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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2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8 ✦
예수신경의 이야기 (2)
“요셉과 명예”
(마태복음 1장 18~25절)
1. 요셉의 명성과 정체성
오늘 이 말씀은 성탄절 때 많이 살펴보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본문이 예수신경에 대해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몇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을 ‘명성(reputation, fam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정체성(identity)’이라고 하는데, 정체성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자아 정체성(self identity)’이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나의 모습이 ‘참된 정체성(true identity)’입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참된 정체성, 즉 하나님께서 보시는 나의 모습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도 중요하고,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어디에 가장 신경을 쓰며 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명성’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인 나의 명성이, 나의 진정한 모습인 나의 정체성만큼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명성과 정체성을 잘 구분하고, 또한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보다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나의 모습이 내 삶에서 더 중요해질 때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새롭게 발견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며, 그는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자신이 힘들게 얻은 명성을 잃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일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가 처해 있던 유대교라는 상황과 함께 시작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사실 신약의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인데, 그가 겪었던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종교적, 사회적 딜레마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차디크’ 요셉
요셉의 명성 또는 평판에 대해 성경은 “의로운 사람” 즉 의인이라고 말합니다(19).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차디크’입니다. 이 말은 성실하게 토라(율법)를 연구하고, 그것을 배우며 실행하는 사람에게 사용됩니다. 요셉 당시에 이 말은, 그가 매일 ‘쉐마’를 암송하고 쉐마대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음식에 관한 규례를 따르고, 회당을 후원하며,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거룩한 절기들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요셉은 이러한 자신의 명성이 자랑스러웠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요셉이 속한 유대 사회에서 흔치 않은 존재인 제사장과 드문 존재인 예언자, 그리고 아주 드문 존재인 메시아를 제외하고, 차디크보다 더 높은 명예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디크로서의 요셉의 명성은 이제 도전받게 되었습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그의 정혼녀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입니다.
2) 도전받은 요셉의 명성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도 전에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8절)
여기서 “약혼”했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 식의 약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식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반지를 주며 프로포즈 하고 약혼했다는 것이나, 한국에서 양가가 모여 약혼식을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거의 결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약혼은 engagement라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약혼은 ‘정혼’ 즉 betrothal입니다. 아직 결혼식을 안 하고 같이 안 산다 뿐이지, 결혼이 확정된 상태입니다. 이때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과부가 됩니다.
그런데 그 정혼녀인 마리아를 가리켜 사람들이 ‘천박한’ 여자, ‘부정한’ 여자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천박하다’는 말이 토라를 따르는 요셉에게도 새로운 명성을 안겨주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지속한다면,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천박한 사람이나, 토라를 싸구려로 만든 사람이라고 그를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제 요셉을 ‘차디크’가 아니라 ‘암 하아레츠’라고 부를 것입니다. ‘암 하아레츠’는 토라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고기를 먹고, 십일조를 건너뛰며, 이방인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노닥거리고 어울립니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지는 여성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한 짓이 바로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런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요셉은 차디크로서의 명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명성은 요셉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게 되면 암 하아레츠, 즉 토라를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요셉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3) 토라(율법)에 호소하는 요셉
요셉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토라를 믿는 사람인 차디크이므로, 모세오경을 찾아 그것을 따르면 됩니다. 율법에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처녀에게는 아무것도 행하지 말 것은 처녀에게는 죽일 죄가 없음이라 이 일은 사람이 일어나 그 이웃을 쳐 죽인 것과 같은 것이라. 남자가 처녀를 들에서 만난 까닭에 그 약혼한 처녀가 소리 질러도 구원할 자가 없었음이니라” (신 22:23-27)
요셉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도중에 자신의 머릿속에 이러한 율법의 문제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마리아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꼬임을 받았거나 강간을 당했을 것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성읍에서 꼬임을 받아 동침한 것이라면, 율법은 남자와 여자를 모두 돌려 쳐 죽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사람들이 없는 들에서 강간당한 것이라면, 남자만 처형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백하지 않는다면, 토라는 마리아가 쓴 물을 마셔야 한다고 말합니다(민 5장). 마리아가 그 물을 마시고 죽으면 그녀에게 죄가 있고, 죽지 않으면 죄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아니면 여자의 부모가 ‘처녀의 표적’을 제출할 수 있으며, 거기엔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요셉의 머릿속을 맴도는 가운데, 그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유혹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한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 대신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이 기적의 결과이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요셉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그는 토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차디크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그가 사랑하고 결혼하기를 원하는 여인이 임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약혼녀는 자신의 임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요셉이 그런 마리아와 결혼한다면, 그는 차디크라는 자신의 명성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요셉은 마리아가 정말로 옳은 것이라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합니다. 만약 그 아기가 정말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잉태된 아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요셉은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
4) 하나님과 씨름하는 요셉
요셉은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유대인 사회가 이해하는 방식과 같이 토라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마리아를 사랑하여 그녀를 아내로 데려올 것인가?
