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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0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18 ✦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요한복음 9장 35~41절)
[들어가는 말]
요즘 컴퓨터를 잘 모르고 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컴맹’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컴퓨터를 사용하시고 또 스마트폰도 많이 사용하실 겁니다. 그런 것들을 사용하니까 자신이 컴맹인 것을 모르실 텐데, 컴맹의 특징은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데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본인이 컴맹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용할 줄 아니까 자기가 컴맹이 아닌 줄 아는데 막상 컴퓨터가 안 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컴맹입니다. 그때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모른다고 해서 항상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로 드라마도 보고, 예능도 보고, 스포츠도 보고, 음악도 듣고, 이메일도 확인하고. 이렇게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잘합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온라인 예배를 드릴 때는 컴퓨터나 티브이를 켜놓고 보기 때문에 그런 건 잘합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원리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몇 개의 키를 누르며 조작하는 것인데, 제대로 작동이 될 때는 본인이 컴맹이 아닌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컴맹은 문맹이라는 말에서 나온 신조어입니다. 문맹이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글자를 모른다고 해서 생활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옛날 분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는 데 최소한의 필요가 글을 아는 것이어서, 문명화되어 가면서 사람들은 문맹 퇴치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지금도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글자를 읽지 못하면 참 불편합니다. 아주 연세가 많은 분들 중 글을 못 배우신 분들은, 교회를 다니시다가 성경을 읽느라고 한글을 배운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혹시 ‘영맹’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영적 맹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자신이 영맹인 것을 몰랐지만 실제로는 영맹이었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 맹인이었던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함께 찾아보기 원합니다.
1. 참으로 보는 사람 (35-38절)
1) 어려움에 처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먼저, 예수님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쫓겨났다는 딱한 사정을 들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5절)
먼저는 단순히 소식을 들으셨다는 뜻이지만, 여기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 ‘들었다’라는 단어가 벌써 다섯 번째 나옵니다. 9장에서 계속 ‘들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2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통해 대신 전해진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그 대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31절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이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신다’고 말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그는 역사상 맹인이 눈을 떴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말을 바리새인들이 마땅히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맹인이었던 자가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는 것은 단지 그에 대한 뉴스만 들으신 것이 아니라,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것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가 한 고백을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으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의 고백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 고백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쫓겨났다는 말은 유대교에서 출교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유대교로부터의 출교를 이 사람이 당했습니다. 부모가 두려워한 일을 아들이 당했습니다. 그러한 그를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만남인데, 처음에도 그러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이 사람이 있는 곳을 지나가셔서 제자들이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의도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실제로는 뭔가 의도가 있어서 그곳에 간 겁니다. 그런데 우연인 척하는 때가 꽤 있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의도적으로 이 사람을 만나주셨고, 이때도 유대교에서 축출된 그를 의도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에게는 시편 여러 군데서 고백하는 것처럼 의를 위해 고난을 택한 당신의 백성을 보시고 아시고 찾아와주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여 괴로움 상황에 있는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와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 우리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것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나서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찾아오시는 든든한 목자가 우리에게는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렇듯 쫓겨난 맹인이었던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또 부활하신 후에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채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사건을 암시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믿는 자들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 소식을 직접 듣고 맹인이었던 사람을 찾아가셨지만, 오늘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특히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2)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복은 어떤 것인가
맹인이었던 자를 찾으신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이 순간 그에게 가장 큰 위로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유대교에서 출교 당했다는 것은 공동체에서 쫓겨났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디서도 몸 붙여 살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게 큰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시는 것이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너는 걱정하지 말라. 네 인생을 내가 책임져주겠다.’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를 만나서 하신 말씀이 ‘걱정하지 말라.’ 하는 위로의 말이 아니라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약간은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괴로움에 빠진 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의 대답도 놀랍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6절)
지금 인자를 믿느냐고 했을 때 그 ‘인자’가 누구인지 자기는 모르겠는데,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 자기가 선지자라고 고백한 예수께서 소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제가 믿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믿음의 고백을 보신 예수님은 곧바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7절)
예수님은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과 아주 비슷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예수님이 예배에 대해 말씀하신 후 사마리아 여자가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입니다.”(4:25) 하고 말하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4:26). 즉, ‘내가 바로 네가 기다리는 메시야(구원자)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 주고자 하시는 가장 큰 위로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따뜻한 말 한마디, 앞으로 잘 살게 해주는 것, 또는 이제 떵떵거리며 살고 불편하지 않게 살고 편안하게 살고 무시당하지 않으며 살고 새로운 공동체에서 사는 이런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것,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 가장 큰 위로였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출교 당한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어느 정도 아는 순간 그분을 옹호하다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결코 헛된 게 아니라는 것, 그것은 굉장한 값어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가 깨닫도록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요한복음 전체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저 사람은 참 복을 받았다. 이게 축복이다.’라고 할 때 보통 어떤 걸 생각합니까?
