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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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동영상: https://youtu.be/9FurHAJDaVI)
2020년 4월 1일 수요예배
✦ 고난 중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3 ✦
“힘든 상황에서도 풍성한 삶을 사는 비결”
(신명기 11장 8~17절)
[들어가는 말]
어떤 중요한 자리를 맡았던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거나 은퇴할 때 고별사를 합니다. 그럴 때 지금까지의 여러 일들이 생각나면서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울먹울먹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유언을 하는 경우는 비슷하거나 더합니다. 배우자와 자녀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말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대개는 ‘사랑한다. 고마웠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고별사를 하거나 유언을 남기면서 이상한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중요한 내용을 말하고, 진심 어린 이야기를 남깁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지난 40년을 회상하면서 이스라엘에 고별 설교를 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마침 요즘의 QT 본문이 신명기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땅 동편인 지금의 요르단 땅에 왔습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셔서 시내 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계명과 법도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왕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또한 다른 백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들에게는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여리고 맞은편에 당도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난 40년의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이제 곧 들어가 차지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내용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는 영어로 Deuteronomy로서 ‘두 번째 말씀’이라는 뜻인데, ‘다시 명령하는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1세대는 다 죽었고 1.5세대와 2세대가 광야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1. 젖과 꿀이 흐르는 땅 (8~9절)
이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8-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시는 가나안 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 NIV)입니다(9). 그런데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이 어떤 땅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이 표현이 21번 나오는데, 그 중 15번이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 가운데 특이한 말씀이 한 군데 있습니다. 민수기 16:13에 보면, 모세에게 반역한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민 16:13)
이 말씀을 잘 보면, 다단과 아비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온 이집트 땅을 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은 가나안 땅, 즉 이스라엘 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비옥한 땅’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살았던 고센 땅은 아주 비옥했습니다. 그런데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자기들을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라고 하신 그 땅에, 우리가 갔었습니다. 그 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땅에서 난 과일입니다.” (민 13:27, 새)
이 말은 열두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둘러본 후에 돌아와서 모세에게 보고한 내용입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온 포도 한 송이를 내어놓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어느 특정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비옥한 땅’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는 땅 (10~12절)
이스라엘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을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한 것은 가나안의 특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집트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고, 가나안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이집트와는 또 다른 특성을 가진 땅입니다. 둘 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비옥한 땅이지만 근본부터 다릅니다.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0절)
이제 얻으려고 하는 가나안 땅은 분명히 애굽 땅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나일 강이 흐르는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나일 강은 저 중앙아시아의 눈 덮인 산에서부터 물이 흐르기 시작하여, 그것이 풍성한 수량을 이루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집트까지 와서 나일 강물이 범람할 때가 많은데, 범람하면 그 부근에 옥토가 생겨납니다.
또 강물이 흘러넘칠 때 저수지에 저장했다가 수로를 통해 농토로 운반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운반을 할 때 ‘샤두프’라는 이집트식 두레박을 사용하는데, 그 샤두프를 통해서 한 쪽에 있는 물을 다른 쪽으로 끌어올려서 옮깁니다. 바로 그때 발을 사용합니다. 나일 강에서 물을 얻어 사람의 발로 물을 대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가리켜 ‘발로 물 대기를’이라고 표현했습니다(10).
이 나일 강의 물이 애굽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근원이고 풍년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일 강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나일 강을 신이라고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 땅은 그런 애굽 땅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1절)
가나안은 일단 애굽의 고센 땅과 같은 평야가 아니라, 산과 골짜기가 많은 땅입니다. 가나안은 샤두프를 통해서 나일 강물을 공급하는 식으로 인간이 발로 열심히 뛰는 노력에 의해 물을 공급받는 이집트 땅과 같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물을 얻어야 하는 땅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흡수한다’는 말이 문학적으로 표현되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비를 마시는 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열려서 비가 내리면 풍성하고 비옥하지만, 하늘이 닫히고 비가 안 오면 끝장이 나는 땅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나안 땅의 특징입니다. 이집트는 인간의 노력으로 살 수 있는 땅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나면 어떻게 됩니ᄁᆞ? 하늘을 쳐다보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자기 노력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하늘로부터 비를 흡수하는 땅처럼, 이제는 삶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이집트가 아니라 가나안에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닫히면 끝장나고 하늘이 열리면 풍성한 땅,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의 특징이고 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2절)
여기 보면 가나안 땅의 특징에 대해 더 나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나안 땅의 특징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집트는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는 땅이고,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아주시고 하나님의 눈이 그 위에 머물며 보살펴주시는 땅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큰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시는 땅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한 관심으로 돌보아주십니다. 자녀가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자녀들 중 하나도 귀하지 않은 자녀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자녀가 많으셔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똑같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장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직접 돌보아주시고 주님의 눈이 늘 우리 위에 머물며 보살펴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하나님은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돌보아주십니다. 내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사랑의 눈이 임해서 구체적으로 나를 돌보아주시고, 연초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복을 주시고 인도해주신 일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이 4월 1일인데 지난 3개월 동안 나를 어떻게 인도해주셨습니까? 코로나바이러스가 12월에 중국에서 시작되어 지난 3개월 동안 전 세계로 퍼졌는데, 그러니까 지난 3개월은 바이러스가 퍼지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살다가 최근에야 미국에서는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고 나아가는 형편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돌보아주셨는지 돌아보십시오.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눈이 떠나는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늘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이 어디 멀리 가셔서 우리를 안 보시는 게 아닙니다. 항상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늘 문을 여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항상 공급해주십니다.
