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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80nAj_HTfpU?t=1587

 

 

2021613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17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요한복음 924~34)

 

[들어가는 말]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어떤 부부가 있었습니다. 신혼 때부터 30여 년을 살면서도 다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혼 초에 한 번은 빨래를 같이 하다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양말을 개는데 남편은 짝을 찾아서 묶었고, 아내는 짝을 찾아서 한쪽으로 포갰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것이 양말을 개는 데 시간이 덜 걸린다고 말했고, 아내는 자기 방식대로 해야 나중에 신을 때 편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데 서로 자기 방식을 주장하다가 감정이 상해서,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던 부부가 주말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을 너무나 사랑하던 아내였지만, 양말 개는 법 때문에 남편에게 저녁을 차려 주지 않았고,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던 남편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 것은 작은 자존심의 문제였지만, 그 자존심이 마치 자신의 가치에 위협을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또 주변에서 많이 해주던 말인 신혼 초에 잡아야 한다. 밀리면 안 된다.’ 하는 말들이 생각나서 물러설 수 없었던 겁니다.

 

많이 쓰는 말 중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 다른 것은 different이고 틀린 것은 wrong이니까 같이 쓰지 않는데, 한국말로는 다른 것틀린 것으로 쓸 때가 많습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면 저건 틀렸다.’라고 하니까 관계가 나빠집니다. 부부간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성도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에 보면 전부 그런 것을 봅니다. 한쪽에서 다른 쪽을 보며 다르니까 틀렸다고 하고, 그쪽에서도 이쪽을 보며 자기와 다르니까 틀렸다고 합니다. 다른 것인데 틀렸다고 하니까 문제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다 틀렸습니까? 그게 아닌데, 자기들과 다르고 자기들의 방식이 아니면 다 틀렸다고 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갈등이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1.   계속되는 바리새인들의 심문 (24~29)

 

이전에 91~23절까지 살펴보았는데, 9장에서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펴보는가 하면, 이 사건이 주님의 회복하시는 은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고침을 받고 본의 아니게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위기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점점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보았듯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더 이상 아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고, 이제 눈을 떴으니 스스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제 눈을 막 뜬 아들이 성인이었기 때문에 아들 때문에 자기들이 불이익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냉정하게 보이는데, 그 당시 출교를 당하게 되면 어디서도 발붙이고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나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고 아들이 책임지도록 한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막 눈을 뜨게 된 아들에게 부모가 이런 식으로 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정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부모의 그러한 책임회피성 매정함을 통해서, 또는 바리새인들의 강퍅함을 통해서, 오히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 스스로 신앙의 선택을 내리고 회복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4)

 

그의 부모로부터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받았지만 바리새인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지 않기로 결정한 자신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어떤 근거나 이유나 구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부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늘 어떤 구실이 있고 핑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 핑계는 그의 부모의 주저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러 추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맹인이었던 사람의 삶에 이루어진 치유 사건에 대해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이미 어떻게 된 것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사실대로 실토하라는 위협입니다. 지금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 부분이 여호수아 때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거기서 아간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훔치고 제비뽑기를 통해 나오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에게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7:19)라고 한 것을 염두에 두고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에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고 죄를 추궁할 수 있는 인물이며, 상대방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정말 그렇고 상대방이 정말 죄인인 겁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넘겨짚었을 뿐이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 안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맹인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못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자기들은 안다고 스스로 믿었던 것뿐입니다.

 

요즘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안 믿는 분들 가운데도 여러 경로를 통해 지식을 갖게 되는데, 실제로 정말 자기가 성경을 연구해보고 여러 가지 책도 공부해본 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들은 풍월이나 자기 생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어떤 학문적 연구 결과로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정말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 굉장히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도 많은 결정들을 감정에 따라 내립니다. 그냥 기분 나빠서 안 하겠다는 겁니다.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 하겠다는 겁니다. 남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너무 그게 좋아서 푹 빠집니다. 또 남들이 보면 정말 좋은 일인데 자기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하는 경우가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보아도 많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정말 연구하고 부인하는 경우는 못 보았습니다.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겁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이야기해도,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진리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비해 맹인이었던 사람은 아무런 꾸밈도 기교도 없이 그냥 단순하고 진솔하게 대답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5)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것이 바로 “I was blind but now I see.”라는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의 가사입니다. ‘내가 이전에는 못 봤는데 이제는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르면서 안다고 했지만, 그는 알면서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전에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선지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던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예수님을 철저히 변호할 만큼 그분에 대해 분명히 알거나 확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순간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 속에는 그가 은근히 바리새인들의 견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호수아가 아간을 추궁한 것처럼 자기들이 볼 때는 예수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가 죄인인지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말이 아닙니까? 이것은 논쟁을 할 게 없습니다. 예수가 죄인인가 아닌가는 논쟁할 거리가 되지만, ‘내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지금은 보고 있습니다.’라는 것은 누가 봐도 사실이기 때문에 논쟁할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간증의 파워입니다. 간증은 논쟁할 거리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님이 해주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 틀리다 논쟁할 것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기적이 사실이라고 확인합니다. 이 말에는 이런 엄청난 일을 한 분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를 완전히 옹호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어떻게 죄인일 수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눈이 열린 다음과 그 전의 자신의 변화를 압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을 스스로 깨닫는데, 자기도 뭐가 변했는지 모른다면 정말 믿은 것인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면으로든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설사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지식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전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이겁니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 내게 일어난 일을 간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변화되었다.’ 하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삶에 별로 변화가 없으니까 부끄러워서 잘 이야기를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가 잘 안 되는 것이지, 복음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의 부모가 출교당하는 게 두려워서 우리는 모르니까 아들에게 물어보십시오.’라고 대답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또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6)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물어보는 것은 윽박지르는 겁니다. 위협하는 겁니다. 뭔가 안 좋은 말을 하도록 강하게 밀어붙이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다 안다고 했는데 또 물어보는 걸 보면 이것이 유도 심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사람의 부모는 두려워했지만 이 사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과 직접 체험한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주님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면 이렇게 담대함이 생깁니다. 어느새 그는 영적 어린아이가 아닌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대답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7)

