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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4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6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4~21절)
[들어가는 말]
러시아의 문호라고 일컬어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있습니다. 그가 쓴 소설들이 많은데 그 중 유명한 <죄와 벌>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필독서로 읽으라고 하는 책들 중 하나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라스콜리니코프입니다. 그가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청년이었는데, 그가 자주 드나들던 전당포 주인은 인정 없는 노파였고 그는 그 전당포 주인을 아주 미워했습니다. 그 주인은 이 세상에 살아서 유익할 것도 없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는, 살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침내 전당포 주인인 노파를 죽이게 됩니다. 그녀를 살해한 후 그에게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득 찾아오지만 그때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 노인은 죽어야 마땅했다. 그 노인이 죽는다고 안타까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런 합리화로 자기의 불안과 두려움을 잊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후 라스콜리니코프는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공과 출세의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문득문득 ‘혹시 내가 발각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는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향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소냐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자기가 지은 살인죄를 알게 된 소냐의 권고로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 감옥에서 죄 값을 치르게 됩니다.
저자인 도스토예프스키가 하고 싶은 말은, 주인공이 아무리 성공의 길을 가든, 어떤 식으로 자기 살인을 합리화하든, 자기가 한 행동을 아무리 잊으려 애를 쓰든, 노파를 죽인 바로 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죄 값을 치러야 하는 그는, 그 후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그의 정체성은 그냥 살인자입니다. 어떠한 성공이나 쾌락도 노파를 죽인 살인자로서의 그의 운명을 바꾸지 못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바로 그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모두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피조물이 아니라, 그렇게 창조되었음에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죄로, 죽음과 절망을 향해 걸어가는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 (14~15절)
그렇다면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그런데 그것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은 다음에 ‘나는 이제 예수 믿고 천당 가니까 내 마음대로 살겠다. 실컷 죄를 짓고 살겠다.’라고 하면, 그래도 예수 믿으니까 천국에 가고 영생을 얻는 겁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4-15절)
15절은 14절에 이어 나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14절을 먼저 제대로 파악해야 15절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절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5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십니다.
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곧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당장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승천하시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자(예수님)가 들리는 사건이 일어나야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는 말이지만, 이것이 단순히 예수님의 인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다니엘서에서 ‘인자’라고 하며 메시아이신 그분, 그리스도이신 그분, 구원자이신 그분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인자이신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이 들리는 사건이 일어나야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인자가 들리지 않으면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14절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사건은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에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며 가는데, 먹을 것은 만나밖에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서 죽이는가?’ 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죄를 짓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불뱀들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물려서 많이 죽습니다. 그랬을 때 백성들이 나와서 자기들이 잘못했고 하나님을 원망하여 범죄했다고 하면서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그래서 모세가 놋뱀, 즉 놋으로 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은 놋뱀을 쳐다볼 때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생각해보면, 뱀이라는 것은 상당히 안 좋은 이미지 아닙니까? 사탄과 죄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악한 존재입니다. 창세기에서도 인간을 꾀인 것은 사탄이 뱀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그렇게 했고, 또 요한계시록에서도 뱀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뱀이 좋은 의미로 쓰인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뱀같이 지혜로워라” 하실 때 그것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위해 쳐다보아야 하는 목표물이 하필 뱀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기 오래 전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뱀은 안 좋은 이미지인데 왜 뱀을 보라고 하십니까? 불뱀에 물린 백성들을 살릴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아주 좋은 것이어야 할 텐데, 좋은 것을 매달라놓고 저걸 보면 낫는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무슨 뱀을 매달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셔서 와서 물었다고 되어 있는데, 뱀에서 불이 나오거나 불이 활활 탔다는 게 아니라, 뱀에게 물리면 코브라나 방울뱀의 경우 맹독이 있어서 죽기 때문에 물리면 불이 나는 것처럼 살에 열이 나고 뜨거워지고 금방 죽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이 뱀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14절에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도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민수기 21장을 염두에 두면 뱀을 달아 놓은 자리에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수님이 뱀을 대신하는 대체물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금 의아합니다. 예수님이 뱀과 동격이 되니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백성들을 살려준 것이 놋뱀입니까? 