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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7일 부활주일 연합예배
✦ 부활절 메시지 ✦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
(요한복음 20장 19~21절)
1. 두려워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은 안식일 전날, 즉 금요일 오후 3시경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그날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르며 지킵니다. 예수님은 그날부터 사흘째 되는 날인 일요일, 즉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20장 앞부분에 보면, 그날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내가 주님을 보았다.”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과 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 세족식을 했던 바로 그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 선생님을 잃었으니 우리 리더를 이렇게 만든 저 로마를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자!’라고 하며 무슨 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안식 후 첫날 저녁’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을 말합니다. 이때는 이미 막달라 마리아가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며 기쁨과 감격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을 때입니다. 하루종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 저녁에 함께 모여서 그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자기들도 잡아서 해칠까 봐 겁을 먹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하느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고 있었습니다.
‘문들을 닫았더니’를 헬라어 원어로 보면, 이들은 단지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문 하나가 아니라 2중, 3중으로 된 문들로 겹겹이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가끔 문을 잠그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도 가끔 문을 잠그는 것을 잊어버릴 때도 있고 일부러 안 잠글 때도 있습니다. 정말로 누군가가 와서 나를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문 잠그는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내 차에서 뭔가를 훔쳐 가려 하면 차문을 안 잠그겠습니까? 또 누군가가 집을 침입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문을 안 잠그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이 문을 잠근 걸 보면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부활을 믿지 않으니까 그 결과로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었습니다.
지금 다락방에 숨어서 공포에 떨고 있는 이 제자들의 모습과, 그에 비해 여기저기 다니며 ‘내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증거하면서 다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무엇이 그들에게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수제자다.’라거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다.’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전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었고 일곱 귀신이 들렸었다는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느냐, 그분을 정말로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들에게 ‘지금 자기에게 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고 그들이 말한 가장 심각한 문제 다섯 가지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1순위가 ‘두려움’이었습니다.
‘취직해야 하는데 앞으로 어떤 직장에 취직해야 하나? 아니, 취직을 할 수는 있나?’ ‘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다 같이 공부하고 졸업하는데, 2~30년 후에 나만 성공하지 못하고 뒤처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두려움이 가장 1순위였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유명한 신문 저널리스트도 상담 편지를 보내주면 자기가 답을 해주겠다고 광고했더니, 한 달에 무려 만 통 이상의 상담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편지를 보냈는데 공통으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그는 한 단어로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공포’(fear)였습니다. ‘새로운 삶’ 때도 자신의 문제를 알아보는 시간이 있는데, 대부분의 기수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두려움입니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건강식품 사업이 너무 잘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타민뿐 아니라 들어보지도 못한 별 희한한 것을 많이 먹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무슨 두려움입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광고를 할 때도 잘 보십시오. 두려움을 부추겨서 사게 만듭니다. ‘당신이 이것을 안 사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다 삽니다. 당신만 안 사면 불행해집니다.’ 하고 부추겨서 사게 하는데, 특히 워런티(warranty)가 그렇습니다. 팔 때는 최고의 품질이라고 하다가, 사기로 하면 고장 날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아니, 최고라고 해놓고는 고장 날 것을 생각하라고 하니, 말이 안 맞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건강식품도 먹고 별 이상한 것도 다 먹는 것은, 깊이 들어가 보면 죽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사실 죽는 것도 두렵지만 아플까 봐 두려워합니다. 물론 아프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약이나 건강식품을 먹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두려움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두려움과 공포로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혹시 지금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게 뭔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염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주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게 되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되면 2중, 3중으로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게 됩니다. 그렇게 잠가버린 마음속에서는 염려와 두려움과 불신이 아주 활발하게 활동합니다.
하지만 ‘신앙’ 즉 주님에 대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러한 두려움으로 잠가버린 빗장을 걷어 내고 염려와 두려움과 불신의 문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도록 도와주십니다.
2. 평강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그렇게 문을 굳게 걸어 잠갔는데도 예수님은 찾아오셨다는 점입니다. 문들을 열어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도 아닙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때려 부수고 들어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 한가운데 그냥 나타나십니다.
