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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8일 주일예배
✦ 제자의 삶 – 산상수훈 26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장 13~20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에 한강 다리 중 하나인 영동교가 있었습니다. 학교는 강남에 있지만 강북에 사는 학생들도 몇 명 다녔는데, 자기들이 영동교를 건너온다고 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차가 많이 막힐 때면 걸어서 다리를 건널 때도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 다리 근처에 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국민 트로트 가수 주현미 씨가 부른 <비 내리는 영동교>라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랬던 영동교가 언제부터인가 ‘영동대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영동대교만 아닙니다. 또 다른 국민가수 혜은이 씨가 부른 <제3한강교>라는 노래도 있었지만, 그 이름이 ‘한남대교’로 바뀌었습니다. 제2한강교는 ‘양화대교’로, 제1한강교는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외에도 한강에 놓인 다리들로서 잠실대교, 성수대교, 반포대교 등 많습니다. 여러분도 눈치채셨겠지만, 다리 이름에 모두 큰 ‘대’ 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특히 ‘큰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다리에는 모두 ‘대’ 자를 붙여서 ‘대교’라고 하고(물론 잠수교도 있지만), 문도 큰 것을 좋아해서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등 모두 큰 ‘대’ 자를 붙여놓고 거기에 화려한 문양을 새겨 꾸밉니다. 크고 넓으면 편리하고 좋은 면들이 있지만, 크고 넓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영적 측면, 구원의 측면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구원이 쉽다는 생각입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으니 얼마나 쉽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게 아니라 단순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이것저것 복잡하게 할 것이 없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것이지, 쉬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문제입니다. 자기는 영접하고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경우가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뒷부분에서 예수님이 바로 그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구원의 길이 많고 크고 넓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은 그 반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구원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좁은 문과 좁은 길, 그리고 넓은 문과 넓은 길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의 비유’입니다. 세 번째는 ‘나무와 열매의 관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 보고, 더욱 주님을 향해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좁은 문과 좁은 길 vs. 넓은 문과 넓은 길
예수님은 여기서 문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3절)
여기서 문을 두 개로 이야기하시는데, 하나는 넓은 문입니다. 일단 문이 있는데, 넓고 쉽고 인기가 있는 문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좁은 문입니다. 힘들고 소외된 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문 뒤에 무엇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주 멋지고 화려하고 좋은 문이라서 확 열고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천 길 낭떠러지라 그대로 떨어져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 뒤에 뭐가 있느냐가 사실은 더 중요합니다. 어디로 가는 문이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어떤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14절)
안타깝게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다가 멸망으로 끝납니다. 아무리 문이 넓고 화려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국 멸망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잘못 가는 것입니다. 문은 그 뒤에 있는 것과 앞에 있는 것, 안과 밖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문 때문에 그 뒤에 뭐가 있는지를 우리는 미리 알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크고 넓고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문을 선택해서 그것을 열고 들어가려 합니다. 그래서 넓은 문을 찾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기가 없다고 나쁜 것이 아니고, 인기가 있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 지혜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과 좁은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를 확실하게 초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왕이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지,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겠습니까? 그럼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그 뒤를 아시는 분이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믿을 만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이는 대로 선택하지 말고, 남들이 다 간다고, 다수가 한다고 따라 가지 말고, 쉬워 보인다고 선택하지 말고, 편해 보인다고 선택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문이 좁더라도 내가 들어가겠다고 하면 열어주시겠다는 뜻도 사실 여기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문이 아주 좁으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 명이 같이 못 들어갑니다. 한 명씩, 한 명씩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상당히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우리가 다 같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한 명씩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각자 결단하고 갖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라고 아들이 자동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할아버지가 위대한 순교자이고 아버지도 위대한 목사라고 해서, 그 아들 딸도 자동으로 구원받고 위대하게 된다는 게 아닙니다. 각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간 다음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 문을 한 명, 한 명 통과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함께 가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들어가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혼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 들어가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좁은 문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고 끝이냐?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십니다. 좁은 문을 통과한 다음에는 좋은 길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이 여전히 좁다는 겁니다. 좁고 길이 협착합니다. 그래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그 뒤에 계속 좁은 길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고생 다 하고 이제 행복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좁은 문을 지나서 목적지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고 구원받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고, 믿은 후의 길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고 좁은 길로 걸어가야 하는데,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걸어야 합니까?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이라고 우리가 편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우리가 안락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의 길을 택해서 걸어가라는 겁니다.
