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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4 ✦
“압살롬의 쿠데타”
(사무엘하 15장 1~18절)
[들어가는 말]
요즘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뉴스를 보면 존속살인의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때려서 숨지게 했다든지, 양아버지가 아이를 학대해서 죽은 경우가 많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종종 자식이 부모를 때려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식하거나 폭력적인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아주 고학력 엘리트 중에도 그런 경우가 벌어집니다.
30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40대 아들이 70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서울에서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우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완전범죄를 꾀했다가 들켜서 결국 잡혔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해에는 유학생이 돈 문제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끔찍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계속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는 일이 1년에 2천 건 정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반역의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가 강한데, 제사도 유교 문화입니다. 유교 정신의 핵심 중 하나가 ‘효’인데, 제사는 하면서 부모에게 반역도 하니 서로 맞지 않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닮은 사랑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도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산고를 겪으며 자식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때, 부모에게 분노하며 자녀가 부모에게 칼을 들이댈 때,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부모가 자식을 때리거나 죽이는 일도 많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낍니다. 이것이 다 인간의 죄성 때문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며 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던 다윗은 황금 같은 20대에 장인인 사울 왕이 무서운 질투와 광기로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녔기 때문에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고 힘들었던 도망자 시절이 끝나고 마침내 왕이 되어서 이제는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큰 죄를 범했고 이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무서운 반역을 당하게 됩니다.
1. 은밀하게 진행되는 반역 준비 (1~6절)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1절)
오늘 본문은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지난 14장 끝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자기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허용한 이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계속되는 내용을 보면, 압살롬의 마음이 다윗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리어 반역을 위한 음모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먼저 그는 반역에 필요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발 빠른 전령이자 호위병 50명을 준비시켜 이스라엘 전역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할 뿐 아니라 왕의 행차를 알릴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한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역대 최고의 훈남이라고 할 수 있는 압살롬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가고, 50명의 늠름하고 잘생기고 멋진 군인들이 그를 호위하며 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그렇게 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압살롬과 그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야, 저분은 장차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다. 왕 감이다.’ 하며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압살롬이 행동하는 게 굉장히 치밀합니다. 뭘 해도 그냥 허투루 하는 게 없고 다 계획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자기의 외모를 잘 사용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일을 합니다.
“2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2-3절)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일에 주도면밀함을 보여 줍니다. 이 길거리의 대화를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문은 재판석이 있는 자리입니다. 모든 재판이 성문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길거리에 압살롬이 일찍 나가서 섭니다. 그러면 날마다 그 성문으로 억울한 사람, 원통한 사람, 불만 있는 사람, 시빗거리가 있는 사람이 계속 들어와서 재판을 청구합니다.
그래서 지난 14장에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나아올 수 있는 것도 왕이 그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왕이 직접 나오거나, 왕이 없을 때는 신하들이 나와 앉아서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들어주며 재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압살롬이 가 있으면서 성문 재판장에 들어가기 전에 문 옆에 서서 사람들에게 “너는 어느 지파 출신이냐?” 하고 묻는 겁니다. 굉장히 정치적인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유다 지파라고 하면 유다 지파에 맞게 해주고, 단 지파라고 하면 단 지파에 맞게 대답을 해주는 겁니다. 특히 유다 지파 이외의 열한 지파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유다 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 유다 지파에게 더 잘해준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다른 지파들의 불만을 부추기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니 왕이고 정치인인 다윗을 은근히 헐뜯기 시작합니다. 정권 말기에 레임덕 증상이 벌어지는데, 다윗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상황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각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정에 이끌렸기 때문인데, 아버지로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으로서 적당히 신하에게 하는 정도로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불만을 가진 압살롬이 와서 다윗과 백성 사이의 틈을 파고드는 겁니다.
‘이전에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인 공주 다말을 범했다. 그런데 왕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갔다. 나중에 다윗이 압살롬을 데리고 왔는데 아무 벌도 내리지 않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년 만에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돌려보냈다.’라는 소문이 다 퍼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 “아유, 우리 다윗 왕도 별수 없네. 아들 보고 싶으니까 슬그머니 예루살렘에 들였다가, 체면이 있으니까 안 보는 거 봐. 우리도 적당히 하면 되겠네” 하는 식의 마음이 사람들 가운데 퍼져 있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 가운데 지난 2015년에 세상을 떠난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싱가포르가 도덕적으로 굉장히 엄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오래 전 미국 청년 하나가 법을 어겨서 태형을 내린다고 했더니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습니다. 안 통했습니다. 그냥 벌을 받았습니다.