이때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자기들은 ‘어떻게 하지?’ 라고 있는데 갑자기 탁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그들이 너무 놀라서 예수님이 귀신인 줄 알 정도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셨습니까? 그들을 놀래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부활한 게 아니라 진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는 영지주의가 세력을 얻던 때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영이 귀하고 몸은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은 영의 감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영으로 하신 것이지, 왜 악한 몸으로 하시겠느냐고 합니다. 그런 것이 영지주의 이단입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탁 나타나고 싶어도 주님은 가능하시지만 우리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ᄁᆞ? 오직 하나님만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오신 주님께서 하신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바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지금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평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레네’인데, 히브리어 ‘샬롬’을 번역한 것입니다. ‘샬롬’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보통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지금도 이메일이나 편지를 쓸 때 ‘샬롬!’라고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저 형식적인 인사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절)
제자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원한다고 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결코 무슨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확인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자신이 손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찔렸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정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고서 기뻐합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1절)
예수님은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같은 말을 반복하십니다. 우리가 똑같은 인사말을 연속해서 반복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서 “How are you doing? 안녕하세요?” 하고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눈 다음에 몇 분 후 또 다시 “How are you doing?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볼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신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때 마침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가 직접 예수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과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니까, 그것을 아신 예수님은 일주일 후 도마가 있을 때 이곳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때도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는데, 다시 그곳에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꼐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도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26). 지난 일주일 동안 제자들에게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강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 평안이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공포와 불신에서 벗어나고, 그들의 마음이 참된 평화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강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강의 근원이 누구입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우리에게는 평강이 넘칠 수가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공포에 떨었는데, 이제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오심으로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정말 믿고 있다면, 어떻게 평강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지금 어떤 문제로 인하여 불안해하며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사건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그고도 계속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것으로 안전해 보려고 해도, 해놓고 나서도 불안해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에게 평강을 부어 주셨을 때, 이중 삼중 겹이 쳐서 마음으로 가게 되고, 굳게 닫혀 있던 그들의 마음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염려의 문, 두려움의 문, 불신의 문이 다 열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골방에서 뛰쳐나와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가는 말]
이제 한국도 상황이 좋아지면서 격리 면제도 풀리고, 내일(4/18)부터 거리두기가 전면 폐지된다고 합니다. 그럼 한국 가기가 이전보다 쉬워질 것 같습니다. 한국행 비행기 표를 알아볼 때 보시면, 일반석에 비해 비즈니스석은 두세 배 정도 비싸고, 일등석(First Class)은 다섯 배 이상 비쌉니다.
왜 그렇게 차이가 납니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데, 자리가 넓고 쾌적하며 서비스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등석은 다리를 죽 뻗고 편안하게 누워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쌉니다.
사람의 자세 중 가장 편안한 자세가 드러눕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자동차나 비행기 일반석에서 앉아서 자더라도 그렇게 개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 사람들이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은 비싸서 못 타더라도, 빈자리가 있는 줄을 차지하려 눈을 번뜩이다가 자리가 나면 벌러덩 드러눕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드러눕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닥이나 침대에 나의 온몸을 모두 맡기는 게 아닙니까? 바닥에 닿는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즉 우리 몸을 침대나 바닥에 많이 맡기면 맡길수록, 우리 몸은 더 편안해지고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침대나 바닥을 믿지 못하면, 거기에 누울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거기에 맡길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침대에 누웠다가 갑자기 뚝 하고 부러지고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라고 하면 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혹시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다가 너무 눈꺼풀이 무거워서 졸고 계시다면, 의자를 믿기 때문에 그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게 내가 졸 때 ‘혹시 무너지면 어떡하지?’ 하면 누가 졸겠습니까? 우리가 침대를 침대에 많이 맡길수록 편안하지만, 그것은 침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많이 맡기면 맡길수록 우리는 더욱 평안을 얻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맡지 못해 불안해하거나 맡기지 못한다면, 평안을 주셨는데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침대에 누워서도 ‘이게 무너지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는데 제대로 잠이 오겠습니까? 적게 맡길수록 그만큼 고통과 괴로움을 더 겪게 됩니다. 누워 있으면서도 걱정하면 평안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고, 맡긴 만큼만 우리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한 결과를 책임져주실 것을 믿고,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부활의 주님께 온전히 맡김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평강의 삶으로 책임져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