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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8일 수요예배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 6

선한 목자와 삯꾼을 나누는 기준

(요한복음 1011~18)

 

 

1.   주님께서 지키고 싶어 하시는 것

 

성경에서 목자를 말할 때는 언제나 주님을 가리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2)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외에 참된 목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목회자를 가리켜 너무나 자연스럽게 목자라고 부릅니다. 이전에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교인들을 가리켜 이분들도 다 내 양이니까 내가 돌봐야 하는데...”라고 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목자라는 말이 됩니다.

 

우리도 목장을 맡아서 섬기는 분들을 목자라고 부르는데, 많은 교회들도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또 많은 선교 단체들도 소그룹 리더들을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목회자뿐 아니라 평신도 중 성경공부를 인도하거나 영적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목자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합니다. 물론 참된 목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지만, 정말 목자와 같이 우리를 참된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사역자들을 목자라고 여기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경우 목회자들과 평신도 리더들이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소위 삯꾼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기준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것입니다. 아무나 보고 삯꾼 목자라고 하면 큰일이고, 또 아무나 선한 목자라고 하며 따르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요즘 이단들 중 아주 대표적인 신천지의 동영상을 아까 잠시 보았는데, 이건 북한 저리 가라였습니다. 완전히 자기들의 교주를 신격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선한 목자가 아닌데 그런 식으로 하면 더욱 큰일입니다.

 

목자라는 타이틀은 세 가지 역할을 포함하는데, 지키는 것, 이끄는 것, 먹이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목자라면 양을 맹수로부터 지키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이끌고, 또 먹이를 먹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목자의 세 가지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이끄시며, 우리를 먹이십니다.

 

그런데 첫 번째 역할인 지키는 것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십니까? 이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도 인생의 시련이 찾아오고 여러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실한 성도인데, 집에 불이 나서 자기 집은 물론 이웃집까지 많은 피해를 줍니다. 교회에서 아주 충성스러운 일꾼인데,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열심히 믿으며 봉사하는 사역자인데 갑자기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백혈병에 걸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날마다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먹여주지는 않으신다 해도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셔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이해가 안 가기도 합니다. 특히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잘 믿다가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나 바울 사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도 이해가 안 갑니다. 왜 그토록 신실한 스데반이 그런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왜 그토록 헌신되어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고난을 당하고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 외에도 신앙으로 해석이 안 되는 상황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기 아주 힘들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말씀하시고서는 안 지켜주시는 겁니까, 아니면 능력이 안 되어 못 지켜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둘 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주님께서 지켜주시려는 것과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시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로 우리의 성공과 건강과 재물과 편안한 삶과 자녀가 잘되는 것과 안락함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4:23, )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꽉 붙어 있도록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잘못되면 생명을 잃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마음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지킨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지난 안식월 때 로마에 갔는데, 일부러 지하무덤인 카타콤 중 한 군데인 Catacombe di San Callisto(성 칼리스토의 카타콤)을 방문했습니다. 지하라서 침침했고 습했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함께 모여 주님을 예배했는지 감동이 되었고, 특히 어린 아이들의 무덤도 있어서 마음에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카타콤 생활을 무려 300년간이나 했습니다. 이것을 세대로 따지면 13대 정도 되는데, 이 긴 시간 동안 그들이 그 어두운 카타콤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지킬 가치가 있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로 하여금 평생 땅속에서 생활하게 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카타콤에서 지킨 복음으로 인해 대제국 로마가 무너졌습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고자 하십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의해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어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어떤 것도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아주 시시한 것들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간직하고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주십니까? 그 방법을 알면 무엇이 생명을 얻게 하는 가장 소중한 마음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2.   누가 선한 목자인가?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키워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삯꾼

 

첫 번째 키워드는 선한 목자와 반대 개념인 삯꾼이라는 단어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2-13)

 

조금 전에 언급한 것처럼, 대체적으로 성도들은 목회자를 목자로 생각하면서, 그들을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제가 목사로서 이런 내용을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좀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성경대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로 구분할 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은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관심일 것입니다. 교인들과 언제나 함께 있어주고, 교인들이 뭔가를 필요로 할 때 함께 기도해주고, 교회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희생하고, 교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목사를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 교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교인들의 사정을 전혀 모르고, 돈과 명예를 좋아해서 총회 같은 데에 자주 가고, 교회보다는 자기 가정의 일이나 교회 밖의 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사를 가리켜 삯꾼 목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기준이 아주 틀리지는 않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정확한 기준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으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를 구분하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정확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선한 목자는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주는 목자를 말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4-16)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마음을 잡아주는 목자가 선한 목자입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14)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함께 있어 주거나 양의 사정을 잘 아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15)라고 하신 것을 보십시오. 단순히 시간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나 양의 사정을 잘 아는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완벽한 하나 됨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무엇을 합니까? 서로를 지켜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서로 지켜주며 도와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반대로 삯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12). ‘삯꾼 목자라고 하지만 삯꾼은 사실 목자도 아닙니다. 삯꾼은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지 못하도록 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리에게 물려가도록 그냥 놔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던 마음이 이리로 표현된 세상의 가치관에 공격당하고 끌려가도 그냥 방치하고 놓아두는 사람이 삯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삯꾼도 양들과 함께 하면서 양들을 칩니다. 양들의 사정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와의 차이점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나 몰라라 하며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물려가고 흩어지게 됩니다(12). 그럼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볼 때 왜 달아납니까?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3, )

