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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_sye0BOrUNQ?t=1508

 

 

2020527일 수요예배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0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평강

(이사야 261~4)

 

1.   인간이 겪는 불안과 두려움

 

코로나 사태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시대는 한 마디로 불안의 시대입니다. 이전 시대보다 주변 여건과 환경이 훨씬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전 그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바로 지금 이 시대입니다.

 

지금은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때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많은 염려와 불안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안이나 염려나 두려움은 단순히 지금 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항상 그것은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언제나 불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7:14)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형통과 곤고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형통할 것인지, 언제 곤고함이 올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도록(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도록) 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미래를 놓고 불안을 느낍니다.

 

사실 인간의 걱정과 불안의 시작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불안한 요소가 있는 것은 단지 지금 이 시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나 심리적인 원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서, 사실은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것을 의지해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workaholic). 술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도박이나 음식이나 성 등은 모두 불안을 잊어버리기 위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불안은 환경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주변 환경이 전혀 불안을 주지 않을 정도로 평안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어느 대기업의 대표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사업이 안 될 때는 안 돼서 불안하고, 잘될 때는 너무 잘돼서 불안하다.”

 

제가 오래 전 시애틀에서 청소년 사역(Youth Ministry)을 할 때 선생님 한 분과 같이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데리고 캠핑을 간 적이 있습니다. 시애틀에서 동쪽에 있는 산을 넘어 위치한 Lake Chelan에 갔을 때 water bike를 탔습니다. 그때 저 혼자 저 멀리 조용한 데로 갔더니 너무 조용하고 물도 잔잔하고 고요하고 평안했습니다. 그런데 앞뒤좌우를 둘러봐도 딱 저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바다가 아니라 호수이고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혼자 떠 있으니까 너무 고요한데도 이상한 불안함이 올라왔습니다. ‘혼자 있다가 뭔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시끄러워도 문제이고 고요해도 문제인, 언제나 불안함을 느끼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전에는 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며 헤매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자기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살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불안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불안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을 바꾸면 그래서 성공하면 불안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그런 불안 요소를 없애는 데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의 환경은 정말로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환경과 여건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오히려 인간은 더 불안해하며 더 큰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마치 제가 조용한 호수 가운데 혼자 가만히 떠 있었을 때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 것과 같이, 우리는 고요하고 평안한 세상 속에서도 이상한 불안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지금 이 21세기의 놀라운 과학기술문명을 누리는 우리가 배우는 현실입니다. 이상하게도 외부적인 조건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인간의 마음은 더 약해지고, 또 인간의 머리는 편해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자꾸 흘러갑니다.

 

 

2.   진정한 평안은 어디서 오는가?

 

그렇다면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들어온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무엇보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1-2)

 

여러 삶의 복잡한 문제에서 구원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벽과 외벽(방어벽)이 되어 우리를 구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할 수 있습니다.

 

평안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음을 편하게 갖자’, ‘겁내지 말고 떨지 말자고 아무리 자신에게 타이르며 평안해지려고 노력해 봐도, 인간 스스로 평안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4:6-7, )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비밀입니다. 상황은 똑같습니다. 변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1:20, )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전에 하나님과 원수로 살았던 우리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며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또 영원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얻고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환경을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선물이 있을 때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른 데서 얻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될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종종 가출하거나 싸우고 집을 나가는 자식이 있습니다. 부모를 떠난 자식이 진정한 평안을 얻으려면, 부모 앞에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는 길 외에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참 평안을 누리려면, 창조주께로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떠난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이듯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산 그 삶 자체가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관계를 회복할 때 평안이 임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놀라운 화해와 평안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엄청난 평안을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인이었던 신분이 의인으로 바뀝니다. 또 하나님과 원수였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뀝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래서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과 함께 영적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이 강물처럼 자신의 삶으로 흘러 들어와 넘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이 불안함이 없어지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불안함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으니까 아무리 부자라도 계속 돈을 벌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사람의 생각에는 저 정도로 돈을 벌었으면 은행에 넣어 놓고 투자를 한 것에서 나오는 것으로만 살아도 평생 먹고 살 것 같은데 만족을 못 합니다. 투자가는 계속 투자하고 사업가는 계속 사업해서 돈을 더 벌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안한 겁니다. 사실 많으면 감사하다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이번에 정부 보조금을 많이들 받으셨을 줄 압니다. 일인당 $1,200을 주는데 없던 돈 $1,200이 생겼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만큼 더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쓰면서 이게 얼마 안 남았네하며 불안해하고 초조해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참 이상합니다. 이럴 때 감사하기보다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평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은 평안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평안하지 않을 길을 선택하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은 아예 그 평안을 알 수가 없고, 믿는 사람은 가끔 그것을 못 누릴 때가 있지만 그 길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오래 전 어디서 한 그림 대회가 있었는데 그 주제가 마음의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은빛을 발하며 잔잔하게 뻗어있는 맑은 호수를 그렸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들도 비슷하게 아름다운 장면, 평화로운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은 다른 그림들과 아주 대조되는 엉뚱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번개가 번쩍이는 것, 그리고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치는 장면을 그린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은 이게 무슨 평안인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런데 그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바위틈에 새가 둥지를 틀고서 어미 새가 새끼 새들을 날개 안에 품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평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아무런 문제없이 잔잔하고 아름답기만 한 호수 같은 평안이 아닙니다. 사실 잔잔한 것은 바람이 불지 않고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지,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비가 쏟아지면 흙탕물이 됩니다. 위험한 요소가 얼마든지 있지만 환경 때문에 잠시 고요한 것뿐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것을 참 평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요란하고 다 부서질 것 같은 분위기 속 그 한가운데서 누리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이 떠날 날이 없는 환경이나 마음을 찢어놓고 상처를 주는 아픔들이 가득한 상황 속에서도, 바위틈 어미의 날개 품에 안겨 있는 새끼 새들이 아무 걱정 없이 평안을 누리는 장면이야말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안,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을 누린 대표적인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37-39)

