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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5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11 ✦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일으키신 기적”
(요한복음 6장 1~15절)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특히 지난주 월요일 이갈렙 선교사님의 소천 소식은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코로나 걸리셨다고 해서, 여기는 걸려도 낫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괜찮으시겠지 했는데, 아주 심각한 상태이셔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순교자로 큰 상급을 받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잘 계시겠지만, 지금 남은 가족들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시련이겠습니까?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계속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사시면서 인생의 큰 시련을 많이 만나셨습니까? 어려움을 다 만나게 되어 있는데, 특별히 아주 큰 고통과 시련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것을 해결하셨습니까? 큰 시련을 당했어도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은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힘들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라고 표현합니다. 본향을 가는 나그네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불가능이라는 높은 산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집트를 떠나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만났을 때,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그 바다는 건널 수 없는 불가능의 바다와 같았습니다. 또 우리 인생은 전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 우리 앞길을 막는 거대한 적을 만납니다. 모세 앞에 선 바로가 그런 존재였고, 다윗 앞의 엄청난 장수 골리앗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를 만나면 대개 사람들은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불가능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높은 산도 정복할 수 있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도 건널 수 있으며, 골리앗과 같은 엄청난 거인도 쓰러뜨리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오병이어 표적이 일어난 배경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유일하게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기적 사건입니다. 기적 사건으로는 유일하게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서 대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기적을 보여주는 대표적 본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자들은 불가능한 일에 직면했습니다. 사람들을 먹여야 하는 문제가 그들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것이 핵심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약간 다른 각도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없으십니까? 당연히 할 수 있으십니다. 또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알아보라고 하실 필요도 없고, 다 앉으라고 하신 후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도록 하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굳이 제자들에게 가서 알아보라고 하셨겠습니까? 또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그것도 한 아이를 통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셔서 그것으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까? 바로 그런 것들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1-2절)
5장에서 38년 된 병자를 예루살렘에서 고치신 예수님은 그 후 갈릴리로 돌아오십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갈릴리에서 엄청난 사역을 하신 것은 유일합니다. 물론 가나에서 혼인잔치 사건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신 사건이 나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핵심적인 사역을 갈릴리에서 하신 것은 요한복음에서 유일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이때는 제자들이 예수님 대신 나가서 전도하고 돌아온 직후입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나가 예수님처럼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정말 성공적인 사역이었습니다(막 6:7-13).
그것을 본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서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제자들도 저 정도라면 그 선생은 얼마나 능력이 많겠는가 하고 좇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에 휩쓸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 산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3절)
이 무리는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녔습니다. 2절에 세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따르다’, ‘행하다’, ‘보다’입니다. 그런데 이 세 동사가 모두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번 하고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 번 따르고 만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따라다닌 겁니다. 끈질기게 따라다녔습니다. 마치 요즘 스토커처럼 막 따라다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여러 번 반복해서 환자들을 고쳐주시는 표적을 행하셨고 그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계속 병을 고치는 표적을 행하셨고, 이 사람들은 계속 따라다니며 그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자체는 잘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으면서 따라온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그들이 기대하던 구원자는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도 그들의 잘못된 기대에 휩쓸린 나머지 예수님 자신을 오해할까 싶어 산으로 피하신 것입니다. 또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고 싶으셨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3절에서 ‘예수께서 산에 오르셨다.’라고 할 때 어느 한 산이 아니라 ‘그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갔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아는 곳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곳은 벳새다 근처의 산지였는데, 완전한 산지라기보다는 언덕이 높은 곳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4절)
여기서 굳이 유월절이 가깝다고 소개한 이유는, 유월절이 요한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사역하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3년인지 압니까? 그 기간이 3년 반 정도 되는데, 다른 복음서들에는 안 나오지만 요한복음에 유월절이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38년 된 병자를 예루살렘의 베데스다에서 고치신 사건의 때는 그냥 ‘명절’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그것이 유월절인지, 오순절인지, 부림절인지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유월절이 있고 그 후 50일째(7주째) 되는 날이 오순절인데, 유월절 이후 갈릴리에 가시자마자 50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또 가셨다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그 사이에도 다른 사역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었다고 해도 그 다음 해 오순절이 아니었겠느냐, 아니면 그 다음 해 유월절이 아니었겠느냐 하고 생각됩니다. 첫 유월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때이고(2장), 두 번째 유월절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환자를 고치신 때이거나 그 후의 오순절이라고 생각되고(5장), 세 번째 유월절이 바로 여기(6장)에 나오는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유월절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유월절입니다. 이렇게 네 번의 유월절이 있다고 보고,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3년 정도 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시간적 배경인 유월절에 일어난 오병이어(떡 5개, 물고기 2마리) 사건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 즉 우리를 위해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6장 전체가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시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리 여기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오병이어 표적이 진짜로 알려주는 것
1) 쓸 수도 없는 사람을 써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5-6절)
