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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22일 수요예배

예수신경 4

식탁 교제로서의 예수신경

(마태복음 1116~19)

 

 

 예수신경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   무엇이 진짜 거룩인가?

 

우리가 식사를 하는 상인 식탁은 단순히 밥만 먹는 도구로 쓰일 뿐만 아니라 교제의 공동체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사람들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교제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식탁을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식탁이 위험한 집단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예수신경을 선언하셨지만, 그분을 비난하는 자들은 식탁에서 전통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기 원했지만, 그 사람들은 정결예식을 지키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토라(율법)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가 식사 예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유대인은 정결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율법에 합당한 것, 코셔(kosher)’ 음식만 먹어야 했습니다. 토라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유대인들은, 예수의 식사 습관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에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고발하고 비난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9)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겉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사실 고대 이스라엘 율법서의 정확한 인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식사 습관 때문에 이런 비난의 말을 들으셔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무리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낸 식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식탁에서 어떤 행동을 하셨기에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까?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9:9-13)

 

어느 날 세리 마태는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예수님을 위하여 저녁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세리 친구들을 초청했고, 그들은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죄인들의 무리였습니다. 몇몇 바리새인들은 그런 죄인들이 예수님과 식탁에 함께 앉은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과 비난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식탁은 고상한 대화를 위한 자리였는데, 그 대화는 율법에 합당한 것정결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마태가 베푼 식탁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 사이에 놓인 벽이 되었는데,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꼭 악하고 비열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율법을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그들의 과도한 집착과 강박증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에게 식탁은 교제와 포용과 용납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삶 속에서 예수신경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식탁에 초대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해서 초대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다 초대하는 것이 예수님의 식탁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식탁에 초대하는 습관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율법적인 고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불순종하는 아들을 부모가 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문서가 있었습니다. 그 문서는 율법(신명기 21장 말씀)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예수님을 비난한 자들은 그 문서에 나온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고발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21:18-21)

 

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 말씀을 보면, 부모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는 패역한 아들을 부모가 붙잡아 장로들 앞에 데리고 가서 여기 있는 우리의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하고 술만 마십니다.”라고 고발합니다.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악을 제거하기 위해 반항하는 아들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모든 것은 예수님이 밥상에서 하신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식탁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식사 습관을 통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분의 습관을 나쁜 것으로 몰아 부쳤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은 식탁을 율법과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드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서 예수신경을 말씀하시며, 그것이 실천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중심이 예수신경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신경이 기도가 되면 그것이 주기도문입니다.

그것이 이야기가 되면 탕자의 비유가 됩니다. 그것이 사회가 되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로 환영하고 사랑을 나누는 식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식사 습관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으셨을 때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예수신경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식사 습관을 통해 드러내려 한 것은, 식탁은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해주는 열린 문이지, 사람들 사이를 구분하고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식탁을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하셨을 때, 그 식탁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예수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2.   식탁으로서의 예수신경

 

율법주의자들의 식탁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만일 네가 정결하다면 너는 나와 함께 식사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네가 깨끗하지 못하다면 몸을 씻고 내일 다시 와라.’ 그에 반하여 예수님의 식탁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네가 깨끗하든 깨끗하지 않든 상관없이 너는 나와 함께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깨끗하게 해주겠다.’

 

예수님의 식탁은 거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미리 정결함을 받고 올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하는 가운데 정결함을 받도록 해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식탁을 정결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곳으로 한정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자기들 역시 정결한 사람만 먹을 수 있는 식탁에서 먹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왔다.’” (5:30-32, )

 

이 말씀을 하실 때 세리들과 죄인들은 병든 사람죄인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건강한 사람의인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다 병든 사람이고 죄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자기들은 의인이고 저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죄인들을 자기들의 식탁에 절대로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보십시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8:9-14)

 

