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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hDjvPShZLVI?t=2018
2022년 5월 29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7 ✦
“나중에 화근이 되는 아사헬의 죽음”
(사무엘하 2장 18~32절)
[들어가는 말]
작은 시비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로 발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전에 신문 기사에 그런 일이 실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껄렁거리고 질이 좋지 않은 남학생이 한 여학생을 성폭행했다가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달려온 여학생의 아버지가 너무 화가 나서 남학생을 발로 찼는데, 그 남학생이 쓰러지면서 머리를 땅에 부딪쳐 뇌진탕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어른도 그러한데, 특히 청소년기에는 욱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욱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청소년들은 더욱 위험합니다. 친구가 다른 학생들과 싸움이 벌어졌거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싸움에 휩쓸릴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불구가 되거나 심지어 죽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면 거기에 가담한 죄로 큰 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Memorial Day라든지 Labor Day라든지 또 4th of July 등 주일이 끼어서 여행을 간 경우, 특히 아이들이나 청소년 또 성인이라도 자녀와 함께 여행을 갈 때, 어디를 가든지 ‘우리가 사정상 주일을 끼어 여행을 나왔지만, 이날이 하나님의 날인 것을 기억하고 이 시간만큼은 예배를 드리자.’라고 하며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보여주며 선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새겨집니다.
주일을 슬쩍 빠지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한 damage를 가져옵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교회에 나가지만 무슨 일만 있으면 교회에 안 나갈 경우,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아, 교회는 내가 무슨 다른 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빠질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 아무리 신앙교육을 열심히 하고 아무리 집에서 자녀교육을 열심히 해도 그런 것 하나가 공든 탑을 무너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잘해나가고, 가정에서 아빠 엄마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이웃을 잘 섬기는 모습이 삶이 되어 보여줄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지켜주시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넬이 이스라엘 군인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결국 살인죄를 저지르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브넬은 사울이 죽은 후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워서 대항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에 두 왕과 두 정권이 서게 되었고, 아브넬과 요압은 군인들과 함께 기브온의 못가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원래 하나였고, 사울이 죽은 이후에 둘이 된 겁니다. 그런데 아브넬은 또 이스라엘이 하나 되지 못하도록 자기 권력을 위해서 일을 벌였습니다. 그가 제안한 장난은 저번에 살펴본 것처럼 양쪽 군사들이 열두 명씩 서로 붙어서 싸우는 것이었는데, 옆구리를 찔러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위험한 장난이 전쟁으로 커져서 양쪽 군대가 맹렬하게 싸우게 되었습니다.
아브넬은 이렇게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나중에 다윗이나 요압에게 자기 지분을 요구할 생각을 갖고 이렇게 한 겁니다. 아브넬도 다윗이 더 강하고 언젠가 전체의 왕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종의 유세를 하여 어렵게 만듦으로써 나중에 자기가 지분을 더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의 혈기를 잘못 건드리게 되면서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이는 죄를 짓게 됩니다. 또한 이 일이 화근이 되어 나중에 다윗이 용서하고 받아주려 했지만, 합의를 마치고 돌아갈 때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품은 그의 형 요압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넬은 하나님의 뜻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또 자신의 야심 때문에 어렵게 만들다가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1. 아사헬의 죽음 (18~23절)
“그 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18절)
스루야는 여인인데 다윗의 누이입니다. 누나인지 여동생인지는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는 누나라고 보는 게 더 맞는다고 보입니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 세 형제를 두었는데,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될 때 30세였고 이 세 사람은 모두 엄청난 용사였습니다.