 

마치 선생님이 몇 번을 가르쳐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를 꾸짖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보통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 너는 왜 한 번 말해서 알아듣지를 못하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니?” 요즘에는 자녀도 부모에게 이야기합니다. “너 아까 그거 했니?”라고 하면 아까 이야기해줬잖아? 왜 또 물어봐?” 제 경우입니다. 요즘은 제가 아들에게 혼나고 있습니다. ^^

 

이 사람은 지금 너무 당당하게 아니, 당신들은 내가 얘기해주었을 때는 뭘 듣고 있다가 또 물어봅니까?’라고 조롱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겉으로만 영적 지도자이지 실제로는 영적 맹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눈이 밝아지고 있는 이 사람에게 오히려 배우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말한 것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도 없었고 들을 의지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큰 함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를 포함해서 교회를 몇 십 년 또는 평생 다닌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실수가 바로 이런 겁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도대체 설교를 몇 번 듣습니까? 매주 안 빠지면 1년에 50번 이상, 수요예배와 토요새벽예배도 나오면 1년에 150번 이상 설교를 듣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성경도 읽고 큐티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는 등,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건 뭐 다 아는 거야. 다 아는 이야기를 뭘 또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큰 위험입니다. 진짜 아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지는 않으면서 머리로 안다고 자기는 다 아는 거라고 하며 시시하게 아는 이야기를 또 하느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함정에 빠진 겁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 아는 게 아닙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뿐 아니라 조롱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정도 표적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정상인데, 바리새인들은 영적 맹인이어서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아주 여유만만 합니다. 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미 인간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구약 이사야에서 맹인이 눈을 뜬다는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자기에게 이루어졌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렇기에 용감하고 단순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가 선지자라고 믿었으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는 겁니다. 따질 게 없는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못 보았는데 이제는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말 하나가 눈에 띄지 않습니까? 그것은 당신들도에서 입니다. 이 말이 뭡니까? ‘나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을 변호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드러내게 된 겁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그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나는 나를 고쳐주신 그분의 제자다. 나는 이제 그분을 따라가겠다.’ 하고 결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바리새인들을 아주 자극하고 기분을 나쁘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고 약이 올라 있는데 이 말을 듣자 곧바로 속에 있던 진심이 나오게 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8)

 

이게 그들의 진심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기 전에 뭘 했습니까? 욕부터 했습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화가 나오니까 확 욕이 나옵니다. 이게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혹시 화가 나면 확 욕부터 나오십니까? 고상하고 아름다운 게 내 진짜 모습이 아니고 욕이 나오는 그게 내 진짜 모습인 겁니다.

 

이 사람들이 논리로 당할 수 없게 되니까 일단 욕부터 합니다. 무슨 욕을 했는지는 차마 기록할 수 없어서 안 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이 사람의 말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지금 기분이 나쁩니다. 그래서 일단 욕부터 하고, 자기들의 종교적 무기를 사용하면서 그를 저주하는 겁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는 말은 너는 모세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제 그들은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는 예수님에 관한 간증이 있었지만, 바리새인들이 가진 것은 권력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제자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놀랍게도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비아냥거리듯 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알면서도 의 제자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의 분위기를 살려서 번역하면 너는 그 치의 제자이나또는 너는 그 놈의 제자이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대신 자기들의 스승은 모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나는 너희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라고 했을 겁니다. 그들은 모세를 오해했습니다. 모세를 정말로 알았다면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어야 옳습니다. 모세가 일관되게 선포했던 것이 바로 메시야(그리스도), 즉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모세의 말을 오해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들이 받았던 율법과 믿었던 하나님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이지 진짜 하나님을 믿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자동적으로 좋은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도 이전에 그것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좋은 말을 한다고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물론 진짜 좋은 사람이면 좋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속여서 좋은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속에 좋은 것이 들어 있으면 좋은 말이 나오지만, 좋은 말을 살짝 했다고 그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그것이 체험되고 삶에 드러나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세상에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도 찾아서 이메일, 메시지, 카톡 등에서 얼마나 좋은 말들을 서로 주고받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5장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모세가 말한 모든 율법과 선지서들도 다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바리새인들을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고발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짜 제자다. 나를 사칭하고 있다.’라고 했을 겁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관계는 요한복음에서 5장에도 잘 나와 있고, 처음인 1장부터도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6-17)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가르침에 있어서 전문가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살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귀한 특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저것들은 율법도 모르는 것들이다.’라고 했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죄인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며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29)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았습니다. 모세는 직접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모세가 힘주어 전했던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전했는데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아마 모세가 살아 있었다면 바리새인들에게 똑같이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바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실 뿐 아니라 말씀을 들으셨고 또 하나님을 보신 분입니다(8:38).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여러 번 가르치셨지만(6:46, 8:42; 13:3, 16:30 )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2.   맹인이었던 사람이 제시하는 증거 (30-34)

