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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3일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1 ✦
“절망의 끝에서 소망이 시작된다”
(룻기 1장 19~22절)
1. 절망은 소망의 전주곡임을 기억하라
인간은 소망으로 사는 존재이기에,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절망입니다. 소망이 사라지고 절망이 찾아올 때, 그 고통은 정말 크게 느껴집니다.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페라에서 막이 오르기 전에 연주하는 곡을 ‘전주곡’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절망은 소망의 전주곡인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절망을 이기고 소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슬픔과 절망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과 소망이 오기 전에 울리는 전주곡입니다.
룻기는 절망의 구덩이에 빠졌던 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인생은 다 끝난 것 같았던 시련에서 다시 일어난 나오미와 룻(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절망은 두려움을 가져오는데, 나오미와 룻에게 찾아온 절망과 두려움은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나오미가 경험했던 슬픔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베들레헴 사람이던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흉년을 피해서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갑니다(1-2). 이 부부의 이름은 굉장히 좋습니다. 엘리멕렉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뜻이고, 나오미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아들들의 이름은 좋지 않습니다.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고, 기룐은 ‘황폐’라는 뜻입니다.
모압에서 아들들이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하는데, 그들의 이름은 룻과 오르바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10년쯤 후에는 두 아들도 죽습니다(3-5). 고대에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노동력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고, 그 집안이 무너졌다는 의미이며, 보호막이 다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속적으로 잃고 비참한 형편에 처하게 된 나오미는 깊이 슬퍼하며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나오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남편이 죽은 것도 슬픈데 두 아들도 다 죽었습니다. 이제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서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고백한 말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0-21절)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말고 ‘쓰다’라는 뜻의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더 이상 기쁜 인생이 아니라 쓰디쓴 인생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나오미의 절망스런 인생을 역전시켜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모압 여인인 며느리 룻입니다. 룻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나오미의 인생도 역전됩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쓴 인생이 단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룻기는 이렇게 슬픔을 이겨낸 아름다운 이야기이며, 절망이 소망의 전주곡이었던 변장된 축복의 이야기입니다. 룻기를 읽으면 소망이 솟아오르고 참된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나오미와 룻은 어떻게 해서 자신들의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까?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토록 절망스러웠던 인생이 복된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까?
2.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려면 애통하라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에게 찾아온 것은 큰 슬픔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이지만,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첫 단계가 바로 애통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남편 엘리멕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잃은 후 어느 날 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6-7절)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보시고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끝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8-10절)
처음에 나오미는 분명히 두 며느리와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났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며느리들에게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는 두 며느리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타국인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는 것보다 자기들의 고향에서 새 출발을 하도록 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와 동시에, 막상 길을 떠나고 보니까 모압 여인인 며느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어떤 비난과 수모를 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 여인이 함께 부둥켜안은 채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하고,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하며 웁니다. 그런데 이러한 울음을 통해 나오미는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내려온 자기 가족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며느리들에게 돌아갈 것을 재차 강권하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3절)
나오미는 자신의 고통이 주님의 손에서 왔음을 인정하며 고백합니다.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 안에 회개가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며느리들도 같이 시련을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처럼 애통할 때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영혼이 맑아집니다. 애통할 때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되며, 회개는 우리를 겸손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애통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욕망을 제거해줍니다. 사실 불순물이 제거되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름답습니다. 애통하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눈물 후에는 평안을 경험하게 됩니다. 애통 후에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고 신비로운 소망으로 넘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살면서 아픔과 고통을 당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으로 슬퍼하는 게 아니라, 소망 중에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피 우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슬픔의 눈물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통해 세상을 볼 때 다르게 보입니다. 눈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비판이 아닌 긍휼과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애통하는 슬픔을 통해 애통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애통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조금만 있으면 슬퍼 우는 때가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절망이 끝나고 곧 소망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3.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려면 좋은 선택을 하라
그런데 절망이 자동으로 소망이 되는 게 아니라,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려면 좋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닥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해석과 반응입니다. 똑같은 일을 놓고도 이 사람은 이렇게 해석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석합니다. 결국 올바른 해석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현실과 고통스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세계가 힘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며칠 전 경찰에 의해 흑인 남성이 죽음으로 시위기 벌어지고 폭동과 약탈까지 벌어지는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내가 바꿀 수 있습니까?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선택이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좋은 선택을 하게 되면 절망의 상황이 소망의 상황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합니다. 선택권을 줍니다. 사실은 권면을 합니다.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합니다. 그때 오르바는 본래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울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르바는 결코 나쁜 여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워낙 강권하니까 결국 돌아가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갑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4절)
‘붙좇았다’는 특별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한 순간의 선택이 두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가전제품 광고가 오래 전에 있었는데, 이것은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오르바는 나쁜 선택을 했고, 룻은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이날 이후 오르바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룻은 성경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 이야기가 아름답게 전해지며, 심지어 이방 여인으로서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지 않습니까?