이제 한 주 남았습니다. 오하이오에서 Vax-a-Million 추첨으로 어디 사는 누가 백만 달러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무엇을 느끼십니까? 부럽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겁니다. 너무 현실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백만 불 당첨된 사람을 보고 보통 복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풍성한 물질을 갖고 사는 것도 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진짜 복의 결과로 나오는 것뿐이지, 그런 게 진짜 복이 아닙니다.
몸이 건강하고,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고, 공부 잘하고, 좋은 직장 잡고, 연봉을 엄청 받고, 권력을 잡고,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것 등은 귀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나쁜 게 아니지만, 그런 게 복의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핵심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니까 신앙과 세상의 일이 괴리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며 ‘이게 아닌데?’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 전체도 그렇지만 특히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최고의 복, 진짜 복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모시고 영생을 얻는 게 진짜라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라고 쓰는 것입니다. 단순히 miracle이 아니라 sign이라고 합니다. 무슨 sign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영생을 주는 분이시다. 구원을 주시는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가리키는 sign으로서의 기적이라서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캐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평생 못 보다가 눈을 떴는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눈을 떴고 보이니까 가서 열심히 일하여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높이 올라가고, 여기서는 안 되니까 다른 동네 가서 살면서 엄청나게 성공했다면 그것이 이 사람에게 진짜 복이겠습니까? 그러다 그냥 죽었다고 하면 그게 무슨 진짜 복이겠습니까? 그런데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만난 것이 가장 큰 복이고 진짜 인생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네가 그리스도를 믿느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구약이 쓰인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인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가 점점 ‘구원자’라는 뜻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렇게 구원자/메시아라고 안 하시고 왜 인자라고 하셨을까요?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실 때 ‘인자’(The Son of man)는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명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라고 하니까 이전에는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대속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메시아를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에도 계속 ‘인자’라는 표현을 쓰시고(3:15, 6:27, 53, 62; 12:23, 34; 13:31), 이사야 53장 같은 데에도 ‘인자’로 나오며,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그들이 더 풍성하게 생명을 누리게 하는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이야기하십니다.
둘째는, 다니엘 7장에 ‘인자’가 나오는데,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역할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통치자와 심판자라는 역할과 뜻이 인자라는 말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왜 예수님이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 그가 당한 고난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길을 따르는 고난의 길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길이 되겠지만, 참 귀한 길이 될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심판하시는 인자, 즉 심판주로서 누가 진짜 죄인이며 누가 진짜 경건한 사람인지, 누가 진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누가 진짜 의인인지를 판단하실 것임을 여기서 또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곧 이어서 누가 진짜 보는 사람이고 못 보는 사람인지를 판단해주십니다.
3) 믿음의 발전 과정
예수님이 “내가 그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자마자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고백합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8절)
절했다는 말은 경배했다는 말인데, 그대로 꿇어 엎드려서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예수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이 한마디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보십시오. 왜 우리가 9장 전체를 다 살펴보는가 하면, 이 사람의 믿음의 과정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처음에 그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나를 고쳐주었습니다.’ 하며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1). 조금 후 바리새인들이 ‘너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했을 때 ‘선지자’라고 했습니다(17). 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다.’(31)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실 때 “주여, 내가 믿나이다.”(38)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진짜로 메시아, 구원자, 세상을 통치하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제가 믿습니다.’라고 진짜 고백을 했습니다. 그에게서 점점 믿음이 발전된 과정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어, 바울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서 꼬꾸라지고 변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도 그 후 변화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날 때부터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교회를 죽 다니다가 언제 믿었는지도 모르게 믿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른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점점 더 구체적이 되고 더 실제적이 되고 더 높아집니다. 고백이 진짜 믿음의 고백으로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경우이든 저런 경우이든 상관없이 확실한 것은, 예수님을 정말 구원자이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통치자요 심판자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일합니다.
