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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Cz4e7LcvnFs?t=206

 

 

20228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26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는 다윗

(사무엘하 91~13)

 

[들어가는 말]

 

오래전인 1993년에 저는 신학대학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나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정권이 바뀌고 새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그때 사정의 바람이 불어서 이전 정권 때 비리를 저질렀거나 잘못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잡혀 들어가서 감옥에 갇혔고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 모두 자기들이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심지어 이전 대통령 두 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내란죄, 반란죄로 한 명은 사형, 다른 한 명은 징역 22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항소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6개월로 감형되었다가 결국 얼마 후 사면 복권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한국은 대통령을 지내기만 하면 본인이나 가족 또는 측근들이 잡혀 들어가는 역사가 반복되는 불행한 일들이 지금까지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직전 대통령 2명이 구속되어 형을 살다가 한 명은 작년 말 사면되어 나왔고 다른 한 명은 요즘 사면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을 보면 나라의 국가적 일이 있을 때,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들이 당을 불문하고 다 같이 모여 웃으면서 환담하고 교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럽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대통령을 하고 나면 잡혀들어가든지 가족이 잡혀들어가니까 안타깝습니다.

 

당연히 권력을 이용하여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후 정치적인 계산 때문에 이전 정권 핵심 인물들을 잡아넣는 면도 분명히 없지 않다는 것을 사람들 모두가 느낍니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적폐 청산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 보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처럼 이렇게 금방 다 알려지는 민주화 사회에서도 그렇다면, 옛날 고대사회 때는 어땠겠습니까? 지금도 독재 국가들은 정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잡아넣거나 암살해서 없애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아니면 숙청해서 죽여 버립니다. 오래전 고대사회 때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당시 고대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발견합니다.

 

 

1.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는 다윗 (1~8)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다윗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다운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자신의 통치 아래 들어오고,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며, 그 주변 나라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강해지자, 다윗은 곧바로 자신이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냅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1)

 

나중에 보면(21)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로부터 억울한 일을 갚게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 집안 남자들 몇 명을 찾아서 내어주는 일이 벌어지는데, 학자들에 따라서는 그 사건이 뒤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먼저 일어난 일이고 오늘 9장이 나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이든 큰 지장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했다는 점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 통치 기간 중 중기 이후에 일어난 일로 보이는데, 사울이 죽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 전투 때 다섯 살이었던 므비보셋이 이제는 성인이 되어 아들까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겁니다. 다윗은 나라를 내적으로 안정시키고 외적으로 적국들을 정복하여 통치 기반을 마련하고 난 다음, 사울의 집에 아직 남은 사람이 있다면 은총을 베풀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전에도 사울과 함께 그의 아들이며 자기와 생명을 나눈 친구인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또 자기를 계속 대적했던 아브넬과 그가 세운 허수아비 왕 이스보셋이 죽었을 때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슬픔을 나타내며 애도했습니다. 그렇게 원수를 향한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특히 1절에서 요나단으로 말미암아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호하고 격려한 가장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특히 다윗이 그의 아버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요나단은 사울의 잘못된 일에 오히려 반대하고 다윗을 몰래 만나 격려했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도망 다니던 시절이니까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오히려 요나단이 그것을 격려해줍니다. 요나단은 그것을 내다보고 네가 왕이 되면 내 자손을 보살펴 다오.’ 하면서 20장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 20:12-16).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도망 다니는 입장에서 어떻게 왕이 되어 너의 후손들을 내가 돌봐주겠니? 네가 내 후손들을 돌봐주어야지.’라고 느꼈을 텐데, 요나단은 앞을 보는 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누가 살아남든지, 요나단이 왕이 되면 다윗 집안을 돌봐주고, 다윗이 왕이 되면 요나단 집안을 돌봐주기로 서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 다윗은 오래전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약속은 몇 년이 되었든 지키는 겁니다. 오래되었다고 이젠 안 지켜도 되겠지.’라고 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겁니다. 약속에는 expiration date가 없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다 이루자 친구가 그리워졌던 것 같습니다. 자기와 생명을 나누던 그 친구 요나단,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의 아들이면서도 자기를 그토록 보호해주고 지켜주었던 그 친구가 그리워졌습니다. 그래서 그와 맺은 언약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신하들은 다윗이 원하니까 수소문 끝에 사울 집의 종이었던 시바라는 사람을 찾아내어 다윗 앞으로 데려옵니다.

