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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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실시간 예배 중 인터넷에 문제가 생겨 방송이 끊기는 현상이 일어나 
동영상이 두 개가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동영상 설교 #1: https://youtu.be/EoKlC9NdZG0?t=2359 

동영상 설교 #2: https://youtu.be/nOOjwh6mLKg

 

 

2022410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14

불순종의 비참한 결말

(사무엘상 311~13)

 

[들어가는 말]

 

한국이 10년 전에 외국인 100만 명 시대가 되었다고 뉴스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2020년 말을 기준으로, 그러니까 10년 후에는 그보다 두 배 이상 늘어 230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도 많이 늘었습니다. 사실 등록된 외국인만 230만 명이니까, 불법 체류자와 일반 방문자들을 다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다고 보아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유일한 단일민족 국가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아 왔습니다. 단일민족, 단일문화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세계에서 단일 민족 국가가 딱 두 나라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대한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입니다. 그래서 한국과 북한만 단일 민족, 단일 문화 국가인데, 사실 이제 더 이상 한국은 단일민족, 단일문화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빨리빨리입니다. 실제로 제가 오래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제3세계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선교관에서 1년 동안 지냈습니다. 그때 한 학기가 끝나고 새 학기에 다른 나라에서 새 학생이 오면 기존에 있던 학생이 불러다 새로 온 학생에게 뭔가를 가르쳤습니다. ‘너는 이것을 한국생활에서 꼭 배워야 한다. 가장 먼저 이 단어를 배워라. 빨리빨리!’ 이렇게 가르치는 것을 제가 직접 제 눈으로 봤습니다. 진짜로 빨리빨리를 가장 먼저 배웁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든지, 한국에 가장 먼저 동화되는 것이 빨리빨리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원래 한국이 빨리빨리병에 걸려서 건물도 빨리빨리 짓다가 빨리 무너지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어떤 결과를 지긋이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눈앞에서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잘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국은 배달이 엄청나게 빠릅니다. 총알배송으로 합니다. 인터넷 속도도 빠르고, 뭐든지 빠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신앙생활에도 나타나서, 어떤 일에 대해 기도해보고 신중하게 결정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대로 성급하게 결정했다가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그들을 당장심판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잘살고 있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 같기 때문에, 분통을 터뜨리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처럼 일을 성급하게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시간표와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일이 풀리기를 원하는데, 그런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정확한 때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우리는 카이로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빨리 되기만 바랍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가 설치고 다닐 때도 조급하게 나서지 않으시고 충분한 시간을 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저렇게 악한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는가? 빨리 망하면 좋겠다. 악한 사람은 빨리 망해야지 어떻게 저런가?’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가만히 두시는 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까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악한 자라도, 아무리 극악무도한 테러리스트라도 그 인격조차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악한 행위를 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아서 그런 것이지, 영적으로 깨어나면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악한 자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한 번 심판이 내려지면 그 후에는 결코 회복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해도 상당히 신중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불순종하며 악하게 살았어도 그의 인격을 존중해주셨고, 심판을 내리시는 데 있어서도 아주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시는 동안에도 결국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고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지금 시리즈 제목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면, 오늘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인 사울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으로 그의 인생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사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가, 다음 번 사무엘하 내용과 연결되기 때문에 살펴보고 넘어가려 합니다.

 

 

1.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한 비극

 

사울은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겸손히 행했습니다. 좋은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교만해졌고 우상 숭배의 길로 나감으로써 실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죽이기는 죽이되 좋은 것들은 남겨두고 처리하며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그러한 사울 왕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너의 왕위는 끝났다.’ 하시며 폐위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사울을 즉시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결정적인 범죄는 22장에 나오는데, 다윗을 도왔다는 억지 죄목을 씌우면서 아히멜렉을 비롯한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일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엄청난 범죄입니다. 이것은 살인을 넘어,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제사를 주관하는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들을 학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사울을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그냥 두셨습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 후 사울은 뉘우치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왕으로서 나라를 이끄는 책임을 모두 내팽개치고 오직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다윗만 쫓아다녔습니다. 나라의 위기에도 그랬습니다.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다윗만 쫓아다니며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울을 그냥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속 기다리시며 기회를 주고 계실 때 마음을 돌이키지 않던 사울과 이스라엘에게 마침내 블레셋 군대가 대대적으로 공격해옵니다. 결국 길보아 산에서 이스라엘 군은 전멸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1-2)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하여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몸이 너무 지치고 피곤하게 됩니다. 조금 더 심해지면 감기에 걸리거나 몸살이 나게 됩니다. 독감 시즌에는 독감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리 일해도 피곤하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십니까? 막 일하다가 피곤할 때 피곤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과로해도 몸이 전혀 피곤하지 않은 게 정말 좋은 겁니까? 그건 좋지 않은 겁니다. 잠을 별로 안 자도 피곤하지 않고 아무리 일해도 지치지 않는다면, 쉬지 않고 계속 일만 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피곤을 못 느끼고 있다가 한순간에 가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한 방에 훅 간다.’라고 하는 말이 그런 겁니다. 모르고 있다가 그냥 가는 겁니다.