물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왜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가,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은 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힘들고 불안하며 사람들도 많이 죽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그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자녀가 있는 평범한 가정이라면, 매일 아침 일어나기가 무섭게 서두르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허겁지겁 직장이나 사업체로 출근하여 하루 종일 가족이 각자 떨어져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다가, 오후 늦게에서야 또는 저녁때가 되어야 간신히 다시 만나 저녁을 먹고 또 금방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우리의 일상생활이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오랫동안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때가 또 어디 있습니까? 부부끼리도 많은 대화가 없이 그냥 살아오던 것이 우리 삶이었는데, 지금은 보기 싫어도 더 봐야 되고 같이 있어야 되고 대화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도 안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기상학자들이 위성사진을 보니까 그 동안 자동차 매연과 공장 매연 등으로 뿌옇고 벌겋고 이상한 색깔이었는데, 지금은 이 땅의 색깔이 지금 파란 색깔로 변했다는 겁니다. 그럼 도대체 그 동안은 얼마나 안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살았던 겁니까?
우리가 하는 작은 일 하나도 하나님께는 엄청난 관심거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가 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태로 인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하나님은 너무나 관심 있게 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보고 계십니다. 내 삶은 하나님께 엄청난 의미가 있으며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3. 새로운 땅에서 주어진 책임 (13~17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특별한 책임도 따릅니다. 이 특별한 책임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하나는 긍정적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방향입니다.
1) 긍정적 방향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3절)
이 말씀의 내용에서 가장 중심 되는 단어는 ‘청종’입니다. 아주 주의 깊에 듣고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히브리어로 ‘쉐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인도해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청종’입니다. 우리가 나라 법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청종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청종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주십니까?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4-15절)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가을부터 봄까지가 우기입니다. ‘이른 비’는 가을비를 말하고, 10월에서 11월 정도에 내리는 비입니다. ‘늦은 비’는 봄비를 말하며, 3월에서 4월 정도에 내리는 비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이 건기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는 5월 말에서 월 초였으니까 건기라서 물이 별로 없는 때였습니다. 하지만 가을과 봄에는 물이 많고 비가 많이 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한국식이 아니라 미국의 학교를 생각하면 외우기 쉽습니다. 이른 비는 가을비이고 늦은 비는 봄비입니다. 미국 학기제와 같습니다. 이른 비, 즉 가을비는 여름 동안 가물어 버린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어서 그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늦은 비, 즉 봄비는 마지막 추수하기 전에 곡식들이 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힘을 주는 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려주셔서 땅을 비옥하게 해주시고, 그렇게 비옥해진 땅에서 곡식들이 나오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곡물을 먹고 배부르게 될 것이고, 가축들도 풀이 잘 자라니까 풀을 뜯어먹고 풍성한 젖을 내며 잘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15).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다할 때의 긍정적 측면입니다.
2) 부정적 방향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16절)
이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왜 주의하라고 하십니까? 마음이 미혹을 당해서 가나안 땅 사람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은 바알과 아세라와 하닷 같은 것들인데, 혹시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가나안 땅의 신들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착각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이나 아세라나 하닷 같은 이방신이 비를 내려준다고 마음이 미혹되어서 우상을 숭배하는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하라, 삼가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17절)
만일 이스라엘이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은 하늘을 닫으셔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실 것입니다(17). 비를 주시지 않으면 곡물이 나올 수 없고, 가축이 먹을 풀도 없어서 자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며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 결과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첫째, 비가 내리지 않게 됩니다. 둘째, 땅에 소산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셋째, 순식간에 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고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17)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가? 비가 오고 안 오고에 따라 그렇게 바뀌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땅인가? 비가 안 내린다고 그대로 망해버리는, 겨우 그 정도 밖에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질문해보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겨우 이 정도 밖에는 안 됩니까? 지금 내가 사는 겨우 이 정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풍성한 삶인 겁니까?