 

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2)

 

이때 시바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사울 집안의 종이었기 때문에 나를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불안으로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그를 찾은 것은 사울의 집을 멸하려 함이 아니라 그 집의 남은 자에게 은혜를 베풀려 함임을 밝히고 그를 안심시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3)

 

다윗은 자신이 베푸는 은혜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은총이라는 것은 그냥 은혜’(grace)자비’(mercy)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로고스’(logos)라는 단어가 말씀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헬라(그리스) 사람들만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라는 우리말 단어도 어떻게 영어로 번역되겠습니까? 한국 사람만 알 수 있는 단어입니다.

 

또 한국 사람만 알 수 있는 단어가 오래전 세계의학백과사전에 등록되었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hwa-byung’(화병)입니다. 발음도 안 되고 그 뜻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합니다. ‘불 화자이니까 fire disease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anger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hwa-byung이라고 해놓았습니다.

 

여기서 은총으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 원어로는 헤세드’(hesed)인데, 이것도 우리가 100%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입니다.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한결같이 신실한 사랑, 넓고도 깊은 자비와 인애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울의 집의 남은 후손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하는 것은 다윗 자신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깊이 경험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이런 은총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는 사람인가? 아니면 인색한가? 이 단어가 영어로는 kindness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친절하고 자상한 것을 말하고, 은혜 이상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친절함인데 나는 왜 별로 친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친절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오든 친절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것에 따라 내 반응이 달라지는 게 친절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주고, 저쪽에서 이상하게 나오면 나도 이상하게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은총’(kindness/hesed)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별로 친절하지 않습니까?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고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친절하지 않습니까? 바로 이 은총(헤세드)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경험하고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은총을 받고도 잊어버리는 것을 전문용어로 뭐라고 합니까?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큰 은총을 입고도 어떻게 그렇게 인색합니까? 은총에 인색한 사람은 은총의 깊이와 풍성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헤세드(은총)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부족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돈이 많은데 늘 부족함을 느낍니까? 늘 불안합니까? 헤세드(은총)를 실천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계속 목마름이 있습니다.

 

유명한 부자들에게 기자들이 물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더 있어야 만족하겠습니까?” “Just a little bit more(조금만 더).” 만족이 없습니다. 계속 목마름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총을 베풀지 않으니까. 행복과 기쁨과 평안이 없고 늘 염려와 불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나는 어떻습니까? 선택적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풀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을 입었으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시바로부터 사울의 집에 생존한 자가 있으며,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의 생명과 같은 친구인 요나단의 아들이라는 것을 듣게 된 다윗은 당장 그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4-5)

 

로드발이라는 곳은 요단강 동쪽 마하나임, 즉 이스보셋 정권이 있었던 곳에서 북쪽으로 3마일 정도밖에 안 떨어진 성읍입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그곳에 사는 마길이라는 사람의 집에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 도망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길은 도망자인 므비보셋을 그의 집에서 보살펴주었을 뿐 아니라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던 다윗을 도왔던 부자로 등장합니다(삼하 17:27-29).

 

그런데 마길이 다윗을 왜 도왔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이때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것에 대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마길이라는 부자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불쌍히 여기며 자기 집에서 데리고 있어 주었는데,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멸해도 시원치 않은 고대 시대의 상황에서 다윗은 오히려 므비보셋을 돌봐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길이 거기에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것을 계산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므비보셋에게 베풀었던 그 은총이 나중에 자기가 도망갈 때 그 전에 므비보셋을 돌봐주었던 마길로부터의 은총으로 돌아온 겁니다. 이런 게 은총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재난지원헌금을 하자고 하고, 우크라이나 특별헌금도 하자고 하고, 또 저번처럼 토네이도나 쓰나미가 왔을 때도 헌금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돈 내놓으세요’(?)라고 하기가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액수와 상관없이 내 마음을 드리며 내 형편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은총으로 내게 돌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절대로 돈 낭비하는 게 아닙니다.

