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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3 ✦
“다윗과 압살롬의 진정성 없는 화해”
(사무엘하 14장 21~33절)
[들어가는 말]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쓰는 말 중에 ‘영혼이 없다’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저도 전에 식사하던 중 아내가 뭐라고 물어봤을 때 “어... 어...” 했더니 왜 이렇게 영혼이 없냐고 했습니다.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사람들의 대화 가운데 “뭐야, 이 영혼 없는 반응은?”이라는 식으로 ‘영혼이 없다’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데, 쉽게 말해서 진정성이 없거나 성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진짜 그런 게 아닌데 그런 것처럼 대충 둘러대거나 동조하는 경우 그런 말을 씁니다.
실제로 몇 년 전 한국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평소에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조사해보았더니 바로 ‘영혼 없는 리액션’이었다고 합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채 과도한 칭찬을 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공감하는 척하는 ‘맞장구형’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2위는 지시한 업무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상사나 선배의 물음에 대해서 아직 멀었으면서도 ‘거의 다 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임시방편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영혼 없는 말이 참 많습니다. 진짜 원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한 번 같이 밥 먹어야지.”라고 하는데, 밥을 먹을 마음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이겁니다. 진짜로 기도할 것도 아니면서 “제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해놓고 기도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런 영혼 없는 리액션을 받은 사람은 기분이 나빠집니다. 성의가 없는 게 느껴지면서 자기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저쪽에서는 성의 없이 건성으로 대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꾸 귀찮게 하는 상대방을 기분 상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영혼 없는 리액션을 보여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침내 다윗과 압살롬이 5년 만에 만나 입 맞추며 화해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인데도 5년 만에 만났으니까 정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은 전형적인 ‘영혼 없는 화해’, 즉 진정성 없는 형식적 화해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또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압살롬의 귀환 (21~24절)
오늘 1절부터 20절까지는 건너뛰고 21절부터 본문으로 잡았는데, 20절까지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요압이 드고아라는 곳에서 한 여인을 데려다가 다윗 앞에서 연기하게 함으로써 압살롬이 돌아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압이라는 사람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봐도 이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그는 어떨 때는 굉장히 용맹한 장수이고, 어떨 때는 간신처럼 굴고, 어떨 때는 아주 교활하고, 어떨 때는 굉장한 믿음을 보이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 아니라 다윗에게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압을 잘 살펴보면 다윗에게 충성하는 신하였고 다윗의 조카이기도 했는데, 다윗에게 충성한 것이 사실은 자기에게 이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치 지도자에게는 요압 같은 사람이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계를 보면 중심 지도자가 있고 그 주변에 요압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체면 때문에 직접 나서서 할 수 없는 일을 요압 같은 사람이 가서 처리해줍니다. 혼자 욕을 다 먹더라도 실행해주기 때문에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지도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 되었는데 자기가 직접 한 것은 아니니까 체면을 구기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이런 요압 같은 사람이 아주 필요하고 도움이 될 때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위험합니다. 그는 왕이 욕심으로 시키는 것도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함으로 우리야 같은 충신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싸움에 나가서 죽게 만들라는 정도로 명령한 것을, 가장 싸움이 치열한 곳이며 가장 강한 용사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시키지도 않는데 자기가 미리 알아서 왕의 마음을 파악하여 일을 실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인간적으로는 아주 유능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위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압은 드고아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구해서 데리고 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데, 구약의 예언자 아모스가 이곳 출신입니다. 이 여인을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하지만, 지혜가 뛰어나다기보다는 연기력이 뛰어난 여인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배우와 같은 사람인데, 굉장히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요압이 감독을 맡은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로 연기하게 되는데, 그 드라마 제목은 ‘두 아들을 잃은 생과부’입니다.
14장 앞부분에서 이 여인이 다윗 왕 앞에 나아와 호소하는데, 이것을 보면 백성들이 왕 앞에 직접 나와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아무리 낮은 백성이라도 직접 나와서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아주 뛰어나고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어떤 왕이 그렇게 아무하고나 만나겠습니까?