만약 스루야가 다윗의 여동생이었다면 다윗이 지금 30세이니까 아무리 스루야가 나이가 많아도 다윗보다 밑이니까 29세가 됩니다. 그러면 29세의 여인이 낳은 세 아이들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십대 소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어떻게 엄청난 용사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다윗의 누나로서 세 아이들이 다윗과 나이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스루야가 다윗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나였다면 세 아들 중 특히 요압 같이 가장 위의 형은 다윗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세 명 모두 다윗의 신복이며 용맹한 군인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 중 특히 아사헬이 매우 빠른 발을 지닌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들노루처럼 빠르다고 표현했는데, 그가 달음질이 빠른 것으로 인해 유명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을 보면 얼마나 빠릅니까? 100미터를 10초도 안 되게 뛰어서 우승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가는데 이 아사헬은 뛰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앞에 갈 정도로 아주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자기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 빠른 발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빠른 발을 믿고 나가서 싸우는 용사였습니다. 자신의 빠른 발로 상대편 군대 장관인 아브넬을 추격하여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추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넬의 창에 찔려 너무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 달려가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으니” (19절)
이리저리 안 가고 똑바로 앞만 보며 아브넬만 쫓아갔습니다. 이렇듯 아사헬은 자신의 빠른 발 하나만을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빠른 발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싸움의 기술도 있어야 합니다.
이전에 제가 친구들과 가끔 축구 경기를 보다가 “저 선수는 발만 빨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축구선수는 빠르기만 하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물론 빠르면 도움이 되지만, 기술도 있고 또 전술을 이해하는 머리도 있어야지, 무조건 빠르기만 하다고 골을 넣겠습니까 아니면 이기겠습니까?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수가 빠르기만 하다고 그게 다가 아닙니다. 지혜도 있고 기술도 있고 노련함도 있고 보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사헬은 자신이 지닌 빠른 발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다른 전투 능력에 대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상대편 군대 장관인 아브넬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브넬의 공격에 대해 방어를 소홀히 하게 되어 그의 창에 찔려 죽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창의 뒤로 찔려 죽었는데, 얼마나 빨리 뛰었으면 창의 뒤로 찔렀는데 죽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브넬이 누구인가 보면, 사울이 왕으로 있을 당시 크게 인정받아서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될 만큼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십대 소년으로서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가 이길 때 이미 아브넬이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 있었으니까, 다윗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고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딱 보니까 아사헬은 다윗보다도 더 젊은 사람인데 자신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바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은 급히 쫓기는 상황에서도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아사헬에게 자기를 쫓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 (20-21절)
아브넬은 아사헬이 자신을 빠르게 추격해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아사헬아 너냐?”라고 묻습니다. 말이 그냥 보면 굉장히 웃깁니다. 막 뛰면서 “너냐?” 그러니까 “나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히 표현한 것이지, 진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수풀에 가려서 잘 안 보이니까 아사헬인지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자기 대신에 자기 군인 하나를 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아 생포해가면 전과를 올리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해서 돌아가라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아도 아브넬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군대의 청년, 즉 자기 밑에 있는 군인 하나를 잡아서 가면 전과를 올린 것이 되어 상을 받을 테니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숨은 중요하고 자기 밑에 있는 청년 군인은 죽어도 좋고 잡혀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까? 무책임한 사람 아닙니까? 장군으로서 자기 휘하에 있는 부하들을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의 사기는 어떻겠습니까? 잘 몰라서 그렇지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알면 충성하겠습니까? 그러니 리더는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하지만 아사헬은 만류하는 아브넬의 제안을 뿌리치고 집요하게 아브넬을 추격합니다. 아브넬은 또 다시 자신을 추격하는 아사헬에게 즉시 중단하고 돌아가라고 만류합니다.
