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Q7W7qinHruU?t=2084
2021년 8월 8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25 ✦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본”
(요한복음 13장 12~20절)
[들어가는 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네 사람은 모두 합심하여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은 점점 더 거세지더니 마침내 배가 뒤집혀지기 직전이었습니다.
폭풍은 멈추지 않고 배는 뒤집히기 직전이라, 큰소리로 기도하던 네 사람은 그 순간 입을 다물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속으로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저 세 명은 포기하시더라도 저만은 살려주십시오. 믿습니다.’ 이것이 어떤 기도입니까? 사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많이 합니다.
또 예를 들어, 지금 백신이 나오기 전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상태에서 내가 다른 3명과 같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얼마 후에 확진자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까지 포함한 4명이 밀접 접촉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우리가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겠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저 세 사람은 어떻게 되든지 나는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하나님, 나만은 걸리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흔히 행할 수 있는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경쟁자들을 누르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은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런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거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편법을 쓰거나 불법을 행하더라도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이 경쟁에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을 다 잘못되더라도 나만은 살려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을 때 사실은 그런 기도를 드리고도 씁쓸함이 올라옵니다. 또한 실제로 그런 기도의 결과가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났을 때, 정말 세 사람은 죽고 나는 살았다면 행복할 것 같으십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롭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코로나에 걸렸는데 나는 안 걸렸다면 물론 감사하지만 마음에 굉장한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생각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히려 내가 죽더라도 남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앙이 무엇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돌아보게 됩니다. 정말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세족식의 참된 의미 (12~17절)
1)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의 섬김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 ‘끝까지의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섬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룟 유다의 기회주의적이고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사랑과 대조되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일을 통해서 끝까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 즉 진짜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신 것은 스승으로서 놀라운 겸손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예수님 같은 분이 하실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가셔서 말을 거시고 물을 달라고 하신 것도 당시 사회의 관습과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예수님이 참 훌륭한 분이시고 겸손한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사회 통념으로 보면 ‘저 사람은 참 이상한 사람이다. 기인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천한 종이나 하는 손님들의 발 씻는 일을 주와 스승이신 예수님이 하신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가만히 있었는데, ‘아유, 선생님이 내 발을 씻어주시네’ 하고 감격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지 몰라서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8a)라고 강력하게 거절하며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b)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발 씻기시는 섬김을 거절할 경우 나중에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섬김까지 거절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나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씻느냐, 안 씻느냐가 아닙니다. 발을 수십 번, 수백 번 씻고, 심지어 손과 머리와 온 몸까지 다 씻는다 할지라도 발 씻김이 의미하는 것을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며 핵심인 사랑의 섬김을 모른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이 세상과 너무나 다른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왕이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섬기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예수님께서 이루려고 하시는 나라이고, 지금 우리가 이루기를 원하시는 나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이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 없다.’라고 하신,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볼 수 있다.’라고 하신 바로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3:3-4).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진짜 어떤 분이신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거듭나야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종이 되는 나라, 백성 가운데 높고 낮은 자가 없이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섬기는 나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종인 동시에 주인이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기뻐하며 그것을 온 마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다’(born again), ‘구원받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가치를 나의 가치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제는 내가 죽더라도 남을 살리는 일,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내 인생을 걸겠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거부했습니다. 베드로는 오해했습니다.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그 의미를 설명하셨던 예수님은 이제 이 충격적인 세족식의 의미를 직접 설명해주십니다. 이제 모든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다음에 예수님은 다시 식사하는 자세로 돌아오셔서 물으십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2절)
