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
2017년 2월 1일 수요예배
✦ 예수신경 1 ✦
“예수신경이란 무엇인가?”
(마가복음 12장 28~33절)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는 ‘예수신경’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시카고에 가면 노던 신학교(Northern Seminary)가 있는데 거기에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라는 유명한 신약 교수님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관계인데,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책을 못 찾다가, 최근에 이분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예수신경(The Jesus Creed)>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이 책을 중심으로 하여 앞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려 했던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도 그랬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으로 유명한 15세기 독일의 영성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하나님과 온전하게 교제하기를 원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책을 쓴 17세기 프랑스 수도사 로렌스(Lawrence) 형제는 하나님과 항상 대화하기를 갈망하며 살았고, 수도원 주방에서 일하며 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18세기 미국의 퀘이커 설교자였던 존 울먼(John Woolman)은 모든 상황에서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위대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 I. Packer)는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길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쓴 분입니다.
또 우리가 하는 <경건의 삶> 교재인 <영적 훈련과 성장>을 비롯한 여러 책들의 저자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영성 훈련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영적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위대한 영성 신학자였고 철학자였고 리처드 포스터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지난 2013년에 세상을 떠난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육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기를 간절히 원하며 살았습니다. 이분도 여러 중요한 책들을 쓴 분입니다.
또 많은 분들이 읽어본 <목적이 이끄는 삶>으로 유명한 릭 워렌(Rick Warren)은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린 삶을 간절히 원하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거장들은 믿음을 세워가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이 뭔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도 알았고, 그 모습이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들을 쓰면서 자신들이 꺠달은 크리스천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적 성숙을 이룬 사람들 뒤에 계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이 영적 성숙을 이룬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예수님이 믿음의 핵심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그것도 기존의 신앙고백(신경)을 바꾸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신경을 가리켜 우리는 ‘예수 신경’이라고 할 수 있다고 스캇 맥나이트 교수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교라는 상황 속에서 더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봅니다.
1. 유대교의 신경 ‘쉐마(Shema)’
신실한 유대인이라면 매일 아침 일어날 때와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큰 소리로 신경, 즉 신앙고백을 암송합니다. 이 신경은 모세오경의 하나인 신명기 6:4-9을 비롯해서, 다른 두 본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유대교의 이 신앙고백은 ‘쉐마(Shema)’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대교의 쉐마를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쉐마는 영적 성장에 관한 유대교의 신경으로서,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했고 또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맞추어 그것을 변형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4-9)
현대의 유대교 전문가에 의하면, 쉐마는 유대인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암송하는 기도문’이고, ‘유대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과 헌신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이 쉐마는 영적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야훼 하나님 한 분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쉐마는 영적 성장을 위한 ‘토라’(율법/모세오경) 생활방식의 윤곽을 제시해줍니다. 토라를 외우고, 읽고, 가르치고, 쓰고, 또한 마음에 되새기기 위하여 옷깃에 ‘치칫(tzitzit)’이라고 부르는 옷 술을 다는 일들이 그러한 생활방식입니다. 지난 번 안식월 때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 갔을 때 보니까, 유대인 남자들이 정말로 미간과 손목에 작은 나무 박스인 이것을 달고 있었습니다. 또 집에도 써서 달아놓습니다.
그렇게 쉐마를 따라 살아갈 때 약속이 주어집니다. 곧 쉐마를 따라 사는 유대인은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는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의 신경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토라(율법)를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니까 그들의 쉐마는 바로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방식은 바로 토라(율법)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2. 첫 번째 개정판으로서의 예수신경
그렇다면 쉐마를 신봉하며 따르던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은 어떤 위치에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참된 유대인으로서 매일 쉐마를 경건하게 암송하며 사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 율법 전문가에게 이 점에 대해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인데, 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내용은 마태복음 22장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조금 다르게 나오고 이것이 쉐마를 더 잘 보여주기 때문에 마가복음 본문을 택했습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8절)
유대인들에게 이 사람의 질문은 믿음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서기관은 유대교의 영적 중심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이 질문의 답을 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와서 질문한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은 당연히 그 답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쉐마를 암송하는 것으로 그의 질문에 답하셨고,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여 유대교 신경(신앙고백)을 변형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영성의 중심,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29-30절)
여기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6:4-5의 쉐마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예수님은 레위기 19:18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1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으로 많은 것을 하라는 명령만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 앞 구절을 보면 이웃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말씀에서 참된 믿음을 위한 ‘예수신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예수신경 안에서 “책 한 권을 단 한 마디의 말”로 담아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로 요약하셨는데, 그것을 제대로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웃 사랑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고 하나로 정리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변형된 유대교의 쉐마, 즉 예수신경 안에 전부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우리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사랑이란 어느 한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 관심을 가지고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말로만 불쌍한 사람에게 잘되라고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행함이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이렇듯 올바른 사랑은 감정이면서 의지이고, 또한 애정이면서 행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속으로 ‘I love you’라고 하거나 말로 “I love you”라고 해도 행동이 없으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도 하고 행동도 나가야 합니다.
