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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0일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12 ✦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른 사람이 모르는 한두 가지의 고통을 안고 삽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모르게 큰 고통을 주는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 가시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던 자기만의 숨은 고통이었습니다. 과연 그에게 “육체의 가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것이라고 결론짓기가 어렵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바울 자신이 받았던 영적 유혹, 즉 의심, 가책, 갈등 같은 것을 말한다.”라고 했고, 마르틴 루터는 “바울이 받았던 핍박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가 독신 생활에서 자주 일어난 본능적인 충동이다.”라고 했고,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은 “바울의 이유 없는 두통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이 늘 고생하던 안질이었다.”라고 하거나, “못생긴 외모에서 오는 콤플렉스였다.”라고도 했고, “간질병이었다.”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바울을 장기적으로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가시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지만, 계속적인 고통과 불편을 줍니다. 남들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아도 속으로 아파서 괴로운 것이 가시가 주는 고통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가시를 가지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분이 허약한 육체로 인해 괴로워하는 경우도 있고, 부모는 건강한데 자녀가 늘 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 행복해 보이는 부부이지만 사실은 갈등 때문에 남모르게 한숨 쉬는 경우도 있습니다.
1. 바울의 육체의 가시
이런 가시가 주는 고통 자체가 곧 축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괴로움 그 자체를 즐기라고 하시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도구를 가지고 우리를 육체적으로 약하게 하여 영적으로 쓰러지게 만듭니다.
물론 사탄의 역사가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7절)
모든 병이 다 사탄의 역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사탄이 우리를 흔들고 넘어뜨릴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누구나 병이 들면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형제자매로서 서로의 병이 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 장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시오. 믿음으로 간절히 드리는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할 것이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약 5:14-16, 새)
병든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 즉 요즘으로 하면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을 부르라고 하고, 그들은 병자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요즘 우리 식으로 적용하면, 병이 들었을 때 중보기도카드를 내고 중보기도 헌신자들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해주라는 것입니다. 딱 맞게 적용이 됩니다. 병에 걸렸으면 함께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8절)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이 너무 괴로워서 세 번이나 특별히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을 생각하고 자기도 세 번을 간절히 매달려 가시를 뽑아 달라고 부르짖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냥 담담하게 한 번, 두 번,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이 아니라, 이 문제 때문에 생명을 건 기도를 세 번 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40일 금식기도 같은 기도를 세 번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생명을 걸고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나와 하나님이라는 두 인격이 서로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아버지와 자녀는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아들딸은 아버지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구할 자유가 있고, 아버지는 자녀의 요구를 들어줄 자유와 거절할 자유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플 때 고쳐달라고 호소하며 요청할 수 있습니다. 자녀의 권리입니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못 했더라도, 아플 때 하나님께 얼마든지 고쳐달라고 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렵고 힘들 때도 기도를 안 한다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으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아니면 사춘기 십대들이 반항하는 것처럼, 영적 사춘기여서 반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바울은 치유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에베소에 있을 때 수많은 병자들을 고쳤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새도록 강론을 할 때 유두고라는 청년이 높은 데 걸터앉아 있다가 떨어져 죽었는데 그를 살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병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사실에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당연히 응답해주실 줄 알았는데 “No”라고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그 충성스러운 종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9-10절, 새)
만일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 자기 요구대로 다 들어주는 요술 방망이 같은 존재로 믿었다면 힘들 때 그대로 나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득찬 그릇을 구했던 바울에게 하나님은 빈 그릇을 주셨지만, 바울은 빈 그릇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뭔지 찾기 시작하며 그 빈 그릇 속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거절하심이 오히려 더욱 놀라운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2. 가시의 의미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은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됩니다. 가시를 주신 이유와, 약한 데서 강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남겨두신 이유
그것은 너무 많은 은혜를 체험한 바울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7절, 새)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바울은 성격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한 일들을 보아도 알 수 있고, 믿은 후에도 교만이나 혈기가 아직 남아 있어서, 갈라디아서 같은 데 보면 베드로가 잘못했다고 마구 야단을 쳤다고 썼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을 보면, 2차 전도여행을 나가기 직전에 1차 때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자기 선배이며 은인인 바나바와 결별을 선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혹하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고후 11:22-23, 새)
그 후 11:24절 이후로 죽 읽어보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는지를 죽 열거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근처에도 못 갈 수준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교만의 덫에 걸리기 쉬운 약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의 아킬레스 건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셋째 하늘에도 다녀온 사람입니다.