좁은 문으로 통과해서 이제 좁은 길이 나온다면 사실 제대로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했는데 넓고 편안하고 안락한 길이 나왔다면 뭔가 잘못된 길입니다. 또 넓은 문을 통과했는데 좁은 길이 나타나는 것 역시 뭔가 잘못된 일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했으면 좁은 길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여기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내용들을 보십시오. 넓은 길이 어디 있습니까? 넓은 문이 어디 있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남이 미니까, 할 수 없으니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들어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정말 애쓰고 힘써서, 마치 올림픽 선수가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힘쓰는 것처럼 그렇게 목숨 걸고 사력을 다해서 들어가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조건이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온갖 짐을 다 들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엄청난 치장을 하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데, 높은 왕관을 쓰고 들어갈 수가 없고, 옷도 화려하게 잔뜩 걸치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명품이고 좋은 가방이라도 큰 것을 들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과감히 버릴 것을 버리고 들어가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몸을 움츠리고 겸손하게 낮추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좁은 문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옛날 어린 시절에 놀다가 소위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했던 경험이 혹시 있으십니까? 그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를 들어가는데 온갖 치장을 하고 왕관을 쓰고 어떻게 들어갑니까? 아주 최소화하고 살짝 몸을 집어넣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 무거운 것, 얽매이는 것을 다 내려놓고 들어간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욕심, 정욕, 교만을 다 내려놓고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결국 회개함으로 몸을 가볍게 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가면 좁은 길이기 때문에 혹시 어떻게 해서 문은 통과했더라도 그런 온갖 것들을 다 들고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짐이 많으면 길을 걷기 힘든데, 그것도 그 많은 짐을 들고 어떻게 좁은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좁은 문을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더 믿음이 좋은가? 내 믿음이 더 좋다. 내가 더 기도 열심히 한다. 내가 더 봉사 많이 한다.’라는 식으로 남과 경쟁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사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사람들 중에 아주 소수만 주님이 뽑으시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게 아니라, 힘이 들기 때문에 그냥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자기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넓은 문이나 좁은 문 중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은 매력이 없어 보이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좁은 문을 택하지 않고 넓은 문을 택한다는 겁니다.
저번 안식월 때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었는데, 그때 베들레헴에도 갔었습니다. 거기 소위 예수탄생교회라는 데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그곳에 가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그 지점에 엄청난 별 모양으로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출입구가 일부러 좁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원래는 큰 문이었는데, 고관들이 말을 타고 온갖 치장을 엄청나게 하고 왔기 때문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거만한 모습으로 올 수 있는가 해서 일부러 문을 좁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내려서 겸손하게 머리 숙이고 들어오라고 원래 컸던 문을 작은 문으로 좁혀 만들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그렇게 걸치고 있던 것을 벗어야 하고, 들고 있던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이 땅에서 배척당하기도 하고, 인내하고, 헌신하고, 순종하면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것, 좋은 것을 기대하고 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어떤 한 부자 청년 관원에게 예수님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준 다음에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시니까 그가 근심하고 돌아갔는데, 다시 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낙타가 바늘귀(구멍)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 19:24)라고 하셨습니다.
바늘구멍이 얼마나 작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무슨 낙타가 들어갑니까? 낙타는커녕 손가락도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낙타가 그 작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분명히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문이 닫힌 다음에 열어달라고 할 사람이 많다고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다 내게서 떠나라.”라고 합니다.
