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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KFOTw7FehaA?si=keahbGGWV3yNpraY&t=119

 

 

 

20231217일 주일예배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 3

미련한 자인가, 슬기 있는 자인가

(마태복음 251~13)

 

[들어가는 말]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정식 이름이 영어로 Presbyterian Church (U. S. A.)입니다. 줄여서 PCUSA라고 부르고, 한국말로는 미국장로교라고 합니다. 우리 PCUSA 미국장로교는 진보적인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부분에 굉장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그래서 좀 안타까운 점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전에도 그런 것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점은 그 어떤 누구보다도 사회 정의에 앞장서 싸우는 교단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인종적인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아주 큰 목소리를 오래전부터 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소수민족을 굉장히 아껴 줍니다.

 

그런데 미국장로교에서 몇 년 전부터 대대적으로 벌이는 운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Matthew 25 Movement 마태복음 25장 운동입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 뒷부분인 31절 이후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살아나게 하는 가운데, 또 배고프고 억압받고 투옥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을 벌이면서 각 교회가 마태복음 25장 교회로 가입하라고 하는데, 거기에 동조하는 교회들이 많이 가입했고, 또 노회별, 대회별로 여기에 가입하는 노회와 대회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운동의 핵심 가치가 세 가지인데, 첫째가 활기찬 회중 만들기로, 각 교회가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조적 인종차별 철폐입니다. 인종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는 운동을 합니다. 세 번째는 조직적인 빈곤 퇴치입니다. 빈곤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퇴치하자는 운동을 벌이는 것이 마태복음 25장 운동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아직 거기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 당회나 연석회의에서도 거론한 바가 없습니다. 할 수도 있지만 왜 안 했느냐 하면 조금 아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동의하기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크게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가 있고, 또 두 번째로 14절부터 나오는 소위 달란트 비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게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마태복음 25장의 핵심은 사회 정의가 아닙니다. 그 핵심은 사회 정의가 아니라 종말입니다. 지금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것이 핵심인데, 그것은 빠져 있고 사회 정의를 열심히 실천해야 한다고만 하기에 아직 가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Matthew 25 Movement에 대한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언젠가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일들을 우리가 감당합시다.’라고 나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무 사회적인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가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 마태복음 25장 운동이라고 하면 25장 전체를 다 보면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5장 전체의 핵심은 사실 종말입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이 마지막 때를 대강절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바로 대강절의 의미 중 하나가 마지막 때 예수님이 오시는 재림을 준비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세 가지 비유를 계속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열 처녀 비유의 해석

 

오늘은 그중 첫 번째인 열 처녀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상당히 유명한 비유입니다. 다섯 명은 미련하고 다섯 명은 슬기로우며, 그래서 대개 결론은 우리가 슬기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슬기로운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성경을 볼 때는 항상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눈을 가지고 1세기에 쓰인 신약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면서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혼인 풍습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 그곳에서도 지방마다, 가정마다 약간씩은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대개 일반적인 결혼풍습은 이랬습니다.

 

신부의 아버지는 자기 딸을 위해서 잔치를 준비하고 신부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이제 곧 열릴 혼인예식을 축하하도록 해줍니다. 한편 신랑은 미리 정혼한 상태로 1년 정도 지내다가 결혼식 날짜가 되면 캄캄한 밤중에 자기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갑자기 신부의 집으로 옵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는데 1년 정도 되는 때 그중 하루에 갑자기 오는 겁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할 때쯤 되면 한 사람이 대표로 신부의 집을 향해 가서 이제 신랑이 곧 도착한다고 외치며 알려줍니다. 그러면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부를 집안에 두고 밖으로 나가 신랑과 그 일행을 맞이합니다.

