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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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3fsV4PgSyA?t=2191

 

* computer의 오류로 인하여 설교가 1:09:45부터 소리와 화면이 끊어지고 나오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202166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16

진실을 회피하고 싶은 사람들

(요한복음 913~23)

 

[들어가는 말]

 

20년도 넘은 한 가지 사건이 아직도 저의 마음에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에서 부목사로 사역할 때였는데, 하루는 교회에서 모임을 마치고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저희 부부가 살던 곳은 큰 아파트 단지였는데, 건물마다 5층 정도 되어서 다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아파트 정문에는 게이트도 있고 경비인까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날 차를 파킹하고 나오는데 저쪽 어두운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당시 자동차 헙캡(hubcab)이 자주 도난을 당하던 때라 마음이 철렁했습니다. ‘혹시 도둑이 아닌가? 나를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그런데 그 그림자가 제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뛰면 오히려 더 위험할까 봐 빠른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그림자는 저보다 더 빨리 걷는 겁니다.

 

저에게 가까이 와서 언뜻 보니까 흑인이었습니다. 그곳에 히스패닉 사람들은 많았지만 흑인은 별로 없었고, 또 그 당시 범죄에 대한 뉴스도 많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강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너무 당황해서 빠르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더 빨리 걸어서 저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저는 무서워서 계속 빨리 걸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저에게 말을 하는 겁니다. “이봐, 나는 나쁜 놈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서 제가 약간 머쓱하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해서 그 사람을 뒤돌아보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며칠 전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이웃 아저씨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Hi!” 하면서 나는 도망간 게 아니고 그냥 바빠서 빨리 집에 가려고 그런 거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던 기억이 납니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도 범죄 뉴스가 많았던 때였기 때문에 역시 무서워서 최대한 빨리 집에 가려고 빠르게 걸었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을 보고 흑인이라고 두려워했던, 저 자신부터 인종차별적인 모습이 있었다는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때 그 일이 제 기억에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우리를 몰아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실체 없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그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실을 믿지 못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피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이웃 사람들의 반응 - 무관심 (13~14)

 

오늘 본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께 맨 처음 질문을 던진 제자들의 반응은 여기 나오지 않지만 이웃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나오고, 맹인이었던 사람의 반응이 나오고, 또 그의 부모의 반응이 나옵니다.

 

지난번에 보았듯, 예수님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만들어 그의 눈에 붙여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이 사람이 눈을 뜨게 된 다음에 그가 가졌을 만한 충격, 감동, 감사, 기쁨과 같은 묘사가 본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는 엄청난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경험했을 충격과 감동과 기쁨이 느껴지십니까?

 

만일 그가 정상인으로 살다가 어떤 사고 때문에 시력을 잃었거나 병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면,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시력을 되찾게 되었다면, 다시 본다는 기쁨이 굉장히 컸겠지만,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던 이 사람이 볼 수 있게 된 것은 기쁨뿐만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신비감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이 사람에게는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시력을 잃은 사람들은 그 기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물건들이, 자연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특히 그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 얼굴을 만지거나 자기 가족을 만지면서 어느 정도 상상은 했겠지만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 본 적이 없습니다.

 

또 사람들은 하늘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여름에 비도 안 오고 하늘이 정말 맑은데 , 하늘이 참 맑다.’라고 할 때 상상이 안 갔을 겁니다. ‘나도 보고 싶은데 못 보네.’ 하며 얼마나 좌절했겠습니까? 또 나무가 아름답다고 할 때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이 어떤 것에 대해 말을 들으면 혼자 머릿속으로 이럴 것이다.’ 하며 상상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눈을 뜨고 보니까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면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는 동시에 또 얼마나 감격했습니까? ‘, 이렇게 생겼구나! 내 가족이 이렇게 생겼구나!’ 또 거울을 보면서 ,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나서 자기가 있던 곳으로 예수님을 찾아 갔을 때 거기 예수님은 안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웃들 중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눈을 뜨고 난 다음에 느끼는 기쁨은 당사자가 가장 크게 느꼈을 것이지만 주변 사람들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날 때부터 못 보던 사람이 어떻게 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자기들이 지금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를 못합니다. “저 사람이 바로 그 거지 아니냐?” “아냐, 그 거지는 앞을 못 보는데 저 사람은 보잖아? 그 사람 아니야.” “아니야. 똑같이 생겼잖아. 그 사람 맞아.”라고 합니다. 그렇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못 믿겠다는 의심이라기보다는 충격의 표현입니다. 충격을 받아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그 앞을 못 보던 그 사람이 맞는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분이 자기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웃들은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3-14)

