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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14성금요일예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마가복음 57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마가복음 1533~47)

 

[들어가는 말]

 

오스트리아 유태인으로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유태인 600만 명을 살해할 당시 나치에게 끌려가 3년간 혹독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온갖 고초를 당했습니다. 부모님과 아내가 먼저 나치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자녀들도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치의 그 악마 같은 손길 아래서 매일매일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쳐왔습니다. 어느 한순간도 살아있다고 할 만큼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분노하거나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평안함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 부모를 빼앗아 가고, 내 아내도 빼앗아 가고, 내 자녀들까지 빼앗아 갔다. 그러나 너희가 나에게서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과 원망과 분노보다는 희망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앞 본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싸고 최악의 선택을 했던 빌라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빌라도와 당일에 친구가 된 헤롯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최악의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고, 최선의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33-34)

 

예수님은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십자가 위에 달리신지 3시간 만에 아주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3)

 

제 육시는 지금의 정오를 말합니다. 12시는 가장 환하고 밝아야 하는 시간 아닙니까? 오늘 날씨가 좋았는데, 아까 12시 조금 넘어서 밖에 나가니까 너무 환하고 눈이 부셨습니다. 그런데 12시부터 예수님이 돌아가신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둠이 임합니다. 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일부 지역이 아닌 온 땅이 다 어두워진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일식 현상일 수 있다고 하는데, 날짜를 보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이 시작하기 전 날인 금요일, 바로 오늘 성금요일입니다. 음력으로는 아빕월 15일인데, 이 날은 보름달이 뜨기 때문에 일식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일식이라는 현상은 태양--지구의 순서가 되어야 하는데, 음력 15일에는 태양-지구-달의 순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8:9)

 

아모스는,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에는 대낮에 어두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요엘 2:2이나 스바냐 1:15에서도 그날은 무서운 날이며, 분노와 환난과 고통과 황폐와 패망의 날이며,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결국 온 땅에 어둠이 임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신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연의 이적을 통해 이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4)

 

제 구시가 되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처절하게 외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사실 이런 내용의 말은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멸망당하는 죄인이나 부르짖는 통곡과 탄식인데, 이것을 외치신 분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울부짖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제 믿음이 약해지셔서 원망을 하시는 겁니까?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절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니고, 절망의 부르짖음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이 절규는 오히려 우리를 향하여,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는 질문이며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버림을 받았다고 외치실 만큼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크고 두려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하나님께 버림받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왜 이런 외침을 해야 합니까?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그 모든 죄와 슬픔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이처럼 철저히 버림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외치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울부짖음은 그냥 갑자기 괴로워서 토해낸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편 22:1의 인용입니다. , 예수님은 죽음을 넘나드는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성경 말씀이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시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오경뿐 아니라 선지자들의 글, 또 가장 늦게 편집된 시편의 글들까지 다 암송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격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까? 고난당할 때 우리 주님처럼 진리와 더욱 하나 되는 영적인 성숙함이 있습니까?

 

매일 우리의 삶이 말씀 위에 바로 서면, 어려움이 다가와도 주님을 의지하여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말씀 위에 바로 서면 잘못된 가르침을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말씀 위에 바로 서면 신실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습니다.

 

 

2.   무자비한 사람들 (35-36)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처럼 처절하게 외치시는 순간에 그 곁에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그것을 듣고 전혀 엉뚱하게 해석을 합니다.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5-36)

 

그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그 중 한사람이 달려가 예수님이 정신을 차리도록 신 포도주를 해면즉 스폰지에 적셔 와서 마시도록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이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정말로 와서 구원하는가를 보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서 그렇게 합니다.

 

이 얼마나 악하고 무정한 마음입니까? 이들에게는 전혀 자비가 없습니다. 죽음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는데, 그저 자신들의 재미와 만족을 위해 그 사람을 계속 깨어있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도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는 이렇게 되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까? 안 그러면 이렇게 무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실 때 우리는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3.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37-38)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집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7-38)

 

이 휘장(커튼)은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고 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딱 한 번 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였는데, 그 사이에 있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 휘장에는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휘장에 그려진 하늘이 찢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사역)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0-11)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은 하늘이 갈라진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이 갈라진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늘이 갈라져 성령이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성소 휘장의 하늘이 갈라져 타락한 성전이 끝나고 예수님의 찢겨진 몸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갈라진 하늘과 찢어진 휘장,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제사장입니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처럼, 주님께 직접 기도하며 또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제사장이라면 어떻게 딴 생각을 하거나 졸겠습니까? 옛날에는 대제사장 딱 한 명이 1년에 딱 한 번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 각자가 마음껏 하나님께 얼마든지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특권입니까? 이 특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4.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39-47)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 주변에는,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 기적을 보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주님의 위대한 죽음을 증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  로마 백부장

 

먼저 백부장이 있습니다. 그는 로마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39)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로 신격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의 군인이며 관리인 백부장이 그 동안 숭배해 오던 황제가 아니라, 바로 저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숨지셨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어떤 특정 사건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라 처형시켰던 사람인 이 백부장은, 예수의 죽음의 과정을 보면서 이 사람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백부장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열두 제자나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이 로마 백부장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고 모든 과정을 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마주 보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만이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마가는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  여인들

 

그와 더불어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여인들도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40-41)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있고, 이들 외에도 다른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41).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끝까지 따라와 목격한 자들이 대부분 여인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신앙심이 더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당시 억눌리고 숫자를 셀 때 들어가지도 못하던 여자들,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소외당하며 살던 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심지어 죽음의 자리에까지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늘 정의를 외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 같았던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결국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서 따랐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다 도망한 상태입니다. 오직 요한만이 그 근처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무리들이 다 사라진 그 자리를 이 여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말을 많이 하거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안이나 출신 배경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모태신앙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외적인 요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평소에 인정을 별로 받지 못하더라도 좋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입니다. 비록 그곳이 죽음의 자리일지라도, 그곳에 가면 손해를 보거나 수치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결단과 헌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이 여인들은 힘도 없고 인정도 못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려움이 닥칠 때 나타납니다. 주님을 평소에 사랑하며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아리마대 요셉

 

이제 또 한 사람, 아리마대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3)

 

그는 존경 받는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아리마대라는 곳은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살던 라마다임소빔을 말합니다.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자이며(23:50-51), 부자이고(27:57),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는 그 동안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못해왔습니다(19:38).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다는 듯,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비록 공회에서 축출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의 편에 서겠다는 단호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미 잡아 죽인 때입니다. 그렇다면 요셉 자신도 한통속이라고 몰려 어떤 고난을 당할지 모르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대하게 행동합니다. 더 이상은 비굴하게 믿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이제는 죽음도 각오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자기 목숨을 지키겠다고 예수님을 버렸고, 요한을 제외하고는 십자가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십자가 현장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제자라고 하셨습니다(8:34). 그렇다면 이 요셉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이 잘 될 때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비록 잘 안 되더라도, 이상하게 꼬이더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손해를 볼 상황이더라도, 용기를 내어 믿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함께 엮은 <1% 행운>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삶이란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흔히 운명론을 말하지만 사실 그 운명도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인생에 주어지느냐가 운명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들을 지혜로, 용기로 이겨낸다면 보다 환한 삶이 열릴 것이다.”

 

삶은 수많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얻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결국 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우리에게는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주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한 번 좋은 선택을 했더라도 그 다음 순간 또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에 잘못 결정을 내리면 인생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어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용기 있는 결단과 올바른 선택과 헌신은 결국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이번 다니엘 금식과 같이 음식과 미디어를 절제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께 집중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21일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어떤 어려운 순간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 있게 결정을 할 수 있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참된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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