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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RhiVJNYJd2A?si=u3kyAthloJfqRrIG&t=66

 

 

 

20231029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28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

(마태복음 724~27)

 

[들어가는 말]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대형 붕괴 사고가 종종 일어납니다. 19941021일 아침 740분경,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가 갑자기 무너져 3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트러스식 공법으로 만들어진 성수대교를 건설할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으며,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매에도 결함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로부터 약 8개월 후인 1995629일 오후 6시경 서울 서초구 삼풍백화점 건물이 붕괴하여 쇼핑객과 직원 등 무려 502명이 죽고 937명이 다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지은 지 오래 된 것도 아니고 단 6년밖에 안 되는 건물이 부실 공사로 인해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대한민국 사상 최대 인명 피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가만히 있는데 그대로 무너져서 생명을 잃었으니까 얼마나 안타깝고도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최근에도 건물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건물을 제대로 짓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반석 위에 집을 지었는지 점검하라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지막 심판을 암시하는 세 가지 비유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유를 말씀하셨고, 또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그리고 오늘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첫 번째 좁은 문과 넓은 문, 그리고 오늘의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두 가지 비유는 서로 의미가 통합니다. 두 개의 문과 길에 이어서 두 개의 집에 대한 말씀은 서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문을 통과하여 길을 걸어가다가 집에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두 가지 문 두 개의 문을 동시에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문 중 한 가지만 선택해서 들어갑니다. 길도 두 길이 있는데 둘 다 걸을 수 없습니다. 하나의 길만 걸어야 합니다. 집도 동시에 두 집에서 다 살 수가 있습니까? 집이 두 채가 있어도 동시에 두 군데에 모두 사는 게 아니라 하루는 여기서 지내고 하루는 다른 데서 지내는 것입니다.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은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뭐든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 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언젠가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산상 설교 전체를 통해 하고 싶으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 너의 인생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나는 좋은 것을 너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것을 선택할 것이냐?’ 이것을 지금 묻고 계십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집에 살기 원하십니까? 굉장히 화려한데 기초가 부실한 그런 집은 아무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아도 아주 튼튼하게 지어진 집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집은 큰 집이냐 작은 집이냐, 또는 자기 집이냐 아니면 렌트하는 집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전한 집이냐, 무너지는 집이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안전 문제를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고 계십니다. 공사 현장에 가면 안전제일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안전을 잘 안 지켜서 사고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의 결론은 예수님보다 1,500년 정도 앞선 사람인 모세가 한 마지막 유언과도 비슷합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유언과 같이 남긴 말씀이 바로 신명기인데, 그 마지막에 모세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30:19)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명의 길이 있고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또한 복의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을 택하라. 복을 택하라.’ 이것이 모세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굉장히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 그리고 반석 위에 지은 집을 택하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생명을 얻고 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본문은 집을 짓는 두 사람, 두 종류의 집에 대한 짧은 비유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 30세가 되어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기 때문에 가업을 이어서 계속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목수는 여러 가지를 만들지만, 특히 집을 지을 때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 비유를 잘 아십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경험에서 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린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이 들려주시는 이야기이고 또 어릴 때 많이 듣는 동화 중에 <아기 돼지 삼 형제>라는 이야기가 기억나십니까? 아기 돼지 삼 형제가 각자 집을 짓는데, 첫째는 짚더미로 짓고, 둘째는 나무로 짓고, 막내는 벽돌로 짓습니다. 그런데 늑대가 나타나 공격해옵니다. 첫째와 둘째의 집은 늑대가 -’하고 바람을 부니까 그대로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첫째와 둘째는 셋째 집으로 피신하는데, 셋째의 집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졌기에 아무리 늑대가 -’ 불어도 끄떡하지 않았고, 그래서 삼 형제가 늑대로부터 무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줘 보십시오. 그러면서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거지?’라고 물으면 웬만한 아이는 다 집을 튼튼하게 지으라는 거예요.’ 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은 튼튼하게, 안전하게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허약해서 그대로 무너질 집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편리한 집이라도, 아무리 비싸도 금방 무너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한국에서 미국에 금방 오신 분들이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뭔가 하면, 왜 이렇게 건물이 넓으냐는 겁니다. 한국은 땅이 부족하기 때문에, 특히 수도권 땅이 부족하기 때문에 땅을 깊이 파서 지하로 몇 층씩 내려가고, 또 위로 높게 지어서 10, 20, 30층 막 올라갑니다. 아파트들도 요즘 고층 아파트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여기는 땅이 넓으니까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이 그냥 넓게 단층으로 짓습니다.

