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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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1) https://youtu.be/hbv3_he-kH8?t=1893

2) https://youtu.be/EyyKCxiGBWg
 

(오늘도 방송 중 컴퓨터 상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다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많이 끊어지고 내용마저 사라진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2021912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29

믿음, 기도, 사랑, 성령

(요한복음 1412~21)

 

[들어가는 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난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라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년간 고생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고, 자기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을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분석하여 책으로 냈습니다.

 

그가 수용소에 갇혀 있던 어느 날, 함께 수감된 사람 중에서 세계적으로 꽤 알려진 어느 작곡가 한 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작곡가가 프랭클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의사 양반, 내가 꼭 할 말이 있어요. 얼마 전 아주 희한한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누군가가 내게 오더니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 봐라. 그러면 내가 대답해주겠다.’라고 하기에 나는 이 전쟁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1945330일에 끝날 것이다.’라고 대답했어요.”

 

이 말을 들은 프랭클은 그 꿈을 언제 꾸었느냐고 물었고 그는 한 달 전쯤에 꾸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때가 3월 초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20여 일만 있으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의 문이 열리면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던 그 작곡가의 얼굴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3월 말이 거의 되어 오는데도 수용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1945년에 전쟁이 끝난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수용소 안에서는 도무지 그런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그 작곡가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330일을 하루 앞둔 329일에 갑자기 고열이 나더니 쓰러져 버렸습니다. 다음날 그는 의식을 잃고 횡설수설하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발진티푸스(typhus fever)가 원인이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나중에 이 사건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는 몸의 면역 기능이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발진티푸스 균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곡가의 경우에는 330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자기가 꿈에서 들은 예언이 성취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니까 아직 시간이 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절망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믿고 기대하며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직 날짜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몸속에 있는 면역체의 기능이 힘을 잃어버리면서 발진티푸스 균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발진티푸스 균 같은 것은 아주 많았습니다. 희망이 있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희망이 없어지고 절망에 빠지니까 그 균에 의해 죽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희망이 있으면 몸의 면역 체계가 활발하게 움직여서 웬만한 병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평소에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어떻게 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새해가 될 때마다 많이 쓰는 말이 희망찬 새해입니다. 그런데 올해 2021년에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새해가 되었을 때도 희망찬 새해라고 하며 좋아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그래도 요즘 백신 접종 이후 상황이 나아지면서 코로나 사태가 끝나기를 희망한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습니다. 바로 소망입니다. 영어로는 똑같이 hope이고 둘 다 같은 의미이지만, 단순히 자신의 기대가 담긴 희망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내가 바랄 뿐 아니라 그 근원이 주님이십니다. 희망보다 더 높은 수준입니다. 그래서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인데 오늘 제목이 조금 이상합니다. ‘믿음, 기도, 사랑, 성령인데, 사실 오늘 본문에 이 내용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믿음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가 당신께서 주시는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소망을 잃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십자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습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에 들어가 로마의 그 참혹하고 끔찍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예수님의 분위기는 절망은 아니고 아주 엄숙했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과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했습니다. 다들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에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예수님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14장부터 16장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12절 말씀은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2)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낙심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고 병자들을 치료하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선포하셔서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떠나시게 되면 이 영광스러운 일을 제자들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셨던 구원을 제자들이 이루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나의 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같이 예수님만의 고유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말합니다.

 

실제로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것을 하리라는 주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떠나신 후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제자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능력을 받아 놀라운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수님이 하셨던 일보다 더 큰일을 감당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이스라엘 지역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지역은 한국으로 하면 경상도와 강원도를 합친 것보다 약간 작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그 좁은 땅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위기에 처하셨을 때에는 거의 다 떠나버리고 심지어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활동하신 땅의 크기나 함께 했던 사람들의 숫자만 따져보아도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리 크지 않고 작은 일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한 일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거기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유대 땅에만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사람이지만 우리도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셨던 것입니다. 소위 대 사명또는 지상대명령이라고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들어라.” (28:19)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1:8, )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 그대로,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만들었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16:15). 제자들인 행한 일들은 세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했다는 것이 정말 맞습니다.

 

숫자적으로도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또 성전에서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을 고치고 말씀을 전했더니 하루에 5천 명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정말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했습니다.

