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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5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8 ✦
“인간의 계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
(사무엘하 3장 1~21절)
[들어가는 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신뢰 관계를 보여주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릴 때도 책에서 그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루즈벨트와의 신뢰 관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처칠은, 당시 루즈벨트의 마음을 잡기가 여자의 마음을 잡기보다 더 어려웠다고 나중에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전쟁 중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나누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한번은 처칠이 목욕하고 있는 중에 모르고 들어가게 된 루즈벨트가 벌거벗은 처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하여 나가려고 하자 처칠은 도리어 팔을 활짝 벌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영국 수상은 미국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유머를 발휘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서 두 사람이 정말 가깝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어서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 사이의 신뢰 관계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하나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치계를 보면 얼마나 서로 싸웁니까? 같은 당 안에서도 파가 갈라져서 정쟁을 하거나 심한 경우 분열하기도 합니다. 이전에도 보면 같은 당에서 분당을 하고 새 정당을 세운 적이 많았습니다.
하나 되기 힘든 것이 사람은 원래 다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의견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금방 듣습니까? 잘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 속에 자기가 더 잘났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틈이 생기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고, 신뢰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이든 교회이든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멋진 말이나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고 이스보셋은 사울의 아들로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의 이스라엘 안에서 두 왕으로 갈라져 싸우니까 이스라엘은 제대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가 둘로 나뉘어 있으니 얼마나 불안정했겠습니까?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이 있으면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싸우는 교회에 누가 나와서 은혜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지만, 대기의 경우 교회가 싸우면 ‘나는 잘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가 사랑하라고 한 게 가장 큰 가르침인 것 같은데 사랑하라고 하는 사람들끼리 왜 싸우나?’ 하면서 외면하게 됩니다.
사울쪽 사람들은 정권을 넘겨주기 싫었고, 다윗의 보복도 두려웠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날 텐데, 그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7년 정도 그런 상태가 지속되었는데, 다윗은 힘이 있어서 무력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무력으로 나라를 통일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을 대적하던 사울파 안에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였고, 그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의외의 방법으로 인도해주십니다.
1. 안정되어 가는 다윗의 왕권 (1~11절)
1) 다윗의 가족 (1-5)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1절)
1절은 3장 전체의 개요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의 오랜 전쟁은 사울 집의 몰락과 다윗 집의 부흥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윗의 가족에 대해 죽 나오고 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2-5절)
헤브론에서 왕이 된 7년 사이에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의 엄마가 다 다릅니다. 그러니까 많은 아내를 취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등 총 6명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물론 고대사회에서 왕은 아내들이 많았습니다. 아내가 많을수록 힘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에 왕권이 안정되어 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까? 찬양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쓴 시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다른 나라 왕들이 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방법인 정략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단순히 여자를 좋아해서 아내들을 많이 두었다기보다는, 정략결혼을 통해 안정을 취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당시 관습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는 관계가 없는 잘못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어디에 보아도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신 곳이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첩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그 후 아내 사라를 통해 이삭이 태어났는데, 사라 사후에 또 그두라라는 여인과 재혼을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동시에 여러 명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부다처였습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다 믿음의 사람들인데 여러 아내를 얻은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감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고별설교가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17장(14-17절)에 보면 왕은 이렇게 하라는 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가 있을 텐데, 그때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하면서 왕에게 세 가지를 금하라고 모세가 오래 전 기록을 해두었습니다. 모세가 대략 BC 1500년경 사람이고 다윗은 BC 1000년경 사람이니까 다윗 500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왕이 다 나올 줄 아시고 미리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첫째는 “말을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말은 군사용 병마입니다. 말을 많이 두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전쟁의 승패가 군사력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군사력에 이스라엘의 승패가 있지 않다는 것을 왕에게 명심시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내를 많이 두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여자를 좋아해서 결혼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결혼하는 여자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우상과 이방신으로 인해 마음이 미혹되고 여러 가지로 나뉠까 봐서 금한 것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여자라도 집안에 우상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우상을 끌고 들어오면 우상숭배로 나아가기 때문에 금하셨습니다.