그가 싱가포르를 그렇게 도덕성 높은 나라로 만들기까지 아주 혹독한 자정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냥 된 게 아닙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자기 혈연부터 잘못할 때 가차 없었습니다. 봐주는 게 없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해진 원칙에서 벗어나면 아들이고 며느리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친인척부터 무섭게 다루니까 온 국민이 “아이고, 법을 어기면 정말 국물도 없구나. 용서가 안 되는구나.”라고 깨닫고 법을 철저히 지킨 겁니다. 만약 자기 자식들은 봐주었다면 그게 통했겠습니까?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부분에서부터 실패한 겁니다. 자식에게는 슬슬 하니까 백성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자기부터 비슷한 죄를 지었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폭행과 살인이 벌어졌을 때, 자기도 간음하고 살인했는데 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백성들이 그런 부분에서 흔들리기 시작할 때 압살롬은 지략가로서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압살롬도 혈기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왜 혈기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때나 그 혈기를 부린 게 아닙니다. 긴 시간을 복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참고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간이 4년이나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만이 백성의 어려운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공의로운 재판관인 것처럼 스스로 높인 후, 자신에게 절하려고 하는 백성을 말리며 붙들고 포옹해주며 입 맞추는 위선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4-5절)
압살롬은 ‘내가 정의를 베풀겠다. 다윗 왕께서는 이제 늙었다. 지난번에 정에 끌려서 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을 보았지?’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씩 넘어오게 만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재판을 받으러 왔는데 그 자리에 최고로 잘생긴 배우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서 포옹해주고 안아주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그 시대 최고의 남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압살롬의 그러한 간계를 알지 못하고 쉽게 다윗보다 압살롬이 더 좋다고 하며 압살롬에게로 마음이 넘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6절)
압살롬은 백성을 위하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백성을 이용해서 자기가 왕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겉모습과 외모만을 보았을 뿐, 그의 속마음과 진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속아 넘어갔습니다. 압살롬은 화려한 외모로 추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람의 외적인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경력을 과장하고 외모를 화려하게 가꾸며 지키지 못할 만한 약속을 남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이단에 넘어갑니까? 누가 봐도 이단인데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학력이고 똑똑한 사람들도 많이 넘어갑니다. 멍청해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거기에 혹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만져주고, 자기 아픈 것을 위로해주고, 사랑이 필요한데 사랑해주니까 넘어가는 겁니다.
이단들을 가만히 보면 보통 교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가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교인들보다 훨씬 낫네.’라고 느끼게 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가 보니까 너무 친절하고 사람들이 좋고 그렇게 인격적인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단입니다.
그런 친절함과 사랑으로 혹해서 넘어가는데, 거기에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접근하면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꾸미는 자들의 화려한 외모와 언변에 속아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가짜들이 많고 속이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지하여 압살롬에게 빠져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보다 사탄이 원하는 길로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겠지.’ 했는데 사실은 사탄이 원하는 길일 수가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성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기본을 하는 겁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이렇게 예배의 자리를 늘 사모하고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성도들과의 교제가 부족하면 이단의 속삭임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함께하는 것이지, 혼자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결국 압살롬과 같은 유혹자, 위선자에게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보며 특히 나의 유익과 관계된 부분에서 유혹을 받으면 주님과는 반대로 나아갈 수 있지만, 주님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 때는 그런 유혹이 와도 능히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잘 보십시오. 내가 혹시 무엇과 타협하지는 않는가? 주님과의 교제를 희생하고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교제 쪽으로 가는 것을 막으며 방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들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최고로 좋은 건 아닙니다. Good 때문에 Best를 놓치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Best인데, Good 정도로 만족하게 하도록 유혹하는 게 요즘 사탄의 전략입니다.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께 가까이하고 함께하는 것을 방해하는 좋은 것이 뭔가를 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영적 분별력을 평소에 길러야 합니다.
