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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8일 주일예배
✦ 어머니 주일 메시지 ✦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
(에베소서 6장 1~4절)
[들어가는 말]
한국에 지금은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있는데, 이전에는 그것을 ‘대한가족계획협회’라고 해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쳤습니다. 요즘은 인구 증가 정책을 펼치는데, 오래 전에는 인구 억제 정책을 폈습니다. 그래서 저와 나이가 비슷한 분들은 이런 말들을 많이 들으며 자라셨을 겁니다.
1960년대에는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기르자.”라고 했습니다. 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벗는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나라에서 만든 구호입니다. 1970년대에는 약간 달라져서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했고, 1980년대에 또 바뀌었습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만 초만원.” 1990년대에도 약간 달라져 “사랑 모아 하나 낳고 정성 모아 잘 키우자.” “아들 바람 부모 세대 짝꿍 없는 우리 세대.”
그러던 것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 확 바뀌었습니다. “엄마! 아빠! 혼자는 싫어요.” “자녀에게 물려줄 치고의 유산은 형제입니다.” 올해인 2022년에도 슬로건 공모전을 했는데, 대상이 “육아는 한마음! 아이는 큰 희망!”이었고, 최우수상은 “당당한 출산휴가, 떳떳한 육아휴직, 든든한 직장문화”였습니다.
1966년에는 가족협회가 벌인 “3-3-35 운동”이 있었습니다. ‘3자녀를 3년 터울로 낳아 35세 이전에 단산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5년에는 “1-2-3 운동”을 했는데, ‘결혼 1년 내에 임신해 2명의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구호의 변천사를 보면 흥미롭기도 하지만 또 슬프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 계획은 시대가 바뀌면서 상황이 바뀜에 따라 구호도 바뀌고 원하는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모습은 상황이 바뀌든 시대가 바뀌든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라고 경험한 가정이 어떠했든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가정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룰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어머니날을 맞이하여, 그 동안은 하던 시리즈를 죽 했지만 이번에는 <부모의 삶>을 하면서 가정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러한 말씀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로마 시대의 자녀들
고대사회에서 기독교는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처음 조선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많은 선교사들이 학교를 지었는데, 특히 여학교들을 지어서 그 졸업생들이 20세기 초반 조선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고대사회의 여성들의 권익을 높여주었지만, 어린이들의 삶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은 더욱 컸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즉 1세기 로마제국에서는 아이들의 삶을 특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소위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라는 것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권한’이라는 뜻입니다. 그 파워가 막강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결박하고, 노예로 팔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벌을 줄 때는 어떤 방법이든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죽일 수 있는 권리도 있었습니다. 그런 권리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자녀가 장성하여 성인이 된 뒤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살리고 죽일 권리도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약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나면 아이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들을 원하는데 원하지 않는 딸이 태어났을 경우 버리거나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살던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아버지의 권한에 완전히 옭아매어 있는, 아주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인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물건 같은 존재였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아동 학대입니다. 많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학대하면서 때리고 벌주고 가둬 놓습니다. 한국에는 부모뿐 아니라 어린이집 같은 데서 종종 학대가 일어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지난 2009년 세상을 떠난 팝의 제왕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도, 그로부터 한 번은 아기였던 자기 아이를 손으로 들고 창문 밖으로 떨어뜨리는 시늉을 한 것 때문에 아동 학대라고 아주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학대가 심하기는 해도, 로마 시대에 비하면 학대 축에도 못 듭니다. 미국에서는 부모가 학대하면 자식이 신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아이가 맞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학교 교사가 경찰에 신고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직접 부모를 신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이 미국에서 또 이제 한국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당시 로마 시대에는 반대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너무 당연하여, 아버지가 아이를 죽도록 때려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받아들일 것인지, 버릴 것인지도 아버지가 결정하던 억압적인 상황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놀랍습니다.