놋뱀 자체가 아닙니다. 놋으로 뱀 모양을 만들어놓았다고 그게 뭡니까? 그냥 놋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냥 쳐다보아서 나은 것도 아닙니다. 쳐다보아야 할 대상이 놋뱀처럼 별 가치 없는 것이라면 쳐다보는 행위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민수기 21장 사건을 이야기하시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하다가 불뱀이 와서 물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백성에게 시급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물론 불뱀에 물린 상처를 빨리 치료받고 낫는 것도 시급하지만, 무엇이 더 시급합니까?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막 원망하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나았는데, 가서 또 불평하고 또 원망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치료받고 내일 또 불평하고 또 물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아무리 지금 놋뱀을 보고 나았어도 가서 또 불평하면 또 물릴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사는 이상 그들은 계속해서 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뱀에게 계속 물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를 그칠 사람들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계속 불평과 원망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날그날 불뱀을 퇴치하는 것, 또는 놋뱀을 보고 몸이 치료를 받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단지 불뱀에 물린 사건 하나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아예 없애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죄를 없애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죄를 씻으실 뿐 아니라 결국 죄를 다 없애고 싶어 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놋뱀을 나무에 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놋뱀을 나무에 매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놋뱀을 매달았다는 것은 심판받는 뱀, 저주받는 뱀을 매달았다는 것입니다. 그 뱀에 쳐다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놋 조각일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려면 ‘나에게 저주가 임해야 한다.’라는 것을 미리 암시해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이 들린 것처럼 나도 나무에 매달려 저주받아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고침을 받고 진정으로 회복되며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놋뱀에 관련되어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놋뱀을 쳐다보면 나을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그들에게 하신 명령이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치료를 위해 연고 같은 약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덜기 위하여 상처 입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뱀과 맞서 싸우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장대에 달린 뱀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뱀을 향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바라보라는 명령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라는 명령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명령이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놋뱀을 장대 위에 달아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바라보고 고침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치료 방법이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여기에서 죄인들에게 구원을 일으켜 주는 수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죄인이 그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즉, 그 방법은 죄인이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어떤 것에서도 눈을 돌려, 하나님이 정해주신 믿음의 대상,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때는 놋뱀만 바라보아야 낫습니다. 다른 것을 아무리 바라보아야 낫지 않습니다. 모세가 장대에 매달아 놓은 그 놋뱀을 바라보아야 낫습니다. 자기가 똑같이 만들어서 그것을 쳐다본다고 낫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믿음의 대상만을 볼 때 낫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을 받을 만한 방법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착하게 사니까 구원받을 수 있고 뭔가를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기준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기준이 훌륭하고 멋져 보이고 고상해 보이고 그럴 듯해 보여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믿음의 대상을 바라볼 때에만 구원을 얻는 것이지, 다른 것을 아무리 바라보아야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비슷해 보이는 열쇠들이 많은데, 초라한 열쇠가 있고, 금으로 만든 황금빛으로 빛나는 열쇠가 있고 심지어 다이아몬드로 만든 열쇠가 있다 하더라도, 맞는 열쇠가 들어가는 것이지 멋지다고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멋지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으로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이 음식을 먹는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나올 것이고, 기운이 나며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었을 때 먹을 것을 받아먹는 것이 자기의 공로입니까? 그냥 준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먹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이 배고픔을 덜어주는 데 필수적인 수단인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인 중의 죄인, 악인 중의 악인이라 할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단 한 가지 방법,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법, 그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경에 자신의 아들에 관하여 기록해놓으신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만들어내서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목적 (16~18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가끔 운동 경기 같은 데 보면, 스탠드에서 관중에 시합을 보면서 응원카드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John 3:16>이라고 써서 보이는 것을 본 적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마도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이것을 뽑는 사람들이 많고, 또 성경에서 아는 구절을 물어보면 이 구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외우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유명한데 정확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소중히 여기는 말씀이 아닙니까?