이런 것들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어떻게 해서 이 정도밖에 안 되었는가?’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풍성한 삶이 왜 내 인생에서는 이 정도로 밖에 나타나지 않는가?’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이 왜 이런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자녀의 풍성한 삶이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나?’라고 질문하는 것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고 싶어 하시고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못 누립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것을 아무리 주셔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컵이 있는데 아무리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놓아도 거꾸로 놓으면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바로 놓아야 물이 들어가는데 거꾸로 놓고 옆으로 놓으니까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삶을 엄청나게 부어주시는데 우리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그것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내 책임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당신들은, 유혹을 받고 마음이 변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 신들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6절, 새)
이렇게 주의하라는 말씀은 신명기 전체를 통해 계속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신 8:11-14a)
모든 일이 잘 풀리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염려가 되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인간은 조금만 잘 되어도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공하고 믿음의 길을 떠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10:12-13)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뜻’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혼’입니다. 모든 마음과 모든 혼(생각과 감정과 의지)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옭아매고 자유를 없애는 게 아닙니다. 여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행복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를 위해서 말씀을 지키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사는 게 뭡니까? 결국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무조건 형통하고 건강하고 부유해집니까?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안 그럴 때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도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열심히 믿고 사랑하고 섬겨도 인생의 폭풍이 불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도 바이러스에 걸려서 아프거나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를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환경이 어려워질 때 우리는 불평하거나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흔히 자신의 처지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 아내(남편)만 변화되면 결혼생활이 행복해질 텐데 왜 변하질 않는 거야?’ ‘내 아이는 왜 저 집 아이처럼 열심히 하지 않지?’ ‘저 지독한 보스만 사라지면 내 직장생활이 편해질 텐데 언제 좀 다른 회사나 다른 부서로 안 옮기나?’ ‘저 손님만 안 오면 내 사업체가 더 번성할 텐데 왜 저 사람이 자꾸 와서 나를 괴롭히나?’
정말 그렇습니까? 내 배우자만 변화되면, 내 아이만 열심히 하면, 내 보스만 사라지면, 그 손님만 안 오면 내 삶이 행복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또 다른 강적이 옵니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실은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을 쓴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가 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구속되어 지옥 같은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그 죽음의 감옥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브란트 목사는 그 죽음의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자신도 중환자였지만 다른 환자들에게 자기 몫으로 받은 빵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주 살벌했던 감옥이, 범브란트 목사 한 사람의 사랑의 실천으로 인해 사랑과 소망의 분위기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죄수 중 한 사람에게 가족으로부터 설탕 한 덩어리가 전달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감방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동시에 자기 가족은 왜 안 보내주는가 하는 원망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설탕 주인은 그것을 먹지 않고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위해 남겨 두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설탕 주인은 그것을 끝까지 먹지 않으며 자기보다 더 아픈 환자를 위해 아껴 두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설탕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환자들이 자기보다 더 아픈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며 설탕을 사양했기 때문입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 죽어 가면서도 그들은 자기보다 더 약한 환자를 위해 설탕을 양보하는 놀라운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 참혹했던 죽음의 감옥이 범브란트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해 변화된 설탕 주인으로 인해 전체로 퍼져 나가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 거기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환경 속에 있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가 굉장히 심각하지 않습니까? 지금 세계에서 특히 미국에서 몇 명이 감염되고 몇 명이 죽었는지, 콜럼버스에 몇 명이 감염되었고 누가 감염자인지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불안하니까 살 수 있는 건 다 사놓으며 마스크, 손 세정제, 화장지, 물 등을 사재기하고 음식을 사재기합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그런 것을 전혀 사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재기가 영어로 뭡니까? panic purchase, 즉 공포심에 질려서 사는 게 사재기입니다. 물건을 사는 데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오는 겁니다. 지금 누구를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서로 사랑할 때,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지옥을 천국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주변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 나도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은 없는지, 그분들을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하더라도 문자나 전화나 비디오 컨퍼런스 등을 통해 서로 안부를 묻고 격려하며 기도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목장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평소에도 개인적으로 다른 분들과 연락하며 기도해주는 시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주님 안에서 약속된, 진정으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어렵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풍성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