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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5 ✦
“피난 길에 오른 다윗을 돕는 사람들”
(사무엘하 15장 19~37절)
[들어가는 말]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더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죽임이나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피난을 가는데, 피난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가족입니다. 어떻게 가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겠습니까? 그런데 피난 가다 가족을 잃어버리면 이산가족이 되고 맙니다.
한국전쟁 때 얼마나 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습니까?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던 사람들 중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영화에도 나왔지만 1980년대에 이산가족 찾기를 많이 했는데, 그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헤어졌던 가족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경우도 있었고, 해외에 사는 사람도 있었고, 어릴 때 입양되어 다른 나라에 나간 경우도 있었고, 북한에 계속 사는 경우도 있어서 나중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지금 끊어져서 안타까운데, 다시 빨리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또 피난 갈 때 필요한 게 먹을 양식입니다. 먹을 게 없으면 그냥 굶고 맙니다. 다른 사람에게 간신히 얻어먹거나, 구호단체에서 배급하는 것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지 않으면 굶게 되니 얼마나 힘듭니까? 지금 피난 가는 것도 힘든데, 먹을 게 없어서 배가 고프고 힘이 없으면 얼마나 처량합니까?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너무 빨리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남한 정부는 서울 시민들을 제때 피난시킬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계속 서울에 있는 것처럼 발표하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 한강 다리를 폭파했습니다. 요즘 그게 아니었다는 말도 나오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민들의 희생이 더 컸습니다. 피난시킬 시간이 더 있었음에도 한강대교를 너무 일찍 폭파해서 시민들이 고립되어 남쪽으로 넘어가지 못했고, 또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하지 못해서 북한군이 약간의 보수공사 후 빠르게 서울을 넘어 남쪽으로 진군하여 많은 곳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처럼,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치밀하고 동시다발적으로 반역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갑니다.
반역 초기에 다윗은 자기 군대와 반역에 가담한 군대를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 군대가 잘 구별되어서 누가 봐도 쿠데타 군인 것으로 보이며 공격해 온다면 예루살렘 성문을 잠그고 대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역이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당장 적에게 포위될 수 있고 또 예루살렘 안에도 적군이 숨어 있다가 갑자기 공격할 수 있는 겁니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사황에서 빨리 예루살렘을 포기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피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데리고 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두고 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두고 가려고 했는데, 압살롬이 백성을 모두 죽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 죽이면 민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라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남으라고 했어도 끝까지 따라갔고, 어떤 사람들은 남아서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피난 가는 다윗을 저주하며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그중 오늘 본문에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다윗을 돕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 이방인인 가드 사람 잇대 (19~23절)
다윗을 신실하게 따른 사람 중에서 유다 지파가 아닌 가드 사람 잇대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데, 그는 블레셋의 가드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다윗에게 망명한 용사입니다. 그는 가드에서 온 600명의 용사들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18).
“19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9-20절)
다윗이 잇대에게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19)라고 하는데, 즉 자기 고향 가드로부터 쫓겨나 망명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나그네입니다. 또 “너는 어제 왔고”(20)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당시 그는 이스라엘에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다윗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다윗이 잘될 때 충성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지금 죽을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 도망가는 상황에서 충성하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잘되는 쪽에 줄을 서겠습니까, 망하는 쪽에 줄을 서겠습니까? 당연히 잘되는 쪽으로 서야 하는데, 잇대는 망할 수 있는 쪽으로 줄을 서는 겁니다. 참 놀라운 사람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그를 받아들이고, 나중에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잇대를 세 명의 최고 장군 중 하나로 삼습니다(18:2, 5).