그래서 그 기회를 살려서 이 여인이 다윗 왕 앞에 나와 호소하는데, 꾸며낸 이야기를 합니다. 두 아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가 졸지에 두 아들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맞아서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살인자가 되었으니까 살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몰려와 살인자 아들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이 과부 입장에서는 한 명은 죽었고 살인자 아들도 내주게 되면 두 아들을 모두 잃어 집안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거의 일어날 확률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정의와 사랑이 충돌한 겁니다. 정의를 이루려면 살인자를 처형해야 하고, 살인자를 처형하려 하니까 대가 끊기고 혼자 남아야 하는 과부의 사정이 너무나 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남편이 죽고 아들도 없으면 여자는 사회적 지위가 하나도 없어서, 죽은 것과도 같은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에게는 특별 사면권이 있기 때문에 왕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 앞에 와 호소한 것인데, 왕이 함부로 사면권을 남발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내에서 정의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다윗 왕을 찾아온 것은 결국 살인죄를 저지른 아들을 특별히 사면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인데, 그 스토리를 가지고 온 겁니다.
이때 다윗은 놀랍게도 살인을 저질렀다는 아들을 만나보지도 않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오직 이 여인의 말만 듣고 특별 사면을 약속해버립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 여인이 해준 이야기가 다윗 자기의 경우와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압살롬도 이 과부의 아들처럼 특별 사면으로 다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살인한 아들에 대해 특별 사면을 약속했음에도 여인이 ‘감사합니다.’ 하고 빨리 떠나지 않고 계속 다윗 앞에 서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 여자가 판결을 내려주었는데도 왜 빨리 가지 않나?’ 하고 이해가 안 됐는데, 가만 보니까 여인이 다윗에게 내어 쫓긴 자, 즉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다윗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요압이 이 일을 시켰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실대로 이 모든 것은 요압이 각본을 짜고 감독한 드라마였다고 고백합니다. 그 후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1-23절)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요청을 공식적으로 허락하면서 요압을 불러 그의 계획대로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기뻐하면서 왕에게 자기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며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21절을 잘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뭐라고 부릅니까?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아들 압살롬’이 아니라 ‘청년 압살롬’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의 아들로 부르지 않고 일반 청년 중 하나인 것처럼 부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압살롬을 아직 용서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데려오라고는 했지만 참된 용서가 아니었습니다.
요압은 직접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려오는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압이 갔을 때 압살롬이 요압을 따라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 이유는 확실합니다. 그곳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압살롬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압살롬을 불러온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평안(샬롬)이 없습니다. 지난번 13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분명히 압살롬을 그동안 그리워했는데, 그리워했으면서도 그를 용서하지도 못했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아들과 재회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데려온 것이 다윗에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 증거를 보십시오.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24절)
다윗은 압살롬을 영접하지 않고 오지도 못하게 하며, 그러면서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돌아오도록 허락은 했지만,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자기 왕권을 이어받았어야 했던 장자 암논의 압살롬에 의한 죽음이 아직도 그가 압살롬을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은 겁니다.
이건 정말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최소 한 번은 만나서 그가 암논을 살인한 일에 대해 엄히 문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로서도 그렇고 왕으로서도 그렇고, 살인에 대해 문책하고 징계했어야 합니다. 처형은 안 하더라도 뭔가 징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기가 칼을 뽑아야 할 때 뽑지 않게 되니까, 오히려 나중에 압살롬이 다윗에게 칼을 들이대는 반역이 벌어지게 됩니다.
뭔가 기대감을 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압살롬은 이로 인하여 다윗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합니다. 물론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압니다. 그럼 뭔가 해결해주어야 하는데 해결은 안 하고 회피하니까 이제 불만이 싹드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신을 왕위 계승자(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다윗을 보면서 이제는 반역을 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이 뭡니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역시 복음의 핵심은 은혜인데 은혜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랑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신 겁니다.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못해.’라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답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복음의 핵심은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죄를 지은 인간에게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원래 용서할 능력이 있었습니까? 예수님 덕분에 그것이 가능해진 겁니다. 우리가 모든 죄에서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정말 믿고 그 감격을 누린다면 그 삶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가 반드시 나타나야 하고 또 그렇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쉽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용서가 쉽겠습니까? 나를 못살게 굴고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용서가 되는 겁니다. 그게 기적이고, 그게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막대기를 톡 건드리니까 확 부러지는 게 초자연적인 초능력이 아니라, 용서를 하지 못할 만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초자연적인 초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용서에 대해 얼마나 자주 가르치셨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고(막 11:2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1:4). 또 1만 달란트 빚진 종에 대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는 것인데, 나에게 조금 빚진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그게 어떻게 용서받은 사람이겠느냐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8:23-35).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많은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테러리스트에 대해 용서하는 것은 쉽습니다. 나랑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말로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내 가족이 거기 갔다가 테러 공격으로 죽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나와 관계없는 사람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관계일수록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 부부 관계, 형제자매 관계처럼 가까운 관계일수록 용서가 필요한 상황과 사건이 많이 발생합니다. 가장 용서할 횟수가 가장 많은 사람이 가족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대부분 용서로 표현됩니다. 물론 섬기는 것으로도 표현되지만, 용서로 많이 표현됩니다. 또 용서를 통해 사랑이 발전합니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라면 작은 일에서부터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영적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계가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거기에서 실패했습니다.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큰 비극이 싹트게 됩니다.
