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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6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6 ✦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
(사무엘하 16장 1~23절)
[들어가는 말]
혹시 사업하다 실패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업에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야반도주한 사람들에 의하면, 그럴 때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망하면 그렇게 가까웠던 친척들이나 친구들도 다 등을 돌리고, 무서울 정도로 거기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뭔가 자기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그런 상황이 되면 자기 것을 잃어버릴까 봐 달려 붙어서 남아 있는 것이라도 가져가려고 다툰다는 것입니다. 참 비정합니다. 돈이 그렇게 사람을 비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집에 남아 있는 가구나 나머지 재산을 다 포기하더라도 빚쟁이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거의 맨손으로 급하게 도망가야 하는데, 그러다 우연히라도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멱살 잡히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욕을 있는 대로 다 듣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폭행을 당하거나 경찰에 넘겨지는 등, 험한 꼴을 당하게 됩니다.
도망가서 숨어다니느라 정신없을 때 요즘처럼 선선한 날씨에 비라도 오면 신세가 정말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순간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럴 때를 이용해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 자기에게 뭔가 이득을 빼먹으려는 사람, 자기를 더 망하는 길로 몰고 가는 사람을 보면 정말 밉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그렇게 도망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아들에게 배반당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 심한 저주와 수치의 피난길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매번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는 것이라도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들어야 합니다. 사실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붙들려고 하기보다는, 그중 가장 내 마음에 와닿는 것,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또는 ‘내가 이래야겠구나’ 하는 한 가지를 붙잡고 일주일 동안 생각하며 묵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 애쓰다가 목장에서도 나누고 그렇게 살아보다가 다음 주일에 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내용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터치해주시는 한 가지를 붙들고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1. 다윗을 속이는 시바 (1~4절)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1절)
다윗 일행이 지나고 있는 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 즉 사울 왕의 기업이 있는 곳입니다. 첫 번째 왕인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는데, 그곳을 지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사람은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Ziba)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는데, 다윗의 명령에 의해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입니다.
그는 므비보셋의 종이 됨으로써, 이전에 사울의 재산을 다 맡아 관리하고 있었는데 자기 입장에서는 므비보셋에게 다 빼앗긴 셈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회복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압살롬의 반역으로 혼란한 시기를 틈타 다윗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므비보셋에게 넘어간 토지와 노비를 전부 되찾을 생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2절)
뜻밖의 일을 당한 다윗은 이 사람이 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여기 웬일이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의 재산을 차지했던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라고 명령했는데, 그 일로 시바가 자기에 대해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윗의 질문에 대해 시바는 “나귀들은 왕의 가족들이 타라고, 음식은 신하들이 먹으라고, 포도주는 누구나 지칠 때 마시라고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상당한 양을 가져왔는데,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는 피난길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세심히 살펴 나귀와 음식을 자기가 준비하여 가져온 것처럼 대답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므비보셋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그의 간교함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3절)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라는 이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네가 섬기는 상전(사울)의 손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다윗의 이 질문은 므비보셋이 물리적으로 이 순간 어디에 있느냐는 것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가 이 반역의 상황에 어느 편에 섰느냐를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자 시바는 자기 상전 므비보셋을 모함하면서 절반의 진실만을 이야기합니다. 사실도 이야기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교묘하게 말하며 거짓말을 합니다. “그(므비보셋)는 예루살렘에 있으며, 드디어 자신의 정당한 왕권을 되돌려 받을 날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반역하여 사울의 왕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시바의 진짜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는 요구된 이상의 내용을 대답하면서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압살롬이 지금 반역했는데, 사울 집안의 므비보셋에게 왕권을 회복시켜 주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므비보셋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런 착각에 빠질 가능성은 아예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것은 자기가 왕이 되려고 그런 것이지, 왜 므비보셋을 왕으로 세우려고 반역을 일으켰겠습니까?
게다가 므비보셋은 신체적으로만 보아도 왕의 자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자기도 압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자기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자기들을 위해 싸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인 므비보셋은 애초에 고대시대에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시바의 대답은 주인 므비보셋을 완전히 모함하는 말일 뿐입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4절)
순간적으로 감정이 상한 다윗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게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바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에게 사울의 재산을 넘깁니다. 다윗은 지금 시바의 악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다윗이 육체적으로 굉장히 곤고한 상황에 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주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움을 당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 옆에서 바르고 선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서 갑자기 나오겠습니까? 평소에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지체들 가운데 내가 어려움을 당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 나를 붙잡아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도 공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판단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겉으로 나타난 시바의 호의만을 보고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말만 믿고 섣불리 므비보셋을 정죄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 재산을 시바에게 넘겨주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겁니다.