 

삯꾼이 도망가는 이유는 양들을 생각하지(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시간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정을 잘 아는 것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빼앗기도록 놔두는 목자는 아무리 양들과 함께 있고 양들의 사정을 알고 있어도 결코 선한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삯꾼일 뿐입니다.

 

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왜 예배를 드립니까? 왜 기도를 합니까? 왜 큐티를 합니까? 건강하기 위함입니까? 성공하기 위해서입니까?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가고 잘되기 위해서 기도합니까? 사업이 잘 풀리기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가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봉사한다 해도, 우리의 관심이 온통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이리에게 물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한다면, 그것은 이리와 같은 세상에 물려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삯꾼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기준이 아닙니다. 사정을 조금 더 아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게 도움으로써 마음을 지키도록 해주는 것이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으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켜준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2)  목숨을 버림

 

선한 목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키워드는 목숨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18)

 

이 말씀을 읽어보면,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들 곁에서 지켜주다가 무서운 맹수가 오면 싸워다가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선한 목자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또 교인들을 위해 너무 열심히 사역하다가 병을 얻은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말씀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

 

여기서도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고, 15절에서도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절에서도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먼저, 예수님은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 명(여자와 아이들까지 수만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여러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셨습니다(야이로의 딸,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베다니의 나사로). 또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고, 물 위를 걷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저런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틀림없고, 그래서 로마를 물리치실 분이며, 배고픈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환영했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그러한 예수님의 힘으로 2인자가 되어 권력을 누려보겠다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은, 왕으로 오시는 분에 대한 예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왕으로 보좌에 앉기만 하시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힘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아무 저항도 못한 채 그 끔찍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분께 기대하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주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죽으심으로써 이리에게 물려가는 우리를 구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기준을 따라가려 했던 우리를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구해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던 마음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그런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온전히 붙어 있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갖게 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논리, 힘의 논리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예수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수 있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죽음 앞에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붙어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기준만을 가지고 살도록,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도록,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도록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렇게 버릴 권세즉 죽을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신 분인데, 그 권세란 요즘 권력자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권세가 아니라, 스스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권세였던 것입니다.

 

 

3.   삯꾼이 아닌 선한 목자로 살기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해주심으로써,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물려가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선한 목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해왔습니까? 지금까지는 주로 이런 목사를 선한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연약한 교인들에게 새 힘을 주어 다시금 세상에서의 경쟁에서 이길 힘을 북돋워주는 목사,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 하는 욕심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헛된 욕망을 마음에 심어준 목사,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해준 목사,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교인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주며 기도해주는 목사...

 

이런 목사들이 지금도 선한 목자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교회의 경우를 보아도, 우리 내면의 죽어 있는 열정을 깨워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외치며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하는 교회를 선한 목자라고,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정말로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가 선한 목자이고 누가 삯꾼인지 제대로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온통 성공과 재물과 건강과 편안함과 안락함이 복의 개념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리에게 물려가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에 열정을 내더라도, 세상의 성공을 부추기는 가르침을 받는다면 우리는 삯꾼에게서 이리에게 물려가도록 방치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의 가치관에 물려가도록 놔두는 자들은 다 삯꾼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만 선한 목자나 삯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선한 목자가 될 수도 있고 삯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섬기거나 목자로 섬기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정에서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남을 속인다면 삯꾼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 모두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겠습니다.

 

먼저, 가정에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부모라면 자녀의 마음이 이리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세상의 기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신앙을 저버린 채 얻는 세상의 성공이 축복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세상에서 실패하고 생명을 잃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사는 것이 선한 목자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

 

생업(직장, 사업체)에서도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남을 속이거나 누르고서라도 내가 잘되고자 하는 이리의 공격과 유혹을 물리치고, 내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또한 교회에서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지금 맡은 직분과 섬기는 사역을 통해 대충 하거나 내가 섬기는 지체들에게 이리의 공격이 오면 나 몰라라 도망가는 삯꾼이 아니라, 내 생명을 내어주더라도 양들을 지키고 섬기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시오.

 

그렇게 선한 목자로 살았던 한 사람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딤후 4:7-8, )

 

참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도 바울과 같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매일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기준대로 살며 또 그것을 전하는 선한 목자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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