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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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HNR3RUfmGKE?si=1azy70b4Kq9LknDx

 

(녹화 중 인터넷 연결에 문제가 발생하여 끊어지는 현상이 일어나 몇 분 지난 후부터 설교 영상이 시작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2024121일 주일예배

예수님의 비유 2

좋은 땅으로 사는 길

(마태복음 131~9, 19~23)

 

[들어가는 말]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등 아주 귀한 책들을 저술한 영국의 지성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가 있습니다. 그분이 쓴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라는 책이 있는데, 우리 교회 도서실에도 있습니다. 삼촌 악마가 조카 악마에게 어떻게 하면 악마로 성공할 수 있는지를 쓴 편지문의 형식입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영국의 한 노신사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기독교 서적 한 권을 읽게 되었고 거기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맞아, 나도 이제 제대로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내 인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준비를 해야지.’ 그는 이런 도전을 받게 되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크게 바뀔 수 있는 이런 중요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그래서 그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하기 시작합니다.

 

밥을 먹고 나니까 식곤증도 오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내가 무엇이 특별하다고 이 나이에 인생길을 바꾸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점심을 먹은 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버스를 타고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예배당을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주일 아침 교회에 와서 예배하며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날은 특별히 말씀이 와닿습니다. ‘맞아, 나도 새로워져야겠다. 나도 이제는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봐야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 그런데 오늘은 설교가 좀 기네. 왜 안 끝나지? , 배고파. 오늘 점심 메뉴는 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예배가 끝나자마자 가서 식사하며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교회에 올 때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그런 나의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악마의 모습. 이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새해가 된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올해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언제나 새해가 되면, 올해는 뭔가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올해는 성경 통독을 하겠다.’ ‘기도를 열심히 해봐야지. 새벽기도, 금식기도를 해야지.’ ‘책 몇 권을 읽어야지.’ 등등 많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연초에 계획하고 결심했던 것들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올해가 시작한 지 불과 3주가 지났는데 새해가 되면서 세웠던 결심을 잘 지키고 계십니까? 벌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의지력이 부족해서 못 지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결심했던 대로 살지 못하고 늘 실패하는 걸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요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의가 흐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을 먼저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데,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중요하지 않아도 급한 것부터 먼저 하고, 적당히 오락과 여가를 즐기고 휴식도 취하고, 그러다 보니까 정작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삶을 즐기게 하면서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작전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대단한 영적 결단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실행으로 옮기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정말 중요한 일을 결심하되 당장 하지 말고 나중에 하도록, 그리고 지금은 일단 급한 일부터 하고, 또 인생을 즐기는 것과 재미있는 것부터 하게 만듭니다. 드라마나 영화나 예능 프로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가?’ 사실 아무리 재미있고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도 며칠만 지나면 기억나지 않습니다. 스포츠 역시 아무리 좋아해도 작년에 누가 우승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까? 어리석은 일입니다.

 

새해에 삶을 제대로 살려면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에 무엇을 먼저 할지를 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집중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1.   문제 제기

 

오늘 본문의 비유를 가리켜 소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비유로 불립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농경문화인데,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는 일과 파종 후 밭에서 수확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네 가지 다른 밭에 뿌려진 씨가 다른 결과를 낸 것을 서로 대조해서 보여줍니다. 어떤 밭은 100, 60, 30배의 수확을 얻지만, 다른 세 밭에서는 한 톨의 수확도 얻지 못한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온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같은 사람이 같은 씨를 뿌렸는데도 네 가지 다른 토양이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 책임이 결국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됩니다. 본문 뒤에 나오는 구절들을 죽 읽어보면,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씨는 천국에 관한 말씀이며, 밭은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는 이전에도 설교 때 다룬 적이 있고 <생명의 삶> 공부에서도 다룹니다. 여러분도 이전에 한두 번 이상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 접해본 적이 있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 , 그리고 씨가 떨어진 밭 중에서 어느 한 가지만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결실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다시 말해, ‘씨 뿌리는 자씨가 떨어진 땅이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결실하게 된 세 가지 이유

 