“아브넬이 다시 아사헬에게 이르되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 하되” (22절)
이것을 보면 아브넬은 아사헬이 자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괜히 죽였다가 요압을 자극하면 좋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 이르게 되니까 결국 하는 수 없이 아사헬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어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그가 물러가기를 거절하매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의 배를 찌르니 창이 그의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곧 그 곳에 엎드러져 죽으매 아사헬이 엎드러져 죽은 곳에 이르는 자마다 머물러 섰더라” (23절)
창 뒤 끝으로 찔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이려면 창끝 뾰족한 쇠로 찔러야지, 창 뒤로 찌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절시키거나 쓰러뜨려서 시간을 벌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창 뒤 끝도 아주 뭉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무라도 뾰족하게 갈아 놓은 정도였을 텐데, 쇠처럼 사람을 쉽게 죽이는 무기 쪽은 아니었지만 아사헬이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아무리 창 뒤 끝이라도 거기에 찔려 등을 꿰뚫고 나갈 정도였다고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몇 번이고 쫓아오지 말라고 한 것을 봐도 알 수 있고, 창 뒤 끝으로 찌른 것으로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아사헬을 죽이고 말았고, 그것은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아사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얼마나 허무한 죽음입니까? 용사가 창에 찔려 죽은 것도 아니고 창 뒤 끝에 찔려 죽었으니 얼마나 허무하고 수치스럽습니까?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고 상대는 과소평가함으로 상황을 무리하게 쫓아가다 망한 케이스입니다.
우리가 아사헬을 보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할 때 잘못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일이 잘될 때, 조금만 더 하면 성공이 바로 눈앞에 있기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무리하게 쫓아가다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 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는데 갑자기 건강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조금만 더.’라고 하다가 갑자기 가정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기업들이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그냥 무너진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해야 하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열심히 감당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능력 이상의 힘을 주십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나는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다가 그래도 순종해서 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에게 이런 게 있는지 몰랐는데 하나님이 주시거나, 아니면 있었는데 몰랐던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과는 상관없는 나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무리할 때 다칠 수가 있습니다. 사업도, 직장 일도, 심지어 운동이나 여가 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쉴 줄도 알고, 멈출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나온 신조어 중 하나가 ‘워라밸’입니다. ‘워크 앤드 라이프 인 밸런스’(Work and Life in Balance)입니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일과 삶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한쪽에 치우치면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노는 데 치중하면 일에 지장이 올 수 있습니다. 균형을 잘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삶>에서도 다루지만, 우리의 사역의 장은 교회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만 사역하는 게 아닙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가정에서 사역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일터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사역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사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가정과 일터와 교회 생활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출 때 영적으로도 건강해지고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너무 신뢰하게 되면 밸런스가 깨집니다. 지금 내가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신뢰해도 아무 탈이 없는 경우는 딱 하나 뿐입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면 아무리 지나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어떤 것,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신뢰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것이 무너지는 지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2. 휴전과 전쟁의 결과 (24~32절)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의 뒤를 쫓아 기브온 거친 땅의 길 가 기아 맞은쪽 암마 산에 이를 때에 해가 졌고, 베냐민 족속은 함께 모여 아브넬을 따라 한 무리를 이루고 작은 산 꼭대기에 섰더라” (24-25절)
지금 동생 아사헬을 잃은 요압과 그 일행은 죽어 넘어져 있는 아사헬의 시체 앞에 잠깐 멈춰 섰다가 기브온으로 갑니다. 기브온은 여호수아 때 해가 멈췄던 곳입니다. 얼마나 슬프고 분노로 가득 찼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넬 일행을 해가 지도록 추격하는데, 아브넬과 함께한 사람들을 ‘베냐민 족속’이라고 합니다(25). 그곳은 베냐민 지역이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가 나와서 아브넬을 엄호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넬 일행은 이미 추격권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 (26절)
아브넬은 요압에게, 계속해서 자신들을 추격해오면 양측 모두 참혹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들이 ‘형제’라고 말하면서 같은 핏줄을 추격하는 것을 그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 보면 아브넬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라고, 싸울 때는 형제라고 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왜 형제끼리 죽이느냐고 합니다. 얼마나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정치 지도자들이 이럴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저럴 때는 또 저렇게 이야기하며 말이 바뀌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을 텐데, 자기중심으로 보다 보면 아무래도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넬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압도 거기에 동의해서 아브넬의 말대로 나팔을 불어 추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휴전을 선언합니다.
“요압이 이르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7절)
이 말은 요압이 아브넬의 휴전 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휴전 제의를 조금 더 일찍 했더라면, 추격 전쟁이 아침에 벌써 끝났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넬이 진작 휴전 제의를 했더라면 자기 동생 아사헬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원망의 마음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 심각한 적대적 대결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것입니다.