시바처럼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중에 거기에 동참하며 함께 슬퍼하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의외로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태도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 이익이 중요하고 급해도 남의 불행을 이용하면서까지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악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입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한 사람과 함께 울어주고 슬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시바처럼 하는 것을 똑똑하다고, 잘했다고, 아주 지혜롭다고 칭찬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한 태도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힘든 상황을 이용해 달려드는 간교하고 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힘들 때일수록 우리가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자기 주위에 사랑의 공동체가 없을 때 위기입니다. 평소에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고 섬기며 서로 기도해주는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안 할 경우, 괴롭고 힘든 가운데 이단에서 와서 너무 친절하게 사랑으로 대해주면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이단이 나쁜 줄 몰라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는데도 지금 이 어려운 순간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은 이단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 잘못으로 교제를 안 하는 것도 문제이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이렇게 함께 모이고 교제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락하신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된 영적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순간적으로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믿음의 동역자들과 지체들이 정말 필요합니다.
위기의 순간이나 마음이 요동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그것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손해를 가져올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말을 듣거나 상황이 변했을 때 쉽게 결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기도하고, 믿음의 지체들이 함께 기도해주며 조언하는 것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5-14절)
1) 시므이의 잘못된 저주 (5-8)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5-6절)
곧 다윗 일행은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는데, 거기서 사울의 친족인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저주를 하고 돌팔매질을 합니다.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 중 첫 번째는 시바이고, 두 번째는 시므이입니다.
레위기(20:27)에 의하면 돌을 던지는 것이 사형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경우 사람들이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는 것이 율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도 바로 그런 율법에 의하여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워서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여기서 시므이는 돌을 던짐으로써,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선포하며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7-8절)
성경은 상당히 순화(?)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험한 욕을 막 한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사시면서 욕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것의 10배 이상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엄청나게 욕을 해대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피 흘린 자’라고 부릅니다. 또 다윗에게 닥친 고통이 우연이 아니라 사울 집안의 사람들이 흘린 피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보응의 결과임을 외치며 저주합니다. 시므이는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인데, 사울은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잘못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냥 놓아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의 잘못으로 죽었습니다.
그 후 사울의 아들 중 하나인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마하나임에서 다윗을 대적하여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때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있었고,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를 데리고 이스보셋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아브넬도 요압의 속임수로 암살당했습니다. 시므이는 그 모든 이들의 죽음에 있어 다윗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여기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므이의 이런 저주의 내용은 다윗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일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왕위에서 폐위되고 그의 집안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니라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배신한 것에 대한 결과였던 겁니다.
도리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두 번 다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신뢰, 그리고 사울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또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스보셋을 죽이고 의기양양하여 온 암살자들을 처단했습니다. 그전에는 사울이 죽었다고 보고한 아말렉 청년도 역시 처단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 집안에 자비를 베풀었는데 시므이는 그런 것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이의 이러한 저주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므이는 “여호와께서”라고 하며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린다고 다 올바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닌데, 자기 개인 감정으로 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2) 피곤한 다윗의 인내 (9-14)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9절)
이것도 역시 상당히 순화된 표현입니다. 막 욕을 하면서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스루야의 아들’이라고 나오는 이유는 스루야가 다윗의 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입니다. 아비새는 아주 용맹한 장수로서 한 번에 여러 명을 죽이는 용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이 같은 사람은 아비새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말립니다.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0-12절)
다윗의 이 말은 시므이의 잘못을 정당화시켜주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자식도 나를 죽이려 하는데, 사울 집안의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나를 저주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혹시 하나님께서 그의 저런 말과 행동을 듣고 보신 다음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주실지 누가 알겠는가?”