2. 압살롬의 아름다운 외모와 그 이면 (25~27절)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5-26절)
압살롬은 이스라엘 가운데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그의 아름다움이 거의 완벽하다는 사실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아무 흠이 없어.’라고 하는 분은 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직접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 누구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분은 ‘바로 내 거울 앞에 있소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100% 농담이거나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가장 잘생긴 사람보다 압살롬이 더 잘생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압살롬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역대 최고였다고 할 수 있는 최고 훈남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남자들은 나실인의 서약 같은 종교적인 이유 외에는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머리카락이 너무 무거워서 이름 그대로 ‘머리카락에 압살을 당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머리카락이 무거워서 어쩔 수 없을 때만 잘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랑과 허영의 상징으로 삼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1년에 한 번 연말에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200세겔은 약 2.3킬로그램(5파운드) 정도 되는 무게입니다. 여러분 중 머리카락을 잘랐는데 5파운드가 넘는 분이 계십니까? 저는 집에서 아내가 머리를 잘라주는데, 요즘에는 많이 자른 것 같아도 왜 이렇게 나온 게 없느냐고 합니다. 요즘은 머리가 많이 빠져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아무리 1년에 한 번 잘라도 그렇지, 무려 5파운드가 넘는 무게였다니 얼마나 머리카락이 풍성했겠습니까? 남자들의 머리카락이 평균적으로 1년에 약 500그램(1파운드) 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데, 그것에 비하면 대단한 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뭔가 출중했습니다. 외모두 뛰어났고 머리카락도 아주 건강했던 겁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압살롬이 돌아온 이야기가 나오다가 왜 갑자기 압살롬의 외모 이야기가 나옵니까? 괜히 여기에 그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야심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생긴 외모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요건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회의가 열려 각국 정상들이 모여 있을 때 ‘우리나라 대통령이 제일 잘생겼다.’라고 하면 으쓱해지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가장 인물이 못하네.’라고 하면 마음이 안 좋습니다. 인물이 좋으면 일단 조금 더 먹고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도 왕이 되기 전에 ‘준수한’ 외모에 큰 키를 가진 청년으로 소개되었습니다(삼상 9:2). 다윗도 하나님이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지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기 직전 준수한 외모에 붉은 혈색과 아름다운 눈을 가진 소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삼상 16:2).
압살롬의 외모에 대한 이런 묘사는 그가 다윗의 후계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칭찬에 약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성경이 그의 외모를 어떻게 기록했는지를 보면 드러납니다.
25절을 잘 보시면 ‘압살롬 같이 아름다운 자가 없었다.’라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그가 아름다웠다.’라고 하지 않고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아름답다고 온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는 아주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고 역대 최고로 잘생긴 사람이었던 것이 틀림없지만, 성경은 ‘그가 잘생겨서 훌륭하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들이 칭찬했다.’라고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압살롬은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리더십 스타일 역시 대중에게 영합하는 스타일이 될 것을 암시해줍니다.
이런 리더십 스타일의 약점이 바로 귀가 얇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띄워주면 좋다고 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따라가며, 그러다 사람들이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못 견디는 그런 사람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는 결국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가다가 일을 그르치고 결국은 죽게 됩니다.