2. 참으로 못 보는 사람 (39-41절)
1) 누가 보는 사람이고 누가 못 보는 사람인가
사마리아 여자처럼 맹인이었던 이 사람도 시련을 거치고 빛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서 점점 영적인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하셨기 때문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치유하신 이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39절에서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39절)
이것을 그냥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굉장히 아이러니이고 역설입니다. 심판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어떤 사람은 뜨끔하면서 두려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심판이라고 할 때 기대가 될 수 있습니다. 경찰이 탁 나타날 때 뜨끔한 사람은 뭔가 켕기는 사람이고, 경찰이 나타나서 반가운 사람은 뭔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심판도 그렇습니다. 심판이라고 할 때 뜨끔하면 뭔가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것이고, 심판이라고 할 때 오히려 반갑고 기대가 되고 기쁘면 정확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받지 못해서 그것을 주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이라고 할 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이고, 또 하나는 처벌입니다. 구원은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영적으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에 못 보았는데 이제는 보게 해주시는 것이 그를 향한 예수님의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처벌은 이제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 보고 안다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그들을 향한 처벌이고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해결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성경과 역사와 사람들 속에 나타난 수많은 증거를 보면서도 눈을 가리고 들으면서도 귀를 막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고 작정한 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부러 못 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에 그런 말씀이 있고 예수님도 종종 그 말씀을 인용하셨지만, ‘보지만 못 보게, 듣지만 못 듣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집트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도록 하나님은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라고 하시는데, 하나님이 멀쩡한 바로 왕의 마음을 일부러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완악하게 나오는 것도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일부러 못 보고 못 듣게 막으시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진리를 보면서도 안 보겠다고 눈을 가리고 진리를 들으면서도 안 듣겠다고 귀를 막으니까 그냥 내버려두셨다는 겁니다. 로마서에도 그런 ‘내버려두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자기에게 오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분을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놀라운 영적 통찰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믿고 따르는 사람은 점점 더 눈이 밝아지고,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듣지 않으며 보지 않으려는 사람은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판하러 오셨다는 말씀과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3장에 나오는 말씀과 반대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3:17-18, 새)
그러나 이 3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심판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못 보는 사람은 보게,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3장에서 하신 말씀은 심판을 아예 안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심판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빛을 거부하고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우리가 죽은 후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누리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초기에는 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게 굉장히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라고 자꾸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천국, 영생,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장소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면 그곳이 어디나 천국입니다. 바로 그런 삶이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곧 지옥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은 순간부터 생명을 누리고 천국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통치를 안 받고 거부하며 주님 없이 자기가 알아서 살겠다고 하면 그게 바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복잡하고 꼬입니다.