요압은 성경 전체를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를 종잡을 수 없는 아주 이상한 인물입니다. 아주 좋을 때도 있고 아주 비열할 때도 있고,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여기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여기서 하나님을 언급했다고 아름다운 신앙인인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린다고 그게 곧 신앙이 좋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요압이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요압은 이때만 아니라 종종 하나님을 입에 올립니다.
심지어 사울도 어땠습니까?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다윗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보고해줄 때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도왔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자기가 악을 행하는데 악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왜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고 그게 곧 신앙인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압이 나중에 복수를 하지 않습니까? 아주 적대적으로 될 것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압이 나팔을 불매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니라. 아브넬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아라바를 지나 요단을 건너 비드론 온 땅을 지나 마하나임에 이르니라” (28-29절)
요압이 나팔을 불어 유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군대를 쫓아가지 말도록 군령을 발하니까 추격 전쟁이 끝납니다. 아브넬 일행은 밤새도록 아라바(사해)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건너 자신들의 본거지인 마하나임으로 돌아갑니다.
요압도 다윗이 왕으로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갑니다. 요압은 비록 자신의 동생을 잃었지만 훗날을 기약하면서 아브넬 쫓기를 멈춘 겁니다. 더 이상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후퇴한다.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두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떠난 겁니다.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으니 다윗의 신복 중에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 없어졌으나, 다윗의 신복들이 베냐민과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 명을 죽였더라” (30-31절)
이 전쟁을 통해 다윗 쪽에서는 20명이 죽었습니다. 열아홉 명과 아사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베냐민과 아브넬이 이끄는 이스보셋 군대는 360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여기서 비교하며 보여주는 것은, 요압도 악한 사람이지만 다윗 군대 위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삼하 3:1)
이 말씀을 보아도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집을 도우셔서 사울의 집을 이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열한 지파를 유다 지파 혼자 대적하여 이토록 놀라운 전과를 올린 것은 다윗 집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요압이 이끄는 다윗의 군대에서 20명이 죽었는데, 그중 12명은 요압의 실수와 잘못으로 죽은 것입니다. 열두 명의 장수들은 요압과 아브넬의 헛된 장난으로 인하여 희생당했습니다. 아브넬 쪽에서도 360명 중에 12명은 전쟁하다 죽은 게 아니라 서로 장난하자고 해서 열두 명씩 붙었다가 죽은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입니까?
아사헬은 자신의 교만과 부주의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압 군대에서 12명은 요압과 아브넬의 잘못으로 죽었고, 7명은 싸우다 죽었고, 아사헬은 아브넬을 쫓아가다 죽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고도 헛된 죽음입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리가 죽 보면 예측하기 힘들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뭔지,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알 때도 있는데, 모를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개인적인 일뿐 아니라 전쟁이나 지난주 총격 사건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뭔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보잘것없는 생각과 지혜로 다 담을 수 없는 너무나 크시고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끔찍한 일들을 보라. 이런 데서 도대체 신이 어디 있느냐? 신이 있으면 어떻게 이런 일을 막아주지 않느냐?’
