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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2일 수요예배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5 ✦
“요한: 사랑의 사도”
(요한일서 4장 7~12절)
1. 요한의 이름의 뜻과 회심
사도 요한에게 가장 적절한 별명이 있다면 ‘사랑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어떤 이름이 제일 흔한지 통계를 내보니, 1위가 요한(John)이었고, 2위는 야고보(James), 3위는 베드로(Peter)였습니다. 제가 만나본 미국 사람들도 John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라는 말은 본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처럼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느끼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3)
이 말씀은 요한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다’고 하면 조금 이상하니까, 자기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서 “예수의 제자 중에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후에도 비슷한 표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 20:1-2)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이 부분을 흥미롭게 표현한 그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요 20:3-4, 새번역)
이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묘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자기 이야기니까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 21:7)
여기도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등장하고, 21절 이하에서도 그 제자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 21:20-22, 새)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자전적 간증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이 쓴 편지인 요한일서, 이서, 삼서 중에 특히 요한일서는 이런 사랑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이 이제는 받은 사랑을 가장 합당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요한은 야고보와 형제 관계에 있으며, 아버지는 수산업을 크게 하던 상인, 세베대입니다. 그는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집안에서 자란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또 이튿날 요한 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 1:35-37)
지난번 안드레를 다룰 때 살펴본 것처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친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그분이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아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 곧 안드레와 요한에게 제일 먼저 하신 질문은 “무엇을 구하느냐”였고,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요 1:38). “선생님, 어디에 사십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예수님과 교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는 장면입니다.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교제하고 싶었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 깊이 들어가기 원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열망했던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따라갔다기보다는,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을 더 깊이 알고 싶어서 따라갔습니다.
2. 요한의 인물과 기질
요한은 그의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아주 급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야고보를 살펴볼 때 같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형제에게 붙은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란 뜻을 가진 ‘보아너게’입니다. 성격이 천둥처럼, 불벼락처럼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격이 불같았고 과격했던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급하고 벼락같다는 것은 나쁜 성격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잘 사용되면 뜨거운 열정과 깊은 감성 때문에 오히려 주님과의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급한 성격이었던 요한은 동시에 강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위하던 열정이 점점 좋게 변하면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갈망하는 열정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무엇보다 요한의 마음을 강하게 울렸던 것이 예수님의 새 계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4-35, 새)
예수님의 많은 말씀 가운데 특별히 요한을 터치했던 말씀은 모두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한은 유독 사랑을 강조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사랑이 너무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이 없고 과격했던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임을 깊이 깨달았고,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요 14:21, 새)
빈 무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갔던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었는데, 둘 중 요한이 더 빨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덤에 도착해서는 무서워서 그랬는지 들어가지 못했고, 조금 늦게 달려온 베드로가 먼저 빈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이 요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더라” (요 21:7)
여기서 행동은 베드로가 빨랐지만,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요한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요한처럼 불같고 격정적이던 사람이,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형제자매를 깊이 사랑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처럼 격정적이고 불같은 사람이 제대로 변화되어 헌신하기만 하면, 사랑을 베푸는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시절 그의 보좌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별명은 ‘살인청부업자’였습니다. 실제로 살인을 많이 했다는 말이 아니라, 대통령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든 대신 나서서 매장시킬 만큼, 잔혹한 냉혈한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닉슨 대통령을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콜슨은 결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연관되어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콜슨은 자신의 어머니나 할머니도 밟고 지나갈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지독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감옥에서 C. S. 루이스(Lewis)의 책을 읽고 친구들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중에 출소한 후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일을 하는 교도소 선교 단체인 Prison Fellowship을 시작하여 대표를 지냈습니다(우리가 협력하던 말라위 김용진 선교사님이 여기 소속). 그는 감옥에 갇혔을 때 그곳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의 모습에 눈을 떴고, 그래서 나중에 그들을 돕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인간을 이렇게 변화시킵니다. 복음이 우리 마음을 터치하면 우리의 약점이 강점으로 변화됩니다.
3. 요한의 인격적인 변화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갔을까요? 요한이 경험한 인격적인 변화를 가리켜 그가 균형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 요한은 세 가지 면에 있어 균형을 찾아 갔습니다.
