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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0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3 ✦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
(요한복음 15장 18~27절)
[들어가는 말]
20세기 영국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허버트 맥케이브(Herbert McCabe)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은 복음이 드러내는 인간의 역설적 상황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은 두 개의 상반된 진리를 외치는데, 그 하나는 만약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진짜 사랑한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사랑할 수 없다면, 자기 폐쇄적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며 당신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위한 미래를 창조할 수 없고 결국 살아갈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당신이 정녕 사랑한다면, 우리 사회가 의지하는 지배 체제에 위협이 될 것이고 결국 살해당할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정리해보면, 맥케이브는 인간에게 허락된 삶의 방식이 두 가지가 있고, 인간의 마지막 결말 즉 운명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두 가지 삶의 방식은 사랑하는 삶과 사랑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같은 결말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면서 살든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든, 결과는 둘 다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실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숨 쉬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사랑을 하면 죽임을 당하더라도 사실은 생명의 길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참다운 인간다움을 보여주시고, 또 그러한 인간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사랑하며 살 때 인간답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닮는 삶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닮는 가장 좋은 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짐승의 삶과 다를 바 없이 그저 욕망에 충실해 사는 삶일 뿐이고 그냥 숨을 쉬니까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인 사랑임을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이가 몇 살이든,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도 십자가의 사랑을 내 삶의 방식으로 삼아서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정말 인간의 회복입니다. 이것이 정말 ‘회복하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정말 인간다움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남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 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예수님처럼 내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사랑하며 남을 살리는 것이 십자가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길입니다.
1.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 (18-21절)
그리스도인다움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를 희생하신 모습을 닮아서 본받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나도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예수님을 죽였듯이 예수님처럼 사는 제자들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것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8절)
요한복음 전체에서 ‘세상’이라는 것은 전 세계를 이야기한다기보다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곳 15장 18절에서 말하는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땅과 자기 백성에게 왕으로 또 빛으로 오셨습니다. 1장에서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가 당신의 백성이라고 알려주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또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7:7)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씀하시고 빛을 빛이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세상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저항하고, 회유하고, 유혹하고, 핍박하다가 결국 죽이게 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며 그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지체가 되었고, 그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주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애쓰셨던 사명이 곧 우리의 사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기 직전에 제자(사도)들에게 이 사명을 다하라고 주시고서 가셨습니다. 그것을 곧 ‘지상 대명령’ 또는 ‘대 사명’(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온갖 유혹과 고난을 당하셨고 박해를 당하시다가 결국 죽임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고난 받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9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다는 말은 곧 그분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세계에 속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선택하여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는 사랑을 받는 대신에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사랑도 받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사랑도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의와 불의가 함께할 수 없고, 정결함과 부정함이 같이 갈 수 없고,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찬을 받고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드러내지 않을 때 가능합니다.
아무리 존경받을 만한 일을 우리가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은 누가 칭찬하습니까? 범법이나 위법에 우리가 눈을 감지 않고, 관행이라고 하는 것에 우리가 제동을 걸며 옳지 않다 하고, 또 위선적인 것들을 폭로하게 되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 지어 전도하러 내보내시면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살려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고지식한 사람, 꽉 막힌 사람, 답답한 사람, 세상 물정을 모르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참 지혜가 없다고 하는데, 그 지혜가 사실 ‘처세술’입니다. 요즘에는 아부를 잘하면 ‘사회생활을 잘한다.’라고 하는데 그것이 다 처세술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답게 말씀대로 살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받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사실 존경을 받는 것도 일시적인 존경입니다. 그것이 계속되면 시기와 질투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칭찬하다가도 나중에는 ‘자기만 깨끗한 줄 아나?’라는 식으로 시기와 질투를 합니다.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고 알아주지 않습니다.
세상을 잘 따르게 되면 당연히 세상이 핍박할 리 없고 사랑을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생명은 점점 죽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처세술에 능하고 살살 거리며 꾀를 부리고 지혜롭게 산다는 사람들의 삶에 평안이 없고 항상 불안합니까? 그것만 봐도 그렇게 사는 게 진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방식에 길들여져서 탐욕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사랑 대신에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미움과 핍박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제대로 못할 때도 비난을 받습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가 정말 욕을 많이 먹고 비난을 많이 듣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를 염려해주어야 하는데 요즘은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향해 ‘교회가 저래도 되나?’ 하고 걱정해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대로 할 때 받는 미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이 쉽지 않을 때는 오히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지키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쉬워질 때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초대교회사를 보아도 그렇고, 중세를 보아도 그렇고, 한국 교회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밖에서 박해가 오고 고난이 있을 때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최선을 다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고난이 없어지니까 그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어려움이 없으니까 오히려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박해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만들어줍니다.