이것을 통해 요셉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차 예수신경이 만든 딜레마에 걸렸습니다. 결국 요셉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피하고자 은밀한 파혼을 선택합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9절)
여기에 잘 보면, 요셉이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어쩌면 차디크로서의 자신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차디크)로서, 그 명성에 손상이 가게 하지 않기 위해 조용하게 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천사가 꿈속에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0절)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는 말을 보면, 요셉이 이 일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용히 끊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왜 무서워합니까? 만일 그가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오게 되면, 자신의 명성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고민이 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마리아를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1-22절)
천사는 요셉에게 태어날 아기의 이름도 이야기해주고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알려줍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말씀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3절)
이 말씀은 이사야 7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사야는 요셉이 살았던 때로부터 700년 전에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무려 700년 전에 주셨던 그 말씀이 이제 드디어 이 아기를 통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꿈속에서 천사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것은 혹시 믿을지 몰라도, 성령으로 임신했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친구들은 요셉이 마리아의 배가 부른 것을 감추기 위해 합법적인 유대식 결혼을 시도하고 있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이처럼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명성을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신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며, 또 명성과 평판까지도 하나님께 복종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가 오직 주님만 의지할 때는 곧 우리의 명성이 죽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명성을 붙들면 참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고,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명성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이야기가 주는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성을 포기할 때, 다른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나에 대해 떠들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요셉과 마리아가 배운 일입니다.
영국 국교회의 목사이자 유명한 복음주의 작가였던 존 스토트(John Stott)도 것을 배웠습니다. 존 스토트는 20세기 복음주의 진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도자입니다. 스토트는 대학 시절, 요셉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정체성과 명성 사이의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주님이 자신을 목회자의 길로 부르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자, 물리학자였던 자기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존 스토트는 자기가 가지게 된 복음 사역의 소명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품었던 높은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는 자신의 소명을 말씀드렸습니다.
훗날 스토트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신앙과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아를 잃을 때 자신을 발견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할 때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스토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는 우리의 진로도 포함되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부모나 우리 자신의 계획과 다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5) 마리아의 남편이고 예수의 아버지가 되기를 선택한 요셉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24-25절)
요셉의 순종은 그의 단호한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곧이어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에게 천사가 알려준 대로 이름을 지어주었고, 자기와 아기와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선포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요셉의 정체성은 더욱 좋아졌지만, 동시에 그의 명성은 아주 낮아졌습니다. 이제 요셉은 명예가 실추된 두 사람과 맺어진 것입니다. 마리아는 간음을 통하여 임신한 여자로 간주되었고, 예수는 사생아로 여겨졌습니다.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오고 예수를 법적 아들로 받아들인 결정은 차디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에게 그것은 어려운 선택이었고, 요셉은 결국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이제 더 이상 차디크가 아닙니다. 대신 그는 마리아의 남편이며, 예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2. 요셉과 예수신경
예수님은 그때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었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요셉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이미 예수신경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 자기 민족이 하던 것처럼 토라와 그 해석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곧 그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정체성이 명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명예가 높아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지금 당장 권력을 누리면 천 년, 만 년 갈 것 같지만, 정말 몇 년 못 갑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모습이 경건한 친구들 앞에서의 자기 모습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바리새인들이 신경을 안 쓰고 자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느냐만 신경을 쓰니까, 위선하는 자, 외식하는 자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요셉의 본을 따른 사람들을 교회 역사에서 발견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입니다.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던 그의 이야기는, 정직함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의 자서전은 명성에서 정체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그립니다.
그는 자신이 회심 이전에 추구하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한 좋은 삶이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명성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명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면 내 영혼의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정체성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놀랍게도 명성을 추구하는 삶에는 만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정체성을 추구했을 때, 정말로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인데, 이왕이면 훌륭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아주 나쁜 명성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사생아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태어났습니다.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형편없는 동네인 나사렛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간음했다고 비난받는 부정한 여인이고, 아버지는 수치를 당한 전 차디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명성을 잃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메시아를 그런 식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분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명성을 잃는 것을 아주 극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명성으로만 따지자면, 예수님은 출생도 훌륭한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죽음은 더더욱 명성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신경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명성을 잃어가면서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장소에서, 자신들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차디크’들보다 ‘암 하아레츠’들에게 더 높은 명성을 준 아기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차디크의 눈으로 볼 때는 암 하아레츠와 같이 아주 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께서 요셉에게 요구하신 것을 이미 스스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원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을 이미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을 사람에게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미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그들이 머물던 누추한 마구간을 나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세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 와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들이었지만, 또한 자신들 앞에 보이는 언덕을 힘겹게 오르며 앞으로 그 힘겨운 길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순종을 선택하여 참된 정체성을 갖는다고 해서 세상의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복된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세상에서의 명성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할 때 내 명성이 손해를 보게 된다면, 하나님께 순종할 때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과연 그럴 때에도 내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요셉이 씨름한 것과 같이 우리도 씨름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는 많은 크리스천들조차 명성을 지키기 위해 정체성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만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어렵더라도, 내게 손해가 오더라도, 주님이 주시는 길은 최고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참된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데에 도구로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