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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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인터넷 연결 문제로 설교 동영상이 두 개가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1) https://youtu.be/jvtQhPNUAGM?t=150

     2) https://youtu.be/L6O6fuUYB1Y

 

 

20221218일 주일예배

대강절 메시지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됐나요?”

(누가복음 37~17)

 

 

0.   변화는 필수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대전에 갈 일이 있어서 처음으로 KTX 기차를 타보았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한국이나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기차를 많이 이용합니다. 관광객들뿐 아니라 시민들도 그렇게 많이 합니다.

 

미국도 뉴욕 같은 곳은 롱아일랜드에 사는 사람들이나 뉴저지 쪽에 사는 사람들 중 맨해튼에 기차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이곳 오하이오를 비롯하여 기차를 타고 단풍 구경을 하거나 특별한 여행 패키지를 제공하는 곳들도 많습니다. 미국의 주력 기차가 앰트랙(Amtrak)인데, 앰트랙 열차의 속도가 보통 100~160마일이고, 캘리포니아 고속 열차의 최고 속도는 무려 220마일이나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에 처음으로 철도가 들어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습니다. 1829131일 당시 대통령이던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에게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아시다시피, 엔진이란 것으로 달리는 기차들은 자그마치 시속 15마일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달립니다. 그렇게 빨리 달리기 때문에 승객들의 생명과 건강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올 수 있으며, 가축을 놀라게 하고 여자들과 어린이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합니다.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여행하는 것을 결코 의도하신 적이 없습니다.”

 

뭘 느끼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이야기인데, 200년 후에 사는 우리가 보면 참 웃기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좋게 봐서 순진합니다. 지금 기차가 최고 200마일 이상을 달릴 수 있는데, 15마일로 달리면 사람에게 치명적이라고 하는 데다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이 없다고까지 말하니까 얼마나 웃깁니까?

 

20세기에 들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특히 20세기 후반 들어 세상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21세기 들어서는 엄청난 변화를 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 2010년대 이후에는 그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계는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리도 사실 많이 변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지금 한국 식품점에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보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게 불과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변화에 대해 사람들은 두려움과 염려를 느낍니다. 그 주된 이유는 첫째로, 변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불확실한 것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없기에 자기가 통제(control)를 할 수 없게 되고,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두려워해서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미국 경영학계의 대부로 불렸던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경영과 리더십 전문가로, 영향력 있는 책들을 많이 썼고 강연도 많이 했는데, 그가 미래에 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거를 무자비하게 버리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돌아가신지 오래된 분이신데, 미국 내 한국학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agner)라는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한국학의 권위자이고 미국 내에서 한국학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그분이 조선이 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진단을 내렸습니다. “첫째는 외부의 변화를 읽지 못한 것, 둘째는 관료집단의 부패, 셋째는 국론의 분열.” 관리들이 부패하고 국론이 분열되어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싸우기만 하다가 결국 밖에서 몰려온 적들에 의해 나라가 망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기와 함께 했던 것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들여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변화는 필수적입니다. 변화 없이는 발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고 한국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러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지금 그것을 찾습니까?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엄청난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변화를 요구합니다. 변화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쓰는 사람이 더 적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들까지도 씁니다. 만일 우리가 변화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뒤로 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거나 자기들은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다가 망할 뻔했던 회사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포드(Ford) 자동차가 자기들은 괜찮다고 버티다가 망할 뻔했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지금 코닥(Kodak) 카메라를 쓰는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카메라 사업을 접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필름(film)을 고집하다가 망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혁신을 통해 잘라낼 것을 다 잘라내고 지금은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기업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브리태니커(Britannica) 백과사전도 망할 뻔했습니다. 종이책만 고집하다 망할 뻔했는데,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급변할 때일수록,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고 무엇을 변화시키면 안 되는지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변화시켜야 할 것을 그냥 놓아두고 변화시키면 안 되는 것을 바꾸어버리면, 큰 손해와 재앙을 불러옵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더욱 그렇습니다.