“자랑함이 나에게 이로울 것은 없으나, 이미 말이 나왔으니,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들과 계시들을 말할까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압니다. 그가 몸을 입은 채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후 12:1-4, 새)
하나님이 계시는 영적 세계는 신비에 속한 곳인데, 다른 표현 방법이 없어서 ‘셋째 하늘’이라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비몽사몽간에 하나님 보좌 앞으로 들림을 받아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비한 체험 앞에는 약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랑하게 되고 교만해집니다.
주변에 이상한 꿈만 하나 꾸어도 요란하게 떠들며 교만해지거나, 방언만 조금 해도 영적으로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비한 체험은 만일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 편에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은혜입니다.
방언, 예언, 치유의 은사 같은 것은 모두 자신의 영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영적 성숙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역에 관련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라고 성령님이 주신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런 것들이 사용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과분한 것을 얻게 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학교에서 가장 교만한 학생이 어떤 학생입니까? 머리가 좋아서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부자 중에도 소위 ‘졸부’들이 교만합니다. 뼈 빠지게 고생하고 노력해서 돈을 모은 사람은 그렇게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 없이 은혜를 받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자기가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교인들이 늘어나도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끈질기게 전도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인 수가 늘어나도 감사한 줄을 모르게 됩니다.
한 영혼을 붙들고 피땀 흘리는 기도와 섬김을 통해 그 영혼을 얻은 사람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에 각각 세례가 있는데,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전도를 못하고 있는데, 다 같이 목장에서 같이 사랑을 나누며 섬기지는 못하지만, 일대일 접촉을 시도해볼 필요는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바울이 교만해질 위험을 사전에 막는 길은 육체의 가시를 거두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유명한 <신곡 The Divine Comedy>을 쓴 단테는 자기에게 가장 악한 죄 일곱 개를 선정했는데, 그 중에서 첫 번째가 교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자기 숭배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교만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자기 숭배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더 미워하시고 대적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분 나쁘고 질투하셔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이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망가지고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 14년 동안 바울은 자기가 셋째 하늘에 다녀온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여기서 그 사실을 밝히게 되었을 때, 그것도 자기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3인칭을 써서 말합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9-10, 새)
이처럼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가시를 가진 채 그토록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만하기 쉬운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교만을 예방해주시기 위해 지금 내게 주신 가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육체의 질병입니까? 경제적인 압박입니까? 인간관계의 갈등입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진로 문제입니까? 직장이나 사업 문제입니까? 어쩌면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인간이 교만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가 겸손해지도록 특별히 허락하신 가시라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남 몰래 마음 아파하고 절망에 빠지는 일이 있다면, 왜 그것이 계속 남아 있는지, 왜 하나님은 이것을 빨리 해결해주지 않으시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경우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한 종이 되어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 약한 데서 강하여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함
바울이 세 번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에게 아주 놀라운 발견입니다.
평소에 그는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고 생각되어 근심했을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간질병 같은 것이었다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갑자기 거품을 흘리며 쓰러지고 눈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될 때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러다가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멸시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볼까 했는데 저렇게 쓰러지니 관두라고 할까봐 걱정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바울은 곧바로 ‘주님이 옳으십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놀라운 기쁨과 자유가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강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없이 독립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사실은 하나님 눈에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나약한 사람 같이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가시가 무엇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지, 나는 그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의지하며 살아가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바울의 생애를 보면, 약한 데서 주님의 능력이 강해진다는 말씀이 그대로 입증되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습니까? 헬라와 라틴 문화권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나왔습니다. 에베소의 그 소요와 난리도, 빌립보의 매질과 감옥도,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반대와 박해도 그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로마도 쇠사슬에 묶인 초라한 바울 앞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혹시 우리가 내 삶의 가시로 인하여 힘들어하고 눈물을 흘리는 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현실을 극복하는 초인적인 능력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 능력을 받을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현실이라도 헤치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능력으로 살아갈 때 우리 삶에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천로역정>을 썼던 존 번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덧셈을 해야 할 때는 뺄셈을 하시고, 뺄셈을 해야 할 때는 덧셈을 하신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마치 손해를 보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바울에게 더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우리의 것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하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고 빼는 것은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쌓아놓으며 많아지고, 남을 섬기며 나눠주면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약한 데서 강해지는 능력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법칙은 그와 다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은 인간의 법칙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의 고통, 어려움, 문제, 실패 등은 우리에게 손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그것이 유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마케도니아에서 이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내고 얼마 후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거기서 쓴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혹시 우리 인생에서 한두 개의 가시는 뽑지 못한 채 계속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놀라운 능력의 종으로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다했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러한 능력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할 때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