 

어떻게 그 심한 파도와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무실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이 평안이 없었지만 예수님께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4:27)

 

이 말씀을 하시던 때가 언제입니까? 요한복음 13장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세족식을 통해 제자들의 발도 씻겨주셨는데, 그 후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셨을 때 가룟 유다가 나가버린 그 밤입니다. 그러니까 몇 시간 후면 체포되실 것이고, 모진 고난을 당하신 후에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시기 바로 직전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자기도 벌벌 떨면서 평안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평안을 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바로 이러한 평안의 샘이 솟아오르게 해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이 참 평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3.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길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3)

 

여기서 심지가 견고한 자마음의 뿌리가 견고한 자,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믿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을 평강하고 평강하도록지켜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이전에 쓰던 개역한글 성경이 더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는 평강에 평강을 더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평강을 두 번 강조하는데, 일시적이거나 불완전한 평안이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십니까? 그 다음 단어가 중요합니다. “지키시리니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이는입니다.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심지가 견고한 자를 주께서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시는 이유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까?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4)

 

우리가 영원히 신뢰할 대상인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조금 신뢰하고 잠깐 반석이 되어 주시는 게 아니라 영원히 신뢰할 대상이시며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늘 바라보며 한결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심지가 견고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평안을 체험하며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여러 성품들 중에 여기서는 하나님을 왜 영원한 반석이시라고 할까요? 고대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가장 흔들림이 없고 든든한 것을 큰 바위(반석)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수시로 변하지만, 바위만은 전혀 동요가 없고 가장 믿음직해 보였던 것입니다.

 

특히 이집트에서 나와 모래와 바위뿐인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방황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바위가 더더욱 그러한 존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저 든든한 반석과 같이 변함이 없으시고 의지할 만한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이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완전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으면서도 심지가 견고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지 못해서 하나님의 평안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채 사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으로서 정말 비극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 주어져 있는데 누리지 못하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하나님을 믿는 신자이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단지 나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고통을 덜어주는 분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시고 저도 믿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 삶의 전 영역을 다스리시는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천국에 가게 해주시는 분, 또 가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해결사 정도로만 생각하니까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1년 여 전에 아주 추운 겨울이었는데, 저희 집 차고 문(garage door)이 고장 나서 바꿔야 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운데 닫히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업체를 찾아서 전화를 걸어 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약속한 날 정해진 시간에 직원이 와서 보고 차고 문을 새로 갈아주었습니다. 그 전에 디파짓을 조금 하고 다 마친 다음에는 잔금을 지불했으며, 그 직원과 기분 좋게 good bye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그 후 저희 가정에서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우리가 그 직원의 의견은 전혀 물어보지 않습니다. 그는 저희 집에서 저희와 같이 살지도 않습니다. 그냥 와서 자기 할 일을 한 다음 보수를 받고 떠납니다. 그것이 그의 일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것과 아주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삶에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평소에는 전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습니다. 같이 살지도 않습니다.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도 않습니다. 그냥 내가 알아서 살다가 문제가 생기면 전화를 겁니다. ‘언제 와 주실 수 있습니까?’

