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Q8mIoyWOTvs?t=1531
2020년 4월 15일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4 ✦
“힘든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비결”
(고린도후서 4장 7~18절)
[들어가는 말]
약간 우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새 날을 맞이하는 동시에 사실은 죽음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1초, 1초 흐를 때마다 우리의 기력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매일 소모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향해 매일 다가가고 있고, 죽음도 우리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젠가 다 죽습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예상치 못하게 세상을 떠난 분들이 많습니다.
바울이 이 고린도후서 말씀을 기록할 때는 대략 AD 55~56년경이라고 생각되는데,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때가 AD 33~34년경으로 봅니다. 그때로부터 20년 이상 흐른 때가 이 고린도후서를 쓴 때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젊은이였는데, 이제는 20여 년이 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고 50 정도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5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평균 수명에 가까운 나이였습니다.
저도 50대가 되고 보니 세월이 정말 빨리 흘러가고, 얼마나 몸이 빨리 쇠하여 가는지 실감나게 느낍니다. 우리들 중 많은 수가, 그 동안 살아온 날 수보다 앞으로 살 날 수가 더 적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몇 년 전 상점에 가서 구경하고 있는데 거기 점원이 저에게 자꾸만 “Sir, sir, sir”하는 겁니다. 그래서 ‘얘가 왜 자꾸 나 보고 sir이라고 하나?’ 하고서 화장실에 갔을 때 거울을 보니까 ‘sir이 맞구나. 아저씨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1. 날마다 죽는 삶 (16절)
바울은 이제 이렇게 중년기를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겉 사람, 즉 육신이 후패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몸만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환경도 아주 나빴습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고 많은 곳에 복음을 전했지만, 사도행전 강해 때 보았듯이, 그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사람들이 항상 복음을 받아들이고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반대하며 바울을 박해하고 죽이려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6절)
바울이 여기서 ‘겉 사람이 낡아진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 늙고 있으며 육신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16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앞에 뭔가가 있고 연결된다는 말이니까, 앞에 있는 말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있는 내용을 다 보아야 하지만, 핵심 구절인 8-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8-9절)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한다’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모든 면에서 압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밑으로 눌림을 당한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는 것은, 이쪽으로 갈 수도 없고 저쪽으로 갈 수도 없고,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그러니까 사방의 길이 모두 막혀 있는 당혹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또 ‘박해를 받는다’(9)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짐승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것처럼 뒤에서부터 추격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것은 올림픽 등을 할 때 레슬링 경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고린도에도 이스미안 제전(Isthmian Games)이라는 아주 유명하고 올림픽과 맞먹는 제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하면 고린도 성도들은 다 압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한다는 것은 레슬링 선수로부터 번쩍 들어 올려져서 내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위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고, 모든 길은 다 막혀 있고, 뒤로부터 추격을 당하고 있고, 밑에서부터 던져져 거꾸러뜨림을 당한 상황이 바로 바울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몸만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겉 사람이 낡아진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절)
요즘은 권투가 별로 인기가 없는데,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흑백 티브이로 동양 챔피언전만 해도 흥분할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홍수환 선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세계챔피언이 되었던 선수입니다.
그 후 한참을 잘 못하다가 다지 재기를 해서 파나마의 카라스키야라는 선수와 챔피언 결정전을 했는데 무려 네 번을 다운 당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규칙이 세 번 다운 당하면 그대로 경기가 끝나는 거였는데, 그때 규칙이 바뀌어서 심판이 볼 때 괜찮으면 계속 진행시키는 것으로 되는 바람에, 네 번을 다운 당하고도 다시 일어나서 오히려 KO로 이겨버렸습니다. 그래서 4전5기의 신화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갓집 친척 되는 분이었습니다.