2. 성공하는 반역 (7~12절)
“7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7-8절)
4년 만에 압살롬이 다윗 앞에 나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만났으니까 총 6년이 지난 때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서원을 이루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고향인 그술에 가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는데, 거기 있는 동안 자기가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서원한 것은 즉시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6년이나 지나서 뭘 지키겠다는 겁니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얘가 왜 6년이나 지나서 서원을 지키겠다고 하지?’라고 하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무슨 다른 바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압살롬에게 그리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단지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는 것이 좋게 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죄를 범한 이후로 영적 분별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나이도 더 들었지만, 나중에 압살롬의 반역 세력과 전쟁할 때 보면 아주 지혜롭게 작전을 잘 짭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 흐려진 게 아닙니다. 죄 이후에 영적 분별력이 흐려진 겁니다. 회개하고 용서는 받았지만, 영적으로 영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사한다니까 ‘좋은 거네. 가서 해라.’ 하고, 서원을 갚겠다고 하니까 ‘좋다, 가서 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진짜 제사하며 예배하기 위해 가는 거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서원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반역을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헤브론입니까? 왜 많은 곳들 중 헤브론으로 가겠다는 겁니까?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인데, 아버지 다윗이 유다 왕이 되어 7년 반을 다스린 곳입니다. 압살롬 자신도 바로 그때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정권이 무너진 뒤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까지 쫓아와서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통합 왕으로 세우면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헤브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땠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동족인데, 거기 있다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하루아침에 왕의 도시였다고 붕 뜨게 된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시골 도시가 된 겁니다. 자기들이 왕으로 섬겼던 사람이 더 큰 곳으로 가버렸으니까 ‘우리는 뭐지?’ 하는 마음이 인간적으로 들면서 분명히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바로 그 틈을 노린 겁니다. 압살롬이 아주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표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지역감정을 여전히 건드리면서 편 가르기를 하는데, 많이 약해졌지만 지금도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압살롬이 바로 사람들의 그런 지역감정을 부추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야심을 위해 그런 심리를 이용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제사를 드리겠다. 서원을 갚겠다.’라고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를 이용하는 사람을 ‘정치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팎에도 예수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라고 불러야겠습니까? ‘종교꾼’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역사를 보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하는데, 다른 게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 즉 기도, 말씀, 예배, 교제 외에는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9절)
압살롬의 반역 계획을 알지 못하고 있는 다윗은 제사드리고 서원을 갚겠다는 아들의 말을 기쁜 마음으로 허락합니다. 아마 다윗은 압살롬의 마음이 이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려나 보다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서운 죄악과 반역의 마음을 온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아주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면, 당장은 잘될지 몰라도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 그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0-11절)
압살롬은 정탐을 온 이스라엘에 두루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라고 외치게 만듭니다. 또한 다윗 주변에 있던 200명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도록 만듭니다. 굉장히 치밀합니다.
이들은 압살롬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헤브론으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르고 동참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아주 난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압살롬을 반대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공범이 되는 겁니다. 아니면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치러 갈 때 거기서 인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온 200명의 유력한 사람들을 압살롬이 왜 초대했겠습니까? 헤브론 사람들이 보니까 예루살렘에서 귀인들 200명이 오는 겁니다. 딱 봐도 옷을 잘 입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좍 오니까 ‘와, 저렇게 멋지고 유력한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에 서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압살롬이 노린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보면서 ‘이 많은 예루살렘 유지들이 압살롬을 왕으로 추대할 정도라면 다윗은 이제 끝났다. 그럼 우리도 압살롬 쪽으로 줄을 서자.’라고 생각했을 텐데, 바로 이것을 압살롬이 노리고 알리지 않은 채 그들을 초청한 겁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반역을 아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12절)
그 반역의 핵심 인물로서 다윗의 지략가였고 <삼국지>의 제갈공명과도 같았던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가담시키기까지 합니다. 이전에 보면, 다윗이 간음한 밧세바가 엘리암의 딸이라고 되어 있는데, 엘리암의 아버지가 바로 아히도벨입니다. 그러니까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입니다. 그러니까 밧세바의 할아버지로 그동안은 다윗에게 아주 지혜로운 조언을 하던 상담자였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 편에 선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에서 있어야 할 이 사람이 어디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다윗을 돕고 있어야 하는데, 밧세바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생활을 접고 다윗을 떠나서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다윗과 협력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압살롬이 그의 고향에서 데리고 옵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거짓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야심을 위해서 계략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하는 건데, 인간 중심의 예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예배는 예배도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 뜻 없이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 가담한 모든 사람이 다윗과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다윗의 원수들이 아니라 도리어 다윗 곁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던 자들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아들인데 반역하고, 또 모사 아히도벨, 그리고 그를 추종한 백성들 모두 다윗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압살롬이 될 수 있고 아히도벨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굳게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늘 찾으며 살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배신해서 압살롬이 될지, 언제 우리가 아히도벨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진리 위에 터를 닦으며 살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반대편에 설 수 있고 이단으로 빠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3.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하는 다윗 (13~18절)
“13 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13-14절)
압살롬의 반역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전혀 저항받지 않고 아주 성공적으로 이뤄집니다. 그의 반역 소식을 들으니까 다윗은 뭐라고 반응합니까? “일어나 도망하자. 두렵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항할 아무런 준비도, 힘도 갖추지 못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이렇게 조급하고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겁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붙어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우면 다윗 쪽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무리 4년 동안 준비했다고 해도 다윗의 용맹한 장수들을 당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싸움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최대한 피했습니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아무리 반역했어도 아들이고 그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피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해보자는 마음으로 떠나게 된 겁니다.