 

신부의 친구들인 들러리들은 각자 횃불을 들고 나가서 신랑을 맞이합니다. 신랑은 이 남자 그룹의 가장 앞에 서서 집을 향해 옵니다. 바로 이때 횃불을 들지 않은 사람은 강도라고 여겨지거나, 이 기쁘고 즐거운 잔치를 훼방하러 온 사람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서면 여러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그 예식을 다 마치고 신부는 자기 들러리들과 함께 신랑의 집을 향해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열 처녀 비유는 바로 그러한 문화적인 배경을 알고 보아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당시에는 그 맥락이 종말, 즉 마지막 때에 대해서 가르치시던 중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볼 필요가 있습니다. 24장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자신의 재림에 대해 길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1)

 

오늘 본문의 열 처녀의 비유내용을 보면 사실은 비현실적인 것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신랑의 도착 시간이 밤중(자정)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밤에 와도 그렇게 아주 늦게 온다는 것은 오히려 2443절 도둑의 이미지와 더 비슷합니다. 또 뒤에서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사라고 하는데, 밤 열두 시에 기름을 파는 가게가 어디 열었겠습니까? 그것도 비현실적이고 인위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대개 한 비유에는 한 가지 핵심 교훈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한 가지 핵심 교훈이 뭔가를 찾아야지, 여러 주변적인 것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비유의 핵심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재림,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지체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종말의 때, 마지막 때를 철저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이 핵심 교훈 위에서 오늘 비유 내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2-4)

 

열 명의 처녀라고 하는데, 이것도 그렇습니다. 왜 열 명인가? 12명은 안 되나? 5명은 안 되나?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냥 열 명이라고 예를 드신 것뿐입니다. 이 열 처녀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여기 보면 열 명 모두 등을 가졌습니다. 일단 가지고 나온 등에는 기름도 들어 있어서 불이 탑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5)

 

열 명 모두 졸면서 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슬기 있는 다섯 명은 안 자고 미련한 다섯 명만 잔 게 아닙니다. 열 명 모두 졸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늦게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종말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신랑이 더디 온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재림이 빨리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2천 년이 지났는데 왜 이렇게 안 오시지?’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시간 개념은 우리의 시간 개념이지 하나님께 해당하지 않습니다.

 

더디 오신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딘 게 아닙니다. 가장 정확한 때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기에는 신랑이 더디 온다고, 즉 예수님이 참 늦게 오신다고 느껴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0)

 

문이 닫혔다는 것은 최후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혼인잔치가 벌어졌는데 문이 닫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하고도 해석이 어려운 것은 기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6-9)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가졌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준비하지 않은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동이나 미국 텍사스에서 많이 나는 석유를 의미하는 겁니까?

 

그래서 지난 이라크전쟁 때 크리스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미국이 석유를 얻고자 이라크를 공격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말세에는 오일을 잡고 있어야 강대국이 된다고 하면서, 그래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엄청나게 오르던 기름값을 보라고 하며, 기름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었다면, 우리도 지금 하는 것을 다 관두고 모두 Gas Station으로 바꾸거나 석유 회사에 취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 기름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 기름이 선행이라고 하거나,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거나, 은혜라고 하거나,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맞는다고 보기가 힘든 것은, 슬기 있는 다섯 처녀가 미련한 자들에게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9)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선행이나 믿음이나 은혜나 성령을 우리가 돈 주고 살 수가 있습니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를 100% 정확하게 알기는 힘든데, 그래도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이 기름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했느냐, 준비하지 않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기름을 준비했으면 종말에 대해 준비가 된 것이고, 기름이 없으면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고, 또 본문이 담겨 있는 마태복음 전체 내용을 살펴볼 때, 기름이 뜻하는 것 중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가운데 행하는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이전 내용들을 보면 이것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저번에 살펴보았던 산상설교 내용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산상설교 앞부분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6)

 

그리고 산상설교를 마치시면서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4-2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데, 무엇을 행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1-12)

 