2. 그리스도인 자녀와 부모의 책임과 역할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1절)
여기 보면, 자녀는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이것이 옳다’라고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2-3절)
여기서 다시 한번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고 하면서,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제5계명입니다. 거기에 자세히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출 20:12)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수뿐 아니라 그 땅에서 계속 형통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오래도록 살 것이다. 형통하게 살 것이다.’라는 차원에서 약속이 주어진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로마 사회에서 특이한 내용이 아니라 아주 흔한 교훈이었습니다. 폭압적인 로마 사회였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흔한 교훈이었습니다. 그 당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신들에 대한 공경과 더불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에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신들을 공경하는 것과 함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모 공경은 십계명의 제5계명이었을뿐 아니라, 많은 지혜 문서들이 강조하는 윤리였습니다. 한국도 대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은 사회의 전통과 미덕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분명히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오늘 본문의 명령이 사회에서 가르치는 윤리 도덕과는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1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단순한 부모 공경의 미덕에서 한 차원 더 올라가서, 모든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교훈이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자녀는 당연히 부모에게, 특히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했지만, ‘주 안에서’ 즉 ‘주님을 경외하는 내에서, 주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순종하라는 것이고, 주님의 본을 따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저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너는 가서 칼로 찔러 죽이고 와라.’라고 하면, 로마 사회에서는 해야 하지만, 주 안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모를 주님과 구분시키는 동시에 주님 다음의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공경하라. 그런 다음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악용한 것이 예수님과의 대화에도 나옵니다. ‘고르반’이라고 해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선물을 이미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서 부모에게 드리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갖다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하나님께 바쳐져서 성전에 가져다가 드렸기 때문에 부모님께 참 드리고 싶지만 못 드립니다.’라고 핑계 대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마가복음 7장에서 지적하십니다. 신앙을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기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일 우선적으로 섬기고, 그다음에 반드시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부모가, 특히 아버지가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크리스천이 된 자녀가 비신자인 아버지에게 핍박을 받고 폭력을 당할 때 ‘그래도 순종하라. 그런데 주 안에서 하라. 주 안에서 사랑과 존경으로 순종하라.’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님 앞에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4절)
왜 ‘아비들’만 지적합니까? ‘어미들’은 안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당시 로마 사회에서 자녀교육의 책임이 주로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이고, 또 사회 통념처럼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만 읽으면 항상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중3 때쯤에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들어서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교회에 열심을 내면서 교회가 끝나면 바로 오는 게 아니라 떡볶이집에 가고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오니까 부모님이 “네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데, 옆으로 살짝 새서 밤에 이렇게 늦게 오면 되겠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저에게 “성경에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공경하라’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모르냐? 너, 요즘 그렇게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는데 모르냐?”라고 하시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당시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런데 그 말씀 바로 뒤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도 나오는데 그건 모르세요?”라고 괜히 이야기했다가 더 크게 혼난 기억이 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라는 ‘아버지의 권한’을 가지고 아버지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녀들을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면 얼마나 폭력적으로 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니까, 아내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심지어 아이가 태어나면 살리거나 죽일 권리도 가지고 있었으니 엄청난 권한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아비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4)라고 가르친 것이니, 이것은 정말 혁명적인 것입니다. 아비들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남용하지 말고, abuse하지 말고, 자녀들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라고 해서 자기가 권리를 행사할 대상이나 자기 재산처럼 보지 말고, 자녀를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인격으로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녀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도 자녀를 “주의 교훈(훈련)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가정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아닙니다. 부모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 중심의 가정생활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뒤집어보면, 그 당시 아버지들의 권한 남용 때문에 수많은 자녀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또 마음속에 ‘노여움’으로 가득했었는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왜 다른 말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그토록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당하면서도 마음속에 분노가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여움’ 즉 분노가 바로 상처입니다.