 

본문을 보면 요한복음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다는 뉘앙스를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종교적으로 옳은 일인가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것에 대한 판단을 바리새인들에게 받기 원했던 겁니다.

 

제자들이 이 사람이 장애인이 된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면, 이웃 사람들은 그가 안식일에 고침을 받은 것이 과연 율법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그가 바리새인들이 찾고 있는 예수와 교제했다는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서 데리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율법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뒤에 감추어진 잔인함과 무정함이 엿보이는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자들은 다 출교시킨다는 결의가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22).

 

이웃 사람들의 이런 애매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구걸하던 이웃의 맹인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고 신기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좋은 일이고, 특히 그 부모와 친했던 사람들은 그 부모의 근심이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같이 기뻐해주고 싶지만 그의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예수라고 했을 때 위험을 감수하고 그들과 사귀거나 그들을 옹호해줄 용기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적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기적이기 때문에 표적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이 기적, 정말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고 경험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엄청난 일을 일으키신 분인 예수에게 주목하고 이분이 정말 메시아인지를 당연히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분이 정말 그분인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그리스도)가 맞는가?’ 하며 그분에게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는 이걸 통해서 자기에게 혹시라도 불이익이 올까 봐 거기에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든지, 영생을 주는 분이시라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든지, 이러한 문제보다는 그저 자신의 안위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적극적인 반대는 아니지만 무관심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지 않는 큰 이유가 바로 무관심입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뭐가 좋은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이 바쁘고 또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올 것 같으면 오지 않습니다. 다른 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안정과 평안과 안위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교회에 가야 되고 그러면 시간도 뺐기고 돈도 뺏기고 여러 가지로 자기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놀 것 다 놀고 할 것 다 하고 나서 그 다음에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웃들도 혹시 예수가 그를 낫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와 교제하다가 뭔가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반응 - 불신과 불순종 (15~19)

 

그에 비하면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소신 있는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가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거기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것이 큰 관심사였습니다. 만약 예수가 정말 메시아라면 자기들에게도 큰 영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5-16)

 

지금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어떤 결정적인 일이나 사건이 있어도,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명백한 일들이 지금까지 많이 발생했는데, 그 사실을 굳이 회피하고 사람들의 입을 막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장애인으로 산 사람,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이 사람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도대체 예수가 이 사람을 어떻게 고칠 수 있었는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능력인지 등을 알아보는 데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예수가 이 일을 안식일에 행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니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자기들 중에 누가 이런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눈을 뜨게 하신 분이 누구인가, 이분이 정말 메시아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7)

 

너무나 명백한 일이 아닙니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고, 자기들도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물을 때 어떤 대답을 기대합니까? ‘모르겠습니다.’라든지 별 것 아닙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는데 선지자니이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맹인의 입장에서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이 최고의 찬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아직까지는 100% 받아들이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이 많은 이적을 행했던 것, 특히 수많은 이적을 행한 엘리사 같은 선지자를 염두에 두고 그는 대답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선지자라는 것, 즉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수라는 사람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해서 했더니 나았다는 정도로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그의 믿음이 점점 깊어집니다. 정말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최고의 찬사가 선지자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도 사실이 분명한데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라는 말과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분명하지만 굳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피하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과는 안 되겠으니까 그의 부모를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18-19)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던 것과 또 그 부모의 아들인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그 부모를 불러다가 이 사람이 너희의 아들이냐?’ 하고 묻는 것은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본인이 직접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이미 설명했는데, 눈을 뜨게 된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부모에게 다시 그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만약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면 실로암 못이나 예수님이 눈에 진흙을 붙여주시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증인으로 불러야지,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한 부모를 왜 부르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그의 부모를 부른 이유는 사실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위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진짜로 이 사람이 진짜 아들인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입 조심을 시키라는 것, 입을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눈을 떴다고 자꾸 떠들고 다니면 부모인 그들에게도 해가 미칠 수 있다는 경고를 하는 겁니다.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요한복음 본문에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것은 다 압니다. 바리새인들도 지나다니면서 이 사람을 왜 안 봤겠습니까? 이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압니다.