 

변화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대개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이나 환경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그것만 바뀌었다면, 그 일만 잘 풀렸으면 내가 잘되었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 사람만 변하면 내 인생이 편해질 텐데...’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분명히 변화시켜야 할 것이 있다고 가르쳐주는데, 그것은 어떤 조직이나 시스템이나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1.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세례요한의 경고 (7~9)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 땅에 와서 메시야(구원자)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구약성경 말라기에 의하면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과 사명을 받은 사람이 메시야(구원자)가 오기 전에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고,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엄청나게 강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7)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성경이기 때문에 상당히 순화된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마구 욕설을 쏟아내는 겁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독사는 새끼들이 어미의 배에서 나오면서 그 속을 다 갈아 먹으며 나오는 그런 종류의 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무리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 독사들아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심한 표현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외칩니다.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불이 날 때 뱀들이 불을 피해서 도망가는 것처럼, 세례요한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장차 올 진노의 심판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드록 있는데, 바로 이때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선포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8-9)

 

여기에서 요한이 말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지금 종교적인 행위를 하니까 괜찮다고 하면 안 되고, 각자 삶을 통해 증명해라. 죄로부터 진심으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안전하다.’라고 하지 말라.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너희의 핏줄이 아니라 너희의 삶이다. 너희 삶은 지금 푸른 나무처럼 열매를 맺고 있느냐, 아니면 죽어서 열매를 못 맺고 있느냐? 죽은 나무라면 땔감으로 불에 던져질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요한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면 아주 충격적입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7)라고 되어 있는데, 이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 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마음에 찔려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물론 이방인이 더러 섞여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기 때문에 그 후손으로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무서운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나무를 자르기 위해 하나님은 이미 도끼를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는 겁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다 찍어서 불에 던지실 것이기 때문에, 그날이 오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을 줍니다. 특히 저처럼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고, 믿은 지 오래 안 된 분들도 계시지만, 많은 분들이 아마도 몇 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셨을 겁니다. 저도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모태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평생 교회에 다녔다. 어렸을 적부터 다녔다. 오래 다녔다.’라고 한다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은,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는 것, 열심히 다니는 것,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 많은 섬김과 봉사를 감당하는 것, 성실하게 헌금하는 것은 다 귀한 일입니다. 나쁜 게 아닙니다.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종교적 행위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믿지 않으면서 겉으로 행동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그냥 다니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에 잘 다니기만 하면 얼마 안 되어 금방 세례를 줍니다. 그 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직분까지 받습니다. 그래서 아주 많지는 않더라도, 안수집사이고 장로인데 사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아니, 그런 목사도 있고 신학교 교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열심히 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또 뭐라고 말씀합니까?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무슨 열매를 말합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8)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마음을 바꾸고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면, 그것을 눈으로 보이게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믿었다면 변화된 모습이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마음은 하나도 변화시키지 않았으면서 이제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괜찮겠지. 종교적인 행동을 하니까 괜찮겠지.’라고 한다면 착각이라는 겁니다. 마음의 변화는 없으면서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믿고 변화되었다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행동으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배 참석이나 봉사나 헌금이나 성경 읽기나 묵상이나 기도 등의 종교적 행동을 하는 것이 정말로 믿은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진짜로 주님을 믿은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행동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왔는가? 나는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마음이 변화되었는가? 그렇다면 믿고 마음이 변화되고 구원받은 것이 내 삶 속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가?’

 

여러분, 정말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흉내만 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자신의 그런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2.   변화된 삶으로의 부름 (10~14)

 

세례요한의 강력한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질문합니다. 여기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무리(10), 세리들(12), 군병들(14)입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나와서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10, 12, 14) 요한은 이 세 그룹의 사람들에게 각각 적절한 대답을 해 줍니다.

 

1)  무리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0-11)

 

세례요한은 옷이 두 벌 있으면 옷이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대답합니다.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옷이나 음식보다 더 많은 양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그러한 것들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회개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회개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 내가 죄인이구나.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회개합니다.’라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것을 해야 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은 사람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2)  세리들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2-13)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을 위해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리들은 로마 정부에 미리 돈을 많이 주고 그렇게 각종 세금과 요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미리 돈을 주고 자기가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세금을 걷을 때는 자기가 로마에 지불한 돈의 본전을 찾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더 큰 액수를 걷어 들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세리들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세리 아닙니까? 마태복음을 쓴 마태(또는 레위)가 가버나움의 세리였는데,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였는데, 그냥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 즉 우두머리였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을 착취해서 돈을 많이 벌었겠습니까?

 

그러한 세리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은 탐욕에 의해서 세금을 걷지 말고 정해진 대로만 받으라고 합니다.