예수님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나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왕이 아니라,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 같은 왕이십니다(10장). 그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7절에서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후’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이야기합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말해주어도 모를 것이라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금 행하신 세족식의 의미를 제자들이 알기를 기대하시는 것처럼 여기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 그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처럼 파격적인 행동을 하신 것을 보며 가만히 구경만 하면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뭔가?’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아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2) 선생과 주의 본을 따르는 제자와 종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3-14절)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선생’이시고 ‘주’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제자이고 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때 자기들은 선생님의 말을 배우고 따르는 제자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자기들은 주인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종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모든 하늘의 영광을 누리셔야 마땅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이 지금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살고 계시며 심지어 그들의 발까지 씻겨주시는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왕이신 예수님은 왕이신데 이런 형편없는 자들과 함께 하실 만한 분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까? 오히려 세상에서 높은 사람들, 아주 유력한 자들과 어울려야 마땅한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회에서 아무 인정도 못 받고 별 것 아닌 사람들, 가장 좋게 말해서 ‘평범한’ 사람들인 제자들과 함께 떠돌아다니며 낮은 자리에서 사시면서, ‘가난한 자, 애통한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선포하시며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시면서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자들에게 가지 않으시고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가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교회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저는 그냥 지금으로 만족합니다. 저의 삶은 넉넉하고 다 잘되고 있고, 신을 믿는 것은 지금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하기 가장 힘든 분들이 이렇게 삶에 많은 것들을 갖추어 부족함이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분들도 자기가 압니다. 겉으로는 ‘나는 괜찮다. 나는 풍족하다. 나는 만족한다.’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이 필요가 없습니까? 지금 삶으로 정말 충분합니까? 실제로는 지금 자기가 누리는 이 행복과 풍족함이 언제 깨질지 몰라서 불안해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요즘 코인 열풍도 불었는데, 주식 투자를 한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웬만한 분들은 주식 투자를 합니다. 놀라운 것은, 고등학교 아이들도 부모가 도와주고 해서 벌써 어카운트를 만들어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투자를 하거나 노후 대책을 세우는 것, Retirement Plan은 필요합니다. 은퇴한 후에 불편함 없이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고, 직장생활을 하면 그런 것들을 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해야 하는데,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 마음속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더 큰 액수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동차를 살 때나 전자제품을 살 때 세일즈맨이 워런티(warranty)를 사라고 권합니다. 그때 가장 강조하는 게 ‘마음의 평안’(peace of mind)입니다. ‘이걸 사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라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잘 알 듯, 워런티 기간이 지난 다음부터 고장이 납니다. 사려면 몇 십 년짜리를 사야지 2년, 3년짜리 워런티를 사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왜 삽니까? 혹시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혹시 모른다는 게 뭡니까? 두렵다는 겁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두려움을 부추깁니다. 광고도 잘 보십시오. 미국 광고이든 한국 광고이든 ‘이게 있어야 합니다. 이게 없으면 큰일 납니다.’ 하며 두려움을 부추깁니다. 그런 것이 광고의 기법입니다.
평안하게 잘 살고 있다가도, 정기 검진을 갔는데 ‘암 세포가 보입니다.’라고 한 의사의 말 한마디에 평안이 깨집니다. 또 직장을 잘 다니다가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라는 통보 하나에 당당했던 마음이 무너집니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갑자기 중병에 걸리면, 지금처럼 코로나에 걸리면 행복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뭔가 일이 하나만 벌어져도 금방 무너지고 깨어지는 행복인데도, 우리는 그냥 못 본 척하며 덮어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뭔가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꿈쩍도 하지 않고 괜찮은 것처럼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너무 많이 가져서 마음이 닫힌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을 찾아가지 않으시고, 낮고 천한 사람들, 마음이 열린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사랑의 섬김을 베푸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종들 역시 사랑의 섬김을 행하며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4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섬김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왕이시지만 세상의 왕처럼 떵떵 거리며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세도를 부리는 왕은 세상의 왕은 될 수 있지만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을 압제하는 게 어떻게 사랑이 되겠습니까? 남을 누르고 위에서 떵떵거리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왕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의 섬김! 왕이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왕이 오히려 밑으로 내려가서 백성을 섬겨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 폭력적인 사람, 남을 힘으로 누르는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와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내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라고 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자들이 ‘와!’ 하고 달려들어 서로 자기가 먼저 예수님의 발을 씻겠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너희들이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제자는 종이면서 동시에 주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남을 씻겨줄 때 종으로 섬기고, 다른 사람이 나를 섬겨줄 때는 주인의 위치가 됩니다.
