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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9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30 ✦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복음 14장 22~31절)
[들어가는 말]
“좋은 질문이 좋은 배움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냥 넘어가지 말고 좋은 질문을 할수록 배우는 것이 더 많아지고 확실해집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해보신 질문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의 경우에 제가 했던 질문은 생각이 안 나고 제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엽기적인 질문이 생각납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아주 오래 전인 고등학교 2학년 때 한문 과목이 있었는데, 그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전부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굉장히 인자하시고 연세가 지긋하시고 은퇴를 얼마 앞두지 않은 분이셨는데, 칠판에 뭔가를 쓰시며 열심히 설명하시는데 친구들은 전부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칠판에 쓰시던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시더니 자는 아이들을 보시고 “아이고, 쯧쯧, 그래 얼마나 피곤하겠냐? 이 시간에라도 자라, 자. 들을 사람은 듣고 잘 사람은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분 후 한창 자던 친구 중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들며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깜짝 놀라고 반색하시면서 “오, 그래, 무슨 질문이야?”라고 하시자 “지금 몇 분 남았어요?”라고 해서 모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누리는 복 (22~26절)
1)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주님
놀랍게도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질문을 합니다. 특히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질문을 하고,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답하시는 형식이 13장부터 계속 나옵니다. 베드로가 질문하고, 도마가 질문하고, 빌립이 질문한 데 이어서 이번에는 가룟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질문합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절)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유다의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구원자)가 오셔서 세상에 자신을 능력으로 나타내실 것이라고 기대했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당연히 엄청난 능력을 펼치며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해줄 것을 모두가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오병이어,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시는 엄청난 일을 하셨을 때 ‘이분이 그분이다!’라고 하면서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능력 있는 분이 오시면 그런 것이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나를 나타내겠다.”(21)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왜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신다면 그들이 그것을 보고 더 많이 믿지 않겠느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유다의 질문은 7장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한 내용과 아주 비슷합니다. 초막절이 가까울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유대로 가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라고 말했습니다(7:4). 유명해지려면 이 갈릴리 촌구석에서만 활동하며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같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형제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7:5).
그렇다면 22절에서 유다의 질문 역시 그가 아직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자신을 영광스럽게 보여주시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거나 자기들 마음대로 믿을 것을 유다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그렇게 엄청난 유익을 보고도 예수님에게서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니까 보여주기만 하면 다 따를 것이라고 유다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고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어떤 이유로든 실망하게 되고,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하시게 되면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혹시 유다(다대오) 같은 생각으로 주님을 오해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흔한 오해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가 부흥하던 1970년대, 80년대에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가 굉장히 큰 구호였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전했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초기 한국 기독교였고, 나중에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가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그것을 약속해줍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슨 복이냐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는 것, 성공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등을 많이 생각합니다. 높이 올라가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많이들 생각했는데,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면, 잘되면, 성공하면, 돈을 많이 벌면 영광이 된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그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지 않습니까?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이 높아진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말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데 그 후 완전히 곤두박질한 경우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단순히 세상에서 공부 잘하고 학벌이 좋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믿지 않는 저 친구는 일이 잘 풀리는데 왜 나는 이렇게 안 풀릴까?’ 할 때가 있습니다. 학교도, 직장도, 사업도, 가족도, 자녀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노력을 안 하거나 게을러서 그렇다면 본인 잘못이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특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쓰며 나아가는데도 이상하게 세상에서 일이 잘 안 풀린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실패냐 성공이냐를 나름대로 판단하고, 그래서 부러워하거나 조롱하거나 하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세상에서 잘 안 되는 것이 실패라면, 예수님이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보다 더 끔찍한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죽는 것도 슬픈데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했으니,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으로 사형당한 것이 어떻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의 개념을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높아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잘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성공하려고 애를 쓰다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 실패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가 진짜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당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순종으로 표현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말세가 될수록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더 빼앗기는 양극화 현상이 말세가 될수록 더 심화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열심히 하는 사람은 더 풍성한 삶을 어려운 중에도 살게 되고, 제대로 안 하는 사람은 있던 것도 없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실 누구에게나 나타나주시지만 알아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역사인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것은 저주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뭔가 뜻이 있으셔서 나를 이렇게 이끄시는구나.’ 