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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순전한 마음을 지닌 사도 (요 1:45-51)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7 (8/26/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DQXGpRgv100?t=1666
2020년 8월 26일 수요예배
✦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열두 사도 7 ✦
“나다나엘: 순전한 마음을 지닌 사도”
(요한복음 1장 45~51절)
1. 나다나엘은 누구인가?
나다나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순전한 마음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이라고 언급된 이 제자는 공관복음의 제자 리스트에 ‘바돌로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나다나엘과 바돌로매는 같은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이 주셨다’(God has given)라는 뜻으로,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니까, 그의 아버지 이름이 돌로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나다나엘과 바돌로매가 같은 인물이라고 보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나다나엘과 짝이 되어 등장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빌립입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을 보십시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 10:2-4)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몇 사람의 이름이 약간 다르게 나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일치하며, 공관복음에서 열두 제자의 명단을 소개할 때 짝을 지어 소개하는 사람들을 주목해보십시오. 베드로를 소개하면서 형제 안드레를 함께 소개하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함께 소개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형제는 아니지만 짝이 되어 동행했던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빌립과 바돌로매’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아니라 바돌로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볼 때 흥미로운 점은, 바돌로매가 등장할 때는 나다나엘이 등장하지 않고, 나다나엘이 등장할 때는 바돌로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나다나엘과 바돌로매는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는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나다나엘이 본명이고 바돌로매가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2. 나다나엘의 회심
나다나엘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나다나엘은 빌립을 통해 전도를 받았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과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 그분을 드디어 만났어! 요셉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가 바로 메시아야!” 그때 나다나엘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오, 그래?”라고 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6절)
나사렛은 워낙 형편없이 작은 동네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 빌립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빌립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이 거슬렸습니다.
그 당시 나사렛은 지방색에 대한 편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대 지역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 사람들을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 지역, 특히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보다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배우지 못해서 무식한 사람들이고 상당히 교양 없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같은 갈릴리 지방 안에서도 나사렛은 아주 작은 동네였고 로마군대가 주둔하는 기지촌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편견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어디 출신이었습니까?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2)
가나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징을 행하신 혼인잔치가 벌어진 곳이었는데, 나사렛은 가나에서 4마일 정도 남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가나 사람들은 나사렛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대뜸 말한 게 그런 이유입니다. 자기가 너무나 잘 아는 데가 나사렛인데, 거기는 그런 인물이 날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가나도 작은 동네였지만, 나사렛은 정말 형편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다나엘은 편견의 대상인 갈릴리, 그것도 작은 동네 가나와 나사렛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욱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연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구하며 나아가던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7절)
여기 보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분이 정말로 메시야인지, 자기가 직접 만나보고 대화를 해본 후 판단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를 기꺼이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로 오고 있는 나다나엘을 가리키시며 엄청난 칭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그리고 또한 아주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8절)
여기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무화과나무는 본래 그렇게 작은 나무가 아닙니다. 가지와 잎들을 내면 높게는 7미터 이상 자라 주변을 덮을 수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때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시원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는 쉼터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옛날부터 경건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낮잠도 자고 말씀 읽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그 구약성경이 예언한 대로 장차 오셔서 자기들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메시아의 오심을 애타게 기다리며 말씀을 읽던 어느 날, 그는 빌립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가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선뜻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혹시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켜 다른 사람들에게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자기에 대해 이런 극찬을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칭찬의 내용을 보십시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간사한 것(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은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고, 마음속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게 민족의 회복을 열망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골 갈릴리 가나 출신의 그를 누가 알아줍니까? 아무도 자신의 그런 열정과 순전함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나본 적도 없는 예수라는 분이 자기가 그 앞에 오기도 전에 자기를 그렇게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기 마음을 꿰뚫어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여쭈어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이 말은 자기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고 거짓이 없는 순수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 마음을 알고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놀랍고 신기해서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완전히 결정타를 날리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에 나다나엘은 그대로 무너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정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49절)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한 것은,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야)이시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그냥 읽으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하며 예수님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던 나다나엘이, 왜 갑자기 태도를 완전히 바꾸면서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갑니다. 예수님이 그가 고민하고 갈망하던 것을 꿰뚫어보시고 말씀을 하시니까, 그는 너무 깜짝 놀라면서 자기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분이라면 메시야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봤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태도가 바뀝니까? 그러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들으며 제대로 알아들은 겁니다.