 

12절을 다시 보면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구주와 주인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나는 주님이 하신 일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게 될 것이다.’ 근심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결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라야 나의 일을 할 수 있다. 큰 집에 살아야 한다. 어느 정도 사회에서 높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으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과 비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하고 더 큰일을 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2.   기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놀라운 일을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하면서 사역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아야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3-14)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예수님의 고별 설교라고 14~16장에 6번 나옵니다(14:13; 14:14; 15:7; 15:16; 16:24; 16:26). 이 구절들을 보면 모든 기도의 구조는 조건(이렇게 하면)과 결과(이렇게 될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조건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결과는 그러한 조건 아래서 모든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은 단 하나입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마치지 않습니까? 나는 힘이 없지만, 예수님의 힘으로,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에 무슨 효력이 있어서 마치 주문처럼 중얼중얼 하기만 하면 무조건 기도가 다 응답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닙니다. 가끔 보면 미국 사람들 중에 ‘in Jesus’ name’을 지 않고 그냥 아멘으로 끝내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도 그냥 아멘하고 나서 아 참, 내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안 했네? 그럼 기도 응답을 못 받지. 다시 해야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면 된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은 자동으로 응답받는 비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18:20, 새번역)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6장의 고별 설교를 하신 상황을 보면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이때의 상황은 예수님이 떠나가신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는 때입니다. 14장 앞부분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로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내가 계속 내 이름으로 함께 해주겠다.” “나와 같이 너희를 돕는 보혜사를 보내주겠다.” “너희 기도에 응답해주겠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기도 가운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도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놀라운 말씀이 되며 그래서 큰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주님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혀 생각 없이 그냥 말로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그분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 응답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실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떠나시고 육신으로 사람들과 함께 하시지 않게 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기도할 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 특히 거기에 예수님은 함께 해주십니다. 혼자 기도할 때도 함께 해주시지만, 특히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당연히 함께 해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약속이며 축복입니까? 그런데 함께 기도할 때 더욱 기뻐하시며 역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의 보냄을 받았을 때 그 보낸 사람의 이름으로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보내시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호소할 권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할 때 보내신 분의 권세로 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법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법적 권위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보내신 아들 예수의 말을 듣고 그를 믿는 자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계속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관계를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떤 높은 사람이 나와 하나 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여기 콜럼버스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검색해서 찾아가보십시오. 그리고 저는 당신과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사람을 보내서 정신병원으로 보낼 겁니다. 유명한 사람이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누가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누가 나를 인정하겠습니까? 그런데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절대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나는 기도를 못합니다. 부담이 됩니다.’라고 하는데 그건 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불러서 나와 대화하자고 하는데 싫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내가 감히 어떻게 가겠나?’ 하고 그럴 수는 있지만, 당연히 그건 엄청난 특권입니다.

 

기도는 결코 일방적 간구가 아닙니다. 일방통행이 아니라 양방향 통행입니다. 무슨 기도를 하든지 그 초점은 주님과의 만남과 교제에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관계 속에서 우리 기도가 응답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제대로 일어나면 주님의 요구나 명령에 대해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순종의 과정에서 기도는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더 깊이 주님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의 기도에 대해서 내가 행하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런 기도를 15장에서는 열매를 맺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란,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여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 특히 이웃을 사랑으로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게 뭡니까? 머리로만, 말로만 믿슙니다!’라고 하는 게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정말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든지 다 받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믿음도, 기도도, 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기도하며 나아가면,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무엇을 구해도 다 응답이 됩니다.

 

남들을 도우려면 내가 어느 정도 잘 살아야 하는데 난 아직 그 정도가 되지 않으니까 못 돕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잘되고 난 다음에 돕겠다고 하면 평생 돕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필요는 어떤 형편이든지 항상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넉넉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지만 그래도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럴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3.   사랑과 성령

 

1)  사랑의 실천

 

이제 예수님이 떠나심으로써 진리의 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5)

 

예수님은 어떤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나의 계명’,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를 받으십니다. 그 계명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새 계명이 뭡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발을 씻겨주시는 것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드리는 기도를 너무나 잘 들어주십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그들의 필요에 민감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를 잘 들어주십니다. 욕심, 탐욕, 정욕, 불의, 방탕, 거짓, 위선으로 사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으로 기도할 때 들어주십니다.