사실 잇대가 뛰어난 용사였기 때문에 지금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있는 다윗에게 꼭 필요한 장수입니다. 그러나 잇대는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다윗은 그에게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윗은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왕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따르겠다는 잇대의 마음이 진심인지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그보다 다윗은 잇대가 자신을 신실히 따르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면서도 그가 자기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고 그냥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압살롬 밑에 있는 장수로서 편하게 지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반역을 당해 피신하는 괴로움 중에도 자신의 평안보다 오히려 신하의 평안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오래전 다윗 자신도 블레셋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잇대를 알고 있었을 수 있고 그때 잇대가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후 결국 다윗이 왕이 되고, 잇대가 이곳으로 망명하여 온 겁니다. 그런 그를 향해, 다윗이 자기도 힘들지만 자기 신하가, 그것도 블레셋에서 망명하여 온 잇대가 잘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다윗은 점점 이전의 올바른 모습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범죄한 밧세바 사건이 일어난 것도 다 자기밖에 모르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쾌락, 자기만족, 욕심, 탐욕을 가졌는데, 이제는 남을 생각하는 이전 모습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참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먼저 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급한 상황에서 자기를 먼저 보호하지 남을 먼저 보호하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지금 남을 먼저 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도 위기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합니다.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가능한 겁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21절)
잇대는 다윗의 그러한 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사심과 다윗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기를, 살든지 죽든지 다윗이 가는 곳에 함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겠다는 사랑과 충성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닙니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룻입니다. 사무엘서 전에 룻기가 먼저 나옵니다. 룻은 원래 모압 여인인데, 이스라엘 여인인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다 죽고 여자들만 남았을 때, 룻과 오르바 두 며느리에게 시어머니 나오미가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 너희도 괜히 나를 따라와서 고생하지 말고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룻이 ‘저는 어머니와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결단했습니다.
그것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이때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가드(블레셋) 사람인데, 그런 잇대가 왕과 함께하겠다고 결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다윗의 인격입니다. 이제 겨우 이스라엘에서 자리 잡고 살게 된 이방인 장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이런 맹세를 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줍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에게 그동안 베풀어준 은혜와 자비에 대한 감사함에서 나온 충성이었던 겁니다. 다윗이 해준 게 없고 박대했다면 잇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겠습니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동안 다윗은 자기 아랫사람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고 그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잇대와 같은 사람들의 신뢰와 충성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평소에 자기 이익만 챙기고 남은 어떻게 되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나가면, 그게 잘되는 것 같고 좋을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에게 버림받게 됩니다. 그런데 평소에 자기도 힘들지만 남을 챙겨주고, 특히 어려운 사람을 돌보아주고 사랑을 베풀어줄 때, 큰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친절하게 사랑으로 대해주는 것인데,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그게 나에게 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단순히 윤리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나에게 놀라운 위로와 복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잇대는 이스라엘에 망명하며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게 가능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은 절대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왕의 사심으로”라고 맹세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말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가 언제 믿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분명히 다윗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으니 그렇게 만들어준 다윗이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그런 은인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하며 선포한 것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반역했고 심지어 아들 압살롬도 반역했는데, 이방인 그것도 이스라엘의 적국 블레셋 출신의 가드 사람 잇대가 이렇게 놀라운 신앙의 신실함을 보여준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 출신이 좋은 사람, 똑똑한 사람, 평소에 착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게 아니라 참믿음의 사람이 약속을 지킵니다. 자기가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짓거나 다른 사람을 밀어낼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 때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고 사기 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렇게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삽니다. 악을 당해도 선으로 갚습니다. 그런 사람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것이지, 조건이 좋은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22 다윗이 잇대에게 이르되 앞서 건너가라 하매 가드 사람 잇대와 그의 수행자들과 그와 함께 한 아이들이 다 건너가고 23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 (22-23절)
다윗은 잇대의 충성심에 깊이 감동하여 그와 그의 사람들이 자기들을 호위하도록 합니다. “앞서 건너가라”(22)라는 말은 자기들보다 앞서가며 호위하라는 말입니다. 잇대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호위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의 군대가 합류함으로써 초라하던 다윗의 행렬이 품위와 위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과 모든 사람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서 큰 슬픔에 휩싸입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다윗의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 있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하면, 살아가다 어려움을 당할 때 의외의 손길을 통해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미리 해놓으면 나중에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겠지.’ 하는 계산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계산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를 것 같아도, 다 느낍니다. 우리는 스스로 계산하고 머리를 굴리며 자기는 똑똑하고 정확하게 또 남들 모르게 하는 줄 알지만, 남들도 그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하는 것도 다 느낍니다. 물론 100% 남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다 느껴지는 게 있지 않습니까? 특히 진심으로 하는 경우는 정말 느껴집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 진실한 관계는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똑똑하게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슬쩍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절대 좋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손해를 보아도 우직하게 선으로 베풀어주고 희생하는 게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그렇고, 주님이 바로 그렇게 희생한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오늘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2.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24~29절)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24절)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 시대에 주로 제사장들이 속한 종파가 사두개파입니다. 그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이 이 사독의 후예라고 하는데, 사실 근거는 없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이 제사장 사독입니다.