일단 문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까지 온 길과 분리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니 아주 잘했습니다. 좋은 결정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엔 또 좁은 길이 나온다는 겁니다. 아주 협착 협착한 길이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면 이제 넓은 길이 펼쳐지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여전히 길이 또 좁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고생하는 길이고 힘든 길이고 어려운 길이라는 뜻이라기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 즉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나의 구주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이제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믿고 구원받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제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니까 이제 좁은 길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히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좁은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받는 구원’의 과정, ‘성화’의 과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받는 구원’을 별로 중요시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나는 천국 간다. 끝.’ 하고는 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진짜 구원받은 것인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성령을 선물로 받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라고, 즉 매일매일 훈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하나님 앞에서 훈련하지 않으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사람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기에, 그래서 자기는 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훈련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신앙생활이 편안한 길, 영광의 길, 인기 있는 길, 출세의 길이 됐습니다. 1세기뿐 아니라 4세기 초반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박해를 당하고 순교자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 길은 외로운 길, 수고의 길, 고통의 길, 희생의 길, 헌신의 길, 심지어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4세기까지 로마제국에서 교회는 아주 극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바로 그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좁은 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십니다.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신 다음에 사탄이 와서 시험합니다. 세 가지로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지름길, 영광의 길, 넓은 길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라는 유혹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아주 바라는 길이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라는 것은 물질적 풍요의 헬라(그리스)의 길입니다. “나에게 절하면 내가 이 모든 권세를 너에게 주겠다.”라는 것은 정치적 권력의 로마제국의 길입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너를 받아 줄 것이다. 뛰어내려라.”라는 것은 종교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길입니다. 높은 데서 떨어지는데 천사가 탁 받아 주면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인기를 끄는 길인데, 그런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다 거부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인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뿐 아니라 그 후부터 4세기 초까지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교회사는 사실 순교의 역사입니다. 로마 시대에 황제들이 얼마나 박해를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 유명한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또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황제들이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했습니다. 주후 311년까지 계속 박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게 약 250년 동안 박해가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데, 놀랍게도 그사이에 성도들은 로마의 카타콤(지하무덤) 같은 데서 예배하며 모였고, 또 지금 터키 쪽의 갑바도기아 동굴교회와 같이 평생 지하에서 살며 빛도 못 보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걸어간 크리스천들은 아주 소수였지만 결국 그들이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박해를 당하면서도 전염병이 돌았을 때 전염병 걸린 곳을 청결하게 하는 것을 돕고, 또 고아들을 거두는 등 선한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잘 보이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전염병이 도는데 누가 나가서 거기를 청소하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고 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랑을 그냥 실천했습니다. 이웃 사랑을 정말 실천했습니다. 그런 사랑 때문에 로마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라도 칙령을 통해서 종교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이제 기독교도 종교로서 공인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잘못 아는 것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게 아니고 여러 종교가 있는데 기독교도 하나의 공인 종교로 인정한다는 것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후인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드디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국교로 되니까 4세기 후반에 얼마나 좋고 감사합니까? 이제 박해가 없고 편안하게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넓은 문, 넓은 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국교가 된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모릅니다.
왕과 귀족이 너도나도 크리스천이 되어 교회로 들어옵니다. 교회들을 세우는데 왕궁같이 큰 교회들을 세웁니다. 지금도 유럽에 가 보면 화려한 성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교회당이 화려하게 세워졌습니다. 또 감독과 주교가 엄청난 권력자가 되었고, 정교 유착이 일어나고, 왕이 공권력을 동원해서 교회 사제를 돕고 수많은 건축 교회당 건축을 지원했습니다. 또 교회와 국가가 아주 돈독한(사실은 아주 이상한) 관계, 밀접한 관계에 들어가서 국가의 정치권력이 교회에 개입하고 또 교회는 국가 정치에 개입하는 식으로 되었습니다.