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좋고 언제 읽어도 위로가 됩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귀한 사랑의 약속이 담겨 있는데, 잘 묵상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 큰 감격과 감사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할 때 세 단어가 눈에 띕니다. ‘사랑하사’, ‘하나님’, ‘이처럼’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처럼’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어서 나오는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내 아들이나 딸을 기꺼이 내어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 아들이나 내 딸이 더 중요하지, 저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내 아들이나 딸을 죽는 데 내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독생자(외아들)를 하나님이 내어주셨다는 것은, 그 정도로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면 왜 그렇게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내어주시겠습니까? 독생자를 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읽으면 잘 이해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희생과 대가도 감수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의 나무에 매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루시려고 한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의미하는 복음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형편없는 존재를 위해 내어주셨다는 것, 그것도 그 저주의 자리에 우리가 달려야 하는데 대신 아들을 달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사랑이고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 가끔 있는데, 그것은 훌륭한 대상이나 고상한 가치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게 대부분입니다. 형편없는 사람이나 형편없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또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큰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아프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는 건강한 줄 압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의 몸 속에 불치병이 있어서 얼마 살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는 몰랐습니다. 의사가 진찰을 해보더니 말합니다. “참 죄송한데, 많이 아프십니다. 오래 살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칠 수 있는 약이 있습니다. 이 약을 드시면 사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자기 생각에 ‘아니, 나는 전혀 아픈 데도 없고, 이렇게 건강하고, 활동하는 데 아무 지장도 없는데 내가 무슨 죽을병에 걸렸나? 전혀 증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건강한데, 또 식욕도 좋고 잠도 잘 자는데?’ 그래서 말합니다. “됐습니다. 나는 멀쩡하니까 그 약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원래 약을 좋아하지도 않고 약을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고 갔는데 얼마 후 이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불치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괜찮으며 멀쩡하다고 생각해서 약을 먹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살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거부한 게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그 약을 먹지 않아서 죽었다는 말은 맞지만, 약을 먹지 않은 것이 그를 죽였다고 하면 그것을 잘못된 말입니다. 약을 먹지 않은 것은 그가 죽은 우선적인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를 죽게 만든 것은 병입니다. 그런데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교적 건강하게 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이야기합니다. “불로장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약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 약이 믿어지지도 않아서 싫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 의사는 강력히 협박을 합니다. “지금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당신은 불로장생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약을 만든 사람이 언제 찾아와서 당신을 죽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이 약을 소개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당신의 죽음에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실제로 이 약을 만든 회사 사람이 와서 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경우에 이 사람의 죽음의 우선적인 원인은 약을 먹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두 경우의 차이를 이해하십니까? 오래 전 한국교회에서 부흥이 많이 일어날 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아주 열정적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람들이 들은 메시지는 두 번째 케이스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지옥에 보낼 것이라고 들렸습니다. 약을 안 먹으면 약 회사 사람이 와서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기독교는 독선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복음은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안 믿는 사람들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심판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8절)
무슨 말입니까? 믿지 않음으로써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죄함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괜찮다고 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물질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행의 최종적 증거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을 아름답게 말할(미화할) 때는 사실 포기하고 체념했을 때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 생명 앞에서 이 땅의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여기 있는 누구에게나 죽음이 당장 임한다면, 그 죽음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립니다. 지금까지 내가 누리던 것과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 죽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런 말도 사실은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는 체념과 허무함에서 비롯된 말이지, 정말 다시 사는 부활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라는 말씀을 “이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라고 이해하면 더 쉽습니다. 이런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고 기차역에 모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데 그 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행 기차를 탈 사람들은 이쪽 사람들, 지옥행 기차를 탈 사람들은 저쪽 사람들이라고 하시며 천국행 열차와 지옥행 열차에 나누어 태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뭡니까?