 

그런데 눈을 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진실을 회피하고 싶다는 겁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불순종의 반응입니다. 아까 이웃 사람들은 무관심의 반응이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불순종의 반응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은 당연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종교적 양심보다는 눈에 보이는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이런 행동은 놀랍지 않습니다.

 

 

3.   부모의 반응 - 비겁함 (20~23)

 

<생명의 삶>을 할 때마다 요한복음 요약을 하는데, 이 부분도 들으시는 분들이 요약해서 내십니다. 그래서 제가 요약한 것을 읽을 때마다, <말씀의 삶>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항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바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의 반응입니다. 굉장히 당혹스럽니다.

 

본문으로 볼 때 그의 부모가 눈을 뜬 아들을 언제 보았는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불림을 받아서 왔을 때 아들이 눈 뜬 것을 처음 알게 된 것 같지는 않고, 아들이 눈을 뜬 다음에 집에 와서 이웃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을 때 부모도 보고 알았습니다. 그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어쩌면 눈을 뜬 아들을 직접 보기 전에 입이 근질거려서 참지 못하는 동네 사람이 와서 당신 아들이 눈을 떴다.’라고 전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침만 해도 아들이 다른 날과 똑같이 구걸하러 더듬으며 밖에 나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지금 집에 들어오는 아들은 눈을 멀쩡히 뜨고 들어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입니까? 그때 이 부모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물론 엄청난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동시에 감동, 감격, 감사가 아니었겠습니까?

 

눈을 뜬 당사자는 분명히 청년이었는데, 이 사람 못지않은 아픔과 상처가 부모에게도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될 때까지 돌보고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을 당했겠습니까? 그들은 눈을 뜨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았을 때 무너져 내리며 펑펑 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동안 태어나면서 앞을 못 보는 아이를 낳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자기가 죄가 많아서 이런 자식을 낳았다고 얼마나 자책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자식에게도 미안하고 또 주변 사람들의 눈도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혹시 임신 기간 중에 뭔가 부주의한 경우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앞을 못 보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 내가 그때 부주의해서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되었다.’라고 얼마나 그 마음에 평생 상처를 안고 이때까지 살았겠습니까? 또 제자들이 물어본 것과도 같이 저거, 뭔가 죄가 있어서 저렇다.’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앞에서 대놓고는 못해도 뒤에서 그러는 것을 다 압니다. 얼마나 그 동안 마음이 아프고 상했겠습니까?

 

게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장성했을 때에는 이 아이를 돌볼 수가 없으니까 길거리에 구걸을 내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또 어땠겠습니까? 만약 맹인이라도 부잣집에 태어났다면 구걸할 필요가 없지만, 구걸을 나갔다는 사실만 봐도 이 집이 가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을 못 보니까 몇 발자국 걷는 것도 굉장히 힘든 아들을 구걸하는 자리에 내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느끼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도 익숙해져서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 더듬거리며 문을 나서는 아들을 볼 때 늘 마음이 애틋하고 미안하고 괴롭고 슬프고, 그 부모의 마음에 맺힌 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눈을 번쩍 뜨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미 어른이 된 아들은 평생 같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기들의 얼굴을 그날 처음 보는 겁니다. 아들이 들어오면서 당신이 내 아빠예요? 당신이 내 엄마예요?’ 하고 서로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서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펑펑 울었을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감사한 일이 있습니까? 누가 내 아들을 고쳐주었다는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을 누가 일으켜주었다는 말입니까? 그때 아들이 말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부모의 마음이 확 가라앉습니다. 무거워집니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라는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잡아 죽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자 갑자기 두려움이 다가옵니다. 지금 눈을 뜬 아들을 보면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좋은데, 동시에 눈을 떴다는 이것이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평생 아들 때문에 고생하고 마음이 너무 아팠는데, 이제는 예수라는 사람에게 고침을 받고 와서 기쁘지만 동시에 큰 두려움과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이 아들을 불러갑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자기들도 오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을 자기들을 불러서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왜 그 질문을 하겠습니까? 그 의도를 이 부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0-21)