게다가 교회 치리도 느슨해져서, 무슨 범죄를 저질러도 오케이 하고 넘어가고, 교인이 된다는 게 무슨 유행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아직도 크리스천이 아니야? 아휴, 유행에 뒤떨어졌네.”라는 식으로 된 겁니다. 얼마나 교회가 소위 살맛 나는 세상이 되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니까 더 이상 성도들은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모이기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주일에 땡 하고 종 치면 교회당에 와서 잠깐 예배에 참석했다가 끝나면 가고, 나머지 삶은 전혀 성경과 다른 자기만의 세상을 살고 또 일주일 후에 또 오는 삶이 반복되었습니다. 중세에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된 겁니다.
게다가 사제들을 지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의 고위 공직자와 같은 엄청난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제들이 그렇게 되니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은 등한시하고, 고위층과 즐기는 일, 파티 참석해서 발을 넓히고 관계를 쌓고 인맥을 쌓는 일에 힘쓰는 경향이 점점 많아진 겁니다.
또한 교회는 엄청난 부을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에는 너무나 놀랍게도 유럽 전체 부동산의 무려 40%를 교회가 가지고 있었다니, 얼마나 돈이 많았습니까? 중세시대에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부유를 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황, 추기경, 사제들이 영혼을 돌보는 일보다 서로 권력과 돈을 더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서로 싸웠습니다. 교회의 금고를 채우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걷고, 성직을 매매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일이 일어났고, 게다가 성직까지 돈을 주며 사고파는 매매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상황 가운데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이 종교 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걷던 교회가 이제 인정을 받으니까 오히려 넓은 문을 택하고 넓은 길로 걷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바로 얼마 전 시대만 해도 사실 교회가 굉장히 넓은 문, 넓은 길이었습니다. 신학교가 너무 인기가 좋아서 아주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도 재수하고 삼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3년 과정의 신학대학원을 나와야 목사가 되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는 학교마다 300명에서 350명을 매년 뽑았고 거기 못 들어가서 재수나 삼수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20~30년 전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신학대학원이 다 미달입니다. 이제 오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간신히 1대 1 정도로 미달이 안 되는 학교가 두세 개 있고, 나머지는 1대 1도 되지 않아서 미달입니다. 신학대학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부에 학생들이 오지 않습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상황마다 달라서 일괄적으로 모두 이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편리 때문에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방이나 시골 지역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부모가 아주 유력한 목사나 장로인데 그 자녀가 목사가 되면 더 나은 환경에서 목회할 수 있는 길을 찾기에 바빠서 교회 목회지 대물림, 즉 세습 문제가 나오는 겁니다. 지금도 기가 막힌 방법으로 수를 써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만 그런 게 아니라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교회나 기독교가 국교로 됐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봉사자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모든 형편이 다 나아졌는데도 예배를 위해 시간을 낼 수가 없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그 말씀을 거부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를 삼가고 열매를 맺는 삶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라고 명하셨는데, 또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목사이니까 굉장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목회자 중에도 넓은 문, 넓은 길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경우 그러한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얼마나 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십시오. 올바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어느 정도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위 좀 잘못됐다고 우리가 비판하는 목사들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게 아닙니다. 잘 나가다가 언제부턴가 삐끗해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나간 겁니다. 그러니까 한동안은 잘할 수 있는데 끝까지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참 적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5절)
여기서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도 같다고 하십니다. 겉보기에는 선량해 보인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노략질하고 죽이는 이리입니다. 참된 목자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한다고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눈이 나쁘기 때문에 양의 탈을 늑대가 쓰고 오면 그것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스스로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회중을 혼란하게 만들고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참된 제자가 아니라 가짜 제자, 사이비 제자입니다.