서로 종이자 주인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이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겨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섬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섬김만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섬기고 섬김을 받고, 섬기고 섬김을 받고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이것을 이 땅에서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우리는 다 은사가 다릅니다. 우리가 겸손함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서로 보살펴주는 것이 교회 공동체,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의 넉넉함을 주셨다면 물질로 섬기고, 섬김의 은사를 주셨다면 섬김으로 섬기고, 가르침의 은사를 주셨다면 가르침으로 섬기는 겁니다. 또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한다면 뭐든지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해도 되고, 또 기도는 누구든지 할 수 있으니 기도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 주신 것으로 저 사람을 섬기고, 저 사람은 저 사람에게 주신 것으로 섬기고, 나는 이쪽을 섬기고 이쪽은 나를 섬기고,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이것이 세상에서 나타난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왜 형제자매들을 섬겨야 합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5절)
예수님이 세족식이라는 충격적인 행동을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제자들이 믿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무슨 감동을 받게 하려고, 또는 제자들이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행동하게 하시기 위해서 발을 씻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특히 이 요한복음도 믿음을 행함과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가장 그것이 두드러진 책은 예수님의 동생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 담임목사 격이었던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행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에게 믿음은 순종의 행동이고,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순종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사랑의 섬김이 없다면 그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전혀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로 주님을 안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잘못 믿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지식도 많고, 나는 매일 큐티도 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한다.’라는 것으로 믿음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큐티도 하고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그런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한 바탕 위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섬김을 행할 때 우리의 믿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계명’에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요한일서에도 계속 이야기하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정말 믿는 게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물론 주님을 믿지는 않는데 섬기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고 하는 것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형제자매들을 사랑으로 섬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섬김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훈련하는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한 경우인데, 온라인으로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녹화보다도 실시간 라이브로 하는 이유도 몸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하자는 겁니다.
교회의 핵심은 ‘함께 함’이고 ‘하나 됨’입니다. 교회는 하나 되어 같이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각자 집에서 예배를 다 따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우리가 주일에 날을 정하여 나와서 예배를 함께 드립니까? ‘함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바입니다.
왜 함께 모여야 합니까? 함께 예배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라는 겁니다. 전체가 다 같이 하기가 힘드니까 목장으로 나누어서 작은 공동체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훈련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나중에 34절에서 ‘새 계명’으로 주신 말씀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으로 다시 나옵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온통 그런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주신 사건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러한 점을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일 3:16-18, 새번역)
아무리 말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해도 사랑하는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정말 은혜가 되는데, 특히 14장 뒷부분과 15장 앞부분을 볼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 좋을 대로만 하지 맙시다. 형제자매의 유익을 위해서 합시다. 나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혹시 그것이 조금이라도 형제자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면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믿음이 강한 우리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돌봅시다.’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사랑의 섬김 아니겠습니까?
3)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고 우리는 제자이며, 자신이 주인이고 우리는 종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님은 자신은 주인이고 우리는 종이며, 자신은 ‘보낸 자’이고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6절)
큰 자가 행하는데 작은 자가 그것을 따라서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오해하면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고 그 다음에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것처럼 오해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행위 구원이니까 안 된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지신 십자가의 역사를 믿기만 하면 될 뿐,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많이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하고 자기 십자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고 하실 때 절대 안 된다고 막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4-35)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부인(self denial)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삶이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숨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즉 자기만 위해서 살면 오히려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생을 얻지 못하고, ‘누구든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면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마가복음 8장의 말씀을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7절)
예수님은 형제자매의 발을 씻어주는 사랑의 섬김을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해서 많은 사람들을 자기 밑에 거느리고 떵떵 거리며 군림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니라, 낮아져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제자들도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순종의 본을 자신들도 따라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이 절대 그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씻기심을 거부했던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기존에 자신들이 살던 삶보다 훨씬 더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서 다 버리고 이 순간까지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예수님처럼 저렇게 자격 없는 사람들의 발이나 씻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뭐하러 이때까지 예수님을 따라왔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핵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리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리더이고 진정한 왕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복 있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된 삶이 되게 하는 놀라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복이 있다’라는 말이 딱 2번 나옵니다. 바로 이곳(13:17)과 또 예수님이 20장에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에 나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0:29)
예수님을 보지 않고 말씀만으로 믿는 자가 진정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진짜 복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종의 자세를 가지고 형제자매의 발을 씻어주는 것과, 예수님을 보지 않고 말씀만 듣고서 믿는 것이 모두 복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복된 사람들입니다. 보지도 않고 믿었으니 얼마나 복됩니까?