셋째로 “은금을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금은 이 땅의 보화와 재물을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게 하라고 하셨는데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것을 전부 완전히 반대로 지켰습니다. 심지어 아내는 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말씀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 전 헤브론에 와서 유다 지파의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아내를 많이 두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후 보겠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버리고 떠났던 사울의 딸 미갈까지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것도 역시 정략적인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등극한 후에 이제는 드디어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성공을 거두니까, 왕이 되니까,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까, 영적으로 틈이 생기고 다윗도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한 번에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예배도 잘하고 찬양도 잘했습니다. 아주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 누구도 다윗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사람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잘남 때문에 나라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그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잘되고 누가 되면 망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 달린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윗같이 가장 위대한 사람, 그 후손에서 메시아(구원자)가 나올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셨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인 다윗도 이렇게 많은 잘못과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감추려 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위대한 책입니다. 자기들이 추앙하는 사람들을 미화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전들인데, 성경은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행적을 역사에 남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가장 뛰어난 왕이었으며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아주 부끄러운 일도 많이 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런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결국 역사라는 것이 강하고 뛰어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는 것,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내를 많이 두는 일로 인하여 장차 왕국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들 솔로몬이 그대로 본받는 것을 넘어 뛰어넘습니다. 솔로몬 왕국은 많은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여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방 신들을 하나님 신앙과 섞어 섬김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정결한 신앙이 다 무너지고, 변질되고, 삶도 엉망이 된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영적으로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분열을 초래했고, 피비린내 나는 내부적 정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만 해도 다윗은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훗날 이스라엘 내전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것은 다윗 자신의 가정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맏아들은 암논인데, 그는 다윗의 맏아들로 후에 이복형제인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성폭행하고, 그 일로 압살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둘째는 길르압인데, 나발의 아내였던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에게서 태어난 아들로서, 다니엘이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대상 3:1). 그런데 암논과 압살롬이 죽은 후에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맏아들 노릇을 하려고 하는데, 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길르압은 일찍 죽었거나,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나발의 족보에 속해서 다윗 왕권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는 그 유명한 압살롬으로,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여 왕이 되지만 전쟁 중에 요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는 다윗이 결혼한 그술 왕 달매의 딸로, 이스보셋의 근거지인 마하나임 북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 출신이었습니다. 다윗은 마아가와 결혼함으로 그술 왕을 통해 이스보셋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는 아도니야인데, 넷째 아들이었지만 솔로몬과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는 스바댜인데, 스바댜와 그의 어머니 아비달에 대해서는 성경에 특별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드르암도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여섯째 아들로 특별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기록은 단순히 다윗 집안이 이랬고 어머니는 누구이고 아들은 누구라는 것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이 아내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 때문에 나중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가를 미리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우리의 욕심 때문에 또는 잔꾀를 부리는 것 때문에 일어납니다. 살살 머리를 굴리거나 욕심을 부리거나 내 뜻을 주장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내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바른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가야겠다는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천하의 다윗이라도 넘어졌는데, 다윗보다 연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넘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결코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 이스보셋 정권의 실권자 아브넬 (6-1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6절)
사울과 다윗의 집 사이의 전쟁은 다윗 집의 부흥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사울 집 내부의 권력 구조 개편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이스보셋이 아닌 아브넬이 권력을 장악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죽은 사울의 아들인데, 정작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결과로서, 이스보셋 정부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군부 세력이 권력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일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나라에 혼란이 오면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가 권력을 잡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이런 것이 고대사회에서는 지금보다 더 흔한 일입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 예상하지 못했던 심각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7절)
아브넬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했고, 그것이 이스보셋과 아브넬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해서 세운 나라가 이제는 스스로의 죄로 인해 결국 붕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라는 아브넬에 대한 이스보셋의 비난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고대에는 이전 왕의 아내나 첩을 후계자의 소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압살롬도 다윗의 후궁들과 잠자리를 같이 함으로써 ‘내가 진짜 왕이다.’라고 과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삼하 16:22).