 

한국의 40대가 199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사망률이 높았습니다(천 명당 8명 이상). 너무 열심히 일하다가 갑자기 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천 년대에 들어오면서 좋아졌는데, 요즘 한국에서 많이 말하는 말이 워라밸인데, ‘워크,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라는 뜻입니다. 요즘 워라밸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상황이 좋아지고,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 40대 사망률이 천 명당 2명 정도입니다. 오히려 미국은 천 명당 4명 정도로 더 높습니다. 사망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약물 중독입니다.

 

무리해서 일하면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은 사실 귀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익입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조금 무리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이상이 옵니다. 그런 이상 증세가 올 때 빨리 캐치하고 바른 방향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게 하는 이상 증세는 바로 블레셋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고 세상 방식을 따라 살게 되면, 이상하게도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자기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자기들을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빨리 사라지거나 망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라기 이전에, 지금 자신들이 영적으로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사인으로 알아야 했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에서도 그렇고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바로 관계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옆으로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으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것 아무리 잘해도 이웃과의 관계가 엉망이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사랑을 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고 옆으로 흘러넘칠 때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달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도 많이 읽고 묵상하며 기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해도, 정작 이웃과 껄끄러운 관계 속에 살아가며 미워하고 있거나 전혀 이웃과의 사랑의 교제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가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현상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이상증세를 보여주는 사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누군가와 껄끄러운 관계가 생겼다면, 사실은 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가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교회에서 전혀 문제도 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의 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이상한 말을 해서 요즘 말로 갑분싸’, 즉 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막 뭐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면 저 사람이 왜 저러나?’ 하며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 자신이 기도나 말씀 묵상에 약간 소홀해지고 영적으로 게을러질 때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럴 때는 영적으로 해이해진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주님 앞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끼리 말다툼할 때도 그렇고, 자녀와 서먹해질 때, 부모님과 서먹해질 때를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졌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을 때, 이상하게 자꾸 열 받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럴 때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사람이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을 빨리 깨닫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빨리 사인으로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돌아가면 금방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계속 악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으니까, 지금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는 것이 보이는 다윗을 옆에 두고 그의 도움을 겸손하게 받으면서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자존심, 사실은 열등감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미워하며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그것은 결국 다윗을 블레셋 땅으로 쫓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용맹한 장수이자 이스라엘 최고의 장군이며 자기 사위이기도 한 다윗,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을 쫓아버렸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패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이때 블레셋이 쳐들어왔어도 다윗이 옆에서 지키고 있었으면 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쫓아버리니까 자기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나의 적이 누구입니까? 내 원수가 누구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아닙니다. 자식도, 부모도, 시부모도, 다른 교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입니다. 사람이라면 우리가 막 붙들고 이야기라도 해볼 텐데, 사탄에게는 인정사정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전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는데 전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위기 앞에서도 전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엉뚱한 짓만 하느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쫓아다니느라고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수 있었던 제사장들까지도 이미 다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할 사람이 누가 남아 있습니까? 그러니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여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사장들까지 다 죽여버리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그렇게 끝난 게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 죽음의 패배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자신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사울만의 일이겠습니까? 혹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나 자신을 잘못된 길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잘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과 껄끄럽고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면,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었다면, 지금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을 미워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손해가 아니라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너무 단순합니다. 그냥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이 정말 밉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놀랍게도 상황은 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내 마음을 바꿔주십니다.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히려 그렇게 밉던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코로나 사태 기간 중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함께 꾸준히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습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이렇게 주일예배, 수요예배, 토요일 새벽에 함께 예배할 수 있고, 삶 공부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그렇고 목장도 그렇고, 대면으로 모이지 못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영적으로 우리가 나태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한 동안 교회에 거의 나오지 못한 분들도 꽤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에 소홀했다면, 빨리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도 않고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있는데, 하나님과 전혀 동행하는 일이 없는데,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면, 별일이 없다면, 오히려 일이 잘 풀리고 있다면, 승진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되고 직장에서도 잘되고 학교에서도 잘되고 있다면, ‘괜찮은가 보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괜찮은 게 아니라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기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다림을 끝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 전에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빨리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의 비참한 패배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3-4)

