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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7일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3 ✦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참된 믿음”
(욥기 1장 13~22절)
[들어가는 말]
수요예배에서 13주째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며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문제는 아무리 피하려 해도 인생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고통을 겪은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욥기를 간략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사실은 전체가 아니라 맨 앞부분과 뒷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중간은 욥과 세 친구가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닥친 고난을 보면서 우리도 힘든 인생의 고통에 대한 교훈을 배우기 원합니다.
사실 인생에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로 인해 깨지고 불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 실패, 해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불치의 병, 실연, 이혼, 교통사고, 천재지변, 테러 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힘든데,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어떤 어려움이 생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반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욥을 통해 인생의 고통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는 원리를 배우기 원합니다.
1. 고통이 찾아올 때 용기 있게 직면하라
가지고 있던 것을 다 잃어버린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통 중에서 그 상황을 피하지 않고 마주합니다. 욥이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 특히 열 명의 자녀들을 하루에 다 잃어버린 그 엄청난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욥이 그것을 다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고통의 모든 과정을 용기 있게 직면합니다. 욥기는 그러한 욥이 의인이었음을 밝히며 시작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절)
욥은 의인이었고, 하나님도 그를 자랑하실 정도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8절)
게다가 그는 화목한 가정과 엄청난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2-3절)
동시에 그는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였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경건한 사람이었으니, 소위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자녀들이 죄를 범할까봐 잔치의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의 명수대로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5절)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욥의 행복을 시기하는 존재가 있었는데, 사탄입니다. 사탄이 하루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데,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주의해 보았느냐고 물으시며 그를 자랑스러워하시자, 그때 사탄이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9-11절)
사탄의 논리는,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셨으니까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시면 그가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소유물을 쳐보라고 허락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2절)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사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욥기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에 나왔다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과 비교도 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탄이 역사함으로 욥은 하루아침에 그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소유물과 또 사랑하는 자녀들을 동시에 잃게 됩니다(13~19).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인생의 일은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거부였던 욥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됩니다. 그토록 행복하게 살던 욥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욥 자신도, 종들도, 친구들도, 마을 사람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사에는 때가 있고 그 목적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때도 많습니다. 전도서 3장 2~8절을 보면 여러 가지 때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죽일 때와 살릴 때, 허물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통곡할 때와 기뻐 춤출 때, 돌을 흩어버릴 때와 모아들일 때, 껴안을 때와 껴안는 것을 삼갈 때, 찾아 나설 때와 포기할 때, 간직할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말하지 않을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을 치를 때와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전도서에서는 다양한 때를 이야기하다가 때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전 3:11, 새)
욥기 1~2장에 나오는 욥의 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때이고, 병든 때이고, 우는 때이고, 슬픔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직면합니다.
2. 인생의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라
모두 다 잃어버린 고통 중에도 욥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는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0-22절)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 보여준 욥의 이러한 고백은 정말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하나님이 거두실 수도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면 재앙도 주실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합니다. 솔직히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당한 이 극심한 고통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 후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이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고 더욱 자랑스러워하시자, 사탄은 욥의 몸을 치시면 분명히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4-5). 이전에는 소유를 치시면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그의 몸을 치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슬쩍 말을 바꿉니다. 우리가 한 말을 슬쩍 바꾸면 그것은 사탄을 닮는 것임을 알고 말을 바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해보라 하셨을 때, 사탄이 가서 욥을 치고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나게 합니다. 그런데 이때 욥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준 것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 아내의 말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고 또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그의 아내가 와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이전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단순히 욥의 아내가 악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그의 아내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욥만 고통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도 똑같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 역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재산을 잃어버린 것도 괴롭지만, 자기가 낳은 자식 열 명이 같은 날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들을 직접 낳은 어머니로서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런 것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고통이 큽니다.
게다가 그렇게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남편이 기와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으니까, 너무 기가 막혀서 원망과 불평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남편에 대한 독설이라기보다는 처참한 상황에서 나온 마음속 깊은 곳의 절규입니다. 이때 욥이 반응하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 2:10)
욥은 이때 자기 아내가 하는 말을 잘 경청하면서, 아내의 아픔을 느낀 겁니다. ‘얼마나 힘들면 저런 말을 할까?’ 그러니까 욥의 아내는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힘들지 마음의 안타까움과 긍휼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잘 보십시오. ‘당신은 참 어리석은 여자다. 참 바보 같네.’라고 하지 않고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라고 합니다. ‘당신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당신이 한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내 자체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어리석은 말을 한다고, 아내의 인격과 아내가 한 말을 구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대화의 기술입니다. 상대방이 한 말과 그 사람을 구분해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맞지 않은 말을 했다고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식으로 봐준다면 아주 화목해질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게 쉽지 않아서 그렇지, 할 수 있다면 아주 좋아집니다.
