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33Q_HOGHdLU?t=1124
2022년 5월 1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5 ✦
“사울의 죽음을 알린 아말렉 사람의 죽음”
(사무엘하 1장 1~16절)
[들어가는 말]
하나님이 주신 아주 큰 축복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마귀가 우리에게 저주와 고통을 가져다주는 주된 통로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의 통로이자 마귀가 주는 저주와 고통의 통로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입니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아주 귀한 축복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마귀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저주의 통로입니다.
감정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조금 전만 해도 기분이 아주 좋아서 ‘너무 행복하다.’라고 하는데, 무슨 일만 벌어지면, 특히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갑자기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낙심하고 실망하고 절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을 더 넘어서 다른 주변 사람을 저주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감정이 지나치면 신앙생활을 할 때도 이것이 정말 성령 충만인지 감정 충만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감정은 쓰임을 받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상하면 기분이 나빠서 천국도 가기 싫다고 하는 경우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감정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성경을 읽다가,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도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미모를 보고 ‘참 은혜로운 얼굴이다.’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뭔가 감정에 터치가 왔다는 겁니다. 감정이 건드려졌다는 겁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도 감정이 아주 좋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거기에도 감정을 통한 축복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나라를 누리는 역사는 분명히 감정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면 우리의 감정도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감정은 위에 있다가도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감정대로 막 행동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겠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함에 있어 감히 하나님께 덤빌 수 없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주로 공격하는 통로가 바로 감정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살살 건드려서 폭발하게 만들던지 침울하게 만들어 우리가 잘못 나가게 하는 전략을 폅니다.
바로 그런 것을 다루는 내용이 <새로운 삶>입니다. <새로운 삶>을 안 하신 분들은 꼭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이렇게 자주 폭발하나? 내가 왜 감정을 잘 못 다스리나?’ <새로운 삶>을 안 하셔서 그렇습니다. <새로운 삶>을 하시면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만큼 감정이 더 상할 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감정이 상하면 상했지, 행복할 수 없는 조건을 다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정을 아름답게 사용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때, 16절까지만 읽었지만 1장 전체를 살펴보고 그 부분을 함께 나누어보겠습니다.
1.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보고 (1~10절)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1절)
사울이 죽은 후 사무엘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원래 하나의 책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죽음을 기록한 1절은 사무엘상 31장을 요약합니다. 그리고 이것과 관계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울 왕의 시대는 가고 다윗 왕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은 아말렉과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과 싸워 이긴 후에 자신의 본거지인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렀다는 것은 다윗이 사울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 사울이 죽었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심할 만한 것은 다윗이 죽인 게 아니냐고 오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님을 여기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2절)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죽음이나 패전과 같은 상황에 대해 극도의 슬픔을 표현할 때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썼습니다. 이 사람도 그렇게 했는데, 사실 이 아말렉 사람은 다윗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거짓으로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진짜 슬퍼서가 아니라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야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 사람인 그가 이스라엘 왕의 죽음을 왜 이런 정도로 슬퍼하겠습니까?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3-5절)
길보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참패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한 자리에서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이 사람이 전해줍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6-10절)
이 아말렉 사람은 사울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첫째, 전쟁의 상황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둘째, 자신이 당시 죽어가던 사울을 직접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셋째,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가져와서 확실한 물적 증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울의 죽음에 대한 아말렉 사람의 설명은 사무엘상 31장에서 사울이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한 설명과 상당히 다릅니다. 길보아 산에는 블레셋의 병거나 기병이 산지라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활 쏘는 자들이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했습니다(삼상 31:3).
사울은 자기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인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는데, 또 다른 이방인이고 또 이스라엘이 가증하게 여기는 아말렉 사람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삼상 31:4). 이쪽 이방인에게 죽임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게 싫어서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이방인인 아말렉 사람에게 자기를 죽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 아말렉 청년은 자기가 사울을 죽인 것처럼 거짓으로 보고한 겁니까? 사무엘상 31장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울도 블레셋 군대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자 자신의 무기를 든 자에게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기 든 자가 너무 두려워서 차마 죽이지 못하니까, 사울은 자신의 칼을 뽑아 그 위에 엎드러져서 자결한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사울 왕국의 핵심은 ‘사람이 주인 된 나라’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대리통치자로 왕을 세워주셨습니다.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결국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금방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 나라의 리더인 사울은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는데,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했어야 되는데, 스스로 자기가 자기 목숨을 처단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철저히 자기가 중심인 나라, 철저히 자기가 중심인 인생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인 사무엘하 1장에 나오는 아말렉 청년은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물론 사울이 요청해서 자기가 그랬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기가 죽여서 그 팔의 고리와 증거물을 가지고 다윗에게 온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 아말렉 청년은 정치적 흐름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이 나라의 힘이 누구의 손에 갈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사람들에게 와서 사울의 죽음을 알리고 그 죽음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것을 슬쩍 덧붙여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사람은 굉장히 머리를 쓰고 있는 겁니다.
