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HOME > 설교와칼럼 > 주일설교방송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pGMkwgtnU-A?t=1955
2021년 8월 29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27 ✦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1~35절)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상식들이 많은데, 특히 연예계에 많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상식은 아마도 ‘아카데미 시상식’일 것입니다. 작년에는 한국 영화 <기생충>이 주요 부분에서 상을 받았고, 이번에는 <미나리>가 여우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여러 영화 부분에 걸쳐 최고의 작품들과 배우들과 제작자들에게 상을 줍니다. 그 바로 직전에 열리는 ‘골든 글로브 시상식’도 유명합니다. 또 티브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에미상’도 있습니다. 유럽에도 ‘칸 영화제’를 비롯해서 여러 시상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시상식들이 굉장히 많은 것을 봅니다. 방송국마다 연말이 되면 경쟁을 하듯 시상식을 하는데 ‘연기대상’, ‘연예대상’, ‘가요대상’ 등 많습니다. 그렇게 시상식이 열리면 거기서 상을 받는 배우들이나 가수들이 나올 때 기자들의 플래시가 요란하게 쉴 새 없이 터집니다.
얼마 전에는 작년에 하려다 못하고 올해로 연기되었던 도쿄 올림픽이 열렸고, 지금은 장애인 올림픽인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경기에 나가서 뛰어난 기량으로 메달을 딴 선수들에게도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지고, 특히 시상식 때 금메달을 딴 선수는 자기 나라의 국가가 연주되니까 그것은 그 선수와 나라에게 아주 큰 영광이 됩니다.
배우든 가수든 운동선수든, 그들이 상을 받는 것은 성실하게 노력하고 훈련한 뒤에 얻는 영광입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좋은 결과를 얻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환호를 보내며 그들을 인정해줍니다. 또 그것은 그들에게 큰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상패나 트로피나 메달은 평생 집안의 가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소위 ‘발 연기’를 한 배우가 아주 혹평을 받는 것을 가리켜 ‘저 사람은 영광을 받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노래를 너무 못하고 방송 중에 자꾸 틀린 가수가 ‘영광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달리기를 하다 넘어져서 입상하지 못한 선수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그와 아주 비슷한 경우를 영광이라고 한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못한 상황입니다. 아주 최악의 일을 겪는 것을 놀랍게도 예수님은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1. 참된 영광인 십자가 죽음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는 주님의 그 사랑을 끝까지 거절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맙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이미 해 오고 있는 일, 즉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결탁하여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가니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1절)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은 30이라는 돈을 손에 쥔 가룟 유다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돈을 벌고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입장에서 그것을 보면서 ‘가룟 유다가 영광을 받았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이 성공하여 돈을 벌었다고 어떻게 그것이 영광이 되겠습니까?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만 사랑하는 삶, 자기 이익만 챙기며 사는 삶이 당장은 좋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삶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그렇게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 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 밖에 모르고, 그래서 사기를 치고 어떻게든 자기 이익만 보려고 하는 것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이기적인 삶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삶에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실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공의, 능력, 지혜 등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났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사랑을 드러낸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가 혹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영광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인자인 자신이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인류 구원이라는 참된 영광을 위한 통로가 되기 때문에 ‘영광을 받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죽음이 얼마나 참혹합니까? 로마 역사를 보면 십자가에 달렸다 살아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살아날 수가 없는 게 십자가입니다. 어쩌다 사형을 잘못 집행해서 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십자가는 그럴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것은 한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그것도 가장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다 죽게 만드는 사형 방법입니다. 가장 끔찍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은 절대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잔인하다고 해서 그랬고, 차라리 단칼에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십자가는 끔찍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죽음으로 가시는 길을 놓고 ‘영광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영광을 받았다’고 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인자가 뭡니까?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인성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그건 뭘 잘 모르는 이야기이고,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단어는 오히려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구약의 다니엘 7장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 7:13-14)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까? 예수님 오시기 500년 이상 전에 예언된 말씀이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인자라는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는 분입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는 분이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그 인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영광스러운 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놀랍게도 가룟 유다의 배반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오히려 영광을 받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끔찍한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믿음이 있나 없나를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가 정말 영광의 길임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여부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가 영광을 받는 길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정말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아니, 당연히 십자가가 영광의 길이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길은 손해 보는 길입니다. 심지어 죽는 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 생명까지 내어주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게 진짜 영광의 길이라고 믿는가?
