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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2일 수요예배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2 ✦
“베드로: 약하지만 강하게 된 사도”
(누가복음 22장 31~34절)
본문은 베드로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가장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1절)
베드로는 사탄에 의해서 밀 까부르듯 함, 즉 체로 치는 것을 당한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도 그를 위해 기도하시며 사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2절)
베드로는 사탄에 의해서 까부름을 당했으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회복하고 일어서서 믿음의 백성들을 굳게 세워주는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는 ‘약했으나 강해진 제자’였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공통된 관점에서 보았다고 해서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이 공관복음과 사도행전 1장에 열두 제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베드로의 이름이 항상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베드로를 보통 ‘수제자’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제자들 중에서 가장 리더 격이었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1. 베드로의 이름과 부르심
베드로의 이름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주어졌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때는 ‘시몬’으로, 어떤 때는 ‘베드로’로, 또 어떤 경우에는 ‘시몬 베드로’로 나오는 그의 본명은 ‘시몬’입니다. 지금도 ‘시몬’이라는 이름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더욱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얼마나 흔했는지, 열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또 한 명의 시몬이 있습니다. 바로 ‘열심당원 시몬’입니다. 이 제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형제들 중에도 시몬이 있었습니다(마 13:55). 그리고 그 유명한 가룟 유다의 아버지 이름도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부르실 때 ‘시몬아’ 하지 않고 ‘바요나 시몬아’라고 하셨습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요나’는 ‘요한’의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 혹은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고, ‘베드로’는 그의 별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petros)인데, ‘반석’ 또는 ‘큰 바위’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그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 만난 뒤 그분이 메시아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형제 시몬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1-42)
베드로는 헬라어이고, 게바는 아람어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말은 ‘아람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주로 아람(시리아)어를 사용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하신 ‘달리다굼’이나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아람어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시몬과 예수님의 만남이 동생 안드레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시몬을 만나 가장 먼저 하신 일은 그에게 ‘게바’ 즉 ‘반석’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앞으로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그가 새로 받은 별명 ‘반석’은 대개 안정감, 단단함, 육중함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시몬에게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습니다. 사실 시몬은 그렇게 육중함이 있거나 안정감을 주거나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장면에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라고 하신 것은 그의 겉모습을 보고 우직하게 생겨서 ‘너는 돌쇠다.’라는 식으로 하신 유머입니다. 하지만 그의 성품과 성격은 전혀 바위 같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의 차례가 되어서 예수님이 그의 발을 씻기시려 하자 그는 펄쩍 뛰며 말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어떻게 선생님이 제 발을 씻기십니까? 제가 씻겨 드려야죠!”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자 돌변하며 그렇다면 다 씻겨주며 아예 목욕을 시켜달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굉장히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기질을 가졌고, 전형적 다혈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런 시몬에게 ‘반석/바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은 믿었지만,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별로 뚜렷한 변화의 흔적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주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삶을 버리고 그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결단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는 밤을 새워 애썼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밝아 온 새벽에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자기 배에 올라서 무리를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오시더니 자기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눅 5:4, 새)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고, 고기잡이에 있어서라면 전문가였습니다. ‘아니, 랍비가 고기 잡는 걸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저런 말을 하지?’ 하며, 그렇잖아도 밤새 애써도 허탕을 쳤기에 아주 못마땅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베드로는 뭔가 저항할 수 없는 권위를 느끼며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눅 5:5, 새)
그러고는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이때 아주 파격적이고 이상한 반응을 보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눅 5:8, 새번역)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겁니까? 아마 베드로는 ‘바다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며 물고기 떼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분이라면 내 마음의 깊은 곳까지 다 아시겠구나. 내가 살아왔던 과거, 숨기고 있던 나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삶도 다 아실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튀어나온 고백이,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였습니다. 이 고백을 받으면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눅 5:10, 새)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 그분의 제자는 사람을 낚는, 즉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도록 해주는 복음 사역을 할 것을 암시하십니다. 그때 두 제자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본격적인 제자의 삶에 응답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영적 체험
어떤 의미로 보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계속 체험해가는 과정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깊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 변화산 체험
예수님은 대표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올라가 모습이 변화되시는데, 거기서 구약의 대표적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고, 거기서 예수님이 놀랍게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베드로는 이날 아주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고,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며, 자신의 온 존재를 던져서 듣고 따라야 할 예수님을 새롭게 체험한 것입니다.