1)  씨 뿌리는 자의 자비로운 파종 (1~3)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모습을 보며 부주의하고 서툰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중한 씨를 정성스럽게 뿌린 것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전혀 씨가 자랄 수 없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사이에 아무렇게나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곳에 아까운 씨앗을 뿌려 낭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농부의 씨 뿌리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밭에 나가 계속해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성실함에 집중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을 잘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고 씨가 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가 6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뿌리다또는 수동태로 떨어지다’(뿌려지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3)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4)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5)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7)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8)

 

씨 뿌리다라는 동사가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어로 스페이레인(speirein)’인데, 이 동사의 반복적인 사용은 씨 뿌리는 자가 직접 씨를 밭에 뿌렸고 그 씨가 정확히 밭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씨를 뿌리는 자는 좋은 땅을 구별하여 거기에다만 제한적으로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사이에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씨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는 모든 종류의 토양에 씨를 골고루 뿌려서 씨가 자랄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가 씨를 골고루 뿌린 것은 자비에서 나온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 씨 뿌리는 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씨 뿌리는 자로서 씨를 뿌리십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시작 부분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1 그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1-3)

 

씨를 뿌리는 자로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와 무리를 향해 바닷가에 앉으십니다(1). 물 위에 떠 있는 배 위에 올라가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십니다. 수많은 무리가 가까이 다가와 천국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배에 올라가 앉으십니다(2). 그리고 당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들으며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소재로 삼아 쉬운 비유로 천국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을 가르치십니다(3).

 

씨를 뿌리는 자로서 예수님은 말씀의 씨앗을 뿌릴 대상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영접하기는커녕, 심하게 반대하면서 적개심을 품고 공격해 오는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기꺼이 천국 말씀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우리와 얼마나 다르십니까! 우리는 보통 재미있는 것을 하거나 누구를 만나 밥을 먹거나 할 때, 나를 싫어하고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을 불러다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살짝 불러서 너만 나와.’라고 하는 경우가 사실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까지도 말씀을 똑같이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에서 나오셔서많은 무리가 모일 수 있는 해변에서’(정확히는 호숫가에서) 천국 말씀을 선포하셨고, 누구든지 그 말씀을 들으며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소재로 삼은 쉽고 평범한 이야기인 비유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100배의 결실을 할 수 있는 천국 말씀의 씨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기회는 다 주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가만히 보면 그런 것이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똑같은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뭔가 흘리기는 흘리는데 침을 흘리며 졸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는 흘리는데, 졸려서 하품하다 나오는 눈물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있는데 어떻게 이리도 반응이 다릅니까?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말씀을 듣지만, 사람마다 반응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다 주어져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2)  밭에 떨어진 씨 속에 담긴 풍성한 수확의 열매 (8)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두 번째 열쇠는 밭에 떨어진 씨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신데, 이 씨가 또 중요합니다. 어떤 씨를 농부가 밭에 뿌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농부가 뿌린 씨는 최상품의 좋은 씨앗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100, 60, 30배의 놀라운 결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8)

 

물론 다른 세 땅(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밭에 뿌려진 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선별적으로 구분하여 좋은 땅에만 좋은 씨를 뿌린 게 아니라, 모든 땅에 똑같은 종류의 씨, 즉 최상품의 씨를 뿌린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생명력과 잠재력을 가진 씨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19)

 

이것을 보면, 이 씨는 바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천국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들에게는 이미 약속된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선물이 담겨 있습니다.

 