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조금만 손해를 봐도 얼마나 못 견딥니까? 조금만 내 인격에 모독을 당했다는 느낌만 들어도 얼마나 못 견디는 세상입니까? 그래서 요즘 자기 SNS에 뭔가를 올리면 저쪽에서 반박하고, 그러면 이쪽에도 또 반박합니다.
그렇게 조금만 뭘 당하면 못 참는 세상에서, 오히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그렇게 살다가 모독을 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괜찮고 그것이 영광의 길이라고 진짜 믿을 때 믿는 사람이고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내 것을 나누고,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가며 섬기고, 조금 기분이 나빠도 용서하고, 제대로 못해도 기다려주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그게 진짜 믿음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은 바보 같은 겁니다. 그냥 이용만 당하는 삶이 아닙니까? 정말 바보 같은 삶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바보가 되라는 말이나 멍청하게 당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도 알지만 그것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특별히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면,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바보 같이 이용을 당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하겠다.’라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믿음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믿는 겁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내가 초라해지고 밑으로 내려가고 망가지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받지만 혹시 그렇지 못할 수 있더라도 주님은 인정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지 않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언젠가 다 하나님 앞에 서는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이 되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칭찬받는 삶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십자가 신앙이고 그런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2절)
주님은 영광을 먼 미래에만 받는 것이 아니라 ‘곧’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지금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만 하나님이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는 게 아니라, 그때도 받지만 지금 이 땅에서 그렇게 살면 이 땅에서도 지금 인정을 받는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혹시 인정을 안 해줄 수도 있습니다. ‘바보 같이 저렇게 사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귀하다.’라고 인정해주시는 영광스러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옛날에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고 했는데, 맞습니다.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슨 복이냐가 문제입니다. 예수 믿고 돈을 잘 벌고, 나도 좋은 학교 가고 내 자녀도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이나 사업체 하고, 높이 올라가고, 오래 살고, 건강하고 하는 그런 데에 머문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습니다. 만약 교회가 그런 복만 추구한다면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교회로부터 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되어 성공하고 높이 올라간 것으로 진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올라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올라가서 뭘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맞을 수 있습니다. 고난과 상실과 어려움과 죽음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오히려 감사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볼 때, 세상은 교회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실 교회가 세상의 기준으로 높아져 보아야 얼마나 높아질 수 있겠습니까? 유럽에 가보면 교회가 정말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데가 많습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성당은 지금도 짓고 있습니다. 사진만 보아도 그 위용이 엄청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 건물이 엄청나도 Empire State Building이나 새로 지은 World Trade Center보다 더 높고 더 대단하겠습니까?
뉴욕에 가서 보면 건물들을 볼 때 ‘와!’ 하고 자연스럽게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대단합니다. 그 사이에 교회 건물들도 있지만 교회를 보고 ‘와!’ 하지 않습니다. 한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교회 건물을 웅장하고 엄청나고 화려하게 짓는다고 해도, 새로 생긴 롯데타워보다 더 대단하겠습니까?
겉모습이 화려하고 웅장한 것으로 세상이 교회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낮아져서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볼 때 세상은 교회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정말로 있구나 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3절)
이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시간은 잠시뿐입니다. 이날이 목요일 밤인데, 이날 밤을 넘어 새벽에 잡히실 것이고, 아침에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낮 12시쯤입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그날을 우리가 ‘성금요일’(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지라도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과 3년이나 함께 지낸 제자들이 자신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왜냐하면 제자들인 이때까지 유대인들과 별로 다를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추구하며 걸어가시는 생명의 길,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진짜 생명의 길을 가기를 두려워하고 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뭘 하고 있었습니까? ‘누가 크냐?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2인자가 될 것이냐?’ 이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서로 발을 씻어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발을 씻어주면 자기가 그의 밑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아무도 발을 씻겨주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주와 선생으로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진짜 영광의 길은 낮아져서 섬기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도 이렇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몸으로는 지금까지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것은 시기심, 다툼, 분열 같은 것들뿐이었습니다. 서로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 다음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가룟 유다가 나갔습니다. 유다가 재정담당자였으니까 명절이 쓸 물건을 가서 사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했든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전통대로 행하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말로 잘 생각해보고 그렇게 이해한 게 아니고, 그냥 그런 줄로 무심코 넘겼다는 말입니다. ‘그러겠지.’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속으로는 ‘아이고, 잘됐다. 유다가 나가네.’ 유다가 나가니까 12:1의 경쟁률이 11:1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좋아하면서 ‘누구 또 나갈 사람 없나?’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여기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말 속에도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작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의 자녀들아’(my children)이라고 하시는 뜻입니다. 요한의 다른 편지인 요한일서에는 이 단어가 7번 나오는데, “자녀들아”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사실은 여기서도 “얘들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어린 자녀들을 부르듯이 부르십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부르십니까? 사실 나이로 보면 예수님과 비슷하거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더 나이가 많았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20대나 30대였고 성인입니다. 그런데 ‘내 자녀들아’ 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이루시는 일이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고 또 새 언약을 맺으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곧 이루실 일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얘들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게다가 이것은 유월절 만찬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을 가족들이 같이 모여서 먹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유월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옛날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올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이 살려주셨고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는 다 죽었다.’라는 유월절 사건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가족처럼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유월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제 이 유월절에 잡아서 피를 바른 그 어린양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이 가져오는 새 시대를 앞으로 14장 이후에서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내 자녀들아’라고 부르십니다.