2) 물 위를 걷는 체험
변화 산에서의 체험과 함께 베드로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체험이 있다면, 바로 물 위를 걸었던 체험입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 외에 물 위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힘겹게 노를 젓던 이른 새벽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고 두려워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4:27)
여기서 ‘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Ego eimi’(에고 에이미 = ‘It is I.’)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구약 출애굽기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출 3:14, 새)
‘나는 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놀라운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한 이후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 함께 배 위에 오르자,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릎 꿇고 절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4:33, 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병 고침은 하면 좋고, 안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은사일 뿐, 구원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체험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시고 주님이심을 계속적으로 체험해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확인하고 체험해 가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신앙생활입니다.
3. 베드로의 신앙고백
베드로의 인생 발자취에서 그가 남긴 중요한 도전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 사건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제자들을 이끌고 가이사랴 빌립보로 향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훈련을 총정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일종의 졸업시험을 치르십니다.
이때 시험 문제는 딱 두 개였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였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습니다.
사실 이것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그분을 누구로 알고 믿느냐에 따라 생사가 결정됩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발견하고, 그분이 구원이고 소망이심을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메시야)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받은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7-18)
4. 베드로의 시험과 예수 부인
베드로를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자신감(사실은 교만)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장 강할 때는 언제입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 간절히 주님을 찾고 부르며 의지할 때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때, 주님의 도움 없이도 알아서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시험에 빠지는 장면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막 14:27)
다른 복음서들에는 다르게 나와 있는데 오늘 누가복음 본문의 내용이 특이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1-32절)
예수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3절)
다른 복음서에는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다 버려도 자신은 절대로 버리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34절)
마가복음은 그 말씀을 듣고도 베드로가 한 마디 더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막 14:31)
신앙에서 ‘자신만만’하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아니라 주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왜 예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서 살아 계신 주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 삶의 문제를 아뢰며 그분을 붙들 때가 사실은 가장 강한 순간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나 혼자 얼마든지 인생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한 때가 사실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 그러나 베드로의 인생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5. 베드로의 회개와 헌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의 죄질을 비교하면 누구의 죄가 더 무겁겠습니까? 아마 베드로의 죄가 더 무거울 것 같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끝났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끝났지만,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후회는 했습니다. 뉘우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으로 회개하고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뉘우침만 있었지, 회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 닭이 울고 난 후, 그는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그리고 눈물 흘리며 통곡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깨지고 무너져 내렸지만, 주님은 깨지고 무너진 그를 다시 세우셔서 반석으로서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십니다. 드디어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의 새벽 바다로 다시 이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요 21장). 그리고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제자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님이 세 번에 걸쳐 주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치라)!” 이것이 그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영혼들을 네가 돌봐주어라!” 이때부터 그는 달라집니다. 이때부터 진실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목자의 소명을 본격적으로 감당하기 시작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쿠오바디스(Quo Vadis)>라는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네로 황제의 유명한 로마 방화사건이 있은 후, 그는 방화의 핑계를 크리스천들에게 돌려 그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핍박을 피해 로마를 벗어나려던 베드로가 반대 방향에서 시내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며 묻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이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주님은, “나는 네가 버리고 가는 저 양 떼들에게로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그는 돌이켜 말합니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그 양 떼들을 돌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더 이상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복음서의 베드로와 확실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순절 부흥의 장에서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하나님 역사의 당당한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비겁하지 않습니다. 아주 용감합니다.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27-29)
박해에 맞서 포기할 수 없는 복음 전도의 소명을 당당하게 확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달라졌습니다. 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통해서 초대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6. 베드로의 죽음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여러 전승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순교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 21:18-19, 새)
베드로가 비록 실수도 많이 하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스런 순교의 죽음이 될 것을 암시해주신 것입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라는 역사가의 기록에 보면, 그는 교부였던 클레멘트(Clement)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전합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아내와 함께 체포를 당했습니다. 죽어 가는 아내를 향해, 예수를 부인하면 놓아 주겠다고 회유하는 말을 듣고 베드로는 아내에게 “내 사랑하는 아내여! 주님을 기억하시오!”라고 말하면서 아내의 순교의 죽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죽은 후 자기 차례가 왔을 때 그는,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나는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릴 자격이 없소!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주시오!”라고 말하고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손을 들고 주를 찬양하며 자기의 마지막 생명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의 마지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십시오. 이제도 영원한 날까지도 영광이 주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벧후 3:18, 새)
베드로는 아주 기복이 심하고 굴곡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수히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붙들고 계셨고 그가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주님의 은혜처럼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 하나,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알아 갈수록 그분이 얼마나 존귀한 분인가를 체험했습니다. 자신의 시련과 넘어졌던 경험을 통해 베드로는 유언처럼 남기는 메시지를 전하며,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 있는 영적인 성숙이라고 당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일어났으며, 그 주님을 의지하면서 마침내 주님을 위해 영광스러운 최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보다도 훨씬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붙잡힐 때 약하지만 강하게 된 베드로처럼, 귀한 믿음의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임했던 은혜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