하고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명예와 권력과 탐욕으로 눈이 먼 세상은 예수님을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앞에 계셔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3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돈 버는 것, 명예가 높아지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때 주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사람끼리도 부모님을 사랑하면 부모님이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내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가 부탁하면 들어줍니다. 물론 나쁜 짓을 하겠다고 하면 안 들어주는 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안 지킨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배드리고 열심히 헌금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심히 말씀도 읽고 묵상하는데, 주님이 명령하신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 “가서 제자를 만들어라”라고 하신 것을 안 하고 있다면,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즉 예배와 기도와 말씀의 바탕 위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두 가지를 약속해주십니다. 첫째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이미 하셨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둘째는 이전에 없었던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거처’라는 단어가 성경에 단 2번 나오는데, 한 번은 바로 여기이고 또 다른 경우는 14장 2절에서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2)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셔야 거처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거처는 누가 거할 곳인지가 2절에는 나오지 않았는데 23절에는 분명히 나옵니다. 그 거처는 바로 우리가 거할 곳이라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과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의 임재, 성자의 임재에 이어서 이제 성부의 임재까지 약속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 함께 해주신다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4절)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비추어질 때만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드러낙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소용없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단들도 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이단입니까?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살며 그분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씀만 쏙쏙 뽑아서 짜깁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정말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단뿐 아니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산다면, 그런 경우는 모두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2) 보혜사 성령을 통해 주시는 깨달음
예수님은 앞에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라고 하셨고, “그는 진리의 영이라...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혜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 말씀해주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5절)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면 더 이상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으며 배울 수가 없게 됩니다. 제자들이 지난 3년 반 정도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듣고 보고 배웠는데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6절)
이제 제자들 눈앞에 있는 예수님이 자기들로부터 떠나시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보혜사 성령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말씀해주십니다. 지금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아진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또 살다가 갑자기 어떤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것도 다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은 성령님을 통해 새롭게 변화가 됩니다. 이 땅의 가치관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때까지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그 밑에서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겠다고 생각하며 ‘누가 크냐?’ 하고 싸우는 세속적인 욕망을 가졌던 제자들이 그런 욕망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의 말씀의 참뜻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것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누리게 되는 유익 (27~31절)
예수님이 이제 떠나가시게 되면 제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1) 평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7절)
‘평안’은 히브리어로 ‘샬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그 샬롬의 세상을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이사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메시아의 역할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본래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따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 서로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누리는 것을 ‘안식’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이 들어와 샬롬이 깨졌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세상에 평안 대신 서로를 미워하고 폭력을 행하고 착취하고 전쟁을 벌이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도 원수 관계가 되었고,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다 무너졌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바로 그렇게 깨진 상태를 원래대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안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휴전이나 종전 같은 정도가 아닙니다. 강자의 힘 앞에 어쩔 수 없이 굴욕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같은 게 아닙니다.
로마는 ‘로마의 평화’라고 해서 주변 나라들을 다 무력으로 점령한 다음에 이제 평화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진짜 평화가 될 수 있습니까? 자기들에게는 평화일지 몰라도, 정복당한 민족과 나라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어떻게 평화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진정한 평안은 평안을 누릴 수 없는 상황에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성령님이 평안을 주시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아무 일도 없고 가만히 조용한 데 있는 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이 아니라, 정말 흔들릴 수밖에 없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누리는 평안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구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평안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생명의 영’이시고, 죽음 가운데 매여 있던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분명히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이 주는 평안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죽음을 이기는 평안이 아니고,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저 죽음의 현실에 대해서 눈을 감게 해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영상으로 보았는데, 타조가 맹수나 사냥꾼을 피해서 막 도망가다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게 되면 땅에 머리를 쳐 박고 가만히 있습니다. 쫓아오는 맹수나 사냥꾼이 자기 눈에 안 보이니까 ‘아, 이제 됐다. 평안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됩니까? 세상의 평화는 그와 아주 비슷합니다. 지금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오히려 엄청난 위험이 바로 자기 옆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세상의 평안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돈과 권력을 잡으면 평안해진다고 속삭입니다. 또 광고기법이 대부분 그런 것들입니다. ‘이것을 당신이 가지면 평안해집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물건 살 때는 ‘워런티(warranty)도 사세요.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면 평안해진다고 유혹합니다. 마약을 하면 평안해진다고 유혹하고, 괴로울 때 술에 빠지면 세상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속삭입니다.