2. 계명의 최고봉인 새 계명
이제 제자들이 가룟 유다처럼 세상과 자기 자신을 사랑해 떠나는 것과 달리, 진짜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려면 ‘누가 크냐? 누가 2인자가 될 것이냐?’ 하고 다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이신 것처럼 그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4-35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님 사랑합니다’ 하고 입술로 고백하고 아무리 노래를 지어 부르고 아무리 그렇게 기도해도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사랑은 사실 세상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사랑을 할 때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정말 놀랍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저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다.’라고 인정해주는 것은, 무슨 엄청난 예배나 기도나 성경지식 같은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능력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즉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저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위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인정해주는 것은 우리가 엄청난 종교적 활동을 잘할 때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할 때입니다. 너무 단순합니다. 서로 사랑할 때!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 주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새 계명입니까? 새 계명을 준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새 계명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할 줄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데 그냥 단순히 자기 기준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자기 기준에서 편하면 사랑하고 불편하면 안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기준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이 부분이 옛 계명과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이전과 달라진 새 계명입니다. 구약의 계명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주에 서기관이 와서 물어봤습니다.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그때 예수님은 레위기 19:18 말씀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9:18)
이것을 ‘가장 큰 계명’(마 22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것에 비해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냥 자신의 몸과 같은 정도로 사랑하셨습니까?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 ‘이웃 사랑’은 어떻게 보면 최소한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자매 사랑’의 단계에 오게 되면, 최소한의 사랑인 ‘이웃 사랑’과는 달리 한 가지가 사라집니다. 뭐가 사라집니까? ‘자기’가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는 것인데, 얼마나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배고파서 빵을 먹을 때 옆에 배고픈 사람이 있어서 그 이웃에게 반을 잘라 나누어주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아예 내가 안 먹고 빵을 다 줄 뿐 아니라, 아예 나 자신까지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수준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 공동체를 나타내는 표지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가족을 포함하지만, 넓은 의미로 아무나 다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믿는 사람끼리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너희’는 제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분명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인데,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는 단순히 이웃 정도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 자신 정도로 사랑할 수 없고 그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 자신을 버리고 목숨까지 주신 사랑을 하셨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라’ 하십니다. 나는 없고 형제자매만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떻게 나는 없고 형제자매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남에게 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왜 그것이 잘 안 됩니까?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이기심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 담을 칩니다. 아주 단단한 담을 서로의 사이에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기심이라는 두꺼운 담을 세워놓고 살기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잘 안 됩니다. 아니, 나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것은 그 담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뭡니까? 바로 이러한 담을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 담을 허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허무시도록 내어드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와서 허물려고 하시니까 ‘어이, 어이, 그건 그냥 두셔야지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거기 계시고 나는 여기서만 믿겠습니다.’라며 담을 치고 삽니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인은 그런 담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과 가장 반대되는 모습이 바로 담을 치고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자기 사이에 담을 쳐 놓고 못 들어오게 합니다. 자기 혼자만의 삶을 삽니다. 그것이 가장 크리스천답지 못한 삶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담을 쌓아놓고 ‘나는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 나 혼자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라고 산다면,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교제를 안 하면서 산다면, 그런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크리스천이 아니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의 삶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먼저는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에 쌓아놓은 담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이미 무너뜨리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다시 세우는 꼴이 됩니다.