3.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상처들
내적 치유를 하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옛날만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 어릴 적에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특히 아버지로부터 상처받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러한 상처가 자기도 모르게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실제로 폭력을 당했을 수도 있고, 특히 말로 하는 언어폭력이 더 심각합니다. 맞은 것은 상처가 조금 있으면 아물지만, 언어폭력을 당한 것은 마음에 확 박혀서 몇십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괜찮은 것 같다가 갑자기 잠수 타는 경우, 자주 우울해지는 것,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을 뜸 들이며 우유부단하게 나가는 태도 같은 것이 모두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런 점들은 많은 경우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나온 여성신학에서는, ‘하나님 아버지(Heavenly Father)’라고 하니까 아버지의 이미지가 너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폭력을 당하고 성적 학대도 당한 여성들이 많다 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자는 말도 나왔습니다.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한 것 같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까 그냥 ‘하나님(God)’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영어로 ‘God, His love, God Himself’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God, God’s love, Godself‘라고 씁니다. 요즘 신학교에 가면 다 그렇게 합니다. 이해는 가지만 그것도 너무 나갔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실수하고 상처를 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다 깨어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로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부모처럼 보이고, 완벽한 가정처럼 보여도 거기에서도 다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자라고, 또 부모가 되고서는 다시 자기 자녀에게 상처를 줍니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내 자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몰라도, 그럼 자녀에게 물어보십시오. 정말 한 번도 상처를 안 받았는지?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상처를 주었느냐 안 주었느냐가 아닙니다. 다 주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다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느냐가 문제이지, 안 준 사람도 없고 안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상처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래전 설교와 목회편지에서도 다루었지만 복습하는 의미로 요약해서 나누어보면, 크게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1) 거절감
원하지 않는 임신과 남녀 차별이 가장 큰 거절감의 원인이 됩니다. 요즘에는 남녀 차별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부모가 농담으로라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바로 ‘너는 어쩌다 태어났어. 너는 실수로 났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연세가 조금 되신 분들, 특히 식구가 많은 가정에서 자란 경우 그런 말을 들은 분들이 많습니다.
또 부모의 부적절한 거절과 일관성 없는 행동도 자녀에게 깊은 거절감의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언어폭력이나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부모, 너무 무서워서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고 자기 생각을 나눌 수 없는 아버지, 또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거나 자녀에게 무관심한 어머니, 특히 놀랍게도 과잉보호가 되면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에게서도 아이는 거절감을 느낍니다.
물론 부모와의 이별도 자녀에게 깊은 거절감을 줍니다.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경우나 이혼도 그렇습니다. 또는 부모의 직장 문제 때문에 떨어져 사는 경우도 그런데, 요즘도 기러기 아빠가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거절감을 줍니다.
그렇게 되면 증상으로 어떤 것이 나타나는가 하면, 그냥 이유 없이 슬픈 것, 우울한 것, 자기 연민, 그것이 조금 지나치면 자기 증오로 나가고, 또 실의에 빠지거나, 세상사에 무관심해집니다. 남이 어떻든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거절감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은 증상입니다.
2) 분노
분노도 상처입니다. 맞설 수 없는 약한 자녀에게 부모가 분노를 퍼부으면, 자녀는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분노하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이, 자녀도 분노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상하게 그것을 닮습니다.
분노의 상처의 증상은 반항으로 나타나고, 적개심으로도 나타납니다. 또 자만심으로도 나타납니다. 궤변으로도 나타납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의기양양하고, 망상하고, 분개하고, 쓴 뿌리가 있고, 비판적 성향이 있고,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지배욕이 있고, 소유욕이 있고, 조작하거나 조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 분노의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 그렇습니다.
특히 조종하는 것이 심한데, 자녀의 감정과 마음을 조종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때로는 자녀를 위해 자기가 엄청나게 희생을 합니다. 그러면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합니다. ‘네가 이것을 못하면 내가 죽어.’라고 협박을 합니다. 그런 모습은 굉장히 자녀를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분노의 상처입니다.