바울도 수없이 다운을 당했습니다(knock down). 그러나 knock out(KO)되지는 않았습니다. 넘어졌는데 또 일어나고 넘어졌는데 또 일어났습니다. 그 비결이 질그릇 같이 약하고 깨지기 쉬운 자신 속에 보배가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보배가 무엇입니까?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6절)
그러니까 여기서 ‘보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또 복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어떠한 환난을 당해서 쓰러졌다가도(다운 당했다가도)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었던 것, 다시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자기는 질그릇 같이 보잘것없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 안에 엄청난 보배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그 힘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보면 바울은 조금 이상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절)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라는 것은 진짜로 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산 사람이 항상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계속해서 넘겨져 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것을 보았을 때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이 떠나 죽고 끝나는 그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으로서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을 함께 살펴보며 느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계속해서 주님을 위해 죽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합니다. 진짜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매일 죽음의 과정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 말 그대로 바울은 매일 죽는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았습니까? 자기 안에 있는 보배,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를 가졌기에, 불의한 세상에서 그 죄를 지적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매일 겪는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보면 좋은 일도 많지만 참 불의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낍니다. 어디를 가도 악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그랬습니다. 구약시대에도 그랬고, 바울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방이 불의로 가득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은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삶을 매일 살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당연한 상황 속에서 ‘나는 예수님을 위해 매일 죽는다.’ 하고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점은, 그러한 상황에서 ‘왜 하필 내게 이런 고난이 오는가? 왜 나는 이런 신세가 되었는가?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주님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으시고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 하며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위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오히려 바울 속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번쩍이며 빛이 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런 상황에 처할 때 오히려 그의 안의 예수님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똑같습니다. 지금 위로부터 압력을 받고, 모든 길은 다 막혀 있고, 뒤로부터 추격을 당하고, 밑에서부터 확 던져져서 거꾸러뜨림을 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낙심하고 있다면, 그럴 때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가 계십니다. 사실 이미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나는 질그릇이지만, 나는 깨지기 쉽고 보잘것없고 연약하지만, 내 안에 보배가 계시다.’ 하는 것을 기억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여러분,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도, 사방에서 우리를 공격해온다고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는 결코 패배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값진 것을 가졌는데 어떻게 패배자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귀한 보배를 품고 있는 사람은 결코 패배자가 아닙니다. 결코 실패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혹시 어려움이 오고 낙심될 때,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돼. 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야.’라는 식으로 자기를 비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지, 그런 사탄의 음성을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보십니다. ‘너는 가장 귀한 내 자녀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낙심을 극복하는 삶 (17절)
낙심을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7절)
헬라어 원문에 보면, 17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주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지금 당하는 고난이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일시적인 것이며 가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받을 영광은 너무나 크고 영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4절)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죽더라도 다시 살리셔서 영광스러운 부활 생명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활 신앙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빌 3:20-21, 새)
흥미로운 것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이 빌립보에서 고린도후서를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당시 헬라(그리스)철학에서는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하면서 무시하면서,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체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거기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것인데,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이 낮은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몸은 낮고 비천한 몸입니다. 썩을 수밖에 없는 몸입니다. 날마다 점점 낡아져가고 후패하는 몸입니다. 정말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런 선포가 놀라운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런 비천한 몸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순식간에 확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지난주 부활주일에도 살펴봤지만,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그 몸인데 문이 잠긴 곳에 확 나타나십니다. 분명히 손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신비한 몸, 변화된 몸, 새로운 몸이었습니다. 우리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영광스러운 몸, 더 이상 썩지 않을 몸,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좋아할 만한 게 뭔가 하면, 그렇게 몸이 변화될 때 약이나 영양제 같은 것을 안 먹어도 되는 겁니다. 완벽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에 그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을 믿고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겉 사람은 낡아지고 있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볼 것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17). 고난은 엄청나 보이지만, 일시적인 것이고 가벼운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서 ‘바울이 나처럼 육신의 질병으로, 자녀 문제로, 경제적인 문제로, 실직 문제로, 사업의 실패로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바울처럼 온갖 종류의 고난을 다 겪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을 읽어보십시오. 자기가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여러 번 감옥에 갇혀서 고생했고, 심한 매를 수없이 맞았고, 돌에 맞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거의 죽었다 살아난 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동족들로 인해 그랬습니다. 동족에게 배신을 당하면 얼마나 마음이 쓰라립니까? 미국에 와서 다른 민족도 아니고 같은 한국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 얼마나 마음이 더 쓰라립니까? 또한 바울은 이방인들로 인해 고통을 겪었고, 강도를 당했고, 대적들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 밖에도 광야와 시내와 강과 바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자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못하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너무 추운데 얇고 찢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는 늘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엄청난 고난과 괴로움을 겪은 바울은 환난이 일시적이며 가볍다고 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가 고통을 잘 참는 초인간적인 인내력을 가진 사람이라 그런 겁니까? 아니면 그가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보다도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신의 가시를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생명을 걸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는 그 엄청난 일들을 당하면서도 그러한 고난이 가볍다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해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장차 엄청난 영광을 맛보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 영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광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체험한 게 뭐가 있으십니까? ‘와’ 하며 너무 훌륭하고 너무 좋고 너무 대단하다고 느낀 것, 제일 비싼 것, 제일 좋은 것이 뭐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경험한 어떤 것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생각할 때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더라도, 우리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떠한 고난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3. 보이지 않는 것을 붙드는 삶 (18절)
바울은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8절)
여기서 ‘주목하다’라는 단어는 목표물이 있어서 그것을 향해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 목표를 향해서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보고 있는데, 보이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걸 보고 있다고 하는 놀라운 표현입니다.