요즘 정치인들도 자기 유불리를 따져가며 하지 않습니까? 머리를 굴리는 게 대단합니다. 옛날에는 한국에 ‘3김 시대’라고 해서 소위 ‘정치 9단’이라고 하는 정치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그 후 그 정도 되는 정치인은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정치적으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 남들은 따라올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아말렉 청년도 나름대로 머리를 상당히 굴리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자기가 사울을 그렇게 죽였다고 말하는데, 다윗이 어떤 상태인지를 이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그동안 다윗이 사울 때문에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윗에게 와서 자기가 사울을 죽였다고 할 때 과연 이것이 자기에게 유리할 것인지 불리할 것인지를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두 가지를 다 생각하고 말한 겁니다.
먼저 ‘사울이 자기를 죽여달라고 해서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할 때, 그동안 사울이 다윗을 계속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윗도 사울을 원수로 여겨 미워하고 있었다면, 이 소식을 들고 왔을 때 ‘너무 잘했다. 네가 사울을 죽였구나.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여전히 사울에게 충성하는 신하라면, 사울의 사위이기도 하고 그 아들 요나단과는 아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아직도 사울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사울을 죽인 것은 내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사울 왕이 나에게 간청하며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을 이루어주었다.’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더라도 괜찮다고 계산한 겁니다.
이렇게 이 사람은 머리를 엄청나게 굴리며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비보를 가지고 온 청년의 거짓을 단번에 간파합니다. 그리고 그를 처단합니다.
2. 다윗의 판단 (11~16절)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11-12절)
다윗은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인 사울이 죽었음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슬픔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슬픔은 사울을 향해서도 있지만 특히 요나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패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 패했고 이스라엘 왕이 죽었으며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은 것에 대한 감정적, 개인적 슬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죽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죽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졌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손상되었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사울이 죽었다면 다윗에게 어떤 상황입니까? 이제 완전히 유리해진 겁니다. 요즘에도 정치적으로 라이벌 정치인이 잘못되면 얼마나 쾌재를 부를 일입니까? 심지어 죽었다면 경쟁자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원수가 죽었고, 자기를 그토록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이 죽었으니 이제는 도망자 생활을 더 이상 안 해도 되고, 게다가 자기는 이미 사무엘이 기름 부어 세운 차기 왕 내정자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 인생은 활짝 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광,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그 영광을 생각하면서 슬퍼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자기 개인의 감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늘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도 내 영광만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의 그 아름다움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 제목을 한 번 보십시오. 나는 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전부 ‘나’, ‘나의’ 밖에 없으면 문제입니다.
당연히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내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배우자를 위해,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 시부모님을 위해, 장인 장모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먼저는 교회 성도들, 목장 식구들, 교역자, 어린이들, 청소년들, 영어권 한국어권 청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내 인생, 내 가족, 내 교회밖에 모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딱 우리 교회만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최악의 죄인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눈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나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이 지역에 있는 이웃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기도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참 슬픈 말이 있습니다. 주변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교회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교회로 오겠지.’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 교회와 지체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지역뿐 아니라 우리 교단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같은 경우에는 가정교회를 같이 하시는 분들과 사역원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미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스케일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그저 내 것밖에 모르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겠습니까?
지난번 <부모의 삶> 때 제가 예화를 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 아이가 축구팀에 들어가 축구를 합니다. 한 번은 게임을 하는데 자기 팀이 6대4로 졌습니다. 팀이 졌으니까 다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아이가 해트트릭을 해서 3골을 넣었습니다. 바로 그때 신앙의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야, 팀은 졌지만 너는 잘했으니까 됐어. 너만 잘하면 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전혀 좋지 않은 교육 방법이라는 겁니다.
팀 스포츠는 팀이 이겨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기 혼자 잘한다고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 선수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득점왕이나 MVP를 차지하고도 ‘우리 팀이 우승하지 못해서 이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는 하지만 별 의미는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도 ‘너만 잘하면 돼. 팀이 못해도 괜찮아. 너만 잘하면 돼.’라는 게 안 좋은 겁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태도를 길러줍니다. 물론 격려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너희 팀이 졌지만 너는 최선을 다했어.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것으로 감사하다.’라고는 해주어야 하지만, ‘팀이 이기건 지건, 하여간에 너만 잘하면 된다.’라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적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3-14절)
아말렉은 야곱의 쌍둥이 형이자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로부터 시작된 민족입니다. 유다 남부의 네게브 광야와 시나이 광야 지대에 정착해서 사는 민족이었습니다(창 36:12). 하나님은 아말렉을 영원히 벌하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말렉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연약한 사람들, 즉 노약자와 여인들이 뒤에 쳐졌을 때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신 25:17-18).