우리는 보통 교제라고 하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같이 모여 대화하고 나누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마음이 안 맞거나 불편한 사람과 어떻게 교제를 마음껏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나와 편한 사람만 교제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건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6-48)
완벽하게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구분 없이 다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나와 편한 사람은 사랑하고 불편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누구나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나 내가 편한 사람만 사랑하는 일은 세리도 하는 일, 즉 아무나 하는 일입니다. 자기 형제자매, 즉 친한 사람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줄 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자매 된 지체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너무 거창하고 힘들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제를 하자고, 서로 섬기자고 하면 대부분 핑계를 댑니다. ‘아유,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직장(사업) 일을 하는 데에도 너무 바쁩니다. 가정도 돌봐야 하고 아이들도 돌봐야 해서 시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잘 따지고 보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시간은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우리 각자에게는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없다고 핑계를 대지 말고, 차라리 ‘시간은 있는데 제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쁘고 피곤해서 못하겠습니다. 하기가 싫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위선이라는 죄는 짓지 않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명령하신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목숨을 내어주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의 ‘새 계명’, 즉 새롭기도 하지만 ‘계명’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 지키면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나쁜 일을 해서 죄 짓는 것만 생각하지, 하라고 하신 일을 안 함으로 짓는 죄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데, 안 지키면 죄가 되는 것이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게 생각되십니까? 지킬 수 없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못 지킬 계명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명령을 우리에게 하시고는,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해 죄를 지음으로 우리에게 벌을 내릴 순간만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가 이 새 계명을 지키기를 원하셔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시간을 내는 겁니다.
이전에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 굉장히 바쁘게 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형제에게 사역을 부탁할 때마다 그는 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말 시간이 없네요. 공부도 해야 하고, 하루 8시간씩 일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도와드려야 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예배에 오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해해주세요.”
그런데 하루는 그 청년이 어느 자매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공부와 일과 집안일 외에는 전혀 시간이 없다고 하며 일주일에 교회에 딱 한 번 나오던 형제였는데, 놀랍게도 자기 여자친구를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이나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여자친구와 한 번 만나면 서너 시간 이상 보낼 수 있는 시간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만들어 내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사역을 못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교제를 못하겠습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과 똑같습니다.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시간이 없으셔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지 못하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예수님보다 바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보다 더 바쁘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매일 24시간을 쓰셨습니다. 그분께는 개인적인 오락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항상 십자가를 지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너희도 이렇게 살아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광의 길이라는 겁니다. 그게 절대 손해 보는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그렇게 살면 손해를 보니 안 되지.’라고 하면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시는 겁니다. 손해 보는 길이 아닙니다. 영광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라고 하십니다.
3.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우리를 통해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구원을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만나면 “안녕하세요?” 하는데 요즘은 코로나로 친교점심도 없으니까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습니다. 로비에서 “잘 지내시죠? 가족들도 다 잘 지내죠?”라는 정도입니다. 문자나 전화로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목장도 가끔 야외에서 대면으로도 모이지만 주로 온라인에서 모입니다.
평소에 주일예배 후 교회에서 잠깐 대화를 나눌 때 20년, 30년 동안 같은 교회를 다녀도 깊은 대화를 한 번도 나누어본 적이 없는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서 그런 것도 있는데,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친교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거기서 무슨 깊은 대화를 나누고 인생의 고민을 나누겠습니까?
사랑하는 또 다른 커플이 있는데, 서로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형제들도 다 잘 있지? 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 굿바이!” 이런 연인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없으실 겁니다. 결혼할 때까지 그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더 가까워지고 서로를 아는 일에 힘쓰며 나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모든 성도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한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살전 5:23, 새)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렇게 반박하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죠.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의 마음을 주시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순종하면서 그냥 아뢸 뿐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주여, 사랑의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만 하고 끝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과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는 그냥 하면 됩니다. 그냥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셨고,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 또한 그 사랑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표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표지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무슨 엄청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그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에 대해 복잡하게 연구하고 따지고 질문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려움도 있고 여러 가지 곤란한 일도 있겠지만 그냥 계속 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에 드러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