일전에 어느 웹사이트를 보니까 어떤 분이 ‘돼지를 무시하지 말라’는 글을 쓴 것을 봤는데, 우리는 보통 돼지라고 하면 무시합니다. 그런데 돼지가 아주 영리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돼지에게 약점이 있는데, 돼지는 등이 땅에 닿지 않으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항상 땅만 보며 사는 동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환난을 당하여 넘어져서 등이 땅에 닿을 때만 하늘을 쳐다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돼지가 항상 땅만 보며 뭐 먹을 것이 없다 하고 찾는 것처럼, 우리도 평소에 땅에 있는 것만 보며 뭐 좋은 게 없나 하고 살다가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 땅의 편안과 안락함만 바라며 살고, 또 어쩌다 조금 힘든 일이 오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의 보이는 것들을 신뢰하며 그것들만 추구하며 살게 되면, 언젠가 우리가 추구하며 성취했다고 이루는 것들이 우리를 배신하고 사라질 것입니다. 혹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런 것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반드시 배신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지켜줄 줄 알았던 것이, 나의 가치를 올려줄 줄 알았던 것이, 내가 죽을 때는 나와 함께해주지 못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우리의 신뢰를 두고 살 수 없다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아무리 요즘이 100세 시대라고 해도, 100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에 비하면 얼마나 짧은 시간입니까?
그렇다고 받은 복을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복을 주셨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복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복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주신 이유가 나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신 재물, 명예, 학벌, 사회적 위치, 좋은 두뇌, 환경, 자녀, 집, 내가 가지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무엇이 주어져 있든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안개와 같이 지나가는 것이고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은 마치 꺾인 꽃과도 같습니다. 여기 있는 백합은 살아 있는 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꺾으면 어떻습니까? 살아 있는 것이나 꺾어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이나 똑같이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 있는 것은 계속 싱싱합니다. 꺾인 것은 처음에는 아름답다가 시들시들해집니다. 왜냐하면 꺾여서 죽어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방은 화려하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일시적인 것입니다. 금방 시듭니다.
이 땅에서 보이는 것이 다 그런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좋고 당장은 화려하고 당장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금방 시들어버립니다. 별것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우리의 가치를 두고서 그것만 바라보며 살 수가 없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확실한 것, 우리가 보는 것보다도 확실한 것,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즉 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저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살 때,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저 천국만 바라보고 이 세상은 아무렇게나 살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당장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나의 이기적인 이득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왜 나를 여기에 두셨고 하나님이 왜 지금 이런 것을 내게 허락하셨을까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며 또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게 됩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혹시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나약한 삶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혹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기준과 타협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삶에 어려움이 와서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은 순간에, 특히 지금과 같이 불안하고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헤쳐 나갈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어려운 상황과 상관없이 기뻐할 수 있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갈 때 우리만 바이러스가 살짝 비껴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갑자기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황도 똑같고 위험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달라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지혜와 능력을 받아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음악회에서 젊은 테너 성악가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 그를 보기 위해 온 성악 교수 두 명이 있었습니다. 둘 중 한 교수는 “이 얼마나 대단한 목소리인가! 정말 아름답다!”라고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교수는 박수를 치며 칭찬을 했지만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테너는 위대한 성악가가 될 소질이 충분하다. 단, 그의 가슴이 찢어지기만 한다면.”
그의 목소리도 좋고 기교도 좋고 음악성도 좋고 다 좋은데, 그의 인생 안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 부족했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그의 마음이 찢어지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생길 때 그의 목소리에는 마음속에 담긴 인생의 고뇌와 감정이 실려 나오기 때문에, 그제야 진정한 성악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만 걷게 되면 그것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습니다. 조금만 비바람에 맞아도 그냥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살다가 고난을 당한다면, 우리 속에 있는 보배가 빛을 발하는 놀라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함께 하는 것이 교회이고, 목장에서도 우리가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기도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게 되면 고난을 당할 수 있고, 또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아무리 열심히 섬기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인생의 어려움이 우리를 싹 피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특히 지금은 세계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겪으면서 불안하고 힘든 상황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고통 속에서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인격이 단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겉 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고백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입을 통해 나오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