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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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5일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2 ✦
“평안의 비결을 배우라”
(빌립보서 4장 1~13절)
[들어가는 말]
21세기 들어 사람들의 삶이 더 편안해졌을 수는 있지만 평안은 찾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평안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안을 찾아보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술에 매달리고, 어떤 사람들은 마약에 매달립니다. 인기를 끌면 해결될까 해서 대중의 인기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돈을 마음대로 쓰면 평안할 것 같아서 돈을 많이 벌어 그렇게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방법도 써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게다가 돈은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큰 근심을 줍니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평안한 사람들이 별로 없고 다들 불안해합니다. ‘혹시 나도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게 아닐까?’ ‘혹시 걸려서 죽는 건 아닐까?’ 그래서 밖에 나가기도 무서워하고, 혹시 사람을 마주치게 되면 ‘저 사람에게 바이러스가 있는 게 아닌가?’ 하며 겁이 나서 피하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도 문제이지만,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지나친 불안과 염려가 더 큰 문제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든지 아니면 그냥 있든지, 바이러스가 있는 현실은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지나치게 불안해하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평안의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함께 그것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평안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
여기 보면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9절에는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평강(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관계없이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이며, 이 평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장벽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장벽을 무너뜨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약속하신 우리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수많은 천군천사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온갖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평안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조금 전에 읽은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하셨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사실은 불과 그 몇 시간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다음 날 그 비참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것을 모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연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스런 십자가 처형 전날까지도 예수님은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평안을 유산으로 남겨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만 평안을 받고 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뻥 뚫린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은 너무나 커서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평안을 주십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사 26:3)
여기서 “심지가 견고한 자”라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에게 머물러 있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늘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머물러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십니다. 평강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공동체의 평안을 지켜라 (1~3절)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때로는 삶 속에서 평안이 깨어집니다. 불안해하기도 하고 걱정과 염려로 가득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지금 같은 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평안을 회복하고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1절)
이 표현을 보십시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집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하여 믿게 된 루디아와 빌립보 감옥의 간수(아마도 귀신 들렸다 나음을 입은 여종도) 등이 주축이 되어 세워진 교회였으며(행 16장), 아주 모범적이고 사랑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열심히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할 때 계속 기도와 헌금으로 도왔고,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도 계속 사랑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2-3절)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름은 모두 여자 이름이며, 특히 ‘순두게’라는 이름이 한국말로는 약간 이상하게(순두부와 비슷해서)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신티케(Syntiche)’라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학자들은 이들이 빌립보 교회의 영향력 있는 여인들(아마도 여집사)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였던 두 여인 때문에 빌립보 교회는 평안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분쟁과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여,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며 화해하라고 권면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 로마 감옥에서 들었을 때 그들에게 분노하며 야단치기가 쉬웠을 텐데, 바울은 오히려 두 여인들에게는 서로 화해하라고 하고, 교회는 그들을 도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름도 생명책에 있기 때문입니다(3).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 각자가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가 평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교회의 평화가 깨어지면 교인들의 마음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오래 전 섬기던 교회가 갈라져서 다투며 분열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보면 교인들이 교회 예배에 와도 얼굴은 항상 굳어 있었고 어두웠고 성이 나 있었습니다. 조금만 무슨 소리를 들으면 별 것 아닌데도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며 그렇게 하도록 힘쓸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각자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른들이 갈라져서 다투고 분열하는 교회에서 자란 자녀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되고, 심지어 이중적인 어른들의 모습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간의 평화가 깨지면 가족들, 특히 자녀들이 상처를 받고 굉장히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도 평화를 누립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깨면서 자기 혼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 이것들을 생각하고 행하라 (8~9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8-9절)
공동체의 평안과 개인의 평안 사이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여기 8-9절의 내용은 두 가지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것들을 생각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행하라”입니다. 생각이 바로 서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실천을 바로 해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명예로운) 것 등이 바로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기림이 있는(칭찬할 만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마음이 꽉 차게 되면 평안해진다는 것입니다.
참된 것 대신 거짓된 것이 들어 있으면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평안한 사람을 보셨습니까? 들킬까 봐 항상 불안합니다. 그래서 사기를 친 사람이 경찰에게 잡힐 때 ‘이제야 푹 잘 수 있겠다.’라고 합니다.
또한 경건한 것 대신 불경건한 것이 들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옳은 것 대신 틀린 것이 들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정결한 것 대신 더러운 것이 들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사랑받을 만한 것 대신 미움 받을 만한 것이 들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것 대신 비난받을 만한 것이 들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스승이 아주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은 젊은 청년들이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온갖 유혹을 다 받아서 평안할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늘 평안해 보이시는데, 혹시 선생님은 우리가 받는 유혹들을 받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이 받는 유혹들을 다 받고 있습니다. 그 유혹들이 찾아와서 제 마음의 문에 노크를 합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는 빈 방 없음!’”