유대교의 신앙에서 쉐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쉐마를 새로 정의하신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미간에도 붙이고 손목에도 붙였지만, 이 사람들은 마음은 없이 행동만 너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쉐마를 받아들이셨지만, 또한 거기에 다른 것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쉐마에 약간의 변화만을 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하고 경건한 쉐마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떻게 뭔가를 덧붙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추가된 부분이야말로 예수신경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매주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함께 고백합니다. 마지막 부분이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인데, 만약 아멘을 하기 전에 그 말 다음에다가 ‘나라에 세금을 내기 전에 십일조를 내서 교회를 후원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을 넣는다면, 아무리 교양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도 말이 안 된다고 공격당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이런 엉터리 문구를 사도신경에 넣었느냐고 뭐라 할 것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이 당시에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쉐마 대신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쉐마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추가하신 것, 즉 이웃 사랑은 유대인들이 모르던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에 있으니까 다 압니다. 십계명에도 5계명부터 10계명까지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니까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추가하시면서 유대교를 비난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신앙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교에가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대교의 신앙고백인 쉐마의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유대교적인 것이긴 했지만 예수신경 안에 나타난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강조는 유대교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예수신경의 내용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이웃 사랑을 믿음의 중심으로 여기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사랑만이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하셨습니다.
3. 나를 따르라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교의 전통적인 쉐마를 변화시키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교의 쉐마는 예수신경이 됨으로써 개인적인 차원이 되었습니다. 자기네 민족의 공동체 차원뿐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설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안 따르겠습니까? 사랑하면 따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 9:59-60)
이 구절들이 속한 본문인 누가복음 9:57-62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그 중 이 말씀은 두 번째 사람과의 대화 내용인데, 예수님이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그가 예수님께 간단한 요청을 합니다. “예, 제가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이 약간 퉁명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대답을 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해라.”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 있을 기회를 요청했고, 그 후 주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한 분이니까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은 인생에 한 번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요청하며 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정의하고 계십니다.
자기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대교에서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쉐마 암송과 관련하여 “자기 앞에 장사를 지낼 시신(특히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사람은 쉐마를 암송하는 것이 면제된다.”라고 하는 예외 규정을 둘 정도였습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쉐마도 자기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보다 우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자기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요구하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유대교의 장례 관습을 조금 알게 되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관습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 당시의 장례는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첫째로,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 그 즉시 가족들이 시신을 관에 넣어 무덤에 안치합니다. 그때 가족들은 며칠 동안 애도의 기간인 ‘쉬브아(Shiva)’를 가집니다. 그리고 시신은 무덤 안에서 약 1년 동안에 걸쳐 부패하게 됩니다.
둘째로, 그 후 유골을 관과 무덤에서 꺼내어 유골함에 넣고 다시 땅에 묻는데, 이것으로 장례 절차가 완전히 끝납니다. 이 관습은 선량한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부친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그리고 그가 토라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이 남자를 만난 사건이 그 첫 번째 장례와 두 번째 장례 사이였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선, 첫 번째 매장 이후 애도 기간 중에 상주가 자리를 벗어나 돌아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예수님이 매우 엄중한 이 의무를 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만일 예수님과 이 사람의 만남이 첫 번째 장례 기간과 두 번째 장례 기간 사이에 일어났다면,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시점까지는 최대 1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의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예수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기가 이해한 대로의 토라를 따를 것인가에 딱 걸린 겁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고 명령하셨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과 동일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유대교의 쉐마(하나님 사랑)가 예수신경(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쉐마에 대한 혁명적인 이해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평범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의 믿음은 유대교의 쉐마와 함께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의 쉐마를 두 가지 방식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추가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신경이고, 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의 기초가 됩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아셨고, 그 삶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릭 워렌(Rick Warren)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삶에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인생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은 시간이다. 그리고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지금이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빼면 인생에서 뭐가 남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시간을 내야 사랑하는 겁니다. 시간은 내지 않으면서 말로만 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4. 이 시대의 예수신경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어린 시절 쉐마를 암송하는 법을 배웠고, 역시 유대인이었던 그분의 제자들도 당연히 이 쉐마를 암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쉐마를 계속 암송했을 것은 분명하지만, 원래의 쉐마에서 약간 변형된 것인 ‘예수신경’,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암송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그들에게 하나의 신경(신앙고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경은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겁니다. 우리가 이 예수신경을 날마다 암송하며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 예수신경을 암송하며 신앙을 고백할 때, 하루 일과에 리듬을 주고 하루를 편안하게 해줄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날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고백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를 붙들어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소위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The Greatest Commandment입니다. 그러니까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매일 고백한다면 그것은 부담이 아닙니다. 그럴 때 삶에서 하늘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이 세상에서의 사명은 다 다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은 예수신경과 함께 시작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지는 서로 다 다르지만, 우리 각자의 삶은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주어졌고, 그 삶은 예수신경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한 서기관이 믿음의 핵심에 대해 예수님께 물었고, 예수님은 그에게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대답에다가 한 가지 혁명적인 내용을 붙이고 또 그것을 살짝 꼬아서 제시해주셨습니다. 그 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붙이셨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신경을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신 대로 나도 살겠다는 헌신과 결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이웃과 함께 하며 그를 위해 존재하는 데 헌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도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신경을 암송하며 고백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이 찔릴 수도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내용이지만, 이 작은 예수신경은 하나님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이웃을 얼마나 자주 사랑하지 않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여정에서 특정한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도록 도전해주며, 더 넓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실천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매일 이 예수신경을 암송하고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매일 이 예수신경을 고백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예수신경을 고백하면서 하루를 마감하기로 약속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책갈피도 만들어서 드렸습니다. 성경에 꽂고 다니시면서 최소한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루를 이것으로 시작하고 하루를 이것으로 마칠 때 삶이 얼마나 바뀌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것을 고백하며 내일을 또 다짐합니다. 저도 물론 하겠습니다.
하루 중 일어날 때와 잠잘 때 하는 것은 미니멈이고, 언제든지 머릿속에 이것이 떠오르면 그때마다 이것을 암송하며 고백해야 한다면 우리의 삶이 변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신경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 모두 매일 이 예수신경을 고백하며 또 그대로 삶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