예수님은 식탁이 바로 이러한 은혜와 자비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사랑을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격이 있어서 주님의 식탁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로운 줄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런데 식탁이 은혜의 장소가 되는 순간, 식탁을 통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1)  식탁을 통해 받는 치유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에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병든 자들을 초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마태의 잔치 자리에서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9:12)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식탁에 초대하고 자신의 임재와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식탁에서 아바의 사랑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신경에 의한 교제입니다. 식탁은 그저 나무로 만든 탁자에 불과한데, 그러한 물건이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식탁은 실제로 우리가 목장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과 같은 식탁일 수도 있고, 때로는 침묵하며 산책하는 공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교회당에서 세겹줄 기도나 짝 기도로 손을 맞잡고 눈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어느 한 곳이 될 수도 있고, 집안에 놓인 의자나 차고나 동네 식당의 탁자에서의 교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물건이나 장소들은 우리를 아바 아버지와 만나는 장소로 이끌어줍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치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2)   식탁을 통해 발견하는 비전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으면 새로운 사회, 곧 예수님의 천국 공동체를 맛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천국 공동체는 예수신경이 삶을 변화시키는 사회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참 이스라엘이며, 그들은 영적으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식탁은 예수님에게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품게 해주었습니다. 곧 식탁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은혜를 제공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식탁은 사람들이 아바 아버지와의 교제를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비전입니다. 식탁이 그러한 천국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식탁이야말로 서로를 향해 열리고 초대하고 포용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탁은 하나의 사회를 만듭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의 물건일 뿐인 식탁을 사용하셔서 천국 공동체, 곧 예수신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비전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식탁은 새로운 사회, 즉 새로운 은혜와 포용과 회복과 변화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3)  식탁을 통해 부여되는 소망

 

예수님의 식탁 습관은 장차 다가올 세대를 기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아주 굉장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식탁 교제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자신의 식탁이 영원을 기대하고 있다고 분명히 언급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장차 올 세대에서는 이방인들도 그분의 식탁에 앉을 것이므로 자신에게 응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8:11-12)

 

지금 인종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합니까?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더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그날이 오면 인종 간의 차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이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4:2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천국에서 그들과 함께 다시 식탁에 앉을 때까지 두 번 다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더 이상 같이 먹고 마시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식탁에서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너무 분주히 움직이지만 말고 여유를 가지고서 이리로 와 그 천국의 맛을 좀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예수신경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식탁이 될 때

 

아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바를 사랑하고, 아바의 사랑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이 지금 어떤 사람이든지, 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우리의 식탁으로, 곧 우리의 교회, 목장, 가정, 사무실, 사업체로 초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구별해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의 식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다 초대하는 겁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 나오는 이야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이코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오이코스,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이제 사람을 보는 눈을 바꾸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교재에 질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림 속에 몸이 진흙으로 더러운 한 아이가 등장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소년은 지금 당신의 집 앞에 서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  가서 깨끗이 씻고 다시 와라.”

-  그냥 들어와. 진흙이 묻었든지 안 묻었든지 나는 상관없어.”

-  잠깐만 거기서 기다려. 내가 닦아 줄게.”

-  못된 습관 좀 버려라.”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6:1, )

 

위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  “가서 깨끗이 씻고 다시 와라.”


이것은 배척입니다. 여기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즉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오라는 것입니다. ‘너같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 교회에 오느냐? 우리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데 너 같은 사람이 들어오려고 하냐?’ 그러니 오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태도였습니다.

 

-  “그냥 들어와. 진흙이 묻었든지 안 묻었든지 나는 상관없어.”


이것은 무관심입니다. ‘네 문제는 내가 알바 아냐.’ 그런데 문제가 있는 사람은 마음대로 하라고 해도 그냥은 못 들어옵니다.

 

-  “못된 습관 좀 버려.”


이것은 비난입니다. 비난은 사람을 떠나게 합니다.

 

대개 교회에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새로 오면 우리가 보통 취하는 반응은 무관심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무관심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새로운 삶> 교재에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 나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세 종류로 본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람 같은 사람인데, 정말 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풍경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운전할 때 옆에 수많은 운전자들이 있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풍경 같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기계 같은 사람은 나와 조금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로서리 쇼핑을 할 때 나를 도와주는 직원과 같은 사람입니다. 서로 대화도 하지만 인격적인 교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을 볼 때 기계 같은 사람이나 풍경 같은 사람으로 많이 봅니다. 참 무관심합니다. 그런데 만일 소문이 안 좋은 사람이 목장에 오면 어떻게 합니까? 대개 배척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면 비난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무관심과 배척과 비난으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시고 하나로 묶어주시고 가족으로 해주신 것이 영혼을 구원하라고 하신 것인데, 오이코스로 묶어주셔서 여기서 훈련되어 나가서 영혼을 구원하라고 불러주신 것인데, 새로운 책임을 주신 것인데, 우리는 그 목적을 잊고 목장생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람직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잠깐만 거기서 기다려. 내가 닦아 줄게.” 더러운 모습으로 왔지만 내가 사랑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주신 뜻은 이렇게 서로 세워주는 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은 상대방을 향한 기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람을 보내주셨는데 저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을 이루시려고 하실까?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지만 주님께서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런 기대가 일을 냅니다. 기대는 하나님의 역사에 문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고쳐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우리와 함께 식탁으로 와 앉아서 먹으며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바로 주님이 주시는 치유와 비전과 소망일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단체도, 그 어떤 사람도, 예수신경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식탁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는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 식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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