11절에서 미련한 처녀 다섯 명이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합니다.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혼인잔치의 문이 닫혔습니다. 그래서 열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산상설교 중 721절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22장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는 것은 그냥 어쩌다 보니까 옷이 없어서 안 입고 오는 차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라는 것은 오래전에 이미 초청장이 나갔는데 때가 되면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 때가 되어 다시 연락을 받으면 그때는 옷을 갖춰 입고 잔치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생각하고 있다가 연락을 받으면 오는 건데, 비유에서 아무 준비 없이 예복을 갖춰 입지 않고 왔다는 말은 나는 여기를 방해하기 위해 왔다. 나는 너희를 대적한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처럼, 오늘 본문의 미련한 다섯 처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자기를 내어드리지 않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온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르고 안 믿는 사람을 비신자라고 합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신을 안 믿는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안 믿는 게 아닙니다. 신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 것이지, 신을 안 믿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도 뭔가 다른 걸 믿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안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안 믿으면 어떻게 삽니까?

 

여러분, 지금 중력을 안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만약에 나는 과학 법칙을 안 믿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나는 저거 안 믿어.’가 아니고 나는 저게 아닌 다른 것을 믿어.’라는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난 예수를 안 믿어.’라고 하더라도 예수를 안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는 사실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가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핑계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그거 몰랐는데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몰라서 못 믿은 게 아니고, 자기 결정에 의해서 다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게 비슷해 보이지만 굉장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할 때 저는 못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사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결정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성경에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라고 하는 것이 여기 다섯 명의 슬기 있는 처녀이고,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겠다.’라고 결정했다는 것이 바로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선행은 그 자체로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는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받은 구원의 결과로 나오는 선행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을 행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선을 행해야 우리가 자신을 구원할 정도로 착할 수 있겠습니까?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착하게 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 때도 있지만, 악하게 행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선을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 하고 찾아서 행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너무나 감사해서,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찾아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2.   비유가 주는 교훈

 

1)  주님의 재림에 대해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지난 2,000년 동안 계속해서 기다려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제자들 사도들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 이제 곧 다시 온다고 하셨으니 자기들이 살아 있을 때 금방 다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안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명, 두 명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 우리의 과 하나님의 은 다른가 보다.” 하며 쓰기 시작한 것이 성경입니다.

 

특히 신약 성경은 서로 의논하고 우리가 성경을 쓰자고 하며 쓴 게 아니라, 자기 있는 곳에서 성령님이 영감을 주셔서 그냥 기록한 것입니다. 대부분 신약 성경은 편지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성경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담겨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금방 안 오시니까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뭔가 기록을 해놓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각각 영감을 주시는 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테러 공격이나 아주 악랄하게 사람을 죽인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말세다, 말세.’라고 보통 말하는데, 사실은 1세기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도들 때부터도 항상 말세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말세였습니다. 지금도 말세입니다. 그런데도 2천 년 동안 예수님이 다시 안 오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예수님이 다시는 안 오신다는 것이 아니고 재림이 지체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열 처녀는 모두 신랑이 더디 온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이 그렇게 느낀 것이지, 신랑은 정확한 때 온 것입니다. 들러리들이 느끼기에 늦게 온다고 한 것은 자기들 입장에서 느낀 것입니다. 신랑은 입장에서 보면 결코 더디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신랑은 자기가 오고 싶은 때 오면 되는 겁니다. 정해진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 측에서 이때 와달라고 한다고 그때 가는 게 아닙니다. 신랑이 정해서 자기가 원하는 때에 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오든지,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지 상관없이 항상 깨어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같이 합시다.’라고 하면 다음에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음에 할 수 없고 너무 늦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준비하는 것이 불가능한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래서 세상 끝에는 단 두 종류의 사람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준비된 사람들, 둘째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실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게 아니라 준비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준비한 사람들과 준비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다섯 처녀는 슬기롭고, 다른 다섯 명은 미련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만 봐서는 누가 슬기롭고 누가 미련한지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열 명 모두 혼인 잔치에 왔습니다. 열 명 모두 등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또 열 명 모두 신랑이 늦게 와서 기다리다가 졸며 잡니다. 겉으로는 열 명 모두 똑같아 보입니다. 다 똑같은 모습을 지녔고, 똑같은 여건하에 있습니다. 겉모습만 봐서는 누가 슬기로운 자이고 누가 미련한 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슬기 있는 자와 미련한 자를 구분하는 것은 외모, 여건, 처지, 형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대한 준비입니다. 그런데 준비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가 언제 드러납니까? 신랑이 도착했을 때입니다. 신랑이 도착할 때만 그들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다섯 명은 신랑이 늦게 올 것은 대비해서 기름을 준비하고 왔지만, 다른 다섯 명은 그런 준비가 없이 그냥 등에 들어 있는 기름이 들어 있는 정도로 그냥 왔습니다. 그러니까 슬기 있는 자들은 신랑이 언제 도착하든지 상관없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아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서 왔지만, 미련한 다섯 명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자기 생각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만큼만 준비해서 온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신랑이 언제 오느냐를 봐야 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 하며 자기 판단으로 온 겁니다. 미련한 자들은 신랑 도착 시간을 자기 나름대로 계산해서 결정을 내린 겁니다. ‘설마 그렇게 늦게 오겠어? 적당히 이때쯤이면 오겠지. 그럼 이 정도면 충분하지.’ 하고 온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주님의 뜻이 아니고 내 생각이 기준인 삶을 살 때 그것이 이렇게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해 줍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우리에게 꼭 알려주고 싶으신 게 이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준비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내용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문제는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다리다가 졸고 잤다는 것도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 졸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할 때 졸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고,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로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준비가 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13)