 

돈이나 헌금만 아니라 시간도 그렇습니다. 바쁜데 시간을 내어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 줄 때, 누군가 어려움을 당하니까 내가 가서 도와줄 때, 이사를 오거나 가는 사람에게 가서 도와줄 때, 나도 시간이 없는데 도와야 하니 피곤하고 지친 채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베푼 은총이 나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데로부터 내게 오도록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소위 똑똑하게 사는 것이 똑똑한 게 아닙니다. 머리를 굴리며 계산해서 요건 요만큼만 하고, 조건 조만큼만 해야지.’ 하는 게 절대 똑똑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냥 사랑으로 나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니까 나도 베풀어야지.’ 하면서 어렵지만 동참하고 시간도 내줄 때, 놀라운 은총이 나에게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6)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므비보셋수치 파괴자라는 뜻인데, 그의 원래 이름은 바알과 다투는 자라는 뜻의 므립바알이라고 나옵니다(대상 8:34).

 

그런데 많은 구약학자들이 오늘 사건을 보면서,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정치적 계산에 의해 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보는 학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다윗이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것은 공짜로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람들 앞에서 사울 집안에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사울 집안의 다른 사람도 있었을 텐데 므비보셋을 택한 이유는 그가 단지 요나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뭡니까?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장애인들이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그런데 고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은 성전에도 못 들어가고, 왕은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은 정권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므비보셋만 콕 집어서 돌봐주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꽤 많습니다.

 

물론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우리가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그런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순수한 동기에서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후손을 찾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 사이의 짧은 단락에서 요나단의 이름이 4번이나 언급됩니다(1, 3, 6, 7). 또한 헤세드/은총’(자비, 인애)3번 사용됩니다(1, 3, 7). 그러니까 이 사건의 핵심은 다윗의 헤세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 앞에 불려 나왔을 때 므비보셋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마길의 집에 그 동안 잘 숨어 있는 사이 시간이 상당히 흘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왕이 부르니까 가자고 했을 때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 이제 드디어 내가 죽는구나. 드디어 이제는 사울 집안사람으로 처형을 당하는구나.’ 그러면서 간 겁니다. 평소에도 두려움 속에 숨어 살았지만, 이제는 부름을 받아 가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이 그에게 뭐라고 합니까?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7)

 

완전히 복음 아닙니까? “무서워하지 말라.” 이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선포할 때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모든 것을 정치적인 의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므비보셋의 이름은 5절까지는 나오지 않고 6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가 다리를 저는 사람이라 다윗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므비보셋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요나단의 자손이라면 자기가 은총을 베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대 시대에는 이전 왕을 제거하고 왕이 된 사람이 선왕의 가족까지 모두 죽여버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역사를 보십시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그토록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사울 집안사람들을 이제 왕으로서 몰살시킨다고 해도 당시 관염으로 볼 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반발을 살 수는 있지만 왕으로서 못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 집안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정치적으로 행동했다면 애초에 처형하는 방법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두 가지 은총을 베풉니다.

 

첫째, 그의 할아버지 사울 왕이 소유했던 모든 땅을 그에게 줍니다. 준다고 선언한 순간 므비보셋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윗이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정말 므비보셋을 견제하려고 했다면, 사울의 땅을 되돌려주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거의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 왕이 자기가 몰아낸 선왕의 땅을 그의 후손에게 실제로 돌려주었다가 그것을 기반으로 그 후손이 다시 일어나서 공격해오고 쿠데타를 일으킨 예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땅을 다 돌려줍니다.