사람들은 이미 지옥행 열차에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웃고 떠들고 음식을 먹고 신나게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이 열차에 타면 저 죽는 길에 떨어집니다. 저쪽 열차로 갈아타십시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이미 심판을 향해,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빨리 내려서 이쪽으로 타라고 하며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생명으로의 초청이지, 안 믿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왜 그렇게 못하셨겠습니까? 지옥행 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잘 가시오. 가서 죽으시오.’ 하면서 그냥 놓아두면 죽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죽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아까 그 <죄와 벌>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자신의 살인을 아무리 잊으려 하고 ‘괜찮아. 그 노파는 원래 죽어야 되었던 인간이야.’라고 합리화해도, 그녀를 죽인 순간 그의 운명은 결국 시베리아 감옥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소냐라는 여자가 그에게 자수를 권했기 때문에 시베리아로 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살인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리로 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3. 심판의 근거들 (19~21절)
지금도 지구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지금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알지 못합니다. 자기는 괜찮은 줄 압니다.
지옥행 열차를 생각해보십시오. 굉장히 화려하고 엄청나게 잘해놓았고 편안하고 푹신해도, 그럼 뭐 합니까? 결국 목적지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절망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9-21절)
이 생명의 빛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높은 장대에 달리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을 다시 생명으로 이끌어 들어가게 하시는 빛입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최고의 선물 아닙니까?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 빛을 거부했습니다.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둠을 빛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절망으로 향하는 기차가 저 천 길 낭떠러지로 곧 추락할 텐데 그게 좋아서 거기에 있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이 어둠을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어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행위가 드러날까 봐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말씀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안 믿는 분들은 어둠을 더 사랑해서 빛에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무엇입니까? 살인죄? 성적 범죄? 도둑질? 사기 치는 것?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는 사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내가 주인이다. 내가 왕이다.’ 이것이 죄의 원래 개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애초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받아 가지고 나간 것부터가 죄입니다. 그것을 다 탕진한 죄, 여자들에 빠져서 살았던 죄, 술에 방탕한 죄 등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런데 가장 큰 죄, 가장 근본적인 죄는 아버지를 떠난 죄입니다. 그게 더 크고 어두운 죄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마음껏 돈도 벌고 또 마음껏 쓰기도 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소유하고 누리고 쓰고 즐기고 싶어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는 혹시라도 허랑방탕하지 않았고, 사업을 아주 잘해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구제했다 해도, 그 선행을 하고 잘된 것조차 아버지에게는 불효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그가 그렇게 훌륭한 사업가가 되는 것보다는, 사실 어떻게 보면 망한 것이 복이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버지 집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성공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성공은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엉뚱한 생각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혹시 망하더라도 오히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창녀들에 비하면 아주 훌륭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했지만 정작 하나님이 필요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며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았던 사람들, 즉 또 다른 탕자들이었습니다.
그 인생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지옥행 열차 안에서의 놀이가 너무 재미있고, 노래하고 밥 먹고 떠들고 게임을 하고, 그래서 온통 거기에 관심이 쏠린 사람들, 또 1등석이냐 2등석이냐 하는 것에 관심이 쏠려 있는 모습을 가리켜 예수님은 ‘어둠’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어둠이 나쁜 짓을 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이 어둠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것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기차에서 내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주인을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절망과 죽음을 향해 가는 기차 안에서 웃고 떠들며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누구든지 이제 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될 기차 안에서 곧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저 인생의 관심이 쾌락과 쌓아놓는 것과 오직 높이 올라가는 것에만 있다면, 그것은 인생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살고자 한다면 어떻습니까? 정말 살려는 사람은 그 기차에서 빨리 뛰어내려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살 길이 있다. 살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정말입니까? 정말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지 뭐가 또 있느냐?’ 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 체념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충격이 되는 동시에 또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절제와 희생과 사랑의 삶을 살고 때로는 복음 때문에 순교의 길을 가면서까지 증언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 영원한 생명을 모른 채 계속해서 지옥행 열차의 달콤함에 취하여 그 안에 계속 머물고 나올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들을 향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주신 이러한 사명을 다 감당함으로써, 우리만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