다윗 행렬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 쪽으로 갈 때 제사장 사독과 떠 다른 제사장 아비아달이 레위인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번에 살펴본 것처럼, 다윗이 도망자가 되었을 때 그를 도왔다고 사울이 그의 아버지 아히멜렉과 모든 제사장들을 몰살시킬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아비아달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계통의 제사장 사독이 있습니다.
이 두 제사장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와서 다윗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영적 지도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다윗을 깊이 지지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오래전부터 다윗은 레위 사람들의 큰 후원자였습니다. 역대기를 보면, 다윗이 얼마나 찬양 사역을 발전시켰는지 모릅니다. 요즘 ‘찬양대’라고 부르지만, 성가대 개념이 바로 다윗 시대에서 기원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찬양하는 사람, 악기 연주하는 사람, 종교적인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도 아론의 계열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다윗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다윗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이제 위기에 처한 다윗을 격려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죄가 성경에 나와 있어서 그렇지, 평소에 다윗이 얼마나 잘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다윗의 왕위가 위태로운 때에도 변함없이 다윗에게 충성을 보입니다. 적어도 이 레위 사람들에게는 압살롬의 반역적인 행위들과 달콤한 말들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이 레위 사람들을 구워삶으려고 얼마나 애썼겠습니까?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와 함께해야 정통성을 부여받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이들은 여전히 다윗 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보다 다윗의 권위가 인간의 힘으로 탈취한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권위는 그저 인간적인 뜻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인들의 이러한 충성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다윗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아주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그에게 합류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이 비록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궤가 자기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온 이스라엘에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자, 봐라, 하나님의 궤가 우리와 함께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 압살롬과 함께하시는 게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있는 자기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 정통성을 가진 왕이라는 것을 온 나라에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놀랍게도 그런 상황을 마다합니다.
“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26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25-26절)
이것은 우선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궤는 자기의 상황에 따라 이리 가져갔다 저리 가져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상황이 좋아지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안 되더라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즉,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사무엘서에서 사람들은 법궤를 가리켜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부적처럼 취급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옮겨오려고 하다가, 율법대로 하지 않음으로 웃사가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다윗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렇게 하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의 개인적,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궤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이긴다는 생각,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확실히 밧세바 사건 이후로 퇴보하고 있던 그의 신앙이 다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비록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죄의 결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많이 했습니까? 암논이 다말을 범해도 가만히 있고, 압살롬이 암논을 죽여도 가만히 있고, 압살롬을 다시 데려왔을 때도 안 보는 등 어리석은 일을 많이 합니다. 또 4년 동안이나 압살롬이 반역을 꾀하며 준비 작업을 하는데도 전혀 모릅니다.
이처럼 다윗은 어리석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겁니다. 죄를 범하고서 회개하고 용서는 받았지만, 죄의 영향력이 계속 그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있었고 정신적인 판단력을 가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그의 신앙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똑바로 깨끗하게 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다시 메고 돌아가라고 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합니다.