그의 머리카락에 대한 것도 그가 1년에 한 번만 연말에 자르는 것으로 볼 때, 그는 평소에 어떻게 다녔겠습니까? 왕자이니까 말을 타고 달리며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다니면 사람들이 멋지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일부러 다니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이목을 끄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그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남자 중에 이렇게 머리를 길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흔했겠습니까? 그리고 머리가 긴 것도 이렇게 인물이 받쳐주는 사람이라야 멋지지, 이상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얼마나 안 어울리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의 머리카락은 그의 외모를 더 돋보이게 했고 그것은 그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사람들도 그런 그의 외모와 머리카락을 보며 칭찬하고 감탄했을 텐데,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자기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사람들이 칭찬하던 바로 이 머리카락 때문에 그것이 나무에 걸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도 자기를 데려온 요압에 의해서 그렇게 됩니다. 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입니까.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27절)
압살롬의 세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딸이 다말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이 자기를 높이기 위해 비석을 세우면서 자기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을 한탄합니다(18:18). 그러니까 아들들이 다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자기 딸의 이름을 여동생의 이름과 똑같이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동생을 굉장히 사랑한 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여동생 다말은 더 이상 안 나오지만, 압살롬이 자기 딸의 이름을 다말이라고 짓는다고 나옵니다.
압살롬은 겉으로 볼 때 너무나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들을 일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요? 하나님의 눈로 볼 때 그는 교활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노리고 반역할 만큼 율법을 멸시하는 악한 자였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왕권을 노리고 반역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는 자기 아름다운 머리털을 자랑하며 매년 그 무게를 달아보는 자로서, 영혼보다 육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년 머리털 무게를 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렸겠습니까? 그것이 일종의 쇼케이스가 되는 겁니다.
한국 방송을 보면 해마다 연말에 연예대상, 연기대상, 가요대상 시상식이 열리는 것처럼, 압살롬도 머리의 무게를 재는 행사를 매년 벌이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그 앞에서 머리를 자르고 무게를 재는 겁니다. ‘작년에는 OOO였는데 올해는 얼마인가?’ 하고 분위기를 띄우면서 그런 것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외모에 굉장히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은 외모를 더 중요시합니다. 간판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다윗이 얼굴이 붉고 아름다운 소년이라 뽑으신 게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뽑고 보니까 외모도 아름다웠던 것이지, 외모 때문에 뽑으신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 같은 눈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볼 때 세상의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주님의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고 좋아 보여도, 그 중심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3. 다윗과 압살롬의 형식적인 만남 (28~33절)
그러나 그렇게 행복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의 마음에 큰 불행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술 땅에서 3년 만에 돌아온 후로도 2년 동안 아버지며 왕인 다윗의 얼굴을 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28-30절)
압살롬은 3년의 망명 기간 후에도 2년 동안이나 다윗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압살롬이 어땠겠습니까? 마음속에 갈등이 더 생기고 분노가 더 깊어지는 겁니다. 아버지 다윗도 블레셋 망명 생활을 했고 광야 생활도 오래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겨냈습니다. 그랬던 아버지 다윗과는 너무나 반대가 되는 모습입니다.
28절에서 ‘이태 동안’(2년 동안)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면 ‘2년의 날들’입니다. ‘꼬박 2년’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2년 동안’이 아니라 매일 하루하루 시간을 세다가 2년이 흘렀다는 뜻입니다. 2년 동안 매일 날짜를 세며 보냈다는 겁니다. 이것은 압살롬이 동생 다말의 복수를 위해 기다렸던 기간과 같습니다. 그때도 똑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훌쩍 2년의 기간이 지난 게 아니라, 하루하루 곱씹으면서, 그것만 생각하고 준비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꼬박 2년 동안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자였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공직에서 배제된 채 가택 연금 상태에서 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해 동안의 세월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도록 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습니다.
3년 동안 자기 어머니 나라 그술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는 그래도 고국에 있는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해 그래도 혹시 불러주지 않을까, 혹시 용서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스라엘 쪽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드디어 요압이 와서 자기를 데려갑니다. 그래서 ‘야, 이제 됐구나.’ 했는데, 막상 돌아와 보니 2년이 지나도 부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아, 틀렸구나’ 하며 희망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압살롬이 어디 멀리서 살았겠습니까? 왕궁 바로 근처에 살았을 텐데, 그렇게 가까이 사는 압살롬을 전혀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압살롬에게 왕권을 물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압살롬은 본격적으로 반역을 실행하기 전에 그래도 마지막으로 다윗의 마음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두 번이나 요압에게 전령을 보냅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느끼는 불편한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압살롬의 부름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요압을 통해서만 다윗 왕에게 자신의 상황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압살롬이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압을 억지로라도 만나려고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른 겁니다.
