데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버지들의 이름이 같은 알패오인 동명이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입니다.
2) 어머니 마리아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입니다. 이제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야고보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고보’라는 이름처럼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도 아주 많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그 장면을 바라보는 일단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40a절)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 여자들은 용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남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는데, 이 여자들은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누가 있습니까?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0b절)
여기에서만 벌써 마리아가 두 명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살로메라는 여인도 같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 여인이 멀리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과 반드시 비교해야 할 구절이 두 군데 더 있습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 27:56)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 19:25)
이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마가복음: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 마태복음: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 요한복음: 그(예수님의) 어머니,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세 기록에서 모두 겹치는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마가복음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태복음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살로메(막)와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마)와 ‘이모’(요)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그 이름이 살로메이고 예수님의 이모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 나오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그러니까 마가복음 15:40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바로 요한복음 19:25에 나오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같은 사람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또한 어떤 신약학자들은 ‘글로바’가 ‘알패오’의 별명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사실이라면 더 흥미로운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만약 글로바가 정말 알패오였다면,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알패오의 아내 마리아가 됩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에게 작은 야고보와 요세라는 아들들이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세와 요셉은 동일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형제 요세를 빼놓지 않는 것을 보면 요세도 아주 신실한 제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다른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앞에까지 와서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목격하며 그 자리에 동참했습니다. 경건한 신앙의 어머니 밑에서 야고보와 요세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3.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의 의미
그의 별명이 ‘작은 야고보’인데, 왜 그에게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이 붙여졌겠습니까?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똑같은 이름을 가진 제자가 있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이 별명이 붙여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작은’이란 단어가 붙었을까요? 확실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먼저 키가 작았다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키 때문에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이 주어졌다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큰 야고보’라고 했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키와 관련된 이유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둘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에 비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작은 야고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를 ‘큰 야고보’나 ‘늙은 야고보’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나이 차이가 아주 컸던 것 같지는 않고, 이것 역시 정확한 이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작은’이라는 표현이 붙여졌겠습니까? 학자들이 추측하는 가장 타당한 이유는, 작은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 영향력이 훨씬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 즉 두드러진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 덜 유명했고 또 후배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작은 야고보’로 불리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만일 정말로 그런 이유로 ‘작은 야고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면, 그는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킨 제자로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며 평생 살았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4. 작은 야고보의 삶과 죽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 “그는 아주 말수가 적은 제자였고, 기도하는 제자였다.”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쩌면 말수가 적었기 때문에 성경에 두드러진 기록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제자들이 떠들고 있을 때 그는 기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는 하나님 나라에 소중한 제자였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시리아로 가서 전도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집트에서 순교했다고도 전해지는데, 순교한 것만은 확실합니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순교했느냐에 대해서 의견이 두 가지로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톱에 잘려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톱이 작은 야고보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고, 영향력이 작은 제자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야고보가 중요하지 않은 제자였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소중한 제자이며, 꼭 필요한 제자였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입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제2바이올린 연주자와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편성할 때 제1바이올린 주자를 모집하는 일에는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어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인자가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제2 바이올린 주자로 기뻐 자원할 바이올리니스트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제2 바이올린이 빠지면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연주를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미국을 방문하는 국빈들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입니다. 거기에는 모두가 발걸음을 멈춰야 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곳은 위대한 장군의 무덤이 아닙니다. 유명한 대통령의 무덤도 아닙니다. 그곳은 바로 한 무명용사(unknown solider)의 무덤입니다. 이름도 없는 용사의 무덤에 헌화하는 것으로 국빈들의 방문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 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장군들을 스타라고 떠받들지만, 전쟁은 그와 같이 이름 없는 많은 작은 영웅들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군들만 있으면 어떻게 승리하겠습니까? 이름도 모를 여러 군인들이 함께 군대를 이루어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지, 지휘관만 있다고 전쟁에서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이 미국은 그런 작은 영웅들을 인정해줍니다. 그들의 가치를 알아줍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는데 찾지 못한 미군의 유골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미국이 그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영적 싸움을 싸운 사람들, 그 영웅들을 하나님 나라는 결코 잊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 때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들, 존경받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꼭 하나님 나라의 영웅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신실하게 섬긴 사람들일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교회당의 저 구석 후미진 곳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일꾼, 화장실 청소를 하는 일꾼, 바닥에 남이 흘린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을 줍는 일꾼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기억해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게 아닙니다. 앞에서 목회자가 잘하고 유명해진다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작은 영웅들이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던 사람은 천국에서 별 상급을 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너무나 많은 박수와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겼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상급과 칭찬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이 얼마나 쟁쟁한 사도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는 정말 작게 그러나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나라를 섬겼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겼던 제자,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꼭 필요한 일꾼이었던 사도 야고보, 이 작은 야고보의 걸음을 따라갈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비록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한다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하게, 꾸준하게, 신실하게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섬기며 나아감으로써, 하늘나라의 큰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