 

맹인이었던 사람은 바리새인들의 저주와 위협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 대단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태도가 당당하다 못해 당돌해집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 신이 나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세 가지 증거를 들어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경험이고, 둘째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고, 셋째는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첫째 증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0)

 

이 사람이 이 말을 할 때의 표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참 이상하네?” 하고 조롱하는 표정을 말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세상을 볼 때 우리도 놀랍니다. 어떻게 안 믿는지 안타깝습니다. 예수라는 분은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고, 그분의 말과 행적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무엇보다 그분의 부활을 보고 듣고 믿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시작한 교회가 2천 년 이상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왕성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 안 좋은 모습들도 있지만, 지금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 때문에 인생이 변화되고,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성품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한 것은 단지 경험적인 증거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둘째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1)

 

그는 어느새 자기가 들어서 알고 있던 성경(구약) 지식을 통해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일을 평가하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얻은 경험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는지를 봐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다면 맞지가 않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이 다르다면 내가 뭔가를 잘못 경험한 겁니다. 미혹 당했을 수가 있습니다. 사탄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신비적인 체험을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3:1-5).

 

예수님이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능력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7:21-23) 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가 맹인이었을 때는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심오한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신다.”라는 것은 신앙의 상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와 있는지 지식적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요즘도 성경의 무슨 내용이 어디 있는지는 척척 잘 알지만, 정작 그 말씀이 내 생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눈을 뜬 사람과 영적 맹인의 차이입니다.

 

세 번째로, 맹인이었던 사람은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2-33)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예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16)라고 했는데, 맹인이었다 나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놀라운 말입니다.

 

이런 세 가지 증거를 또박또박 이야기할 때 그것을 들은 바리새인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을 겁니다. 정말 겸손한 지도자라면 누가 말했는가와 상관없이 그 말씀이 진리인가를 보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4)

 

이걸 보십시오. 맹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자마자 죄를 실토하라고 윽박지르더니(24), 아는 대로 솔직히 말하니까 너는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라고 저주하고(28), 이제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증거까지 말하며 예수님을 두둔하니까 아예 쫓아내버립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이게 진리와 상관이 있습니까? ‘너의 말은 틀렸다. 그러니까 나가라.’ 하고 쫓아낸 게 아니라, ‘네가 감히 우리를 가르치느냐?’ ,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기분이 나빠서 쫓아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진리, 말씀, 율법을 다 말해도 결정적으로는 기분이 나빠서 그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우리도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정적일 때 기분이 나빠서 또는 기분이 좋아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바리새인과 같은 태도라는 겁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이것이 사실인가, 진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이 바로 불의한 권력이 자기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진리를 따지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윽박질러서 힘으로 쫓아내는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나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말을 잘 보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너는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9장 첫 부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1-2). 누군가의 죄 때문에 그가 맹인으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3). 실제로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쫓겨났습니다. 부모가 두려워 피했던 일을 아들이 당한 것입니다. 앞을 볼 수 없을 때는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 또다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어둠의 세상에서 빛 되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하며 나아가면,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기쁠 때도 있지만 고난이 올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고난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으로 돌파할 것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일에 세상과 충돌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해서 안 믿는 사람이나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러셨습니다. ‘너희들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라.’ 선한 행실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지,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행실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를 거스르는 삶을 우리가 선택하게 되면 고난이 오고, 반면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들과 함께 흘러 떠내려가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이 우리 삶 속에 매일 올 수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순간부터 큰 결정을 내릴 때까지 항상 우리 앞에는 도전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살 건지, 아니면 그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주님을 따라 살 것인지?

 

맹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사실 엄청난 위기상황, 위협을 당하는 상황, 저주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고백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믿음이 자라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도 두렵고 힘든 상황,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믿음을 선택하며 나아가면, 당장은 힘든 것 같아도 놀랍게 그 안에 점점 더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역사를 풍성하게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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