사울 왕은 바로 이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거역하여 폐위당하게 됩니다(삼상 15:23). 반면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아말렉을 멸망시킴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행하는 왕으로서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삼상 30:17).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 하였더라” (15-16절)
사울을 죽인 일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말렉 사람은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개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히 그렇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까 그래서 그를 처단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아말렉 청년을 심판함으로써 결국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어떻게 감히 손을 댔느냐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나 조종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없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전투가 벌어졌던 길보아 산(중부)으로부터 다윗이 있던 시글락(남쪽)까지는 80마일이 넘는 먼 거리였습니다. 이 아말렉 사람은 그 먼 거리를 힘들게 달려와 다윗에게 사울의 죽음을 알려준 겁니다. 왜 그랬습니까? 당연히 보상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상을 받을 것을 생각하니까 그 먼 거리를 신이나서 달려온 겁니다.
그는 시체들 가운데 값나가는 물건을 훔치기 위해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쟁터에 간 것인데, 사실 이 사람이 이스라엘 쪽에 속해 있었지만 싸우지 않고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 끝나고 뭔가를 얻으려 가보니까 우연히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왕의 옷은 다르기 때문에 금방 눈에 띕니다. 그리고 사울이 왕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왕관과 팔의 고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상당한 재물을 얻은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값이 나가는 겁니까? 엄청난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왕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데 그걸 얻었으니 얼마나 값진 겁니까? 이걸 들고 블레셋으로 갔으면 상을 많이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상을 원했기 때문에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다윗에게 가면 더 큰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결국 사울 왕의 죽음을 통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들, 특히 왕이 죽임을 당한 비극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잔꾀를 부리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을 즉각 처단함으로 왕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와 함께 아말렉에 대한 심판을 완성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아말렉 청년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다 죽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많은 록펠러(Rockefeller)에게 기자가 물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돈이 얼마나 많아야 만족하겠습니까?” “Just a little bit more. 조금만 더.” 억만장자인데도 조금만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정말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의 위험도 감수하고 이렇게 먼 거리를 힘들게 달려오게 할 정도로 욕망은 대단합니다. 거짓말을 지어내고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뿌린 것도 재물을 더 얻기 위한 욕망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서라도 자신의 부유함과 영광을 취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 아닙니까? 그러나 이러한 욕망의 끝은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상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남들은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되면 된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살면 돼.’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나라가 망하면 자기도 망하는 건데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권력자들이 나라가 망할 때 도망을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남들은 어떻든 나만 잘되는 것은 없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 나만 잘하면 돼.’라고 할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가 잘 나아가야 나도 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엉망인데 나 혼자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신앙생활을 잘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교회가 잘 나아가는데 ‘나 혼자만 안 하겠다. 나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 문제이지만, 교회는 잘되고 있지 않은데 나 혼자 잘하겠다고 해서는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 공동체가 누구입니까? 바로 옆에 있는 성도들, 형제자매들입니다.
3. 다윗의 활 노래 (17~27절)
사울은 다윗의 정적인데, 무엇보다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쫓아다녔던 원수입니다. 반면, 요나단은 정말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눈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사울을 위해서도 요나단을 위해서도 애가를 지어서 부릅니다. 그것을 ‘활 노래’라고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이스라엘아, 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19-20절, 새번역)
첫째로, 죽임당한 이스라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21-22절, 새번역)
둘째로, 여기서는 놀랍게도 사울의 용맹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23-24절, 새번역)
셋째로, 사울과 요나단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솔직히 저 같으면 사울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니던 원수인데 왜 사울을 위해서 노래합니까? 사랑하는 요나단만을 위해서 노래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둘 다 애도했습니다.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없이 되었는가?” (25-27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요나단과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 애가를 개역개정으로 보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오호라 두 용사가”라는 후렴구를 두 번 반복하면서 다윗의 슬픔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특히 이 부분이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부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가리켜 ‘내 형’이라고 부르는데, 나이에 대해서 자기가 더 어리고 요나단이 형이라는 게 아니라 요나단의 뛰어난 인격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합니다.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감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다윗은 감정을 잘 다스렸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사울이 죽었으니까 이제 내가 왕이 되고 좋다.’라고 하는 자기의 욕망이 아니라, 이렇게 슬퍼할 수 있는 그의 영성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는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결국 높여주십니다. 그리고 고귀하게 사용해주십니다.
우리도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지면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번 주에도 살아갈 때, 아니 바로 오늘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사탄으로부터 감정을 건드리는 공격이 올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충만할 때 더 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 분별하면서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정말 믿음의 사람, 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고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