 

므비보셋은 성인입니다. 자기는 다리를 못 쓰니까 자기는 못 싸워도 이 땅을 기반으로 군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땅을 돌려줍니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아도 다윗은 정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과 약속한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놀랍게도 므비보셋을 자기 옆에 두어서 항상 자신과 식사를 함께하도록 합니다.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비록 다리를 못 쓰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대로 로드발에 놓아두면 이스보셋 정권이 있었던 마하나님과 가까운 곳이라 그 잔당들과 모의하여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다윗이 아예 그를 자기 옆에 딱 두고 감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신체적 결함에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율법의 규정을 생각해 보면, 장애인의 몸으로 왕 앞에서 매일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차별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장애인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겁니다. 고대사회 때는 장애인들이 취급도 못 받았고 저주받은 자라고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요한복음 9), 그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이렇게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확실한데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눈이 안 보이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 상황에 의해 이 사람이 그렇게 태어났지만, 그의 삶은 저주받은 삶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삶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는 AD 1세기 초 아닙니까? 다윗 때는 BC 1,000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보다도 천 년 전인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더 좋았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더 나쁘면 나빴지 더 좋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왕의 상에서 늘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자비이고 배려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므비보셋을 친아들처럼 대해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왕자들과 같이 식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자비에 대해 므비보셋은 뭐라고 합니까?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8)

 

자신을 가리켜 죽은 개 같은 나라고 하는 걸 보면 자기를 아주 낮추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사울 집안사람이니까 도망자로 살았고 또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던 므비보셋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자아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치심과 상처 속에 사는데 사람들이 뒤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저렇게 되었다.”

 

그렇게 살아오던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의 헤세드(은총)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개 같은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해주십니까?”라고 감탄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의 오랜 상처와 수치를 씻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 죽은 개를 보셨습니까? 운전하고 가다 보면 가끔 개가 차에 치어 죽은 것을 봅니다. 자기가 그런 것 같다는 것입니다. 죽은 개가 너무 귀엽다고 가서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찡그리면서 피해 갑니다. 그런 존재인 자기를 돌봐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윗이 실천했다는 겁니다.

 

정말 은총을 입었다고 깨달았으면 은총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베푸는 작은 배려와 사랑이 상처를 갖고 살던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걸 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윗도 아닌데 무슨 엄청난 것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일이 잘 풀릴 때, 성공을 거둘 때, 돈도 좀 벌고 사회에서 안정될 때, 집도 아파트에서 집으로 또 더 좋은 집으로 옮길 때, 차도 중고차 타다가 작은 새 차에서 조금 더 좋은 차를 타게 되는 등 형편이 풀릴 때, 남을 돌아볼 줄 알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만 잘 먹고 나만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나와 내 가족과 내 아이들이 잘될까?’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자기를 돌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기도 돌아보아야 하지만, 그럴 때 이웃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라는 겁니다. 혹시라도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은 없는지 돌아보라는 겁니다. 엄청난 걸 하라는 게 아니라 함께 봉사하고, 어떤 기회가 있을 때 구제헌금 등에 동참하고, 시간을 내서 함께 교제하는 것 등을 통해, 놀랍게도 나는 작은 일을 한 것일 뿐인데 큰 상처가 치유 받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런 것이 복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2.   은총으로 회복된 므비보셋의 인생 (9~13)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9-11)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서 사울과 그 집의 모든 것들을 주어 므비보셋 대신에 관리하게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바에게 므비보셋이 아니라 네 주인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네 주인의 손자이지만, ‘네 주인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은 너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몰수된 기업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므비보셋은 할아버지인 사울이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로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서 양발을 다 저는 고통을 당하던 장애인이었지만, 이제는 다윗의 은총으로 다윗의 아들들과 나란히 앉아 먹을 수 있는 영광된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자비로운 행동에 시바도 어느 정도는 감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갔다가 돌아왔을 때 시바가 므비보셋을 모함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땅의 반을 시바에게 주는 일이 벌어지는데, 시바라는 사람은 약삭빠르고 눈치가 빠르며 상황을 잘 판단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것을 챙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다윗과 같이 순수하게 은총을 베푸는 사람의 삶이 행복하겠습니까, 아니면 시바처럼 약삭빠르게 자기 것을 챙기는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겠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보면 므비보셋은 미가를 비롯하여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시바는 아들이 몇 명입니까? 아들이 열다섯 명, 종이 스무 명이었습니다. 자기도 종이면서 종도 많고 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굉장히 챙기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사울 집안의 종이었으면서도 엄청나게 자기를 챙기면서 산 사람이 시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를 늘 생각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마치 므비보셋이 받은 은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한 게 없고 자격도 없는데,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벌써 예수님을 통한 은혜를 보여주는 겁니다. 므비보셋이 뭘 잘한 게 있습니까, 뭐가 잘난 게 있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풀어줬습니다. 단지 그의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자격도 없는 우리가 단지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무엇보다 므비보셋은 왕의 상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식탁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전혀 나아갈 수 없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껏 나아가 이렇게 예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은혜를 늘 기억하도록 주신 것이 바로 이 공 예배입니다. 같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만찬입니다. 성만찬 때마다 바로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식탁에 내가 참여하여 먹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예수님 덕분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는 받은 은총에 더하여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우신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이런 은총을 받아서 좋다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나도 은총을 베푸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먼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그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다.