오래 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중국 지하 교회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 같이 이야기하며 기도하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여러분 중국 지하 교회를 위해 핍박이 없어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때 중국 지하 교회 지도자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아니요, 그렇게 기도하지 마십시오. 계속 핍박이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살 길입니다.” 핍박이 없어지면 오히려 타락한다는 것을 그 지도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박해를 받게 되는 이유를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0절)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종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친구입니다. 주인의 길을 종인 우리가 가지 않을 수 없고, 또 주인이 당하신 박해를 그분의 뒤를 따르는 종이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당하신 대로 우리도 당하게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다가 고난이 오고 박해가 오면 그것은 괴로워하고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할 일이고 기뻐할 일이라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르고 살 만하게 되었을 때 신앙생활을 더 간절하고 열심히 하셨습니까, 아니면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까? 당연히 어려울 때 더 간절해집니다.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있어도 다 그렇게 됩니다.
편해지면 해이해집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편해지고 좋아지면 사람의 눈이 다른 데로 향하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경우를 보십시오. 고난을 당하고 어려운 사람이 타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편안해질 때 타락합니다. 선진국에 이상한 도덕적 해이가 더 많습니다. 먹고 살 만하면 사람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박해가 오는 것은 오히려 환영할 일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경한 이름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어서, 저 십자가(나무)에 달린 예수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아로 부르고 그를 따르는 일은 엄청난 불경죄가 됩니다. 또한 로마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로마 황제를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라는 단어는 당시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고, 또 로마로부터도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교를 부정하는 일이 되고, 또 로마 황제가 세계의 주인임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핍박한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1절)
사람들이 박해하는 것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라고 하십니다. 이방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유대인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 즉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자신들만큼 하나님을 잘 알며 또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불릴 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죽이는 데 힘썼습니다. 정말 확신을 갖고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고, 자기들의 유대교를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무조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갖되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믿고 있으면 큰일입니다. 또 사실인데 안 믿어도 큰일입니다. 우리는 사실,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안 믿었고 따라서 하나님도 믿지 않은 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요즘도 신을 믿는다면서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데,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은 알라 신을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알라 신을 인정하지 않고, 또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신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슬림들은 알라를 위해서 엄청난 테러와 끔찍한 살상도 많이 저지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단들이 개신교 안에 있어 왔는데, 그들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자기들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자기들만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외아들 예수를 메시아(구원자)로 보내셨고 또 앞으로 다시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분이심을 말하지 않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잘 알고 있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 참다운 신앙인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살면서 그 믿음 때문에 어려움이 오더라도 박해를 당하는 사람,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정신으로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다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사람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렇게 살아가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하는 세상 (22-25절)
예수님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연구하지만 정작 그분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한 유대인들의 상태는 사실 단순하고 순진한 무지가 아니라 아주 치명적인 무지였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2-24절)
앞에서는 예수님이 세상에게 미움을 받으시므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일이 사실상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무지와 착각 그리고 그로 인한 불신앙의 죄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역사상 하나님은 환영받으실 때보다 배척을 당하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삶은 칭찬을 받을 때보다 미움을 받을 때가 많았고, 계속 의인으로 살면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됩니다.
요즘 큐티 말씀이 욥기인데, 욥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나를 경외하는 사람이 없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이다.’ 하고 인정하실 정도로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와서 처음에는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함께 일주일 동안 울어주며 가만히 있다가, 욥이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입을 여니까 친구들도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하며 논쟁을 벌입니다. 그런 내용으로 차 있는 것이 욥기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끔찍한 어려움을 당하여 아픈 욥에게 와서 뭘 그렇게 논쟁을 벌입니까? 그들의 결론은 ‘네가 뭔가 죄를 지었으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들의 심리상태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을 가만히 보면 그들은 분명히 욥을 시기하고 질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욥을 의인이라고 인정하지만 그처럼 부자로 살지 못하고 의인으로 살지 못하니까 분명히 시기와 질투가 그들에게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바르게 살면 존경도 받지만 시기와 질투도 받습니다. 그런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 사람들은 언제나 역사에서 소수였습니다. 성경에도 소수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이 성경에 나와 있지만, 그들의 수를 세어보면 아주 소수입니다.
대부분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을 걸어가며 자기 내면의 욕망을 이루려는 잘못된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무 불편하게 하지 않는 ‘소비자적 신앙’이 교회 안에서도 환영을 받아 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잘된다. 일이 잘 풀린다.’라고 하면 환영을 받지만, ‘예수 믿으면 죽는다.’라고 하면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물론 교회 역사를 보면 전혀 헌신을 요구하지 않거나 열정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하면 더 큰 대가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선금 십일조’라는 것까지 나왔습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얻은 수입에서 1/10을 구별하며 바치는 것인데, 벌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리 자기가 벌고 싶은 액수를 정해서 그 액수의 1/10을 미리 내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 어떻게 진짜 믿음이겠습니까? 헛된 환상, ‘이렇게 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다 가짜 종교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많은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비자 종교에 열광하고 환호하면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품이 꺼졌습니다. 최근 각 교단들이 총회에서 교인 숫자를 발표했는데 1년 전보다 급격히 줄어들었고 몇 년 전에 비하면 40만 명 이상 줄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인데, 거품이 꺼지니까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항상 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수였고,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비자적 종교인들이 볼 때는 나병환자를 찾아가시는 예수님, 그것도 만지면서 고치시는 예수님, 창녀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용서해주시는 예수님,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 수많은 군중의 환호를 물리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는 것을 거절하시는 예수님,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시는 예수님, 십자가를 자처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정직한 진리보다 잘 치장된 거짓을 더 좋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을 보면 계속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지금 자신이 배척을 받고, 제자들이 미움을 받고, 따라서 하나님도 미움을 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5절)
이 말씀은 시편 35편 19절과 69편 4절에 나옵니다. 특히 시편 69편은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번 인용이 됩니다. 의인이 까닭 없이 미움을 당하고 고초를 겪는 중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시가 69편입니다.