이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이미 죽은 영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심판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말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3장이나 9장이나 같은 내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보는 자와 못 보는 자를 구분하는 기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실 때 거기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고, 율법 전문가로 소문난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메시아에 대한 것임을 깨달아야 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신 말씀이 진짜로 앞을 못 보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로 왔으니 그를 믿는 자들은 보는 것이고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못 보는 것이라는 영적 의미로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고,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야 하고, 사실은 머리로 알았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 율법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특히 이사야에 나오는 말씀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에서 메시아가 하는 일들 가운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백한 것처럼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실제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그들이 모를 수가 없는 겁니다. 율법을 정말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0절)
맹인이었던 사람의 말을 듣지 않던 바리새인들 중 몇 사람이 예수님을 감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늘 따라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기들 안에서 돌아가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무슨 일을 하고 말을 하는지 감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묻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뭐라고? 우리도 맹인이라고? 아니지, 우리는 맹인 아니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뭘 기대합니까? ‘너희는 맹인이 아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39절에서 하신 말씀을 반복하며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41절)
보는 사람에게 죄가 그대로 있다는 말 역시 아이러니이고 역설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말은 정말로 눈으로 보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다 안다고 여겨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눈으로만 본다는 게 아니라, 자기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말합니다. 반대로 ‘맹인이 되었더라면’이란 이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스스로 영적으로 무지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맹인이었던 사람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반응입니까? ‘예, 믿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었으면 그랬을 겁니다. ‘예, 믿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였을 겁니다. ‘안 믿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분이 누구입니까? 제가 믿고 싶습니다.” 얼마나 솔직합니까?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다.”라고 하시니까 “제가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굉장히 솔직하고 진솔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맹인이 되었더라면”의 뜻입니다. 그런 아름답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이 사람처럼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모르면 모른다고, 알고 싶다고 갈급해하는 태도입니다.
요즘도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중에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기독교는 합리적이지 않고 성경에 엉터리 같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어떻게 믿느냐고 하는 사람과, 지금 믿지는 않지만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굉장히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VIP 분들을 대하다 보면 크게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정말 마음이 꽉 닫혀서 ‘나는 필요 없다. 나는 다 안다. 내가 결론을 내렸는데 나는 그게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직 믿지는 않지만 굉장히 마음이 열려 있고 겸손합니다.
비신자 중에도 지금 당장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따져 보고 의심해보고 질문도 해보고 또 더 알아보고자 하는 용기와 의지를 가진 사람은 결국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신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생명의 삶> 공부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거기서 진지하게 공부해보고 결론을 내리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마 11:25, 새번역)
제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주셨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말씀에서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라고 하시고, 요한복음 본문에서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들은 문맥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나아와 배우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마 11:29).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고전 1:26-27, 새번역)
스스로 약한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몰아세웠던 바리새인들, 맹인이었던 사람이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같으니까 말을 막고 쫓아냈던 바리새인들, 속으로 자기는 다 안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했던 바리새인들이야말로 바로 영적 맹인들이고 죄인들입니다. 10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고도 따라오지 않는 양은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 속한 양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하신 이 말씀이 참 두렵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성경을 공부할수록 지식이 쌓여 가지만, 혹시 그만큼 무지도 쌓여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은 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분도 계시지만, 여기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믿어오셨을 겁니다. 저도 평생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 믿고 있는 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주님 앞에서 맹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또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하면 할수록 더 모르는 게 많네’ 하고 겸손해지면서 더욱 배우고자 힘쓰게 살게 됩니다.
가끔 보면 삶 공부를 같이 하자고 할 때 ‘저는 너무 많이 배워서 이번에는 쉬어야겠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농담이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입니다. ‘나는 다 아니까 배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모르는 게 훨씬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예배에도 소홀하다면, 어느 순간인가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처럼 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하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빨리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며 더욱 주님을 찾는가, 아니면 이 정도 했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느슨하게 살고 있는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결국 앞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가에 따라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영적으로 분별하며 살든지, 가진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든지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사느냐에 따라 앞으로 삶의 결과가 달라지게 됩니다.
[나가는 말]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았던 사람이 고침을 받자마자 즉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나서 제자로 인정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가지 아는 것’(25)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서 변했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권력을 가진 종교지도자들과 맞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아니라 경건한 사람의 편에 서신다는 성경의 교훈만으로도 그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위협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지식과 지위가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막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누군가가 바로잡아 줄 필요가 없을 만큼 자기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참 진리 앞에서 마음도 닫고 눈도 닫게 되는 영적 맹인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평상시 자신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자신들이 믿고 있던 진리가 삶에 나타나도록 허락하지 않는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들은 그저 평소에 하던 대로 예수님께 반응했던 것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왕이십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분의 제자로 살 이유가 충분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깨달으며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갈수록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놀라운 지식과 지혜를 더 풍성히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하늘나라의 풍성한 기쁨과 생명을 이 땅에서 누리며 또 그것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