1) 야망과 겸손의 균형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논쟁이 일어납니다. 그 논쟁은 서로 누가 큰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도 보면 논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어떤 교훈을 주셨습니까?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막 9:35, 새)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야망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요한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야망을 가지고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야망을 극복하고 섬김을 배워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변화의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진리와 사랑의 균형
또한 요한은 진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경험하고 성숙되어 가면서, 그는 진리뿐 아니라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갔고, 균형을 찾아 갔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모습을 복음서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 사건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막 9:38, 새)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했는데, 이때 예수님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쉬이 나를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막 9:39-40, 새)
이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마음을 넓게 가져라!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다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이런 교훈을 받으면서 요한은 점차 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균형을 찾아 나가는 인격적인 변화의 과정이었습니다.
3) 영광과 고난의 균형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에게 자기 어머니까지 모셔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하나는 오른편,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혀 달라고 청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새)
주님의 ‘잔’은 고난의 잔이고 ‘세례’는 죽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그들은 나중에 그렇게 고난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영광을 원한다면 먼저 고난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난의 값을 지불해야만 영광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은 영광과 고난의 균형을 찾아 나서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4. 요한의 사역과 죽음
요한의 사역은 크게 네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 중심의 사역 단계
물론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지만, 본격적인 사역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벌어집니다. 사도행전의 초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표현은 ‘베드로와 요한이’입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같이 주로 다녔는데, 이때 요한만 있는 것은 야고보가 그 사이 교회 전승에 의하면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과 같이 다니며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후기에는 바울이 주도적인 리더로 부상하지만, 초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역의 단계에서 요한은 사역의 중심을 에베소로 옮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에베소 중심의 사역 단계
에베소라는 도시는 지금의 터키에 위치합니다. 지금은 폐허가 된 조그만 도시지만, 과거에는 소아시아의 중심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성지 순례라고 하면 이스라엘부터 생각하지만, 터키도 아주 중요한 성지입니다. 그곳에서 사도행전의 역사가 다 기록되었습니다. 이 에베소에 가면 지금도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살던 집이 보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에베소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 고난의 절정에서 ‘가상칠언’을 하실 때, 그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왜 요한에게 부탁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요한이 장수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일찍이 순교했고, 예수님의 동생들도 모두 순교하고 죽었는데, 그 후에도 몇 십 년 동안 요한은 살아 있었습니다.
둘째는, 사랑이 많기 때문에 잘 돌봐 줄 거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늙은 여인을 자기 어머니로 평생을 모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면서 에베소에서 전도하고 사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요한은 밧모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3) 밧모 섬에서의 사역 단계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9)
밧모는 현재 그리스에 속해 있고 에베소는 터키에 속해 있어 나라가 다르지만, 과거에는 한 지역처럼 활동했고, 두 곳이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밧모 섬에는 지금도 사도 요한이 기도했던 곳을 기념하는 교회와 수도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귀양살이를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였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약 A.D. 95-98년까지입니다. 그렇게 귀양살이를 하던 요한은 새로운 황제 트라이안이 등극하면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자유를 얻은 요한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4) 에베소에서 사역을 마무리하는 단계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다가 붙잡혀 독사 굴에 던져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나고, 끓는 물에도 던져졌지만 하나님의 기적으로 다시 보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핍박을 너무 많이 받아 몸이 상해서 들것에 뉘어져 제자들에 의해 모셔졌다고 하는데, 주일날이면 간신히 버티고 앉아 매주 같은 주제로 “형제자매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사도 요한의 설교의 단골메뉴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마치 노년의 사도 요한이 말씀을 들려주는 것처럼 들어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7-12절)
성도들은 요한의 설교가 좋은 설교지만 똑같은 설교를 계속 듣다 보니 지겨워서, “선생님, 이번 주일에는 새로운 설교를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은 “형제자매들아, 새로운 설교를 한다. 서로 사랑하라!”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설교하던 요한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연사를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자연스럽게 죽은 사람은 딱 한 명, 사도 요한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죽었지만, 사실 다른 어떤 사도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는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외치다가 사랑 가운데서 죽어간 사도가 요한입니다. 그는 AD 100년경에 죽었습니다. 정확히 몇 년도에 몇 살의 나이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90대에 죽었습니다. 그때의 기준으로 하면 굉장히 장수했습니다.
그는 평생 사랑으로 살면서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많은 말씀을 전했지만, 가장 위대한 말씀, 그가 남긴 유명한 성경 구절은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으로 유명한 성경 구절은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요한복음 3:16을 받아 믿은 사람은 반드시 요한일서 3:16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구원받고 영생을 얻은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속에 살며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 땅에 남기고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삶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사도 요한을 깊이 기억하며 우리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삶을 사는 사랑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