 

이것은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부모는 예수님이 고쳐주시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우리는 모르겠고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라고 하는 것인데, 자기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아들에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벌을 면하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이해가 갑니다. 아들이 장성했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보통 13세에 성인식을 합니다. 저번 안식월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청소년들이 막 춤을 추었는데, 13세가 되는 아이들이 와서 성인식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최소한 열세 살은 넘었고,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인이니까 스스로 대답하도록 물어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왜 모릅니까? 압니다. 아들이 말을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최대한 벌을 안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2-23)

 

아들에게 물어 보라는 말은 그냥 보면 부모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할 수 있고, 또 그 동안 아들의 아픔과 고난을 아는 부모가 어떻게 이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겠습니까? 아들이 보게 된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미워했기 때문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두려움입니다. 22절 맨 뒤에 보면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즉 두려워했다는 겁니다. 출교 당할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먹고사는 데 어려움을 당할까 두려웠습니다.

 

출교 당한다는 것은 사실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면 어디에서도 발붙이고 살 수가 없습니다. 다른 데 이사를 가도 그 꼬리표가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있습니다. 그게 두려웠던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보다, 그 소망과 기쁨보다,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올까 봐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이 더 컸던 겁니다.

 

여러분, 지금도 사람들이 두렵기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괜히 예수 믿고 교회 가서 시간 보내다가 내 일이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학생들이 시험 때가 되면 왜 교회에 안 나옵니까? 괜히 교회에 갔다가 시험을 망칠까 봐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사실 교회에 안 간다고 시험을 엄청 잘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두려움 때문에 안 되는 것이지, 진짜 시험 때문이 아닙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직장 일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에 소홀해집니까? 뭔가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생명과 소망이 엄청나게 크고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보십시오. 미국에서 코로나 사태가 13개월이 되었는데,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서 코로나로 고생한 분은 없었습니다. 사실은 코로나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도 그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움츠러드는 겁니다. 실체보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항상 중요한 것은 어떤 일어난 사건 자체보다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두려움으로 해석을 하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지금 이 부모도 고난을 당할 것이 겁났습니다. 알고 있지만 아는 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아프지만, 어차피 아무런 희망도 없었던 아들이 조금 더 고생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 겁니다.

 

이웃 사람들이 무관심의 반응을 보였고 바리새인들이 불순종의 반응을 보였다면, 이 부모는 비겁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속으로는 울었을 겁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아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자리에 분명히 아들도 같이 있었는데 아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집안인데 가난이 원수다.’라고 속으로 이야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겁한 반응이 사실은 우리의 모습과 가장 가깝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처럼 주님께 무관심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바리새인들처럼 주님께 불순종하고 일부러 대적하는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는 주님을 믿는 기쁨도 있고, 확신도 있고, 믿음의 고백도 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감히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지 모른다는 유혹과 위협 앞에서는 자주 비겁해집니다. 그것을 대적할 용기가 나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믿는 대로 행동할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 그렇게 비겁한 믿음 생활을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가운데, 비겁하게 믿음생활을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라는 핑계를 대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가는 말]

 

오늘 이웃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관심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불신과 불순종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예수님이 아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 때문에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비겁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된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무 두려움 없이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맹인이었던 사람입니다.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당당히 대답합니다. “그분은 선지자입니다.” 아무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담대히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매일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리고 사는데, 두려움으로 결정하든지 믿음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매일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것이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예배를 빠지는 것도 모두 우리가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릴 때 두려움으로 하시겠습니까, 믿음으로 하시겠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올바른 결정을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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