여기서 ‘응한다’라는 말은 시편 기자가 이 일을 미리 알고 예고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의인의 길에 늘 뒤따르는 반대와 거부와 미움의 모습이 예수님께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예수님을 따름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삶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려고 하십니다. 그렇게 확신을 주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했으니까 너희도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둘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이 의인의 고난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다가 당하는 어려움이 나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고난도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믿을 수 있고, 이전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견딜 수 있습니다.
3. 보혜사 성령님의 오심과 제자들의 증언 (26-27절)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와서 한 일과 한 말씀이 세상의 믿지 않음을 핑계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26-27절에서는 성령이 오셔서 자신이 한 일과 한 말이 진리임을 증언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놀랍게도 제자들 역시 바로 이 증언의 대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6절)
세상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미워하지만 성령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증언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십니다. 앞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는데, 즉 예수님도 보혜사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보혜사’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지금 예수님은 세상 법정에 피고로 서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곧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법정에 서시게 됩니다. 또한 후에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보혜사 성령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호인의 역할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셨으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잘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남을 슬쩍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면, 그 순간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당연히 유혹에 빠져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데, 그 순간만큼은 성령님에 사로잡히지 못하고 자기가 앞서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진리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27절)
보혜사 성령님만 아니라 ‘너희’ 즉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언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시기 전에 13장에서부터 제자들을 따로 모아 17장까지 죽 말씀을 가르치시는 이유도 바로 이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준비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까지 이들을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처음부터 자신과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우리의 삶 공부처럼 가르치는 것도 하셨고, 특히 함께 있는 것, 즉 예수님과 같이 먹고 자고 지내고 다니면서 보고 배우게 하시는 훈련이었습니다. 공부만 하는 훈련이 아니라 삶을 통해 보고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하시는 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곧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이고, 또 동행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럴 때에만 주님의 증인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말은, 지금 이 땅에 예수님이 안 계시지만 그 예수님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게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개인 예배도 할 수도 있지만,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 함께 교제하는 일, 함께 말씀을 공부하고 나누는 일이 교회 됨을 위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동행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가치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복이라고 선전하는 잘못된 집단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 가지에 계속 힘을 써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하기에 힘써야 하고, 열심히 말씀을 함께 공부하기에 힘써야 하고, 또 목장과 같이 함께 모여서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는 훈련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진리를 배우고 나와서 실천하는 장이 목장이고 교회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나가는 말]
책에서 오래 전 읽은 이야기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70대 남성 두 사람이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공원에서 만났습니다. 한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이 오기에 보니까 연배가 비슷해 보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요즘 신문을 보니까 백만장자가 심심치 않게 나오던데, 만약 선생님이 백만장자가 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질문을 받은 사람이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엽니다. “나가 죽어야죠.” 질문한 사람이 깜짝 놀라 묻습니다. “아니, 백만장자가 되었는데 왜 나가 죽습니까? 죽긴 왜 죽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 두 번째 사람이 입을 천천히 엽니다. “이보시오, 나는 지금 억만장자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것의 크기와 분량이 우리의 판단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노 권사님이 생신을 당하여 교회에서 축하를 해드렸습니다. 그 중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청년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권사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래오래 100살까지 사세요!” 그랬더니 그 권사님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연세는 99세였던 것입니다. 1년만 있다가 죽으시라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같은 말이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되지 않습니까? 이게 뭔가 하면, 우리가 판단을 잘하며 살아야 하는데, 인간과 인간의 판단은 늘 서로 충돌하고 다툼을 야기하며 서로를 해치다가, 결국 본인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친다는 겁니다. 인간의 판단은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과 관점과 시각과 문화와 교육적 배경과 얼마나 가졌는가의 정도와 사회적 환경에 따라 늘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판단의 기준을 항상 바뀔 수 있는 것에 두면 우리도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판단의 기준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배움으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진리로 우리를 채우고 진리의 시각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배운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 함께 모여서 확인을 받고 실제로 실천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구애됨 없이 모든 면에 걸쳐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릇된 판단으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해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이끌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앞으로 다가올 30년을 바라보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 교회, 또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