다윗은 악으로 악을 갚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비참한 처지일 때는 와서 욕하며 저주하다가, 나중에 다윗이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와서 그대로 엎드려 절하며 제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를 살려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그를 잘 처리하라고 합니다. 자기 대에 처리하지 않고 솔로몬에게 처리를 맡기는데, 실제로 시므이는 자기 잘못으로 결국 처형당하고 맙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함에 있어서, 시므이가 하는 말이 정말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러나 칼로 시므이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겸손히 회개하며 이 원통함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더 좋은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13-14절)
사실 시므이가 이렇게 나와서 저주하며 돌 던질 때는 목숨 걸고 하는 겁니다. 누가 생각해도 이렇게 하면 당연히 죽지 않겠습니까? 용사들이 몇 명인데 저쪽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자기 같은 사람은 상대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나와서 다윗을 저주하며 당연히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신이 나고 자신감이 붙어서 더 저주를 퍼부으며 깐족 깐족대는 겁니다. 그걸 듣는 용사들은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그래도 참고 갑니다. 왕이 하지 말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가 계속 그 뒤를 따라오며 돌팔매질하면서 모욕하고 저주하는 것을 그냥 두는데, 이것은 다윗의 겸손하고 영적인 모습인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같이 ‘뱀처럼 지혜로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므이의 이런 행동이 참 무모한 게 아닙니까? 용사들이 많은데 그 앞에서 어떻게 혼자 이렇게 합니까? 그러니까 시므이는 대표로 나온 겁니다. 지금 사울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는데, 다 나왔다가는 몰살당하니까 대표로 나와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때까지도 이스라엘에는 ‘사울 충성파’가 아직 건재하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시므이를 단칼에 죽여버리면 사울 충성파를 비롯하여 사울을 그리워하는 베냐민 사람들, 또 사울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이 압살롬에게 기울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다윗은 언제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들을 정확하게 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너무 뛰어났고 정치적으로도 너무 뛰어난,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3. 다윗을 대적하여 계략을 꾸미는 아히도벨 (15~23절)
1) 압살롬에 대한 후새의 속임수 (15-19)
“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5절)
다윗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압살롬은 그의 추종자들 및 아히도벨과 함께 아무 저항 없이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오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아버지 다윗을 향한 반역이 드디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고, 그가 꿈꾸던 것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6절)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니까 그를 환영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후새였습니다. 압살롬에게 있어서 후새의 출현은 뜻밖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다윗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이고 상담자이자 모략가였습니다.
과연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서 지금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위장 투항하고 있는 겁니다. 후새는 이 순간 다윗이 15장에서 요청한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압살롬 앞에 와서 다윗을 도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7절)
압살롬은 이러한 놀라움을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하는 말로 표현합니다. 압살롬은 후새가 다윗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친구에 대한 마땅한 자세는 친구와 대적하는 자기에게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 피난길에 있는 친구와 함께하며 고통을 나누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압살롬이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압살롬의 태도를 가리켜 요즘 많이 쓰는 전문용어(?)로 ‘내로남불’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그에게 적용해보십시오. 반역하고 예루살렘에 와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대로 대입하면 ‘이것이 네가 아버지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느냐?’
지금 아버지를 반역한 주제에 그의 친구가 자기에게 왔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압살롬은 지금 친구 정도가 아니라 친아들로서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는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사람입니까?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8절)
압살롬에게 후새가 다윗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붙었다는 것은 의외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후새의 항복을 내심 반기면서도 이게 진짜인지가 상당히 의심스러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이 아버지의 친구인데 나에게 온 게 진짜인가?’
이때 후새가 압살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의심과 궁금증을 만족스럽게 풀어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죽임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아히도벨 같은 사람의 눈이 얼마나 날카로운데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후새는 먼저 압살롬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합니다. 나중에 보면, 이상하게도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기가 막힌 모략을 듣지 않고 후새가 제시한 말을 듣습니다. 누가 봐도 그건 이상한 일입니다.
아히도벨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는 완벽한 계략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후새는 그런 식으로 방법론에서는 자기가 아히도벨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새는 마음을 파고드는 전략을 폅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은 아주 기가 막히고 완벽한 것이었지만, 후새의 전략은 압살롬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방법을 썼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후새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왕위 후계자 서열 1순위인데 아버지는 자기를 왕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한 압살롬을 후새는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인정받지 못해 생긴 압살롬의 상처, 즉 그의 인정 욕구를 파고들어 만져줌으로써 그의 마음을 안심시킨 것입니다. 대단한 전략입니다. 그러면서 충성을 다짐하니까 압살롬이 어떻겠습니까?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19절)
지금 자기가 다윗을 따라가지 않은 것은, 다윗이 쫓겨가고 압살롬이 왕이 된 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압살롬의 허영심을 부추깁니다. 자기는 친구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해서 압살롬 편에 남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압살롬 당신이다.’라고 말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다시 말해,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져야 하는데 후새는 압살롬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절대 다윗 왕가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절대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그는 압살롬의 쿠데타가 큰 그림으로 보면 다윗 왕조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다윗 개인에 대한 것임을 말하는 것도 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도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후새의 대답은 압살롬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압살롬의 신뢰를 얻게 됩니다. 많은 경우 머리로 이해되는 것보다 마음을 터치하는 게 더 통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보면 후새는 압살롬을 왕으로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에서 후새가 압살롬을 보면서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라고 외쳤는데, 이 왕이 누구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자기에게 그런 줄 아는데, 속으로는 다윗을 생각하며 그렇게 외친 겁니다. “(다윗) 왕이여 만세, (다윗) 왕이여 만세!”라고 외친 겁니다.