 

사실 높은 건물을 지을수록 땅을 깊게 파야 합니다. 깊게 파서 짓지 않으면 무너지게 됩니다. 깊게 팔수록 높은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는 사실 밑으로 얼마나 깊이 파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낮은 건물은 별로 깊이 파지 않아도 되는데,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땅을 깊이 파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소홀하게 하고 또 쉽게 쉽게 갑시다. 뭐 어렵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면서 부실하게 하면,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때가 되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건물들이나 다리들이 붕괴되는 모습을 우리가 지금까지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건물이 붕괴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건물은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땅에서 완벽하게 안전한 건물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 같은 데는 건물 코드가 굉장히 까다롭게 돼 있는데, 왜냐하면 지진이 많기 때문에 그 지진에 견딜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도 7이나 8 정도의 강력한 지진에 견디게 설계하고 지어도, 진도 10의 엄청난 지진이 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아무리 우리가 안전하게 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종류의 집을 대조하여 보여주고 계십니다. 서로 반대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두 집에 똑같이 비가 내리고 창수(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칩니다. 비와 창수와 바람은 집에 다가오는 세 가지 시험을 나타냅니다. 비는 위에서 내리니까 위로부터 오는 시련이라고 할 수 있고, 창수 즉 홍수라는 것은 아래로부터 오는 재난이라고 할 수 있고, 또 바람은 옆으로 몰아치는 고난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닥치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폭우와 홍수와 태풍과 허리케인 같은 것들은 우리 삶에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과 문제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두 집이 이런 똑같은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한 집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이고, 다른 집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 집이 어떤 집인가, 튼튼한 집인가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두 집은 사실 똑같은 종류의 집입니다. 집은 똑같은데 기초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견디기도 하고 못 견디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강풍이 불어도 잘 견디고 끄덕 없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집 자체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집 자체보다 기초가 약해서 무너지니까 집도 같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기초 위에 세우느냐가 생명과 죽음, 견딤과 무너짐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그렇게 무너질 걸 알면서도 왜 모래 위에 집을 짓겠습니까? 모래 위에 지으면 반석 위에 짓는 것보다 빨리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용도 적게 듭니다. 또한 겉으로 화려하게 지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칭찬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스스로 굉장히 만족하면서 , 나는 참 지혜롭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강한 지진이 오는 것을 대비해서 진도 7이나 8까지도 견딜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하는데, ‘, 그 정도 지진이 오겠어?’라고 하면서 진도 56 정도에 견디도록 지으면 비용도 절감되고 공사 기간도 단축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뭐 설마 그렇게 큰 지진이 오겠어?’라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지역에 그동안 일어났던 지진 통계 자료까지 분석해 가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큰 지진이 온 적이 없다. 백 년도 전에 한 번 왔다더라. 그러니까 지금은 거의 올 가능성이 없다.’라고 판단하고 짓는 겁니다.

 

사실 무너지는 집을 짓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인생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2023년이 두 달 정도 남았는데, 불과 3년 반 전인 20203월에 눈에도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덮고 우리 인류의 삶을 이렇게 완전히 바꿔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재난이 닥쳐옵니다. 시간문제일 뿐이지, 이런 일들은 계속 일어납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무리 단단한 바위 위에 집을 지어도, 깨지고 무너질 때가 분명히 옵니다. 이 세상에서 깨지지 않는 집은 없습니다. 그런 기초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집을 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시라. 영원한 반석이시라.”와 같은 말씀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신약으로 오면 바로 그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계속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 반석이 되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기초와 반석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우리 현대인들은...’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지금은 현대가 아니라 후현대, 즉 포스트모던(Postmodern) 사회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회의주의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모든 게 상대적이다.’라고 하며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이 자기모순인 게, 자기가 말하는 그것조차도 진리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어떤 기초이든 상관없다. 뭐든지 갖다 쓰면 된다. 아무거나 상관없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기초는 없다. 그리고 이 기초를 붙잡지 않으면, 그 위에 세우지 않으면, 죄와 사망의 급류에 휩쓸려서 다 떠내려가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노래 중에도 주님 같은 반석은 없도다.” 하고 찬양하는 곡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각자 자기 집을 짓는 건축자입니다. 보통 인생을 집에 비유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집을 어떻게 지을까?’라고 청년 때 앞날을 전망하며 나는 어떤 집, 어떤 인생을 만들어 갈까?’라고 궁리하고, 또 중년과 노년에 접어들면 그동안 나의 집은 어떠한가?’라고 또 돌아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집은 지은 집을 통해 평가받게 됩니다.