 

 

3)  군인들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14)

 

<새번역> 성경에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군인들은 로마 군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나 로마 총독을 섬기는 그 지역 용병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님 당시를 그린 <The Passion of the Christ> 같은 영화를 보면 군인들이 나오는데, 로마 군인들도 있지만 그들이 고용한 유대인 용병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그런 군인들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세리들이 세금을 걷으러 다닐 때 그들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갈 때도 있고 이런 용병들이 갈 때도 있었습니다. 왜 같이 가느냐 하면 세리가 혼자 갔다가 폭행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리들과 군인들 모두 유대인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사실 군인들의 봉급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빼앗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협박해서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해서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는 등,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의 돈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4)  회개에 합당한 열매의 의미

 

이 세 종류의 사람들(무리, 세리들, 군인들)에게 요한이 답해준 내용을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변화된 삶입니다. 그런데 그저 속으로 내 삶은 변화되었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태도를 변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무리에게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라고 하고,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 외에 더 걷어서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으며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행동을 하라고 합니까?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 진짜로 회개했다면 그 열매로서 그런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했다고 하면서, 믿었다고 하면서, 이웃을 향한 아무런 사랑의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회개와 믿음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는 회개하고 믿음으로써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진짜 믿고 마음이 변화되었다면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잘 깨달은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쓰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확신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보다 앞서 이렇게 전했던 세례요한의 말씀을 정확히 깨달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세례요한이 세리들이나 군병들에게 너희의 직업은 악하다. 당장 때려치워라.’라고 호통을 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대신 그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일할 때 정직하게 일하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위치를 이용해서 남을 해치고 자기 소유는 늘리는 일을 이제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세리의 일은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군인의 일도 당연히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악용하여 자기 재산을 늘리는 데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해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착취하지 말고 정직하게 일하며 급료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혹시 돈이 모자란다면, 정말 절약해서 살든지 아니면 직업을 바꾸어야 하는 겁니다. 그 직업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남을 찾취하고 괴롭히며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재산을 불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회개하고 믿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 직업 중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예수님도 막달라 마리아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해도 괜찮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창기 일을 계속하면서 믿어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악 된 직업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에 있어서는 정직하게 일하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무리에게도 당장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이웃을 위해 다 내놓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다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괴로움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라고 한 겁니다. 자기 삶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 정도라도 무조건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자기는 충분히 먹고살 만한데 남은 것에 대해 욕심을 부리며 더 많이 쌓아두려고 하지 말고 그런 것을 사용해서 남들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특히 무리에게 한 말을 자세히 보면, 11절에서 옷 두 벌 있는 자가 단수(한 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옷 두 벌 있는 한 사람은 옷 없는 한 사람에게 나눠주라.’ 하고 되어 있는 겁니다. ‘먹을 것이 있는 자도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진 것을 다 내놓고 혼자서 여러 명을 다 책임지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최소한 다른 한 사람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명은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최소한도 안 한다면 정말로 회개하고 믿은 것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도 강력한 도전을 던집니다. 그것은 네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반드시 이웃에게 사랑을 보여야만 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크리스천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겠습니까? 단지 우리 자신만 잘 먹고 잘살라고 그러신 게 아닙니다. 그저 구원받고 천국 가게 해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천국 가는 게 목적이었다면, 믿자마자 바로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아직도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사랑,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안 믿는 분들 앞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그분들은 아니, 내가 왜 죄인인가? 나는 살인, 강도 등 나쁜 짓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도 돕고 가끔 홈리스 사람을 만나면 베풀기도 하는데 왜 내가 죄인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생각하는 죄는 범죄(crime)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crime이 아니라 sin입니다. sin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상태이고, ‘하나님 필요 없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내 주인이다.’라고 하는 것이 죄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안 하는 정도로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 자기 기준으로 나쁜 짓을 안 했으니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성경의 기준에 의하면 죄인이 맞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나쁜 짓을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게 아닙니까?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게 아닙니까?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새 계명을 주셨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게 아닙니까?

 