물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상황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희생자 아이들도 그렇고 교사들도 그렇고 범인도 그렇고, 어떻게 자랐고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라고 판단해버리고 ‘그러니까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라고 너무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을 다 안 다음에 그렇게 판단해야 옳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뜻은 이거다.’라고 하거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결론을 너무 성급히 내리지 말고, 특히 신앙인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이번에 희생자들이 4학년 아이들인데, 얼마나 예쁘고 귀여울 나이입니까? 그런데 내 아이가 그렇게 죽었다면, 그것도 총에 맞아서 이런 사건으로 죽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무너질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부모들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고엘리사 선교사님이 아주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고 나라들마다 다 봉쇄했는데 기도는 봉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확 깼습니다. 기도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는, 봉쇄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조금 더 관심이 있으시면 이번에 죽은 사람들과 아이들의 명단을 찾아서 보며 읽으면서 기도하는 겁니다. 적어도 그런 노력을 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주님의 뜻을 찾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역사와 같은 일반적인 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실 때가 많습니다. 비록 이성에 한계가 있고, 양심이 마비될 때가 있고, 또 역사가 여러 가지로 혼돈될 때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만으로 정확한 주님의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특별 계시입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 모두 다 알려주지는 않지만, 구원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알려줍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이 구원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성경을 통독하고, 말씀 묵상 QT를 열심히 하고, 동시에 설교를 통해, 기도를 통해, 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민감함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밤새도록 걸어서 헤브론에 이른 때에 날이 밝았더라” (32절)
요압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베들레헴에 있는 그 아버지의 묘에 장사하고 밤새도록 달려 해가 뜰 때쯤 헤브론에 도착합니다. 헤브론으로 돌아왔을 때 요압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그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적군을 360명이나 죽이고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자신의 동생을 잃은 슬픔과 또 그를 죽인 아브넬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3장에서 요압은 그런 증오심으로 인하여 아브넬을 살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엡 4:26). 유대인들에게는 해가 지면 새 날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까지 분을 품고 넘겨버리면 자기 인생을 갉아먹는다는 겁니다. 주님은 원수를 용서하며 또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오심이나 분노를 품고 하루를 넘기고 이틀을 넘기다 보면 순간적인 감정으로 분노하고 미워했던 것이 미움과 증오심으로 굳어져 버립니다.
괜히 성경에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망가지지 않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니까 얼마든지 화가 날 수 있고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증오와 미움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그날그날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우리가 이런 일들을 죽 보면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시각을 평면적으로 보지 말고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이야기 뒤에 숨은 뜻이 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놀랍게도 너무나 비참하고 악한 일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모아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사울의 왕위는 이제 다윗의 왕위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사울의 왕위는 불순종과 오만 때문에 결국 불합격 판정을 받고 끝났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을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몰랐던 사울은 제멋대로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높아지려 했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 다윗 때문에 자신의 지위가 손상당한다고 느끼며 그래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편 그런 중에도 다윗의 왕위는 점차 강건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뢰하며, 꾸준히 인내하며, 또 자기 맘대로 일하려 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갔으며, 또한 비록 형편없고 악한 왕이었지만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존중할 줄 알았던 그의 삶을 통해 왕위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을 보호해줄수록 자기가 더 강해진 겁니다. 사울을 무너뜨리면 강해질 것 같지만, 사울을 막아주었을 때 자기가 더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브넬과 요압이 등장해 소란을 피우는 겁니다. 아브넬과 요압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악인들입니다. 그들은 그저 권력을 잡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교만하고 방자한 그들이 시끄러운 잡음을 일으키면서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다윗 이야기는 뒤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저도 묵상하다가 오늘 본문이 직접적으로 다윗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그게 아니라고 깨달아 지금 다루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 이야기가 아닌 것이 아닌 겁니다.
여기서 여전히 왕으로서 성실히 행하고 있는 다윗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전에 사울을 장사지내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주었고(삼하 2:5-7), 가족을 잘 돌보고(삼하 3:2-5), 언약을 맺고(삼하 3:12-16), 시를 쓰며 진실하게 슬퍼합니다(삼하 3:31-37).