 

만일 므비보셋이 다윗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것을 사양하며 자기는 이런 은혜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거부했다면, 다윗은 그것을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분노했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해주겠다는데 네가 왜 거부하느냐? 그것도 네 아버지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러는 건데 네가 왜 그러느냐?’라고 했을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실망하시고 더 나아가 분노하실지 모릅니다. 믿음의 반응은 반드시 상하고 애통해하는 심령을 통해 나오는 겁니다. 므비보셋처럼 나는 아무 자격이 없는데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아무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참여시켜주십니다.

 

넓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 때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게 됩니다. 원수의 집안에 원수로 갚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자비로 갚는 것이 믿음입니다. 실제로 원수를 갚기 위해 평생 노력한 사람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원수의 인생이 쪼그라들어 아주 볼품없이 된 것을 보고 내가 이런 사람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평생 시간과 노력을 바쳤나?’ 하고 허탈해했다고 합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말 시간 낭비이고 에너지 낭비입니다. 오히려 사랑과 자비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태도이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12)

 

미가는 누가 하나님과 같으신가?’라는 뜻입니다. 미가는 많은 자녀를 낳았고 그 때문에 사울의 가문은 끊어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다윗이 결코 정치적으로 이 모든 것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에서 미가로, 미가에서 그 자녀로 계속 사울 집안이 이어져가는데 얼마나 위험합니까? 원수의 집안인데 계속 번성하면 얼마나 자기 정권과 후손에게 위험합니까? 그런데도 은총을 베풀었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13)

 

여기서 므비보셋에게 장애가 있는 것과 왕의 상에서 떡을 먹은 것을 동시에 언급하는 이유는, 므비보셋의 현재의 연약한 모습과 다윗이 그에게 베푼 은총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아무 자격이 없지만 받은 은총을 여기서 강조합니다.

 

 

[나가는 말]

 

정리해 보면,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 그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적으로 므비보셋은 다윗의 호의를 입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원수였던 사울의 손자였고, 다윗을 피해 몰래 숨어 지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에게 재산을 돌려주고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큰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을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요나단이 베푼 사랑을 기억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은혜를 갚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맞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받은 상처를 은총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요나단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까? 자녀로서 부모님에게 상처를 받고, 부모로서 자녀에게 상처를 줍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상처를 받습니다. 특히 말로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상처는 나도 가서 확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처가 더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극복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나누었던 그런 사랑으로 극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또 서로간의 사랑으로 해결됩니다. 원수 갚는 것으로 상처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므비보셋이 받은 은총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총과 비슷하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개 같은 저를 어떻게 이렇게 돌보십니까?” 그런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벧전 2:9-10).

 

그러므로 혹시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만 있는 삶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보복하려는 건 아닌지 돌아보면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을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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