그리고 19절에서도 잘 보면,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라고 했는데, ‘섬기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오지만 각각 쓰인 단어가 다릅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내가 당신의 아버지를 곁에서 섬겼던 것처럼, 저는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버지를 섬겼으니 이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곁에 있겠다고 한 겁니다. 의도적으로 ‘당신을 섬기겠다’는 말을 생략한 겁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후새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그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으로 삼습니다. 이처럼 후새의 말이 먹혀들어 간 것은, 사실 후새가 아주 기가 막힌 전략을 써서 그런 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압살롬을 징계하실 것의 분명한 징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악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과 교만은 너무나 큽니다. 압살롬은 주도면밀하게 세상 지혜에 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를 높이는 것에는 쉽게 속아서 스스로 알고 있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간 겁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그냥 놓아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답답하고 괴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악의 최종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악을 심판하시며 진리가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데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잘 섬기며 나아가면 됩니다. 언젠가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그런데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반대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도 않은데 일이 잘 풀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망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지도 않고, 예배드리지도 않고,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하고, 섬기지도 않는데도,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 잘 나가고, 성적도 잘 나오고, 아이들도 잘되고, 전부 순조롭게 잘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곧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기다려주고 계시는 것임을 깨닫고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보장이 안 됩니다. 우리의 보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아히도벨의 첫 번째 조언 (20-23)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0-21절)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히도벨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 두고 간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다윗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함으로써, 압살롬 편에 가담한 자들이 더 이상 다윗에게 미련을 두지 않게 하는 것과, 또 압살롬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할 수 있도록 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런 일은 당시 흔한 일이었습니다. 적국을 정복한 나라의 왕이 정복당한 왕의 후궁들을 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히도벨의 말이 약간 이상한 게, 21절 뒷부분에서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까? 지금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면 압살롬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힘이 더 강해지겠습니까? 더 결집한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뭔가?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윗과 압살롬이 원수지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압살롬의 의도는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권을 자기에게 넘겨주도록 다윗을 압박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겁니다. 압살롬도 다윗 왕조의 합법적인 왕이 되고 싶지, 누가 불법적인 왕이 되고 싶겠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압살롬을 살리라고 간청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면 다른 왕자들도 언제 아버지 손에 죽임을 당할지 몰라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다음 왕으로 평안하게 권력을 이양하겠습니까?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가 이렇게 계속 애매하게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압살롬의 반역 편에 서서 쿠데타에 동참한 신하들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윗은 압살롬이 자기 아들이니까 봐주겠지만, 거기에 가담한 자기들은 죽임을 당할 게 뻔합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절대 관계가 좋아지면 안 되는 겁니다.
아히도벨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압살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압살롬에게 결집한다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얼마나 정치적입니까? 지금도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22-23절)
이것은 사실 지난번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나단이 찾아와 12장에서 이야기한 내용의 성취일 뿐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윗이 후궁을 많이 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도벨의 모략은 악한 것이었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한 압살롬의 행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위였습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다 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악함도 사용하셔서 그것조차 다윗을 징계하는 기회로 삼으시고, 또 나중에 압살롬과 아히도벨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아히도벨과 압살롬 일당은 악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강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대적하는 악인들이 성공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악한 사람은 건강하며 장수까지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수치를 당하고 위험에 처하고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면 ‘믿어봤자 소용없네. 기도해봤자 소용없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소용없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곤란합니다.
결국 악인들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 땅에서 심판이 전부 이루어지고 보상이 전부 이루어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그럴 수 있지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악한 사람들이 심판받거나 하나님 뜻대로 산 사람이 상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을 반드시 책임져주신다는 것,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 아닙니까? 영원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악인의 죄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단지 지금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혹시 심판과 보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공의의 하나님을 믿으며 신뢰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면 결국 악으로 망하게 됩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악을 당할 때 힘들지만 그때 인내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꼭 붙들고 나아가야겠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주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럴 때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주 안에서의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도 그러한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리면서 승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