이 천국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신분이나 지위나 소유와 관계없이 공평하게 선포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풍성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뿌리신 천국 말씀의 씨앗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천국 백성이 거둘 수확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조금 나은 것 같기는 한데, 요즘 한국에서는 데서는 책이 안 팔립니다. 그래서 출판사마다 굉장히 힘들어하고 또 한국의 대형 서점들 중 문 닫는 곳들도 지난 몇 년 사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요즘 한국을 방문할 때 대형서점을 가보면 책만 파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책이 부수적이고 주된 상품은 다른 것들입니다. 굿즈나 선물이나 상품 같은 것들입니다. 예쁘고 팬시한 것들을 많이 팝니다. 가서 보십시오. 전부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도서실에도 책이 있고, 저도 책을 많이 사서 있는데, 제가 책을 쭉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걸 언제 다 읽나? 은퇴할 때까지 다 못 읽겠다.’ 만약 똑같은 책이 모든 교인의 집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책이 모든 교인의 집에 다 있는데, 그것을 읽은 사람이 있고, 그냥 꽂아만 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똑같은 책인데 누구에게 더 유익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읽은 사람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읽고서 금방 잊어버린 사람과, 읽으면서 읽고 또 읽으며 진짜 좋은 아이디어다. 내가 이대로 한번 살아봐야겠다.’ 하며 실행하는 사람 중 누구에게 더 유익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이것을 읽고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것이라도 덮여서 책장에 꽂혀 있는 책과 지금 읽히고 실행이 되는 책은 가치가 다릅니다.

 

성경이 그렇습니다. 요즘 성경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많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집에 가보면 성경이 종류별로 몇 권씩은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있으면 뭐 합니까? 읽어야지.

읽으면 뭐 합니까? 행해야지. 그러니까 똑같은 것인데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익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3)  풍성한 열매를 맺은 좋은 땅의 순종 (4~8)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또 하나가 바로 네 가지 다른 땅들입니다. 땅이 다르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해 보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은 애초에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실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별로 책임이 없다고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것은 토양의 상태가 아니라 밭에 뿌려진 씨에 대한 각 땅의 반응과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네 가지 다른 땅은 떨어진 씨를 받아들이는 다양한 반응과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네 가지 땅들을 보면 씨를 점점 더 잘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주는 순서로 되어 있는데(길가-돌밭-가시떨기-좋은 땅), 그것은 어떤 땅이 천국 말씀인 씨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땅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 땅들은 어떤 태도로 씨를 받아들였기에 저마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까? 이 네 가지 땅들은 결국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땅이고, 다른 하나는 열매를 맺은 땅입니다. 결국 두 가지입니다. 앞의 세 땅은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좋은 땅만 결실했습니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땅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천국이 임하였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두 가지의 다른 반응, 즉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과 거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19-23).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토양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4)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19)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녀 딱딱하게 굳어버린 길바닥처럼, 마음 문을 닫고 있어서 천국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꽉 막히고 닫힌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5-6)

 

“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0-21)

 

돌밭은 천국 말씀을 듣고 즉시 기뻐했지만 믿음의 뿌리가 없어서 신앙 때문에 어려움이 오거나 손해를 보게 되면 쉽게 믿음을 떠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7)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2)

 

가시떨기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아쉽게도 결국 결실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길가는 믿는 사람이라고 보기가 힘들고, 돌밭은 믿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안 믿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시떨기는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열매를 못 맺는 사람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8)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3)

 

유일하게 좋은 땅은 떨어진 씨를 잘 자라게 해서 100, 60, 30배의 큰 수확을 거둡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인데, 깨달았다는 말 속에 깨달은 말씀대로 산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고 깨달아 말씀대로 살아서 좋은 열매를 맺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좋은 땅이란 결국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자신 야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먼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좋은 땅의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이 장차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는 기쁨을 누리는 주인공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놀라운 천국 백성의 복된 삶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빼앗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조금 전에 세례 간증도 해 주셨지만, 형제님이 정말 핵심을 아주 잘 파악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아니 영원은커녕 얼마 가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합니다. 천국의 기쁨입니다. 이것을

약속하십니다

 

 

3.   씨 뿌리는 자의 초대 (9)

 

좋은 땅이 풍성한 결실을 거둔 이유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씨 뿌리는 자의 자비로운 파종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 밭에 뿌려진 씨 속에 이미 천국의 풍성한 열매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땅이 그 씨앗을 받아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와 씨와 좋은 땅이 서로 협력하여 수고했기 때문에 천국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와 씨까지는 네 종류의 토양에게 똑같습니다. 씨 뿌리는 자는 뿌렸고 또 씨도 떨어졌습니다. 거기까지는 네 땅이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각 땅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이 천국 비유를 들은 자들을 천국 백성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좋은 땅이 결실한 것처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복된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예수님은 이미 모두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 길은 100배의 결실이 보여주듯이, 처음과 마지막이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복과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천국 비유를 들은 모든 사람에게 천국 백성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렇게 살라고 도전하십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가 아니라, 좋은 땅과 같이 천국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잘 자라게 해서 100배의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천국 백성이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가 약속하는 은혜의 세계로 들어올 것을 강력하게 초청하십니다. 그것이 9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9)