따라서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했다는 소문은 아브넬이 사울 왕의 후계자로 자처했다는 것과 같은 주장입니다. 이제 아브넬이 왕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이 소문은 점점 강해지는 아브넬의 권력을 질투한 사람들이 퍼뜨렸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실제로 아브넬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사실은 더 낮습니다. 아브넬이 진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계략을 짜서 아브넬과 리스바가 같이 있게 했을 수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도록 증인들을 동원해서 목격하게 한 후 그것을 가지고 퍼뜨리는 겁니다. 옛날이 더욱 무섭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얼마나 치사하고 더럽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이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이스보셋의 귀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군가가 보고한 겁니다. 그랬더니 이스보셋이 너무 화가 나서 아브넬에게 따집니다. 아브넬이 너무 강해지니까 두려움도 있고 질투도 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가서 따진 겁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8-10절)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항의에 대해 분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이스보셋이 정당한 항의를 한 것인데 거기에 대해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사울 집을 지금까지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자기인데, 그러한 공을 인정하지도 않고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었다면 이스보셋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항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아브넬의 분노를 더 돋운 것이 됩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아브넬은 결정적으로 나라를 다윗의 손에 넘기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넬이 진짜로 그렇게 했든지 안 했든지 상관없이 이것은 아브넬의 사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브넬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를 보면, 사울의 집을 향한 신실한 충성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권력을 잡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결국 아브넬은 이미 기울어 가는 나라를 이제 다윗에게 넘겨야겠다고 작정하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보장받으려는 속셈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아브넬은 자기 스스로의 말로 인정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하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자기가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나라를 세우고 다윗을 대적해 왔습니다. 이제는 사사로운 것 때문에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 붙으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보니까 이쪽은 아무리 해봐야 별일이 없고, 이쪽에서 권력을 잡아 봐야 별것 아니라는 것을 이제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 쪽에 붙으면 더 낫다는 계산이 벌써 끝난 겁니다. 이스보셋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항의 때문에 아브넬의 결정을 더 빨라지게 촉진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 (11절)
이것만 보아도 이스보셋은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아무 대항도 못할 것을 왜 이야기합니까? 아브넬의 이러한 분노에 대해 너무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단지 이름뿐인 왕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나라에 대한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그의 죄를 더욱 분명히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보셋은 다윗에게 항복하고 그 나라의 통치권을 넘겨주는 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지만,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아브넬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이거구나.’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대적하게 될 때, 나중에 분명히 결과가 좋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고 범해도 죄는 죄인데, 알면서도 범하면 그것은 더 악합니다. 특히 아브넬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여기에 무기력한 왕 이스보셋이 있습니다. 그런 왕을 조종하고 나라를 뒤흔드는 아브넬이 있습니다. 그리고 곧 뒤에 나오는 내용대로 왕인 다윗도 통제할 수 없는 군사령관 요압이 있습니다. 또 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다윗의 아내 미갈이 등장합니다. 다윗도 나름대로 미갈을 되찾아 사울 왕조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인정을 받고자 애씁니다.
그러나 다윗이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추대받게 된 계기는, 의외로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갈등으로 인하여 아브넬이 자기 왕을 배반하고 다윗을 지지함으로 문제가 그냥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이미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은 그 목적을 위해서 가고 있는데, 거기에 아브넬이나 이스보셋 같은 사람은 알지 못하면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아무리 인간이 계략을 쓰고 술수를 동원해도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갈등, 속임수, 배반, 폭력, 죄악 등의 문제들 가운데서도 당신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십니다.
성도의 모든 인생과 결과는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보시며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카운트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어떤 복잡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도 낙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시며 기록하고 계신데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 낙담하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적인 꾀나 세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런 방법을 왜 쓰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찾는 것이 믿음의 반응인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2. 아브넬의 뜻밖의 조력을 통한 유익 (12~21절)
1) 화친의 조건 (12-16)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또 이르되 당신은 나와 더불어 언약을 맺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이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하니” (12절)
아브넬은 자신의 생명과 권력을 보장받기 위해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기로 결심을 굳히고 다윗에게 사신들을 보내어 화친 조약 체결을 제안합니다. 그런데 여기 질문을 보십시오. 그가 뭐라고 합니까? “이 땅이 누구의 것이니이까?”
이 질문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땅이 다윗 당신의 것이니까 내가 되찾도록 돕겠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진짜는 ‘이 땅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나 아브넬이다. 내 도움이 없이는 땅을 전부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게 잘해라.’라는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얼마나 정치적이고 교활합니까? 아브넬은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적절한 보상과 보호를 얻기 위해서 이런 것을 제안하는 겁니다.