 

이것이 핵심입니다. 핵심은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생명의 삶> 공부에서 죄의 정의에 대해 배우는데, 죄의 정의 중 하나가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선이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조금 도와주는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서 말하는 선은, ‘미래가 나에게 달린 게 아니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야고보서에서는 선이라고 정의합니다.

그와 반대로 내가 알아서 하면 된다라고 하는 것을 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 말씀과 너무나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한다.” 무슨 뜻입니까? ‘너희는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것을 마치 자기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으면 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적당히 이 정도만 하면 돼. 신앙생활은 딱 요 정도로만 하면 돼.’라고 한다면 누구의 생각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내 생각입니까? ‘적당히 이 정도 기준으로 살면 되는 거지.’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자꾸 네가 주인인 것처럼 하느냐?’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던 때에 오실지 모릅니다.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결국 깨어서 준비가 되어 있으라는 뜻인데,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든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신실하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열심히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으면 예수님이 언제 오셔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이쿠, 예수님이 오셨네.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이러면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어떤 마음이십니까? ‘한참 있다가 오시면 좋겠다. 지금은 내가 준비가 안 돼서...’ 그럼 결국 누구 기준으로 지금 살고 있는 겁니까? 자기 기준으로 사는 겁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지금 이 정도면 되는 거지.’라고 자기 기준으로 그렇게 살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몰라서 지금 오시면 어떡하지? 큰일인데.’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면서 신실하게 살면 언제 오시든지 무슨 걱정입니까? 언제든지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매일매일 열심히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열 명 모두 이 잔치를 준비할 시간이나 여건은 동등했습니다. 다섯 명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지고 다섯 명에게는 더 적은 시간이 주어져서 준비를 못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두 다 이 잔치에 참여해서 즐기며 축하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준비한 내용이 달랐고,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교회에 나와서 같은 시간에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도 슬기 있는 처녀와 같은 사람도 있고 미련한 처녀와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어디에 속하는지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만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저분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야.’라고 했는데 마지막 때가 되어 보니 그렇지 않을 수가 있고, 또 우리가 볼 때 저 사람은 영적으로 신통치 않아.’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준비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땅을 떠난다면 죽음의 순간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너무 믿음이 좋아.’라고 하거나 저 사람은 영 믿음이 없어.’‘라고 함부로 한단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다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또 이렇게 모두 하나님을 예배하러 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라고 부르지만 마지막 때 그 결과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바쁘다, 바빠.‘라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히 안 바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보면 그렇게 바쁘지도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진짜로 바쁜 분들이 계신데, 말로만 바쁜 분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높은 사람에게는 25, 26시간이 주어지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20시간만 주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24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간에 대한 명언이나 유머가 많습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전부도 아닌 공부 하나도 정복하지 못한다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간다.”