사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 편에서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진행되었습니다. 다윗이 늘 자기 곁에서 어려운 일에 대해 지혜를 구했던 아히도벨도 자기 곁을 떠났고, 아들들은 압살롬을 심히 두려워하는 상태였고, 다윗 자신은 예전처럼 힘이 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이도 많아졌습니다. 이제 아무런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 결국 다윗이 선택한 것은 일단 궁궐을 떠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도피를 결정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5). 그러므로 지금 다윗이 하려고 하는 것은 압살롬이 반역했으니까 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15 왕의 신하들이 왕께 이르되 우리 주 왕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리이다 보소서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더라 16 왕이 나갈 때에 그의 가족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왕이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하니라” (15-16절)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궁궐을 나설 때 후궁 10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나단이 선포한 말씀처럼(12:11), 다윗이 아내들을 이웃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게 됩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아히도벨의 조언에 따라 이 후궁들과 동침하여 자기가 다윗과 적대 관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16:20-22). 이런 악한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것조차 선으로 바꾸어 결국 약속을 이루십니다.
“17 왕이 나가매 모든 백성이 다 따라서 벧메르학에 이르러 멈추어 서니 18 그의 모든 신하들이 그의 곁으로 지나가고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과 및 왕을 따라 가드에서 온 모든 가드 사람 육백 명이 왕 앞으로 행진하니라” (17-18절)
벧메르학은 '먼 궁궐'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던 다윗의 별궁으로 보입니다. 다윗 일행은 이곳에서 피난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한편,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피할 때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떠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의 곁에는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신실한 신하들과 용사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봅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가족과 같이 지냈던 용사들도 있고, 또 놀랍게도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 블레셋 출신의 용병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 편에 섭니다. 원래 적국인데 다윗 편에 선 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4. 너무나 잘났던 압살롬의 파멸
압살롬은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에 아버지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통해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지도자인 것이 보였고, 또 아버지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나라면 더 부드럽게 할 텐데, 나라면 더 평화롭게 할 텐데, 나는 너그럽게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고, 하나님이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하실 때까지 그런 왕을 인간적인 힘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볼 때 아버지가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다윗이 압살롬 나이였을 때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보다 더 백성들의 인기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능력과 기회도 있었지만 계속 피해 다니며 험한 광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 같은 악한 자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기 전에 인간의 손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에 대한 반역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고 도전인데, 압살롬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너무 잘났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자기 자신이 너무 강한 사람(사실은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태도가 자기를 파멸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모릅니다
압살롬은 인간적으로 아주 뛰어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외모도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최고의 훈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 누이 다말을 범한 암논에게 복수하기까지 2년이나 기다리며 준비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 자기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사람의 심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도 아는 심리전의 대가였습니다. 성 곁에 자기 심복들을 두어서 다윗 왕에게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섭하고, 자기가 그들의 대변인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치밀한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처음 왕위에 오른 유다의 헤브론으로 가서 반란을 시작함으로, 자기가 새 시대에 어울리는 왕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겁니다. 반란을 시작함과 동시에 열두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미 왕권이 압살롬에게 넘어간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는데, 요즘 식으로 하면 방송을 이용해서 고도의 선동 심리전을 펼친 겁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오른팔과도 같은 지략가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보다 더 완벽하고 치밀하게 반역 준비를 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은 99%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려는 과정이나 싸움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99%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쿠데타였지만, 1%를 하나님이 건드리실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자기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그 안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아버지 다윗과 압살롬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압살롬 주변에는 성공을 원하는 수많은 엘리트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뿐이고, 끝나면 다 흩어질 사람들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과 잘난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사람이 많습니까? 내 주변에는 거룩한 사람이 많은 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조건을 보고 몰려들 때 그 조건이 없어지면 쉽게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신하들과 가족들뿐 아니라 용사들을 보십시오.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아닙니까? ‘맞서 싸웁시다!’라고 해야 될 텐데 ‘왕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따르겠습니다.’ 하고 충성을 보입니다. 게다가 블레셋 이방인들까지도 충성하겠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리더십 아닙니까? 다윗의 리더십은 인간적 처세술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 리더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압살롬의 세력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아주 강대한 성처럼 보입니다. 아마 이것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압살롬은 자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1%에 하나님이 손을 보시면 전세하 하루아침에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철저히 준비하고 쌓아 올려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그냥 톡 치시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공든 탑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과대평가하다가 하나님을 과소평가했고, 그러다 결국 무너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결국 지금 나는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존중(respect)하며 두려워하고 있는가? 말씀을 존중하는가? 예배를 존중하는가? 또 교제를 중요시하는가? 아니면 경시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점검하면서 결국 멸망으로 가느냐, 아니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느냐를 물으며, 믿음으로 성공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