 

물론 인생의 집을 혼자서 짓지 못합니다. 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집을 짓습니다. 인생을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모든것을 내 힘으로 이루었다.’ 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사실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 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면, 그것이 대부분은 맞는 말이더라도, 사실 그 사업이 성공하려면 여러 가지 변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때 이것이 탁 맞아야 하고, 자금도 탁탁 흘러야 하며, 또 누군가를 만나서 문제가 탁 해결되기도 합니다. 막히는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게 착착 뚫립니다. 그게 어떻게 전부 100% 다 자기 힘으로 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다 도움의 손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거, 어떡하지?’라고 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그 한 통으로 해결된다든지, 누구를 우연히 탁 만났는데 그 사람을 통해 해결된다든지, 우리는 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삽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무리 진짜로 전부 자기 힘으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아기로 태어나 자기 힘으로 자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부모님이 돌봐 주셨든지, 만약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누군가가 돌봐 줬으니까 이렇게 잘 큰 것이지, 자기 힘으로 혼자 성인이 되며 스스로 잘 컸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기는 내버려 두면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그런데도 나 혼자의 힘으로 다 이루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 또 결혼한 다음에는 배우자와 심지어 자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나 여러 다른 사람들, 교회에서도 우리 서로 성도끼리 사랑하고 섬기며, 직장 또는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의 도움의 손길을 받아서 우리는 인생의 집을 지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결국 자기 집을 짓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도움은 받지만 결국 자기 인생의 집은 자기가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도 자기에게 있습니다. 내 집을 짓는 것은 나의 책임이지,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됐냐고 다른 사람의 탓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든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사람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지은 인생의 집이 나를 지켜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을 우리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인생의 어떠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태풍이나 허리케인이 불어도 견딜 수 있는 집인가? 인생에 그런 강풍이 불어와도 견딜 수 있는 집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모자랄 수 있습니다. 확실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고 유명해졌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재난이 닥쳐올 때 내 인생은 안전한가, 아니면 위험한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번에 코로나가 닥치면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잘한 줄 알았는데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집은 안전한가를 우리가 잘 점검해야 하고, 특히 내 집은 제대로 된 기초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 하나가 나오는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밭에 너무 수확이 많아서 풍성해지니까 행복한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곡식을 쌓아둘 곳이 부족할 정도로 너무 많이 거두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둠으로써 이제 편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관점으로 보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고 총명하고 성공한 사람입니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까? 엄청난 소출을 얻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굉장히 절약도 잘하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재물을 허랑방탕하며 낭비하고,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도 아니고, 낭비가 아니라 재물을 잘 관리하겠다고 하는, 아주 경제관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잘 아끼고 절약하고 세이브하는, 누구나 본받을 만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육신의 필요와 영혼의 필요를 혼동했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9).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엄청나게 풍성한 것들로 많이 쌓아 놓으면 내 마음이 만족 될 것이다. 내 영혼이 만족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물질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속 이야기해주는 것, 또한 동시에 우리도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세상에 많은 것을 가지고 좋은 것을 가져도 우리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괜찮은데 조금만 지나면 다 시시해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억만금을 합친 것보다 우리 각자의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런데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채우려고 하면 채워집니까? 안 채워집니다. 내 마음보다 더 큰 존재로 채워야만 채워집니다. 성경은 바로 그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으로밖에 우리 영혼과 마음의 텅빈 공간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자에게 그러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12:20). 지금 그렇게 엄청난 곳간을 새로 짓고 거기에다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그 엄청난 소출과 곡식으로 꽉 채워놓고 뿌듯하여 , 좋다. 내가 이렇게 많이 채워 넣었구나.’라고 할 바로 그 순간에 목숨을 잃고 세상을 떠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죽음과 함께 땅에 지은 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빈손으로 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벌거벗고 태어났고, 죽을 때도 빈손으로 벌거벗고 갑니다. 진짜 1센트 하나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은 여전히 부동산이 굉장히 좀 문제인 것 같은데, 집이 뭐 몇십 채가 있어도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내 집이 아닙니다. 아무리 집이 많아도 그 집들을 죽은 다음에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빌딩이 몇 채가 있고 건물주라고 해도 그중 하나라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진짜 내 집은 천국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바로 그런 집을 이 땅에서 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기간 동안 그 집을 허술하게 모래 위에 짓는다면, 그것은 참 허망한 결말이 될 것입니다. 심판 앞에 모든 것이 그대로 무너집니다.