“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28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27-29절)
제사장들에게 돌아가라고 하고, 그들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연락책으로 데려가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피난길에 오른 다윗은 예루살렘을 차지한 압살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의 반응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추격해 온다면 굉장히 위험하기 때문에 급히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들어가기 전에 소식을 들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위기의 순간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태도와 함께 신속하고도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고, 동시에 아주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오직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기 힘으로 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 후에는 나가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라면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서 “하나님, 시험을 잘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시험이 있다고 해서 예배를 빠지고 공부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사실 그 시간에 공부도 안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은 절박한 상황이었지만 사람을 의지하거나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결과든 하나님의 뜻과 처분을 겸손하게 기다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이 심판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24:14). 사람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나아가겠다고 결단합니다.
이렇게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을 철저히 맡기는 사람만이 사람과 하나님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자꾸 다른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고, 하나님까지 이용하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 정도로만 생각하게 되면,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인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 노릇, 왕 노릇을 하는 겁니다.
다윗은 왕좌에서 내려와 도망자가 되는 순간 정말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의 왕좌에 올려드렸습니다. ‘제가 그동안 왕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이렇게 자기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왕이 되시게 합니다. 원래 왕이신데도 자기가 왕 노릇하다가 일이 꼬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자기 왕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때 긍휼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왕 노릇하고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비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이 뭐라고 부르시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왕’으로 불러 주십니다. 본문을 가만히 보면 성경이 다윗을 가리켜 ‘왕’이라고 합니다. 신하들이 다윗을 ‘왕이시여’라고 부르는 것만 아니라, 성경도 그를 왕이라고 부릅니다(19, 21, 25, 27). 지금 압살롬은 ‘내가 왕이다. 이제 다윗이 왕이 아니라 내가 왕이다.’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 왕 아니야. 네 아버지 다윗이 왕이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높은 위치에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계시는가에 우리가 늘 신경을 써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신경을 쓰기는 써야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시는가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늘 애쓰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3. 다윗의 기도 (30~31절)
“30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31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30-31절)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슬픔의 사람이 되어 감람산을 맨발로 오르는 다윗과 그의 일행들에게 또 하나의 엄청난 타격을 주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반역의 무리 가운데 원래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소식과 더불어 자신의 친구였고 또 신뢰하는 자이며 모사였던 아히도벨에 대한 소식은 다윗으로 하여금 큰 충격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다윗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바로 다윗이 이런 일을 겪으면서 쓴 시가 있는데 그게 시편 55편입니다. 지금 자기가 아들의 반역으로 쫓겨 도망가면서 자기의 모사 아히도벨이 저쪽 편에 붙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심정으로 이 시편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55편 12~23절 (새번역)
12 나를 비난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였다면, 내가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자기가 나보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내 원수였다면, 나는 그들을 피하여서 숨기라도 하였을 것이다.
13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14 우리는 함께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님의 집을 드나들곤 하였다.
15 그들이 머무르는 곳, 그 곳에는 언제나 악이 넘쳐흐르는구나. 죽음아, 그들을 덮쳐라. 산 채로 그들을 음부로 데리고 가거라!
16 나는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니, 주님께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17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내가 탄식하면서 신음할 것이니, 내가 울부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실 것이다.
18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도, 주님께서는, 나에게 덤벼드는 자들에게서, 내 생명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다.
19 아주 먼 옛날부터,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부르짖음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마음을 고치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는 그들을 치실 것이다.
20 나의 옛 친구가 손을 뻗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치는구나. 그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욕되게 하는구나.
21 그의 입은 엉긴 젖보다 더 부드러우나, 그의 마음은 다툼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
22 너희의 짐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이 너희를 붙들어 주실 것이니, 주님은, 의로운 사람이 망하도록, 영영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23 하나님,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멸망의 구덩이로 내려가게 하실 것입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자기 목숨의 절반도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주님만 의지하렵니다.