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서 간절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며 율법과 예언서들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보고 이분이 정말 메시야가 맞으시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본래부터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안고 기도하며 기다리던 나다나엘이 드디어 예수님과 만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 순간이 바로 나다나엘의 회심의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나다나엘의 사람 됨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은 그에 대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다나엘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같은 갈릴리 출신임에도 자신은 가나 출신이고,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너는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읽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느냐? 정신 차려라!’ 하고 야단쳤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편견을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는 나다나엘을 만나자마자 그를 비난하거나 충고하는 대신 먼저 칭찬하셨습니다. ‘네 마음에는 간사함이 없다! 비록 나에 대한 편견이 있을지는 몰라도, 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참 이스라엘 사람다운 순전함이 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실 때, ‘참’이라는 말은 ‘순전하다’, ‘정직하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에는 편견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순전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때 나다나엘의 마음 문이 확 열렸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먼저 그 사람에게 어떤 칭찬거리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못 믿겠다고 하거나 교회에 대해 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반박하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참 깊으시네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을 많이 하신 분이네요.”라고 하면 마음이 확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신은 편견만 많군요. 그건 기독교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겁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되게 하시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더 덤벼들거나 아니면 ‘뭐요? 그래, 당신 잘났소! 얘기가 안 통하네. 관두쇼.’라고 하며 대화가 끝나버릴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관계를 좋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칭찬입니다. 칭찬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늘 칭찬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험담하고, 비판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벽이 생깁니다. 거기 없는 사람에 대해 험담하면 시원할 것 같지만, 더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계속해서 벽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외로운 섬에 다리가 놓이는 것처럼 외로운 자신에게도 다리가 놓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다리를 만들 수 있습니까? 바로 칭찬입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칭찬은 오히려 놀리는 것이나 아부처럼 들릴 수 있으니까, 확실한 사실에 근거해서 칭찬해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칭찬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가졌던 일부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정직함과 순전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평가해주셨습니다. 나다나엘, 그는 순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4. 나다나엘의 사역과 죽음
그의 사역과 죽음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살펴본 몇몇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 이외의 자료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 역사와 전승에 의하면, 나다나엘은 아주 조용한 성격으로 늘 뒤에 있고 나서지 않았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제자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유대 땅을 떠나 소아시아(터키)로 갔는데, 그 중에서도 라오디게아와 골로새 근처에 있던 도시인 히에라폴리스 주변에서 전도하다가, 나중에는 페르시아 그리고 심지어 아르메니아까지 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전승에 의하면 인도까지 갔다는 설도 있는데, 물론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또 한 전승에 의하면, 그는 전도하다가 붙잡혀 몽둥이에 맞아서 피부가 다 벗겨졌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채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모래주머니에 담겨 바다에 던져진 것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학자들은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서, 나다나엘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을 당한 후 모래주머니에 채워져 바다에 던져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돌로매 혹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도에 대한 상징이 있습니다. 피부가 벗겨진 채 죽임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해서 교회 역사에서는 항상 이 사람의 상징으로 세 갈래로 갈린 나이프를 제시합니다. 그는 칼에 의해 살가죽이 벗겨지면서까지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주님 앞에 드린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5. 나다나엘의 교훈
나다나엘은 크게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 편견 극복의 중요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편견을 극복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진리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 있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편견을 넘어서지 못하고 편견의 노예가 된 채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 하나님에게 붙잡혀 살아간 사람들은 편견을 넘어서는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다나엘에게는 특별히 나사렛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편견을 넘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나다나엘이었습니다.
2) 진지한 구도의 중요성
그는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던 사람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말씀을 읽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때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창세기 28장을 읽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닙니다. 창세기 28장에는 무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야곱의 사닥다리 사건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창 28:10-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50-51절)
‘너, 이거 읽고 있었지? 그런데 네가 그것을 네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인자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로서 인류를 구원하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너는 바로 그러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나다나엘이 성경을 읽으면서 추구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정말 놀랐을 것이며, 바로 자기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이심을 더욱 확신하여 예수님의 뒤를 열심히 따랐을 것입니다.
3) 순전한 마음 밭의 중요성
나다나엘은 평생 순전하고 신실한 제자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깊은 묵상의 사람이어서,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순수하게 가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바로 말씀 묵상입니다.
영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You are what you eat.” (나는 내가 먹는 것이다. = 먹은 음식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한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마음을 무엇으로 채우는가가 나를 결정합니다. 매일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면 그 말씀이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밤낮으로 드라마만 보고 있으면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묵상을 통해 경건한 영향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 밭이 순전하게 가꾸어집니다.
예수님은 네 가지의 마음 밭을 이야기하십니다. 돌밭도 있고, 가시떨기 밭도 있고, 길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밭은 무엇입니까? 좋은 땅입니다. 그 좋은 땅이라고 비유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여 그 마음이 순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다나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사모하여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