그런 것들이 진짜 평안이겠습니까? 일시적으로 잠시 잊은 것뿐이지, 내 눈에 안 보이는 것뿐이지, 진짜 평안이 될 수가 없습니다. 거짓 평안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진짜 평안이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은 가짜 평안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평안은 진짜 평안인데, 그것이 고난 속에서 누리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평안은 괴로운 중에 누릴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고통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평안이 진짜 평안입니다. 우리 주님의 평안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게 해줍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역사에 보면 순교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에도 일제강점기나 6.25 한국전쟁 때도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예수 믿으면 죽이고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때리며 고문했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일제강점기 때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못으로 만들어놓은 데를 맨발로 걸어서 엄청난 부상을 입는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그 상황이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견디었겠습니까? 맞고 찔리고 부상을 입는 상황에서 육신이 너무나 괴롭고 힘든데 견딜 수 있었던 힘이 평안입니다. 그분들은 견디는 중에 평안을 누렸던 겁니다. 그 상황이 되면 분명히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찌르고 고문하고 때리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 평안이 있겠습니까? 그런 가해자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부인하지 않으니 얼마나 약이 오르고 독기가 올라오겠습니까? 그런데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때 그분들은 분명히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스데반 같은 사람도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죽음의 순간에 기도하고 죽었습니다. 평안을 누렸습니다.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죽이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이제 성령의 약속, 평안의 약속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가시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왜 제자들이 지금 근심하고 두려워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정말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여러 근심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요즘은 코로나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백신 접종을 마쳤어도 혹시 걸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 속에서 불안하게 다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정말로 주님의 사랑을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렸다는 사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죽일지라도 나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임을 믿는 것만이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게 해줍니다.
물론 코로나바이러스는 치사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결려서 사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혹시 우리가 그런 질병에 걸려 죽더라도, 암에 걸려 죽더라도, 아니면 선교지에서 박해를 받고 순교하게 되더라도, 그들은 이 땅에서 우리의 목숨만 빼앗아갈 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목숨만 빼앗을 수 있지, 우리의 영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 즉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은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을 믿을 때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있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14장을 시작했는데, 이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14장을 끝냅니다.
2) 기쁨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떠나심이 주는 또 다른 유익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8절)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나심의 의미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믿었다면,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곧 다른 방식으로 오시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은 예수님이 원래 계셨던 곳, 즉 하늘 보좌, 아버지께서 계신 곳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왜 성도들에게 기쁨을 줍니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참 이해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을 읽어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분이 각각 독특한 분이신데 이 세 분이 완벽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분들 사이에 질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성령님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십니다. 예수님보다 더 크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떠나심이 성도들에게 결코 기쁨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실패나 패배가 되지 않고 오히려 놀라운 역전의 승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은 탄식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일입니다. 즉, 그 크신 하나님께서 놀라운 부활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예수님 자신에게도 영광을 얻으시는 길이 되고,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마음에 근심하고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기뻐 뛰며 춤춰야 할 소식입니다.
3) 믿음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29절)
또 다른 유익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단계의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천국의 비유’ 가운데 여러 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직 옥토(좋은 땅)에서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쓰인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20:31). 그런데 그 믿음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생긴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믿기는 믿었지만 언제든지 시험이 오면 넘어지고 도망갈 수준의 믿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고, 부인한 제자도 있었고,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떠나신 후 성령님이 오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전에는 성령님이 안 계셔서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성령님이 오셔서 안에 들어오심으로 성령님을 받은 후에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진짜로 믿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모든 말씀과 노력은 다 믿음을 바라보며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더라도 제자들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것을 더욱 굳게 믿을 수 있게 되고, 또한 그분의 죽음이 가져올 모든 결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이 바라고 계십니다.