좋은 선택을 통해 룻의 인생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뀝니다. 룻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말론보다 나중에 훨씬 더 훌륭한 남편인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아들도 낳게 됩니다. 룻이 낳은 아기가 오벳인데, 오벳의 아들이 이새이고 이새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나중에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도 오십니다. 그래서 이방 여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룻은 어떻게 그런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좋은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룻과 같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선택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으라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만 해도 선택해야 할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로서리 스토어에 가도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고민하게 됩니다. 같은 사과도 종류가 많고, 물을 사려고 해도 종류가 많습니다.
그런데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영원히 남습니다. 나쁜 결정을 하면 나중에 만회할 수도 있지만 결과는 계속 남을 수 있습니다.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 좋은 책, 좋은 스승, 좋은 교회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원히 거할 곳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은 ‘일생’이 아니라 ‘삼생’이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어머니 뱃속인데 거기서 잘 자라야 이 세상에 태어나서 건강합니다. 또 지금 2생에서 열심히 잘 살아야 3생에 가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삶의 다음 삶(내세), 천국에서의 삶, 영원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거할 곳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선택한 결과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가는 길을 정하는 것인데, 한 길을 정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러 길들 중 한 길을 정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길들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14절에서 룻이 나오미를 ‘붙좇았다’고 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다바크’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붙잡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룻이 나오미를 붙잡고 따를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룻의 선택이 영적인 선택, 신앙적인 결단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기로 선택한 것은 단순히 나오미 개인을 따라가기로 선택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과 신들을 포기하는 신앙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가짜 신 우상이 아니라,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참 신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는 믿음의 백성의 일원이 되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2) 영원의 시각을 가지라
좋은 선택은 믿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고, 좋은 선택을 내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영원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넓은 시야가 필요합니다. 당장은 쉬워 보이는 길이 좋은 길이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당장은 힘이 들어도 어려운 길, 좁은 길을 선택함으로 영원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룻은 영원의 시각으로 이 상황을 보았습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5-17절)
오르바는 단순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길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알고 있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룻은 단순히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서 나오미를 따라간 게 아니라, 영적인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유익을 위해 편안하고 익숙한 길 하지만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영원의 시각을 가지고 당장은 힘든 길이지만 옳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룻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손 가운데 예수님도 오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3) 하나님의 헤세드를 갈망하며 헤세드를 베풀라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사랑, 은혜, 자비, 인애’(steadfast love)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의상 그대로 ‘헤세드’라고 사용하겠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알았던 여인이고, 시어머니를 따라 헤세드 입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함께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 전 큐티를 했던 신명기 23장에서 모세가 전해준 아주 결정적인 명령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 23:3)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속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발람이라는 가짜 선지자(무당)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악하게 행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올 수 없도록 금지 당했습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민족이고 하나님의 구원에서 차단된 민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 사람인 룻은 지금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럼 하나님이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으니가 옛날에는 모압 사람들이 못 들어온다고 하셨다가 이제는 들어올 수 있다고 말을 바꾸신 겁니까? 아니면 룻은 착하니까 이런 착한 사람은 이 명령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2장 1-2절)
여기서 보아스를 가리켜 “유력한 자”라고 부르는데, 룻의 죽은 남편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지만 보아스는 ‘빠름, 쾌속’이라는 뜻입니다. 그 뜻대로 그는 일처리를 아주 빠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용사’라는 뜻입니다. 그는 ‘은혜의 용사’입니다. 2절에 ‘은혜’가 나오는데, 은혜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3장 11절)
이것은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서는 룻을 가리켜 ‘현숙한 여자’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도 똑같이 ‘유력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룻도 역시 ‘용사’라는 말입니다. 보아스도 용사인데 룻도 용사입니다.