 

오늘 본문은 사울이 결국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왕으로서 너무나 치욕적이고 끔찍한 죽음입니다. 일단 이스라엘 군대는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며 쫓기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인들이 뒤에서 이스라엘을 추격하면서 활을 쏘아댔는데,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 한 화살이 사울의 몸을 꿰뚫고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화살을 맞아서 더 이상 싸우기도 힘들고 도망칠 수도 없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막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붙잡혀 죽는 것은 왕으로서 결코 당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이 잡히게 되면 엄청난 수치를 당한 다음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의 무기를 들고 따라오는 부관에게 자신을 칼로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죽어서 자기 시신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살아서 수치를 당하는 것은 모면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기를 든 자, 즉 그의 부관은 감히 왕을 죽이지 못합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의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드려 죽고 맙니다. 할복자살을 한 겁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만약 이때 사울이 생포되었다면 블레셋 사람들은 이전에 삼손의 눈알을 뺐던 것처럼 사울의 눈알을 빼거나 아주 치욕적인 방법으로 고통을 준 다음에 죽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5-7)

 

한때는 성령이 임하셔서 예언도 하고 성령 체험도 했던 사울이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욕심을 향해 나아가게 되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못한 상황에서 이런 할복자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비참하게 수치를 당하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원하는 일이고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해서 스스로 저주스러운 죽음의 길로 가게 합니다. 심지어 믿는 사람들도 절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사도 베드로도 이야기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아무리 어렵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살다가 우리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시작도 중요하고, 지금 살아가는 중간과정도 중요하며, 동시에 끝이 아주 중요합니다.

 

연로하신 분들은 더 생각하시겠지만, 젊은 사람이라고 준비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어떻게 내 생애를 마감할까?’ 이것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내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이 내 장례식에 와서 뭐라고 할 것인가? 무엇을 느낄 것인가?’ 이것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처음이 좋아도 끝이 좋지 않으면 결국 좋지 않은 것이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장례예배를 천국 환송 예배로 드립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간 것을 믿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 슬프지만 슬픔 가운데서도 돌아가신 분을 보며 쯧쯧거리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있고, 돌아가신 것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지만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고 하며 감사함을 느끼는 장례식도 있습니다.

 

똑같은 장례식도 이렇게 다릅니다. 끝을 준비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갈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끝이 언제 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평소에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Living Will이나 유언장도 준비해야겠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주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던 사도들(바울, 베드로 등)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야고보는 목이 잘려 죽은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베드로는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고, 바울도 목이 잘려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낙타무릎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고 의인 야고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를 미워하던 자들이 그를 높은 데서 밀어 떨어뜨렸고, 떨어져서 괴로워하고 있던 그를 돌로 쳐 죽었습니다. 칼로 죽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여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치욕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난 사울과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의 죽음은 정말 비참한 죽음입니다.

 

만약 사울이 블레셋 군대에게 붙들려서 치욕을 당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그가 하나님께 회개했더라면,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하고 갔더라면 그는 이전의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명예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하다가 비참한 결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낮추실 때는 거기에 분명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달으며 우리가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려야겠습니다. 삶이 어려울 때 아예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버리면 오히려 반등하며 치고 올라갈 길이 생길 수 있는데, 스스로 두려워하고 조급해하면서 미리 중간에 자기 마음대로 판단을 내리고 도망치거나 포기해 버릴 때, 더 비참한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끝까지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어야겠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무릎 꿇고 나아가야겠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붙들어야겠습니다. 어려울수록 이러한 예배의 자리를 지키며 나와야겠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은 반드시 책임져주십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7천 개 이상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3.   사울의 죽음과 장사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8-10)

 

전투가 끝난 다음 날, 시체가 널려 있는 들판으로 돌아온 블레셋 군인들은 죽은 이스라엘 군인들의 옷을 벗기면서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챙긴 겁니다. 그러다 저기 보니까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아주 화려한 왕의 갑옷을 입고 죽어 있는 시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들, 즉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 하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시체를 훼손합니다. 일단 목을 베고 그 머리를 블레셋 사방에 보냅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머리다!’ 하면서 선전을 하는 겁니다. 이때 세 아들들의 머리도 함께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몸은 벧산이라는 곳의 성벽에 박아 놓습니다.