 

 

2.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어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4-25)

 

누구나 인생의 집을 제대로 짓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6-27)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말씀을 듣는 것은 다 같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다릅니다.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 즉 말씀대로 사느냐,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말씀을 듣지도 않는 사람은 집을 짓는 것을 시작하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집을 짓는다는 것인데,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일단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는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듣는 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듣긴 듣는데 행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1세기 당시 예수님이 활동하실 때 수많은 사람이 따라다녔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 명을 먹이실 때, 남자만 5천 명이면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할 때 최소 2만 명 이상이 되는 수많은 사람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때만 아니라 예수님이 다니실 때마다 항상 수많은 인파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겠습니까? 또 기적을 일으키시는 장면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처음에는 전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변화되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듣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말씀을 들으면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 이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다른 선택이 뭐가 있겠습니까? 말씀을 들었는데 말씀대로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 듣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목회편지에도 썼지만, 제 아들이 스타벅스에서 일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주문했습니다. “라테 주세요.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걸로요.” 우유를 빼고 라테를 만들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라테는 우유가 99%입니다. 그런데 우유를 뺀 라테라니,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런데 이런 것은 그냥 황당하다고 하고 끝날 일이지만,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이것은 황당한 정도를 넘어 완전히 인생이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가 저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주여를 한 번 하거나, ‘주여, 주여, 주여라고 3창한다고 했습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주여, 주여하고 두 번 하는 데를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횟수가 문제이겠습니까?

 

그렇게 앞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향해 주여, 주여라고 말로만 하는 게 문제라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듣기만 하는 것이 문제다.’라고 하십니다. 듣기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계속 예수님이 위선을 지적하셨는데, 그들이 말은 참 잘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성경 지식은 많았지만 실천하는 행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아주 화려하지만 기초가 부실한 집과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는 듣고 행하는 사람과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었으면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입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행할 것인가, 행하지 않을 것인가?

 

행하는 것도 자신의 결단과 선택이고, 행하지 않는 것도 자신의 결단과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어쩌다 보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기로 내가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결정입니다. 남 탓하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나의 결정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이제 그동안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을 마무리하는 시점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보내시게 될 텐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그냥 적당히 따라다니는 무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 이 시점에 와 있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는 그저 예수님을 너무 좋아하는 팬 정도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행함이라는 기준으로 나뉘어져서 정말 제대로 된 신실한 제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되지 못한 형편 없는 제자가 될 것인가? 이렇게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행함이 없다는 것은 듣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은 더 위험합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행하지 않으면 위선으로 가는 지름길이며, 자기가 무너지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좋은 사람인 줄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인 성경 말씀이 안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좋은데, 좋은 말씀을 들으면 자기가 그렇게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됩니다. ‘, 내가 정말 저런 삶을 살아야지.’라는 마음을 품게 되면 자기가 진짜로 그렇게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씀을 듣고 나가서 또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삶 공부를 듣고 배우며 , 정말 좋다. 나가서 정말 그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마음을 품게 될 때 그에 대한 행동이 없어도 자기가 마치 그렇게 사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저처럼 이렇게 모태 신앙, 즉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니고 몇십 년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도 우리 중 많은 분이 교회를 오래 다니셨습니다. 나쁜 말을 하는 설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좋은 말씀인데, 좋은 말씀을 들으니까 , 좋다, 좋다.’라고 하다 보니까, 내가 진짜 그런 좋은 삶을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라고 야고보서에서 말씀합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은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다.’라고 계속해서 야고보가 말씀합니다. 야고보서의 핵심이 뭡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죽은 믿음이라는 게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믿은 사람이라면 그 믿음이 삶 속에서 행함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어떻게 그 믿음이 삶 속에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야고보서 내용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가 주님의 말씀 위에 자기의 삶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고, 하나님 말씀이 곧 우리의 반석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옆에다 집을 지으면 안 되고, 말씀 위에다 집을 지어야 합니다.