다시 말해, 룻기에서는 보아스를 가리켜 ‘은혜의 용사’ 또는 ‘언약의 용사’라고 부르고, 룻도 역시 ‘언약의 용사’, ‘은혜의 용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비록 모압 사람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룻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룻이 ‘언약의 용사’가 되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오미가 ‘너희들은 친정으로 돌아가라.’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면 거기는 편안하면서도 자기를 보호해주는 ‘자기 편’인 곳입니다. 그래서 안전하게 안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것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룻이 이스라엘에 와서 당했을 고통을 상상해보십시오. 성경에서 일일이 다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렇지, 굉장히 고생을 했습니다. 일단 언어와 문화가 다릅니다. 그래서 겪어야 했을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서러움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몸도 힘들지만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도 국제적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꽤 많아졌습니다.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동남아시아 출신의 한 젊은 여성이 한국의 어느 지방 도시에 시집을 왔다가 남편이 뜻하지 않게 일찍 죽어서 시어머니와 같이 사는데, 시어머니가 늙었으니까 한국인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아무 일이나 하며 막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저기 공사 현장에 가서 잡일을 하고, 식당 같은 데서 허드렛일을 해가며 돈을 벌려 애를 씁니다.
한국에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따뜻하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타 인종에 대해, 그 중에서도 동남아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코 친절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 티브이에 실험을 한 것이 나왔습니다. 분주한 거리에서 백인 여성이 사과 봉지를 들고 있다 쏟았을 때 사람들이 다 와서 도와주었습니다. 또 건장한 흑인 남성이 그렇게 하니까 역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다 도와줍니다. 서구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볼품없는 한 동남아 남자가 쏟으니까 아무도 안 도와줍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야, 사람들이 왜 저러나?’라고 했지만 사실 저도 거기 지나갔으면 장담을 못 합니다.
한국사회에 은근히 인종차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에서 우리가 인종차별을 당한다고 하지만, 사실 한국에서도 타인종 특히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합니까? 게다가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얼마나 구박하고 멸시하고 조롱합니까? 또 비쩍 마르고 키도 작고 힘도 없어 보이는데 누가 쉽게 일감을 주겠습니까?
룻의 상황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얼마나 밤새 울고 또 울만한 그런 상황입니까? 그러나 룻은 그 모든 것을 다 이겨내고 인생의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그래서 룻은 모든 차별과 눈총과 텃세를 다 이겨낸 용사, 즉 ‘언약의 용사’이고 ‘은혜의 용사’인 것입니다. 룻기는 룻이 단순히 착한 효녀 며느리인 것이 아니라, 이 언약 공동체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험한 영적 싸움을 이겨낸 언약의 용사, 은혜의 용사, 믿음의 용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룻이 비록 인종적으로 모압 사람인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룻은 모압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룻은 모압 사람이 아니라, 언약의 용사로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된 이스라엘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성경의 관점이며, 이것을 정확히 간파한 사도 바울이 나중에 로마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롬 2:28-29, 새)
이것은 룻에게 딱 맞는 말씀이 아닙니까? 룻이 유대 사람이라는 겁니다. 참 할례를 받은 유대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는 사람, 즉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는 겁니다. 모압 여인 룻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하길 간망했습니다. 원래 모압 사람은 안 되는데도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 백성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룻을 기뻐하신 하나님은 그녀에게 헤세드를 베푸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헤세드를 구하는 가운데 좋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실수로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헤세드가 임하면 실수도 선으로 바꾸어주셔서 인생을 다시 써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믿음으로 어려운 선택을 한 룻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룻에게 그 후 보아스의 헤세드를 입게 해주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당신의 엄청난 헤세드를 베푸셔서 룻이 다윗 왕 뿐 아니라 메시야의 조상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남편이 죽은 뒤 우상숭배로 돌아갈 수도 있던 상황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하며 시어머니와 함께 이스라엘 공동체로 들어온 룻, 믿음의 싸움과 영적 싸움을 이긴 룻에게 하나님은 보아스를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립니다. 닫힌 문만 보고 있으면 바로 옆에 새로 문이 열려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일로 너무 낙담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대하며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헤세드(인애)를 구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룻이 자기도 어렵지만 어머니를 따라가고 어머니에게 인애를 베푼 것처럼,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주변 이웃들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절망의 끝에서 소망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