그러니까 사랑의 섬김과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하셨는데(막 10:45)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3-44)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고 바로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닙니까? 세상은 섬겨야 누릴 수 있는 영생의 복을 거절하고 좁은 길을 걷지 않습니다. 누가 좁은 길을 가고 싶어 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까? 떵떵거리는 길, 높아지는 길,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길을 원하지, 누가 낮아지고 남을 섬기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높아지고 섬김을 받는 데서가 아니라, 섬기는 데서 진정으로 높아진다고, 거기서 진짜 복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이 진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서로 ‘당신이 먼저 섬겨주면 나도 섬기겠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당신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너 때문에 못 산다’라는 말들만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섬김이 있는 곳에는 ‘당신 덕분에 제가 잘 삽니다.’라는 감사만이 넘치게 됩니다. 또 내가 섬길 때 그런 말을 듣게 됩니다.
2. 주님이 택하신 자들 (18~20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중에 가서야 자신의 섬김의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끝내 자기를 배반할 자도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8절)
예수님은 앞서도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11)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유다는 선택되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하면 본문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가장 믿었던 측근이 배반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에게도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인용하시는 말씀은 시편 41:9입니다. 다윗을 대적하기 위해 원래 자신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자기 아들 압살롬과 손잡고 음모를 꾸미는 내용인데, 함께 떡을 먹던 자가 자기를 배반했다는 겁니다.
고대 근동에서 어떤 사람에게 발꿈치를 들어 발바닥을 보이면 그것은 모욕의 표시입니다. 다윗이 배반을 당했듯이, 그의 후손이신 예수님도 배반을 당하십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버림받음을 예고한 곳은 구약성경에서 이 시편 말고도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의 배반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께만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나가는 사도들에게도 앞으로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일임을 암시해줍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배반의 그림자를 미리 말씀해주십니까? 자신이 가룟 유다에게 배반당해 죽게 되더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19절)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자신들이 그 동안 쏟은 충성과 섬김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가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믿음다운 믿음이 요구될 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그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인정할 때 우리 믿음이 참 믿음이 된다는 겁니다. 지금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참혹한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예고되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여기면서 믿으라고 미리 말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 그인 줄’이라는 말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말입니다. 물 위를 걸으셨을 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을 때와도 똑같습니다. ‘에고 에이미’(I am that I am) 즉 ‘나는 나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배반당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있는 자’, 즉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것이니까 그 순간에도 믿음을 버리지 말고 지키라고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좋아하는 것만 순종한다면 그분은 나의 조언자(consultant)이실 뿐 나의 주인(Lord)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조언하시는 분이 아니라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주인은 명령하지, 조언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기 이익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0절)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제자들도 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이 이어서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의 섬김을 하시고 목숨까지 내어주신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서로에게 종이 되어 서로를 섬기며, 더 나아가 세상을 섬기고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주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셨고,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된 것을 봅니다.
[나가는 말]
결국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랑을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피차 복종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되는 일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일입니다. 형제자매를 대할 때 예수님을 대하듯 하라는 뜻입니다. 주인을 대하듯, 상전을 대하듯, 선생을 대하듯 서로에게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그냥 우리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무감에서 하고 생존을 위해서 한다면 수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섬김을 받았는지를 안다면, 내가 얼마나 큰 선물을 받고 누리는지를 안다면, 내가 그렇게 환영을 받고 영접을 받았듯이 나도 이웃과 형제자매를 그렇게 대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 때 오히려 나의 삶이 복되고 존귀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진정한 주님의 제자와 종으로 살아 참된 복을 받고 나누어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