여러분, 혹시 배신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무슨 엄청난 배신을 당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실 남들이 나를 실망시키는 경우는 많습니다. 특히 가족이 나를 실망시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친했던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치는 일들이 인생에 많이 일어납니다.
그럴 경우를 위해 꼭 적어놓으십시오. ‘시편 55편.’ 배신당해서 잠도 안 오고 심장이 뛰고 혈압이 오를 때 시편 55편을 죽 읽는 겁니다. 묵상해 보십시오. 다윗의 심정을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이 분명히 평안을 주시고 인도해주실 겁니다.
그런데 잘 보면 결론이 뭡니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라는 겁니다. 지금 인간이 배신하고 친구가 배신한 상황에서 ‘나는 괴롭다.’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주님만 의지하겠다.’라는 게 결론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사람들을 심어놓으며 아주 실용적인 면도 보여주지만, 영적인 면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할 게 아니고, 그냥 가서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으로 작은 친절을 베풀면 됩니다.
4. 아렉 사람 후새 (32~37절)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32절)
다윗이 사람들이 예배하는 장소인 산의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아렉 사람 후새가 나타납니다. 그는 다윗의 친한 친구이자 신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이 방금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31). 그런데 그러자마자 바로 후새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저건 우연히 일어났다 보다.’라고 하는 게 참 많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특히 기도를 했으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체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신 증거입니다. 그가 기도하자마자 후새가 나타났다는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그를 보자마자 바로 깨닫습니다. ‘아, 하나님이 지금 기도에 응답해 주셨구나.’ 그래서 후새를 자기와 함께 가도록 하지 않고 스파이로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해서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기를 계획합니다.
“33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3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6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33-36절)
다윗은 후새만이 아히도벨과 버금가는 모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후세가 나타나자마자 ‘아, 하나님이 도우시는구나. 내 기도에 응답하셨구나.’라고 깨닫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산시켜 달라는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후새가 성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알려준다.
그 첫 번째는, 압살롬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겠다고 꾸미는 것입니다(34). 그럼으로써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려 합니다. 후새가 왕궁에서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왕의 궁중에서 들은 모든 일을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려 다윗이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35-36). 그래서 그들이 다윗에게 전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는 압살롬과 그의 부하들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다윗의 부하들도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후일에 다윗의 친구들이 압살롬과 그 일행들의 모략을 이길 수 있도록 하심으로 예루살렘을 다윗에게 다시 허락하실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37절)
여러분, 이것을 읽으시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합니다. 여기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아주 기가 막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정말 놀라운 역사가 여기 들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면? ‘압살롬이 성읍으로 들어가고 그 후에 후새가 들어갔더라.’라고 되었으면, 의심을 사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간발의 차이로 후새가 먼저 들어가고 압살롬이 그다음에 들어갔습니다. 후새가 압살롬보다 먼저 가기 위해 달려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바로 그 후에 압살롬이 들어와서 의심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늦게 들어갔으면 분명히 의심하게 되었을 겁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지은 또 다른 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시편 3편입니다. 다윗의 심정을 느끼면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3편 (새번역)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지은 시’
1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2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를 에워싸주는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시니,
4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 들어도 또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7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 아, 주님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리셨습니다.
8 구원은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다윗이 은혜를 회복했습니다. 그동안 영적으로 흐려졌던 그의 눈이 똑바르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응답을 받을 만한 영적 민감성이 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응답을 해주셔도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늘 깨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다 어떤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면 그게 주님의 인도하심임을 우리는 바로 깨닫게 됩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갔던 다윗입니다. 우리도 혹시 인생의 어려움을 당할 때, 특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신과 미움을 당할 때, 시편 55편과 3편을 기억하시고 읽으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감으로, 아름다운 기도의 사람이 되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