3) 굶주린 마음
주로 편애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 굶주린 마음, 굶주림의 상처입니다. 성경의 인물로는 야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굶주린 마음의 사람은 항상 뭔가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렇게 여인에게 집착하고 자녀에게 집착했습니다. 특히 라헬에게 집착했고 요셉에게 집착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조건적인 신앙의 모습이 많습니다. ‘OO해주시면 XX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성취와 업적을 이루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피곤해집니다. 할 일이 계속 쌓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더 할 일이 많아집니다. 굶주린 마음이 있으면 결혼생활도 힘들어집니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에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과잉보호는 거절감 뿐만 아니라 굶주린 마음도 줍니다. 사랑을 퍼부어주는 것 같은데, 부모가 다 해주는 과잉보호를 하면 오히려 마음에 굶주림이 생긴다는 겁니다. 철저히 자녀의 인격을 무시하고 부모가 다 알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기 방식대로 주는 사랑은 받는 입장의 자녀에게는 전혀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자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의 표현일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4) 두려움
분노와 비슷한데, 부모가 상처를 주는 말을 자주 하는 경우 자녀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할 때 자녀는 엄청난 공포를 느낍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을 큰소리 치면서 하면 아이들은 ‘아빠엄마가 이혼하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아빠를 따라가나, 엄마를 따라가나? 엄마를 따라가면 새아빠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 것까지도 아이들이 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싸울 일이 생기면 조용히(?) 싸우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이 여러 이유로 안정적이지 않을 때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부모의 장기간 출장의 경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떨어지는 것이지만, 가족이 서로 떨어질 때도 두려움이 생깁니다. 또한 이사를 너무 자주 해도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이사가 굉장히 잦고 이사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물론 부모의 죽음이나 이혼을 통해서도 두려움이 생깁니다.
과잉보호는 정말 안 좋습니다. 과잉보호는 왜곡된 사랑인데, 과잉보호가 두려움의 감정도 줍니다. ‘네가 살아가는 것은 너 자신이 아니라 부모인 나 때문이다. 너 혼자 하면 실패한다.’라는 두려움의 메시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의 증상으로 심한 불안감이나, 고립감, 또 책임 전가가 나타납니다. 자기가 잘못해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당당히 사과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상황이 안 좋아서 이렇게 된 건데.’라고 자꾸 미루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니면 모험을 하지 않고 안으로 안주만 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신앙도 ‘적당히 이 정도만 하면 돼.’ 하며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또 집착과 중독도 나타납니다.
5) 열등감
결손 가정일 경우 자녀에게 열등감이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또 부모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 즉 부모 중 하나라도 사회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든지, 인격적 장애가 있든지, 부부 싸움이 아주 심한 부모는 자녀에게 열등감을 심어주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심하게 학대하고 비하할 때 자녀는 엄청난 열등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합니다. 언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끔 화가 나면 아이에게 “야, 이 바보야! 넌 이것도 못하니?”라는 말을 할 때, 특히 어릴수록 굉장한 열등감을 심어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잉보호가 정말 안 좋은 것은, 그것이 또 열등감의 원인도 된다는 겁니다. 편애와 비교가 심한 부모도 자녀에게 열등감을 심어줍니다. 나는 이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잘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자꾸 몰아가면 그것이 과잉보호가 되고, 그렇게 되면 온갖 상처의 원인이 되며 열등감도 그렇습니다.
열등감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놀랍게도 완벽주의가 생깁니다. 그리고 지나친 희생을 하려고 합니다. 또 자신감이 약하고 부담감은 큽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한 모습도 나타나는 것이 열등감의 상처입니다.
6) 죄책감
문제의 원인을 자녀에게 돌릴 때 죄책감이 생깁니다. ‘네가 자꾸 울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네가 태어난 다음부터 집안이 기울었다.’ 이런 식의 말을 자꾸 들으면 죄책감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자책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자꾸 뭔가를 감추려고 하며 솔직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민감한 죄의식, 정당한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발이 나타납니다.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인데 거기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반발하는 경우인데, 이런 것이 죄책감의 증상입니다.