 

하나님, 제가 이번에 이게 잘되어야 해서 저 사람을 살짝 속여야 하는데 저 사람의 눈을 가려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진짜로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눈이 가려졌는지 못 보고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아님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것은 큰 유혹입니다.

 

그러나 내 형편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웃을 위해, 형제자매를 위해 사랑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응답해주십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에 응답을 잘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 사역이 참 귀합니다. 다음 번에는 더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 헌신자로 사역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축복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기에 가능해진 겁니다. 그 사랑에 우리도 사랑으로 화답할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15절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 말을 듣고 지키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생긴 새로운 공동체는 진리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모여서 잠깐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종교 기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연결되어야 하고, 더 교제해야 하고, 더 서로 환영해야 하고, 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 혼자 하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귐이 없으면, 진짜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겁니다. 사랑할 때 기도가 응답됩니다. 또 기도할 때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2)  보혜사 성령님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 중 하나가 바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이 땅에 자신을 대신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더 이상 인간으로 안 계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그래서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들어와 영원히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응답받는 기도와 성령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6)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의 간구로,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심으로써 오신다는 것입니다(26). 우리의 구원은 삼위(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된 협력 사역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순종의 결과로, 그리고 성령님이 실행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둘째, 성령을 보혜사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우리말로는 위로자’, ‘상담자’, ‘대언자등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영어로는 Counselor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혜사를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뭡니까? 예수님 자신도 보혜사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신 말씀은 자신과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주로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을 대신해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하셨던 일을 제자들을 위해서 감당하실 것이고, 또 제자들을 통해서 그들이 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또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의 역할입니다.

 

셋째, 보혜사 성령은 영원토록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토록 머무르신다는 것, 그리고 특별한 일꾼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신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구약에서의 성령과 가장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구약 때는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 이후에 신자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28: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시지 않는 동안 성령이 그분의 임재를 대신하실 것입니다. 그 보혜사 성령님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진리를 나타내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역할과 같습니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따라서 성경을 예수님의 빛에 조명해 밝히 드러내시는 분은 성경의 저자이시며 예수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세상과 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더라도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이 잘못된 겁니다. 특히 어느 유명한 이단은 거짓말을 하고 속이면서 그것을 모략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어떻게 성령의 역사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잘못입니다.

 

가끔 보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거짓말을 하려고 하면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러지 말라고 찔러주십니다. 그래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나가면 잘못되는 겁니다.

 

아무리 뜨겁게 예배하거나 많은 활동을 해도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참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은사와 치유와 기적이 있지만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참 교회가 아닙니다.

 

 

3)  성령 안에서의 사랑의 순종

 

이제 예수님은 가시지만 제자들은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시지만, 동시에 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8)

 

예수님은 자신이 간다 해도 제자들은 고아가 되지 않으며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제 예수님이 가시면 보혜사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해 오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며, ‘주의 영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로 오리라라는 말씀을 다시 설명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19)

 

예수님은 자신이 오리라는 말씀을 여기서는 살아 있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의 왕으로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환경을 보면 주님이 안 도와주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0)

 

앞서 19절에서는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날이라고 하십니다. ‘그날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전형적으로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날이나 종말은 단 하루나 특정한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새로운 언약이 체결되는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새 시대를 완성하시는 그날까지 그날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제자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자신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비록 승천하셨지만, 성령을 통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고아처럼 버림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결코 예수님의 안 계신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제자이고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땅에 살다 가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

 

이것은 이미 15절에서 말씀하셨던 것이고, 나중에 23-24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임재 조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바로 진리의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에는 없었던 약속이 여기에 덧붙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첫째, 내 아버지, 즉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도 그를 사랑해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 사랑받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제자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1334-35절의 새 계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이 이상하지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설교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특히 예수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 순종이라고 하지만 제일 중요한 순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있으면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강도나 살인처럼 범하는 죄만 생각하는데,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사랑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랑하며 순종할 때, 바로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가장 잘 드러내고 바로 그런 교회가 이 세상에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고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냐는 주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나아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보시며 거기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래서 이웃과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여 주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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