 

말씀 옆에 짓는다는 것이 바로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 옆에 집을 지어놓고 나는 괜찮다.’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무너지는데,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십니다. 아주 크게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평소에는 잘 구분이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다 이렇게 교회에 다니고,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고, 헌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듣고, 또 삶 공부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삶 속에서 말씀을 행하는 것이 없다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행함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신 것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바로 그것이 말씀을 행하는 삶입니다.

 

산상수훈은 ‘OOO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는 팔복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복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복 있는 사람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마치 네 가지 토양 중 좋은 땅, 즉 옥토에 떨어진 씨앗처럼, 그런 사람은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 그러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수없이 많은 시험과 환난이 오지만, 우리가 말씀 위에 있을 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한 말씀만이 우리를 굳건하게 붙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말씀, 아는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일단은 듣고 배우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설교도 듣고, 스스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삶 공부도 듣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일단 들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나 삶 공부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행할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행할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목장에 와서 하는 것이 뭡니까? 삶 속에서 내가 행한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을 할 때 그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복잡하게 할 것 없이 설교 때 딱 하나를 붙들고, 조금 믿음이 성숙하면 자기가 매일매일 묵상하는 것에서 하나를 붙들고 그날 그것으로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설교 중에서 하나를 붙잡고 일주일 동안 그대로 행하려고 살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살아보다가 목장에 와서 내가 지난 며칠 동안 이 말씀대로 행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하여 좋은 열매를 얻었습니다.’라고 하거나, 해보았는데 잘 안 된 경우 , 이렇게 해보았는데 잘 안 됐습니다.’라고 하거나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서로 격려하면서 괜찮습니다.’라고 해줍니다. 잘했을 때는 잘했습니다. 계속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하고, 잘하지 못했을 때는 괜찮습니다. 계속 앞으로 해나가면 됩니다.’ 하고 격려해 주고 서로 기도해주는 것이 목장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와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도 듣고, 또 삶 공부에서 말씀을 배우고, 삶 속에서 그 배운 말씀을 실천해보고, 그 행한 말씀을 들고 목장에 와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와 삶 공부와 목장이 같이 돌아갈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를 하고 관두거나 한 주를 하고 관둘 일이 아니라, 꾸준히 우리가 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그런 과정을 통해 내면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인생에 싱크홀이 생깁니다. 가끔 도로에 싱크홀이 생겨서 그대로 사람이 빠지거나 차가 빠지는 일이 요즘도 벌어지지 않습니까? 갑자기 훅 꺼지는 겁니다. 인생에서 잘 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훅 꺼지는 겁니다. 내면을 잘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듣고 배우고 행함으로써 마음을, 내면을 가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성공했다가 갑자기 붕괴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뉴스를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의 기초는 무엇인가? 세상의 성공, 물질, 지식 같은 것이 나의 기초인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상당히 위태로운 인생이 됩니다. 심판 때 결코 나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어떤 타이틀, 어떤 권력, 아름다움, 지식, 재물, 심지어 내 가족도 언젠가는 다 떠나고 내 곁에 남아 있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지켜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는가? 내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시라고, 반석이시라고. 우리가 들은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살 때 반석 위에 서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며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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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시면서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너는 어느 기초 위에 너의 인생을 세우겠는가? 굳건한 반석인 나의 위에 너의 인생을 세우겠느냐,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 인기가 있는 것, 또는 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위해 세우겠느냐? 인생에 다가오는 폭풍과 비바람과 홍수를 보면서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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