또한 그의 지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내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아내의 잘못된 생각, 특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었습니다. 그냥 들어주고 오케이만 한 게 아니라, 틀린 것을 바로잡아주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통 중에서 욥이 보여준 행동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욥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귀한 성품을 드러내는데, 특히 겸손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그 동안 누리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았고,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겸손입니다. 모든 게 자기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도 아끼는 것을 잃어버리게 될 때, 특히 입술로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욥처럼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성품과 믿음을 기를 때, 욥과 같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회복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원망은 단순히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인생을 파괴하지만,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어려울수록 우리가 할 일은 욥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하는 것입니다. 힘들수록 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고 삶이 회복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통을 통과한 후에, 욥은 이전에 받았던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겪어야 했던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이 찾아옵니다. 욥이 고통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1)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은혜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아주 극적인데, 그 중에도 가장 극적인 장면은 욥이 하나님을 친히 뵙는 장면입니다. 그때 욥은 하나님을 친히 경험하고 회개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 42:5-6, 새)
우리 신앙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주님을 뵙는 것이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다윗도 똑같이 그러한 경험을 하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5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시 16:2, 5, 새)
다윗의 이 고백에서도 보듯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돈이나 어떤 물건이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고 그분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 한 분만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2) 용서의 사람이 되는 은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통의 과정을 통해 욥에게 원하신 것은 용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대개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특히 이렇게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비록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모든 감정을 다 경험했습니다. 특히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찾아와서 논쟁을 벌이며 괴로움을 더했던 친구들에 대해 분노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욥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면서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고 그에게 기도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7 주님께서는 욥에게 말씀을 마치신 다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마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지고 가서, 너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않고, 어리석게 말하였지만, 내가 그대로 갚지는 않을 것이다.’” (욥 42:7-8, 새)
이 말씀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라는 말씀도 됩니다. 그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욥이 주님께,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셨는데, 욥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보다 배나 더 돌려주셨다.” (욥 42:10, 새)
이 기도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용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언제 욥에게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복을 주십니까? 욥이 “자기 친구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난 다음”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다시 주신 때는 그가 모든 고난을 잘 견뎌낸 다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을 용서하며 중보기도를 드린 다음이었습니다. 고난을 견디어냈을 때가 아니라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났을 때 주님께서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주시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 회복과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왜 그런 것입니까? 혹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하면 삶이 풀립니다. ‘왜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지 않으시고 안 풀어주시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혹시라도 내게 풀지 않은 관계, 불편한 관계, 해결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은 관계가 없는지, 특히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가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생각나게 해주신다면 빨리 용서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복의 통로를 열어놓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용서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사람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라고 하니까 ‘나는 원수가 없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무슨 철천지원수만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서운하게 한 사람, 나를 보며 째려보거나 이상하게 눈을 흘기는 사람, 가시 있는 말을 잘하는 사람, 차갑게 대하는 사람, 인사를 잘 안 하는 사람, 내가 인사해도 안 받는 사람, 불친절한 사람을 다 포함하는 겁니다.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보통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그 사람들에 대해 다른 데 가서 험담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는 게 용서입니다.
용서의 힘은 위대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때, 인간의 상처는 치유됩니다. 그런데 치유의 대상은 자기가 용서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치유 받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3) 회복의 기쁨을 누리는 은혜
욥이 모든 고난을 견뎌내고 자신을 괴롭힌 친구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을 때 그는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고 두 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회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관계의 회복입니다. 자기를 몰아붙였던 세 친구와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와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산을 갑절로 늘려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자녀 열 명을 다시 주셨습니다. 물론 잃어버린 열 명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 이 자녀들을 낳은 겁니까? 바로 자신의 아내입니다. 그러니까 한때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던 그의 아내였는데, 그 아내와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사실 욥의 아내도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긴 나날 동안 욥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 욥의 부드러운 질책을 들은 후 그의 아내가 회개한 겁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함께 오랜 시간을 견디어낸 겁니다.
인내하고 용서할 때 관계의 회복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풍성함이 뒤따라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비극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시는 분, 그리고 인생을 역전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로부터 약 2천 년 후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쓸 때 그 많은 믿음의 인물들 중에 욥을 예로 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 5:11)
욥의 결말을 보면서 우리도 인내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다리기를 배웁니다. 그럴 때 욥과 같은 역사가 우리 모두의 삶에도 동일하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