안 좋은 것을 자꾸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면 나쁜 것이 들어올 방이 없어집니다. 마음속에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이 가득 들어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들을 생각하라고 하고, 또한 그것들을 행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모습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8절에 나와 있는 것들이 다 바울이 살았던 그대로였습니다. 자기는 안 하면서 남들에게 하라고 하면 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았던 것을 다 보고 들어 알고 있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자기가 한 대로 그들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억지로 하도록 짐을 지우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실천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말씀대로 살 때 옵니다.
4. 바른 관계를 가지라 (4~7절, 11~13절)
평안은 바른 관계를 가질 때 옵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자신과의 관계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냥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특히 지금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 어떻게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마음속에 기쁨이 없지만 억지로라도 얼굴에 미소를 지으라는 것입니까?
그런데 4절을 잘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직접 체험하면서 배운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울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큰 기쁨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은 4절 맨 앞에 있습니다. “주 안에서.” 이 “주 안에서”가 어떤 의미입니까? 바울은 이미 1장에서 그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2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22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빌 1:20-24, 새)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함을 받으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이고,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이고,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이고, 사는 이유도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는 것이 유익한 것은, 죽으면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는 말로, ‘살자니 괴롭고, 죽자니 두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살자니 좋고, 죽자니 그것도 좋다.’라고 합니다. 사는 것도 좋고, 죽는 것도 좋다는 겁니다. 이 두 마음이 둘 다 너무 강해서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죽어서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좋지만, 성도들을 위해서는 살아서 돕는 것도 좋으니, 사나 죽으나 다 좋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주 안에서’ 사는 모습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1-12절)
이 말씀을 보면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이 ‘배웠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상황 속에서 배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환경이 변하면 기쁨도 변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기분이 엄청 좋다가도, 밖에 나가서 누구와 조금만 다투게 되면 금방 평안이 사라집니다. 일이 잘 풀리고, 자녀도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실컷 하면, 기분도 좋고 마음이 너무 편안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안 좋아지면 금방 기쁨을 상실하고 불편해집니다. 누가 말 한마디만 툭 던져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져버립니다. 환경 때문에 누리던 것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라 그냥 ‘편안함’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기며 ‘나와라, 뚝딱’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처지 가운데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배고픈 환경 속에서도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느끼고, 배부르고 풍족한 상황 속에서도 주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멸시를 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존경을 받는 환경 속에서도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내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데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긍정적 사고방식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환경과 처지와 형편에서 견딜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비천하든지 풍부하든지 어떤 상황이든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서, 로마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하고 외칩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1)
불과 몇 시간 후면 그 끔찍한 십자가에서 달려 처형당할 시점인데, 어떻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 죽음을 앞두신 주님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기쁨이 바울도 맛보았던 기쁨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맛본 그 기쁨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또 우리에게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 타인과의 관계에서 관용을 베풀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5절)
4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뒤, 여기서는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관용’이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너그럽고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슬쩍 넘어가주는 것이 관용은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동시에 너그럽고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본성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가 잘못하면 아주 관대하고, 남이 잘못하면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며 비난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본성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있습니다. 예, ‘내로남불’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남을 관용하기가 참 힘듭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안 좋은 일을 당하면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첫째는 맞부딪쳐서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망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할 때 맞부딪쳐서 싸우는 것은 ‘분노’로 나타납니다. 반면, 도망치는 것은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 분노나 두려움이 아니라 ‘관용’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평안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심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염려하지 말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6-7절)
염려와 걱정이 많아서 기도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결하라고 합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려면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늘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아뢰면 평안을 얻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면 감사가 나오게 되고, 감사가 나오게 되면 평안해집니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일 수 있지만,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키다’라는 말은 보초를 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보초를 서주시면서, 불안이 오면 쫓아내시고 염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도 염려가 계속된다면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기도뿐입니다. 기도는 간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로서, 찬양도 있고 감사도 있고 회개도 있고 물론 간구도 있고 또 중보도 있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 기도를 하면 놀랍게도 염려가 사라집니다. 참 신기합니다.
우리 삶에 문제들이 닥칠 때, 시각을 45도 올리라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문제들을 수평적으로만 보면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각을 45도 올리면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게 되고, 문제는 가끔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염려와 근심이 많을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감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가 나오면 염려는 사라지게 됩니다.
한 도시의 사방 일곱 블록을 지상 30미터(약 100피트)까지 채우는 안개는 고작 물 반 컵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험과 염려가 바로 안개와 같습니다. 엄청난 것 같지만 사실은 물 반 컵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빛이 오면 모든 인생의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마음에 보초를 서주시면서, 불안이 오면 쫓아내시고 염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시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지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서 누리며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