특히 거짓 선지자들은 포장을 잘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또 거기에 넘어갑니다. 말을 잘하는 언변이 뛰어나고, 외모가 좋고, 학위가 있는 등의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데, 가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16절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6절)
열매로 그들을 안다는 겁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습니다.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냥 봤을 때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우리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압니까? 나무에 열매가 달린 것을 볼 때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나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열매를 보니까 사과가 달려 있으면 사과나무임을 알 수 있고, 복숭아가 달렸으면 복숭아나무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보라는 겁니다. 또한 같은 열매라도 열매에 차이가 있습니다.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7-18절)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고, 또 그 열매가 좋으냐 나쁘냐를 보면 나무의 건강 상태가 어떤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점점 메마르고 몹쓸 열매만 내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잎은 무성한데 열매가 하나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열매를 맺긴 맺었는데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잘 분별해야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실 성품의 열매입니다. 전도의 열매도 있고 사역의 열매도 있지만, 성품의 열매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성품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이미 ‘팔복’에서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청결하고, 화평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이 바로 성품의 열매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좋은 땅처럼 30배, 60, 100배를 거두게 됩니다.
네 가지 토양의 비유(마태복음 13장)가 있습니다. 씨가 뿌려졌는데 길가에 떨어지고, 돌짝밭에 떨어지고, 가시덤불 안에 떨어지고, 또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좋은 땅만 열매를 맺고 나머지는 다 열매를 못 맺습니다.
씨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네 가지 종류의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이 다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전혀 관심이 없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잘하는 것 같다가 그냥 사그러지고, 어떤 사람은 잘하고 싶은데 열매가 없고,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갖고 옵니까?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옥토에 떨어진 씨의 차이점은 딱 하나입니다. 열매를 맺는가, 못 맺는가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도 어느 정도 싹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더 자라서 열매를 맺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크리스천의 문제는 바로 이 가시덤불에 머물러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좋은 땅으로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가시덤불이라 열매를 못 맺습니다.
이 네 가지 토양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길가’와 같이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는 없지만, 주로 가시덤불과 좋은 땅 사이에서 헤맵니다. 지금 이 시대 모든 크리스천의 문제는 열매를 맺느냐, 못 맺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열매를 못 맺고 있느냐, 아니면 맺고 있느냐? 그것이 내가 가시덤불의 상태이냐, 좋은 땅의 상태이냐를 보여줍니다.
나는 지금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혹시 열매를 맺었다면 이 열매는 좋은 열매인가, 나쁜 열매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9-20절)
여러분, 이 다음인 21절에 엄청나게 중요하면서도 해석이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새가족반’의 ‘예수 영접 모임’ 때도 그렇고, <생명의 삶> 때도 하기 전에 질문을 합니다.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그럴 때 어떤 분들은 ‘예’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아니오’라고 하고, 어떤 분들은 ‘모르겠음’이라고 합니다. ‘아니오’라는 것은 아직 믿지 않는 상태이고, ‘모르겠다’는 경우가 가장 문제입니다.
자기가 분명히 믿기는 믿는 것 같은데,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하면 ‘예,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종교가 뭐냐고 하면 기독교라고 말은 하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확신을 주기 위해서 많은 것을 합니다. <생명의 삶>에서도 그런 것을 계속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 하나님의 자녀가 가는 곳이 바로 하늘 아버지가 계신 천국이라는 것을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쉬운 것 같습니다. ‘아, 그럼 나도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서 이제 천국에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믿느냐고 하면 ‘예, 믿습니다.’라고 하고, ‘그럼 이제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하면 ‘예,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어디에 갈 수 있습니까?’ 물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굉장히 쉬운 것 같은데,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다음에는 삶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이제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제 천국 백성이다.’라고 한다면, 천국 백성으로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맺었다면 좋은 열매인가? 만약 아니라면 내 착각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구원받았다는 게 착각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자기 마음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나는 예수 믿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천국에 갑니다.’라고 했다면, ‘내 삶은 어떤가? 내 삶이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다운 삶인가? 그 열매를 맺고 있는가?’ 이것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열매로 안다고 하셨지,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열매를 맺고 있는가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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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개의 문 그리고 두 개의 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선지자와 나무가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으며 좋은 열매를 맺는 참된 제자가 되라고, 그것이 정말 생명의 길이라고 예수님이 우리를 초대해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 좁은 문을 선택하여 예수님을 믿고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좁은 길이지만 생명의 길인 그 길을 걸어가며 생명의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