사랑하지 않는다고 무조건 죄라고 정죄하면 안 되겠지만, 믿는 사람이라면 사랑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그 방향으로 가도록 애쓰며 나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부터 해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날씨도 추운데 문을 잡아준다거나 하는 작은 친절부터 시작해보는 겁니다. 내가 먹고살기에 꼭 필요한 것 외에 그래도 남은 게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또 내가 뭘 살까?’ 하는 것만 궁리하는 게 아니라, 이것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보고 실천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미국에 왜 왔습니까? 이민 오신 분들도 있고, 유학 오신 분들도 있고, 다녀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도 미래에 좀 더 잘살아 보려고 온 게 아닙니까? ‘나는 못 살고 싶어서 미국에 왔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돈도 잘 벌고, 자녀 교육도 잘 시켜서 잘되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정말 너무 어렵고 먹고살기가 힘든 분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들은 사실 교회에 안 나옵니다. 남들 앞에 나오는 걸 꺼려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안 나옵니다. 남들 앞에 나오질 못합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 만한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것들을 더 많이 가질까에 관심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언제까지 내 배만 불리고 또 더 크게 불리는 삶만을 살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나 은퇴 후 노후에 어느 정도 살아갈 수 있는 정도 외에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한 번 이렇게 해보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두 종류로 나눠보는 겁니다. 1번은 나에게 정말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보십시오. 2번은, 내게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내가 원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게 있는지 잘 모르겠으면, 1년 이상 안 쓰고 그냥 두고 있는 것이 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성경 말씀은 결코 1(나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2번입니다. 내게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내가 원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많아질수록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처럼 돈의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방지해주시기 위해 주신 것이 바로 이웃 사랑이고, 헌금도 그런 것입니다. 나밖에 모르고, 내 가족밖에 모르고, 내 돈밖에 모르고, 오직 움켜쥐면서 , , 만 외치며 사는 삶을 살다가 돈의 노예가 되고 망가지는 인생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런 제도를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억지로 빼앗아 가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신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콱 움켜쥐고 욕심을 부리는 것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계속 쥐고 있으면 내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돈의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지, 그저 원해서 가지고 있는 것인지, 또는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 다 아십니다.

 

요즘 전도서 말씀을 묵상할 때도 나왔지만, 이 세상에 태어날 때 1센트라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죽을 때 1센트라도 가지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남겨놓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 이 땅에 얻은 것들이고, 떠날 때 다 놔두고 갈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다 없어질 것들인데, 그것을 잘 사용하면서 살면 되지, 왜 거기에 집착해야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는 곳에다가 투자해야겠습니다. 지금 투자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은퇴 후 10, 20, 30년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고 나를 영원히 커버해주는 하늘 창고에 쌓아야겠습니다. 여기 있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천국에 갔을 때, 내게 주신 집을 보니 그 곳간이 하늘 상으로 가득 차 있게 되는 것이 목사로서의 제 소망이며 기도 제목입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 (15~17)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15)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듣고서 혹시 저 사람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야)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구약시대 때 포로로 잡혀가면서 메시야(구원자)를 그토록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세 가지 점에서 자신과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6-17)

 

자기는 그분이 아니라고 다른 점을 말합니다. 첫째, 자기보다 능력 많으신 그리스도의 종이 될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16). 신발끈을 푸는 것은 종이 하는 일인데, 자기는 그분의 종이 될 자격도 없다는 겁니다.

 

둘째, 자기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처럼 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16).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불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17). 당시 농부들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그릇에 담긴 알곡을 다른 그릇으로 부어서 옮기거나, 삽이나 괭이로 알곡을 공중으로 띄웠습니다. 그러면 쭉정이는 바람에 날리고 알곡만 그릇에 담기게 됩니다. 그다음에 떨어진 쭉정이를 모아서 활활 타는 불에 태워버렸습니다.

 

이것은 9절의 도끼에 대한 말씀과 마찬가지로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고, 쭉정이는 구별되어서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고 태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메시야, 구원자)가 알곡을 모아들이신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가 이 알곡입니까? 죄로부터 진정으로 돌이키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동시에 이웃을 향한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세례요한의 선포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둘째, ‘정말 믿었으면 삶에서 사랑을 실천함으로 그것을 보이라.’

 

믿지 않으면서 행동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정말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 행동이 없는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먼저 회개하고 믿어야 하며, 그다음에는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례요한의 메시지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먼저는 자기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다음에 그 변화된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날 때 세상에서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고, 또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명한 러시아의 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의 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전 인류를 변화시킬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만,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온 세상을 바꿀 생각은 하는데,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살아오던 방식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 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 자녀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기대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변화들은 따라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목회편지에 질문들을 죽 썼습니다. 이런 것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이웃과의 관계에서 보기들이 약간 읽기에 민망합니다. 누구누구와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묻고는 <아주 좋음 / 무난함 / 약간 갈등 있음 / 심각한 문제 있음 / 원수 됨> 중 하나에 체크하라고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원수 됨에 체크하고는 나는 계속 원수로 살 거야.’라고 한다면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겠습니까? 이게 믿는 사람이겠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순간적으로 실족하거나 잘못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지속된다면 정말 믿은 것인지, 정말 회개한 것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사랑을 나누는 삶, 특히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온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 오신 그 예수님의 본을 따라, 주님을 믿는 우리 안의 믿음을 가지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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