 

여기 귀가 없는 분이 계십니까? 귀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 당시 나병환자는 귀가 닳아져 없어졌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에게 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도 그렇습니다. 정말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예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도 여전히 많고, 예배도 참 많습니다. 큰 교회는 1부에서 6부나 7부까지도 있습니다. 우리도 주일에 한국어 예배가 있고 영어 예배도 있고 어린이 예배도 있습니다. 또 수요예배도 있고 새벽기도도 있고,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다 참석한다면 1년에 도대체 몇 번 설교를 듣는 겁니까? 그런데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별 변화가 없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게다가 삶 공부도 하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기까지 하면 도대체 말씀을 몇 번 접하는 것입니까? 또 설교는 몇 번을 듣습니까? 주일예배만 참석해도 1년에 52번을 듣는 것인데, 그 말씀대로 살지 않을 거라면 설교나 말씀 묵상이나 성경 통독이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매주 설교를 듣지만, 예배가 끝나고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가만, 오늘 설교 제목이 뭐였지?’ 하고 생각이 갑자기 안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생각이 안 난 것이고, 아예 나가는 순간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지금 나의 삶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삶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할 때 열심히 하고 은혜도 받는 것 같은데, 조금만 지나면 언제 배웠냐는 듯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들어오시는 분들도 있고 다른 데서 듣고 오시는 분도 있어서 이전에 배운 것이 생각나시겠네요?”라고 하면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쳐다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금방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내용을 다시 해도 언제 그런 걸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망각의 은사라고 하는데, 교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은사입니다. 여러분이 그 은사로 아주 충만하셔서 목사가 같은 것을 또 하고 또 하고 우려먹어도 전혀 눈치를 못 채니, 굉장히 은혜로운(?) 은사입니다. 이것을 진짜라고 들으시면 안 됩니다. ^^

 

그런데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했는데, 바로 나가서 서로 싸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설교는 왜 들어야 하고 왜 해야 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라고 설교했다고 할 때, 나가면서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갈라져서 나간다면, 도대체 그런 말씀을 들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예배 때 설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좋은 아이디어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설교해도 전혀 실천이 안 되니까 설교를 없애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굉장히 좋은 생각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 예배에서 설교가 가장 긴데, 그것을 빼버리면 30분 정도에 예배가 끝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대로 하지도 않을 것을 뭐 하러 합니까? 그냥 성경 말씀을 죽 읽고서 여러분, 이대로 사세요.” 하고 끝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듣기만 하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저번에 살펴본 산상설교(마태복음 7)에서 결론적으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말씀을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가 아니라, 말씀을 행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네 가지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땅만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이 저절로 좋은 땅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과 같은 땅이었습니다. 좋은 땅은 애초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척박한 땅을 삽으로 파고 곡괭이질을 하고 해서 갈아엎은 땅이 좋은 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수고가 들어가고 땀과 정성이 들어가서 만들어진 땅이 좋은 땅입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에 씨가 떨어지니까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한자어를 들어보셨습니까? 불한당(不汗黨). ‘너는 불한당이야.’라고 하면 다 기분 나빠할 것입니다. ‘아닐 불’, ‘땀 한’, ‘무리 당입니다.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노력하지 않고 거저먹겠다는 사람입니다.

 

전혀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서 신앙이 성장하기를 원하고 영적으로 잘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영적 불한당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단 이렇게 듣는 게 중요합니다. 또 말씀을 묵상하고 자기 스스로 듣는 게 중요합니다. 그다음에는 행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새해가 밝은 지 3주가 지났습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49주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해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좋은 땅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100, 60, 3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2024년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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