 

문제가 해결되면, 마치 수리를 끝낸 서비스 직원에게 대금을 치르고 보내듯이, 적당한 헌금이나 봉사를 통해 내가 내 할 일을 했다.’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살지 않으시고, 나의 결정에 전혀 하나님의 의견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냥 필요할 때만 불러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그런 사람은 심지가 견고한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시는 것을 전혀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내 삶을 하나님께 전부 내어드리는 결단이 없이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 노릇을 하면 좋을 것 같지만, 또 실제로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뭐가 따라오는지 아십니까? 평생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이 따라다닙니다. 거기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계속 그것을 갖고 살아갑니다. 일은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높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습니다.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과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해방되지 못하고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엄청나게 수지맞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길입니다. 최고의 길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을 신뢰하는 삶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심지가 견고한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한 반석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반석으로서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성품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쓴 책이 요한일서입니다. 원래 사도 요한은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형 야고보와 함께 너희는 보아너게(우레의 자식)라고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을 녀석들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실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요한이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일 4:18, )

 

어떻게 보면 사도 요한이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자기가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 왜 두려워했는가 하면 주님을 잘 몰랐다는 겁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형제자매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하고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완전한 사랑 안에 거하면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한다는 말은 뭡니까? 사랑이 거기에 없다는 겁니다.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왜 계속 강조합니까? 왜 예수님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살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이 있으면 두려움이 내쫓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면서 마음의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느껴질 때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외아들까지도 내어주셨던 그 사랑을 확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진정한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내쫓깁니다. 사랑이 있을 때 두려움은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두려움이 있습니다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또 사랑을 받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래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십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온 우주에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십니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거기에 나 한 명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영원한 반석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 마음에는 상황을 뛰어넘는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혹시 지금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자녀로 인해 힘든 것이 있습니까? 부모님 때문에 힘듭니까? 시부모님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경제적인 고민이 있습니까? 미래가 보이지 않아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까? 신분 문제나 진로 문제 때문에 고민합니까? 또 어떤 관계의 문제가 있습니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나 한 명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반석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이 어둡고, 원하는 대로 되어 가지 않더라도, 상황이 계속 답답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깊은 바다나 높은 산이 막고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들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 아니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시며 또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조금 사랑하고 마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랑하십니다그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영원히 신뢰하며 나아가는 심지가 견고한 자로서, 어떤 상황이든지 평강에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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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드러나는 참된 믿음 (욥 1:13-22)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3 (6/17/20) kpccoh 2020.06.18 1609
254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7-10)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2 (6/10/20) kpccoh 2020.06.11 1093
253 절망의 끝에서 소망이 시작된다 ( 룻 1:19-22)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1 (6/03/20) kpccoh 2020.06.04 2756
»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주시는 평강 (사 26:1-4)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9 (5/27/20) kpccoh 2020.05.28 2914
251 고난 받는 자녀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습 3:14-1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9 (5/20/20) kpccoh 2020.05.21 1804
250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 (히 11:5-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8 (5/13/20) kpccoh 2020.05.14 2430
249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 40:27-31)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7 (5/06/20) kpccoh 2020.05.07 3346
248 문제로 인하여 앞길이 안 보일 때 기억할 것 (엡 1:15-23)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6 (4/29/20) admin_p 2020.04.30 898
247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다 (시 119:65-75)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5 (4/22/20) admin_p 2020.04.23 5210
246 힘든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비결 (고후 4:7-18)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4 (4/15/20) kpccoh 2020.04.16 3986
245 성경의 예언을 이룬 예수님의 죽음 (요 19:23-30) -성금요일예배 (4/10/20) kpccoh 2020.04.11 1581
244 힘든 상황에서도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 (신 11:8-1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3 (4/1/20) admin_p 2020.04.02 2177
243 평안의 비결을 배우라 (빌 4:1-13)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2 (3/25/20) admin_p 2020.03.26 1825
242 불안하고 두려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라 (출 15:22-27)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 (3/18/20) admin_p 2020.03.24 1707
241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7)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3 (3/4/20) kpccoh 2020.03.05 1580
240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눅 7:24-30)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2 (2/26/20) kpccoh 2020.02.27 1967
239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왕상 18:20-40) - <하나님의 질문에 답하라>- 11 (2/19/20) kpccoh 2020.02.20 2057
238 "하나님, 거기 계신가요?" (창 8:1-6) (2/12/20) - 조준오 목사 kpccoh 2020.02.13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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