두 사람의 밭이 서로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 멀리 살았던 것도 아닌데 불러도 요압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밭에 불을 놓습니다. 그러니까 요압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마음에 이미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가택 연금 상태나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면 안 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아버지 왕을 만나서 자기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요압이 압살롬의 여러 차례에 걸친 호출에도 선뜻 응하지 않았던 것은, 비록 압살롬의 자세한 마음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압살롬이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형 암논을 그렇게 죽인 사람인데 어떻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뭔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려 한다는 야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요압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입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한 것이 요압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득실을 자세히 따지고 있습니다. 압살롬도 따지고 있고 요압도 따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요압이 한 수 위입니다.
“31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1-32절)
왜 자기 밭에 불을 질렀느냐는 요압을 향해 압살롬은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이 말을 보면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은 뭡니까? ‘죄 있으면 빨리 죽여라.’라는 건데,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나는 죄가 없다. 암논은 마땅히 죽어야 할 놈이 죽은 거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살인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으며, 아버지 다윗이 자기를 이토록 오랫동안 방치해 두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이러려면 왜 불렀나? 이러려고 불렀나?’ 이에 요압은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을 주선하고, 압살롬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다윗 앞에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그토록 보기 원하는 것은 자기 잘못을 진실로 뉘우치거나 죄를 고백하거나 다윗을 가까이서 뵙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자신의 반역을 실현하기 위한 필요가 다윗과 화해하려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빨리 화해해야 자기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있던 3년과 돌아와서 지낸 2년, 총 5년의 세월도 압살롬의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33절)
드디어 다윗은 압살롬과 5년 만에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면 5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너무 건조하고 너무 어색하지 않습니까? 압살롬은 여러 신하들 중 하나처럼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왕의 입맞춤도 다른 신하에게 하는 형식적 인사와 똑같습니다. 여기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거나 격하게 껴안았다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본문이 계속해서 다윗을 ‘아버지’나 ‘다윗’이라고 부르지 않고 ‘왕’으로 부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지를 안혹, 왕과 신하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서로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정말 진정성 없는 형식적 화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왜 그랬겠습니까? 압살롬은 차기 왕 감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고, 그렇게 형을 무참히 살해한 사람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압살롬의 반역의 마음을 더 부추겼습니다.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마음을 담아 사람들에게 입맞춤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렇게 진심이 담긴 입맞춤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압살롬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영혼 없는 입맞춤을 경험하면서 하나도 진정성이 없고 형식적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압살롬의 마음엔는 더 이상 어떤 의심이나 미련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이 자기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반역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는 것 뿐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성경 본문은 압살롬을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의 잘생긴 외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압살롬의 아름다운 외모와 대조되는 그의 악하고 추한 내면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음 장인 15장에서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고 잠시 왕이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압살롬은 그 누구보다 외모가 최고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복수, 원한, 분노, 미움, 살해, 반역, 조종 등 모든 추하고 더러운 죄악들로 가득했습니다. 온갖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는 압살롬처럼 되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외모를 꾸미고, 학벌을 높이고, 온갖 스펙을 쌓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면 자기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몰두하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외형적인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마음속에는 바로 그런 과정 속에서 비교의식이 자라나고, 거기서 오는 열등감, 경쟁심, 미움, 분노, 질투가 가득해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계속 그런 쪽으로만 몰두하는 겁니다.
가족까지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리고, 하나님도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한 도구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전부 자기 성공을 위한 기도 제목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셔서 자기가 성공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를 깨닫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외형적인 것만 추구하는데, 그러다 보면 그 끝은 무엇입니까? 결국 파멸인데, 그 과정 속에서 계속 겪는 것은 상처이고 불안이고 염려입니다.
이후에 압살롬은 자신이 그렇게 자랑하던 머리카락 때문에 죽게 됩니다(18:9, 15). 압살롬의 죽음은 내면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비참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는 아름다운 외모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혹시 지금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기 때문에 자랑하고 아끼는 나의 '머리카락'에 몰두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