오늘 보낸 하루는 내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한다.”

 

시간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져 있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시간이 없고 어떤 사람은 여유 있게 삽니까? 우선순위가 잘 되어 있느냐, ds 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먼저 정해야 하고, 미루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할 일은 오늘 하는 겁니다. 저도 잘 안 되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 최선을 다해 가장 중요한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사랑의 실천 등을 해야 합니다. 요즘 너무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서 거기에만 심취하여 드라마와 영화만 보고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이웃을 더 사랑할지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8-9)

 

여기 보면 슬기 있는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주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인심이 야박하다.’라고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런 것이 지금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영적인 일은 남의 것을 빌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것은 남에게 빌려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가끔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편은 안 나오고 부인만 교회에 나오는 경우 이제 좀 나오시죠.”라고 하면 우리 집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다니니까 나중에 천국 갈 때 그 치맛자락 붙잡고 나도 같이 가면 됩니다.”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그런 건 없다는 겁니다. 남의 것을 빌려서 할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을 준비시켜서 해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손주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누구든지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각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남의 믿음을 빌려서 자기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장인어른은 없습니다. ‘하나님 시아버지도 없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만 계십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매번 안 빠지고 참석해도 자기 자신이 주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하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아무리 영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가도 자기가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이나 미국에 아주 좋은 교회들, 건강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초대형 교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유명하고 좋은 교회를 다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해야 합니다. 교회가 엄청나게 크고 좋다 해서 거기 다니기만 하면 저절로 자기가 그런 신앙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하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셔야 합니다. 목사의 일은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하고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최고의 설교를 하셨어도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안 바꾸기로 결단했습니다. ‘절대로 저 사람의 말을 듣지 말자.’ 하며 자기들이 바뀌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심판 때 주님 앞에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인데, 오래전 어느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시험을 치르다가 전도사로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시험공부를 별로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어서 시험을 보다가 이렇게 썼습니다. “교수님, 하나님은 모든 답을 다 아십니다. Merry Christmas!” 몇 주 후 답안지를 돌려받고 보니 거기에는 교수님이 이렇게 적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 100. 당신 0. Happy New Year!”

 

 

2)  문이 닫힐 때가 반드시 온다

 

한 가지 또 기억할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지만, 이것이 마냥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언젠가 문이 닫힐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문이 닫힌 후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신랑의 잘못이 아닙니다. 신랑이 나쁜 사람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문이 닫히면 그때부터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하는 게 그 당시 문화이고, 일단 마지막 때가 오면 그때부터는 아무런 기회가 없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끝납니다.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설교학 교수님이 아주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학생들에게 과제물을 요구할 때 절대로 기간 연장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목사가 되어 주일 아침이 되었는데도 성도 여러분, 제 설교 준비가 아직 안 끝났으니까 두 시간 뒤에 다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설교학 과제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말이 되는 말씀 아닙니까?

 

 

[나가는 말]

 

그렇다면 여러분, 나는 마지막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생활이 너무 바빠서 마지막 때가 올 것을 잊어버리고 살진 않습니까? 마지막 때에 대하여 준비하고 있든, 잊고 살든,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예수님이 먼저 오시든지 우리가 먼저 갑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행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사실 때문에 감사하면서 더욱 자신을 준비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름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시간을 매일 가지며 그분의 뜻을 깨닫고 또 그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내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며 매일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옵니다. 이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준비시켜야 하는데,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주변에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주님을 모르는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함께 그 기쁨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자신을 준비시키며, 다른 사람도 주님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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