 

안식월 때 성지순례를 하면서 그곳을 가보았는데, 로마시대 때 세운 유적이 남아 있고 사울 때의 유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근처가 산지이고 옛날에는 거기 성이 있었는데, 그 성벽에 사울의 시체를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발가벗겨서 시체를 매달아 놓은 겁니다. 아주 큰 수치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성 중 하나였던 벧산에 시체를 박아 놓고는 너희 왕과 왕자들의 시체가 이렇게 되었다.’하고 전시하면서 자신들의 승리를 과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절망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11-13)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훼손하고 수치를 안겨준 이때, 이전에 사울에게 은혜를 입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줍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요단강 동쪽에 있고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중부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했습니다.

 

11장에 보면 암몬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 쳐들어와서 모든 사람의 오른쪽 눈을 빼면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위협했을 때, 사울이 가서 암몬을 물리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용되었던 일이었습니다.

 

만약 사울이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사용된 적이 없었다면, 모든 백성이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오래도록 그의 시체가 그냥 성벽에 매달려 있었을 뻔했습니다. 그가 그때는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잘한 일이 계속되었더라면 사울이 괜찮았을 텐데, 바로 타락함으로써 안타까운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또 안타까운 것은, 다른 왕자들은 몰라도 요나단은 아는데 왜 사울과 함께 요나단까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야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가 컸지만,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아끼고 사랑하면서 자기 아버지 사울이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해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지만 사울과는 완전히 달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왜 사울과 함께 이토록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까? 왜 하나님은 요나단을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왜 시신도 훼손당하고 수치를 당하는 죽임을 당하도록 놓아두신 것입니까?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는 비참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요나단의 죽음은 사울의 죽음과 결코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다가 심판의 죽음을 당한 것이지만, 요나단은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한 용사의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과 같은 시간에 죽임을 당하여 목 베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똑같이 성벽에 매달렸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의 의미는 사울의 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였을 수 있고 오히려 사울의 죽음이 더 위대하다고 보았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나가는 말]

 

제사 어제 페이스북(Facebook)에 알림이 떠서 보는데, 제가 아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유명한 분이신데, 짧은 글을 올리신 것을 보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목사로서 목회도 하시지만 집안 대대로 하는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에서 우크라이나 긴급구호 기부금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조용하게 했는데 신문에 나서 쑥스럽다고 쓰셨는데, 그분의 한마디 말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이 당신을 바꾸지는 못하게 하라!”

 

그분이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부금을 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성금 1(지금 약 $82,000)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사실 별것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세상이 나를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라고 쓰셨습니다.

 

지난주 당회 및 연석회의와 임시제직회 때 우리도 우크라이나를 위한 특별헌금을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지난 12월에 토네이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미국 남부에 생겨서 구호헌금을 걷어 연초에 보냈으니까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엄청난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해 헌금을 하자고 하면 얼마 전에도 했는데 뭘 또 하는가 하고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정성스럽게 부활절 헌금을 준비해주십시오.’라고 하니까 부활절 헌금도 해야 하고, 또 평소에 주일헌금도 해야 되고 십일조 헌금도 해야 하고, 할 것도 많은데 또 우크라이나 특별헌금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된다고 느껴질 수 있음을 잘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헌금을 계속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목사가 안 할 수도 없고 해야 하니...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저 몇 백 불, 천 불, 이천 불 보낸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 사람들에게 그게 뭐 그리 큰 도움이 되겠나?’ 그렇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마음을 모으자고 하면 얼마가 모이겠습니까? 얼마나 모일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몇 천 불을 모아서 보낸다고 해도 그게 그들의 삶을 바꾸겠습니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특별헌금, 구호헌금을 한다고, 또 실제로 가서 봉사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중단되었지만, 단기선교를 가서 뭘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변한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나밖에 모르고, 내 가족밖에 모르고, 내 자식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고 그러던 내가 이것을 함으로써 변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은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울의 비참한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죽음이 그렇게 비참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무엇인가?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 길로 가고 있는가?’ 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길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가는 이 길은 그 끝에 하나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길입니까? 아니면 그 끝에 마귀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고 있는 그런 길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길로 걸어가 하나님을 기쁨 가운데 만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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