4) 사랑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까지나 제자들을 직접 보고 격려하시거나 용기를 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가시고 그분의 말씀만 남게 됩니다. 이제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주님이 떠나신 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살지가 결정됩니다. 이제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할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0절)
지금처럼 제자들을 붙들고 많은 말씀을 주실 날이 이제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임금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임금’은 ‘사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알지만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보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또 그를 죽게 만들고 자기가 왕 노릇 하려는 악한 자입니다. 8장에도 나오지만, 그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숭배하도록 만드는 존재입니다.
이단 중에 베뢰아 이단이 있는데 귀신론이 핵심입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게, 안 믿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서 쫓아낸다고 하며 귀신에게 물어봅니다. ‘너는 무슨 귀신이냐?’ ‘나는 내 아들에게 들어왔다.’라고 합니다. 그게 다 거짓말인데 귀신의 말을 듣고 파악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사탄은 거짓말 밖에 모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게 다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따라가니 이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거짓말을 듣고 따라갈 수 있습니까?
또 신천지 이단도 ‘모략’이라고 해서 순 거짓말하며 속이는 것을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어떻게 하나님의 방법일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단입니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모두 사탄의 하수인들이 됩니다. 사탄은 그렇게 성령을 거절한 자들 속에 임하면서 그들을 다스립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 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만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이것은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분이 바로 이 구절을 가지고 인용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라는 말씀만 가지고서 강력한 사탄이 오니까 예수님이 무서워서 제자들과 말을 그만해야겠다고 경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파워와 사탄의 파워가 동등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말씀을 안 본 겁니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 죄의 형벌을 받고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결과 사탄에게 죽음이라는 값을 지불하고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31절)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세상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무엇이 생명의 길인지 알려주시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고 죄가 사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돌아가심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라” 하고 명령하시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목숨 다해 지키심으로써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순종의 사랑을 통해 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할 수 없으셨고, 그 결과 세상의 미움을 받아 돌아가셔야 했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오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세상 임금 즉 사탄의 승리의 날이 아니라 패배의 날이고 심판의 날이 됩니다. 사탄의 속박에 매여 있던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제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예수님을 통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제 이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제자들의 사명이고 또 교회의 사명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천을 촉구하십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31). ‘일어나라’, ‘떠나자’라는 말은 물론 실제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이제 너희도 내가 가는 이 십자가의 길로 같이 가자.’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라. 떠나자.’ 바로 ‘십자가의 길을 같이 가자.’라고 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뛰어넘으라고 하십니다. 일어나 여기를 떠나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을 살 때 진정한 샬롬(평안)이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 어디서 평안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무엇을 하셔서 진정한 평안을 얻으셨습니까? 생명을 구해주는 평안, 변하지 않는 평안을 어디서 누리셨습니까? 드라마에서? 예능에서? 영화에서? 그런 것은 잠시의 즐거움을 줄지 몰라도 세상의 평안은 주님의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진정한 평안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이 죽음이 길이지만 그러나 생명의 길인 그 길을 따라갈 때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 길로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나가는 말]
오래 전 한국에서 어떤 분이 가족과 휴가를 갔는데, 산속의 별장 같은 데를 빌려서 갔습니다. 거기에는 실제 나무를 떼는 fire place가 있었습니다. 거기 땔감으로 쓸 나무들이 놓여 있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들이 부러진 야구 방망이였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보니까 방망이가 부러졌는데 그 끝자리에 이름이 씌여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그 당시 활동하던 유명 프로야구선수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선수들이 경기하다가 부러져 버리는 것을 누군가가 모아서 땔감으로 놓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 그분이 이런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배트를 가지고 프로선수들이 야구를 할 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타석에서 배트를 휘둘러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고 점수를 냅니다. 그 배트에 자기 이름까지 새겨 넣으면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히 가는 게 아니고, 몇 년 가는 것도 아니고, 몇 번 치다가 부러져서 자신의 영광이 오래 가지 못하고 그저 땔감으로나 쓰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무리 이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애를 써도 결국은 이렇게밖에 되지 못하는구나.’ 하는 허무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계속 따라갈 때 그 결말은 결국 그렇게밖에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 같아도 금방 부러져서 땔감으로나 쓰는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이 남겨주신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기억하면서, 그 말씀이 새롭게 이루어가는 역사에 쓰임 받는 고귀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