그러나 아브넬과 요압은 다윗이 하는 일을 방해만 하고 훼방만 하고 망치기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진리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저급하고 이기적이고 거만합니다. 그러한 그들은 역사적 상황,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자신의 명성과 야망을 위한 무대로 이용하는 데 몰두할 뿐입니다. 아브넬은 잔꾀를 통해서 그렇게 하려고 하고, 요압은 폭력을 통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유약함을 이용해 먹으며 자신을 위해 교활하게 다윗 편에 붙으려 시도하고, 요압은 다윗 군대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개인적 원한을 갚게 됩니다. 여기에 욕망과 기만이 있고, 암살과 살인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죽 읽다 보면 ‘아니,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왜 나오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왜 이런 이야기로 성경의 아까운 지면을 낭비하는가? 아브넬이나 요압 같은 악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읽고 싶지 않은데, 그런 이야기라면 이미 요즘 신문방송 뉴스에서 충분히 보고 듣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까지 나오니 참 답답하다.’라고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뭔가 좋은 소식을 듣고 읽고 싶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뜨겁게 역사하시는 이야기를 읽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이런 것들은 빼고 편집을 해야겠다. 좋은 이야기만 놓아두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복음을 기록하는 데 써야 할 지면을 왜 아브넬과 요압 같은 악한 자들의 이야기에 할애하는 것입니까? 왜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들어 있습니까? 이들 뿐입니까? 사울도 그랬고 아합과 이세벨, 또 그 외에도 악한 자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수없이 나옵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도 않는 백성이었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한가? 결정적으로 이런 상황에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시나? 어디 계시나?
만일 하나님이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며 말씀하고 계신다면 왜 상황이 좋아지지가 않습니까? 왜 사람들이 개선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악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왜 요압이나 아브넬 같은 교만하고 악한 자들이 그렇게도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시다면 왜 역사가 이토록 엉망이란 말입니까?
쉽게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평성대와 아무 문제가 없는 데서 우리의 ‘현재 구원’(성화)을 이뤄가시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로 바꾸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복잡하고 악한 사람들 속에서 우리를 빚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넬과 요압 역시 이 이야기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니까 우리는 ‘아, 하나님에게 그런 뜻이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며 죽 읽어갈 때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과정과 심지어 마음속까지 다 들여다보시고 평가하십니다. 오늘 ‘목회편지’를 보셨습니까? <손흥민 선수와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마지막 경기에 나왔던 심판을 이야기하나?’ 하실 수도 있습니다. 손흥민을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손흥민 선수는 세계적인 축구선수입니다. 한국에 그런 선수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이번 시즌에 23골을 넣어서 공동 득점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봅니다. ‘야, 대단하다. 23골을 넣었구나.’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기록이며 보통 사람들은 골을 제일 많이 넣고 득점왕이 되었다는 것에 머물지만, 전문가들은 모든 수치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러니까 그를 더 높게 평가합니다. 다른 어떤 선수보다 더 뛰어난 시즌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가 실력에 비해 너무 저평가되어 있다고 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데, 물론 우리가 잘못하는 것도 놓치지 않고 다 보십니다. ‘얘가 예배를 잘 드리는지 보자. 이런 Memorial Day 같은 휴일에도 예배를 잘 드리나 보자. 예배당에 와서도 딴생각하며 졸고 있지는 않나? 집중을 잘하나?’ 보고 계십니다. 무슨 목적으로 살아가는지 보고 계십니다. ‘어떤 욕망을 갖고 있나? 욕심이 있나? 탐욕을 부리나? 특히 돈에 대해서 그런가?’ 다 살펴보십니다.
그런 것들도 다 보시지만, 특히 좋은 것들을 다 보십니다. 남들은 알아주지 않고 몰라도 우리가 묵묵히 성실하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을 하나님은 절대 놓치지 않으시고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생명책이 기록하고 계십니다.
특히 일이 잘 풀리고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나 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닥치고 도저히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상황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묵묵히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고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묻습니다. ‘야, 너 몇 골 넣었어?’ 그리고 ‘야, 잘했네.’ 또는 ‘에이, 못했네.’라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넣었니?’ 이걸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기회가 100번이 주어졌든 1,000 번이 주어졌든, 몇 골을 넣었느냐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 너는 50번 밖에 기회가 없었는데 20번을 넣었구나. 대단하다!’ 이걸 봐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 모든 우리의 기록을 다 종합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했다, 충성된 종아, 신실한 종아, 잘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알아준다고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사람들이 모를까?’라고 너무 억울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라고 하며, 낙심하지 말고 계속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고전 15:58).
마침내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정산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지금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또 억울해하거나 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