다윗의 가장 강력한 적이 사실 아브넬인데, 이 아브넬이 다윗에게 화해의 언약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하고 있는데 제발로 먼저 찾아온 겁니다. 더 이상 싸움 없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브넬의 그러한 제안을 환영하면서 조건을 내겁니다. 무엇입니까?
“다윗이 이르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을 맺거니와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3절)
그냥 보면 다윗이 여자를 좋아해서 자기를 떠난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치적인 이유로 미갈을 찾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보십시오.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원래 결혼했었던 사울의 딸 미갈을 되찾음으로 다윗은 사울 왕조의 합법적인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지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도 엄청나게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전령들을 보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그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로 나와 정혼한 자니라 하니,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 (14-15절)
다윗은 아브넬과 몰래 조약을 맺은 후 이스보셋에게는 공식적으로 전령들을 보내서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보셋이 누이 미갈을 적인 다윗에게 순순히 보낸 이유는 아브넬의 압력 때문일 것이 분명합니다.
미갈은 다윗과 헤어진 후에 재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합법적인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이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갈과 결혼한 발디엘이 잘못한 겁니다. 이혼이 아닌데 그냥 결혼해버렸으니까 무효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는 미갈을 되찾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16절)
너무 허무합니다. 울면서 끝까지 따라왔는데 “돌아가라” 하니까 그냥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발디엘이라는 사람은 원래 사울과의 깊은 유대 관계로 인해 미갈을 아내로 데려가서 잠시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몰락한 후 즐거움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한 게 아닌가? 잘살고 있는데 남의 가정을 파괴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발디엘이 다윗의 가정을 파괴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이 권리를 되찾은 겁니다. 그런데 미갈을 그냥 둘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미갈을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철저히 모든 것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너무나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렇게 너무나 정치적인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2) 돌아오는 이스라엘 (17-21)
기울어 가는 정세와 이스보셋과의 틀어진 관계 등을 계기로 하여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기로 작정한 아브넬은 곧장 그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이것은 그가 주도면밀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7-18절)
이것을 그냥 보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요즘 뉴스에서 정치인들이 얼마나 수를 씁니까? 그건 저리 가라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넬이 먼저 열한 지파 중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의 장로들(리더들)을 부릅니다. 뒤에서 베냐민 사람들만 따로 부른 걸 보면 이때는 열 지파를 부른 겁니다.
그래서 그 장로들을 불러 자신의 계획을 알립니다. 아브넬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다윗에게로 돌아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다윗을 자신들의 임금으로 세우기 원한다는 뜻을 사울 집에 건의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던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의 그러한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힘으로 강권 통치를 계속해 왔던 겁니다.
아브넬의 말속에서 또 한 가지 확인하는 것은, 이스보셋 정권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권력욕을 위해 다윗을 대적하며 다른 정부를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나라를 돌리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러한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브넬이 다윗에게 나라를 돌리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전적으로 불신앙적인 입장에서 나라가 망하기 전에 살짝 넘김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받고자 하려는 속셈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19절)
이스라엘 장로들의 동의를 얻은 아브넬은 최종적으로 권력의 중심에 있는 베냐민 지파 장로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동의를 얻어냅니다. 이제 정부를 다윗에게 넘기려는 그의 계획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용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넬을 향한 하나님의 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에게로 당신의 백성을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 안에서의 인도하심입니다. 오히려 아브넬은 자신이 계획해서 잘 진행되던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20-21절)
아브넬은 자신의 부하 20명을 화친 사절로 자신과 동행하게 하면서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찾아갑니다. 그때 다윗이 아브넬을 잘 대해줍니다. 큰 잔치를 벌여주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고, 결코 자신의 기분이나 혈기에 따라 사람들을 대하거나 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한 것을 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이 술술 풀리면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면서 일이 잘 풀린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중에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이러한 내용을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이처럼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약속을 이루십니다. 아무리 이런 인간의 악한 계략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일이 술술 풀리며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주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인간의 능력이나 상황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왕이신 예수님의 완전한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왜 그런가? 이 세상이 왜 그런가?’라고 할 만한 일들이 요즘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아실까?’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오묘하고 선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주님의 뜻을 늘 구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쓰임 받는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