4.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길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상처들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거절감, 분노, 굶주린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열등감, 죄책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그런 상처들을 받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분들은, 그렇게 된 것 때문에 내 자녀에게도 그런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결을 위해 <부모의 삶> 공부도 하는 것이고, 특히 <새로운 삶>이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가 <새로운 삶>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치유를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음의 치유를 받고 회복해가는 과정이 바로 <새로운 삶>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그런 삶 공부들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경로를 통해서 치유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전혀 하지 않게 되면 상처를 그대로 가지고 살면서 자기가 받은 상처를 또 자녀에게 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치유를 받고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1)라고 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4)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해결책이 없습니다. 아무리 무슨 테러피 받고, 아무리 무슨 심리치료를 받고, 요법을 받고, 상담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시면 됩니다. 주님이 나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의 왕으로서 다스리시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육신의 부모님이 살아 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상관이 없이,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의 중심이 되실 때 더 이상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뭡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와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공적인 예배이고, 개인 예배, 즉 말씀을 스스로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공적인 예배와 개인적인 예배가 모두 중요합니다.
성전에는 성전 뜰이 있고 건물인 성소가 있습니다. 성소의 앞에 휘장이 쳐져 있는데, 그 앞에 지성소입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전 뜰만 밟고 가는 정도가 아니라, 깊숙이 들어가 정말 그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뵙는 예배, 우리 자신이 제사장이 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죄 용서의 체험, 은혜의 체험, 결단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 진정한 치유가 있습니다. 따로 내적 치유나 상담 요법을 안 해도, 정말 예배를 제대로 드리면 우리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의 삶>을 할 때 항상 드리는 이야기인데, 이번에도 제가 또 느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어보면, 솔로몬 이후에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는데, 북이스라엘에는 선한 왕이 하나도 없이 다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남 유다는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계속 이어가면서, 나중에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까지 이어 갔습니다.
유다에 왕들이 19명(또는 20명) 있었는데 아주 훌륭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바른길을 갔다는 평가를 받은 왕이 8명인데, 그 중 3명(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은 ‘다윗의 길을 걸었다.’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만 해도 그 아버지 아하스가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악한 왕에게서 어떻게 이렇게 히스기야 같이 훌륭한 왕이 나왔는지 정말 의문입니다. 그런데 또 히스기야처럼 종교개혁도 하고 다윗의 길을 걸으며 정직해 행했던 훌륭한 왕 아래에서 므낫세라는 최악의 왕이 나왔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요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야는 너무 훌륭했는데, 아버지도 악한 왕이었고 아들들도 전부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거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가만히 성경을 읽다 보면 바로 거기에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잘 읽어보십시오.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은데, 남 유다 왕 중에 ‘OOO가 OO년에 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 이름은 OOO이고 OOO의 딸이다.’ 또는 ‘OOO 출신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도 그렇고 요시야도 그렇습니다. 악한 왕들도 그렇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의 역할은 하나님이 가장으로 맡겨주셨는데, 외부로부터 내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 가정의 방향(direction)을 잡는 역할(‘이 방향으로 나아가자’)을 주로 하는 겁니다. 그럼 어머니의 역할은 뭡니까? 내부에서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다독여주고 바른 방향으로 가게 밀어주는 역할입니다.
아버지는 끌고 가고 어머니는 밀어주는 역할을 맡겨주셨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direction을, 어머니에게는 detail을 주셨습니다. 물론 예외의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무리 앞에서 이끌고 가도 어머니가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그 아들은 악한 왕이 된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악한 왕으로서 잘못된 방향으로 막 나아가더라도, 집안에서 어머니가 믿음으로 아이를 잘 양육했을 때, 훌륭한 믿음의 왕이 된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이 어머니날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바로 서면 가정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아버지까지 믿음으로 바로 서면 이 가정이 얼마나 아름다운 가정이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바로 섰는데 어머니가 바로 서지 못하면 그 가정은 정말 힘듭니다. 어머니는 바로 섰는데 아버지가 바로 서지 못해도 역시 힘들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자녀들에 대해서는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중요하고, 어머니는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기 계시는 어머니들이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아이의 미래가 달려 있다.’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가정, 다시 말해 주님이 중심에 계신 가정, 주님이 다스리시는 가정, 그런 가정이야말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며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모실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가족 모두가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치유와 회복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주님 중심의 가정이 되어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놀라운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