이런 내용은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빌립이 질문을 받았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오는 것을 보시는데, 뒤에 보면 남자만 5천 명 정도니까(10)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2만 명 정도는 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자들은 일하러 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일이 없는 사람들만 좇아왔을 것이기 때문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더 많은 수가 따랐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배가 고픈 사람들, 그래서 음식을 먹여주어야 하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것처럼 요한복음에는 직접적으로 그들이 배고파서 불쌍히 여기셨다고는 안 나오지만, ‘어떻게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을 볼 때 그들을 먹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사람들, 먹여주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자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입니까? 그 큰 무리는 큰 문제로 보입니다. 날은 저물어 황혼이 되었고, 그들은 지금 빈들에 있습니다. 음식을 구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모든 사람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상황을 제자들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시험(Test)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을 넘어뜨리기 위한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훈련을 시키시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빌립이 여기서 언급되는데, 유명한 베드로나 야고보다 요한이 아니고 왜 빌립에게 하셨겠습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가 바로 이곳에서 가까운 벳새다 출신입니다. 고향이 바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가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어디서 먹을 것을 살지 잘 알기 때문에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안드레가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역시 그곳 벳새다 출신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고향이 거기이기 때문에 이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앞에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만 남게 될 텐데, 그때 불가능한 일을 만나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미리 훈련시켜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때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뭐라고 대답합니까?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7절)
빌립은 굉장히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었다고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수학적인 사람입니다. 계산이 빠릅니다. 200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사도 조금 밖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것도 모자란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당시 노동자가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벌었는데, 200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가 8개월 정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8개월 수입을 생각해보시면, 그 정도 액수입니다. 그는 수를 세는 머리가 아주 빨리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결론이 뭡니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자기 머리로는, 자기 계산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복음에는 직접적으로 안 나와 있지만 마가복음을 보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막 6:37)라고 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얼마나 불만이 폭발했겠습니까? 지금 피곤하고, 저녁때이고, 먹을 것을 구할 데도 없고, 특히 돈이 없는데 어디서 200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입니까? 불가능한 데에 계속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돈의 액수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그때 예수님이 또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막 6:38) 그래서 제자들이 가서 알아보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게 됩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8-9절)
보통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아주 적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엄청난 일을 이루실 수 있다.’라는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이 사건의 핵심을 놓치는 일이 됩니다.
당연히 그런 뜻도 있습니다. 보잘것없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 손에 들리기만 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사건을 말하면서 그보다는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오병이어를 통해 일어나는 기적과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일어나는 기적 중에 어느 것이 더 기적답습니까? 조금을 가지고 나중에 열두 광주리에 남은 것을 담을 정도로 된 것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뭔가 보이는 것,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 것과, 아무것도 없는데 하늘에서 쏟아지거나 물고기가 갈릴리 호수에서 날아가지고 튀어 온다면 더 엄청난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주님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때 오병이어(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보잘것없어도 우리가 뭔가를 드려야만 주님이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오병이어가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와 복음 사역을 확장하는 일에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뭔가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드릴 때 하나님이 엄청나게 증폭시키셔서 사용할 수 있으시다는 뜻도 있지만, 그 이전에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 자체를, 사실 써봐야 별 것 없고 쓰기 싫은 그런 존재를 써주신다는 데 더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닙니다. 아무리 놀랍고 대단한 기적이라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목적은 사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뭔가 물건을 드려 헌신하고 우리가 하는 어떤 것 때문에 하나님이 엄청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아무리 드려봐야 주님 보시기에 이건 쓸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기를 기뻐하신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초점입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굳이 제자들에게 테스트를 하십니다. 뭐 하러 하십니까? 그냥 하셔도 되는데. 그런데 테스트를 하시면서 그들이 뭔가를 깨닫기를 또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이 제자들은 모든 믿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아주 평범한 그들을 불러서 주님은 제자로 삼아주셨고 제자가 뭔지 그 역할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사람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사건에서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신데도, 이 사건에서 오병이어라는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에 비해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힘으로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사용하신 것처럼, 주님은 정말 형편없고 쓸 수도 없는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여러분, 스스로 ‘나 정도 되는 사람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쓰실 만하지.’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착각입니다. 우리 중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실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도 하나도 없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쓰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써주신다는 것!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정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고, 오늘 또 주일이네. 귀찮네.’라는 게 아니라, 이 은혜를 정말 깨달은 사람은 진실 된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도 열심히 읽고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필요가 없는데도 동참시켜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라
이때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어서, 안드레가 그 아이를 직접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다른 데서는 ‘떡’이라고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보리떡’이라고 나옵니다. 요즘처럼 제과점에서 맛있고 먹기 좋고 보기 좋게 만들어진 빵이 아니라 아주 작고 밋밋한 빵입니다. 중동의 빵을 드셔보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옛날 2천 년 전에는 더 형편없었습니다.
아주 가볍고 한 사람이 먹어도 부족한, 여러 개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여러 개를 먹어도 배가 안 부릅니다. 그러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사람의 한 끼분도 안 되는 겁니다. 게다가 얘는 아이니까 아이의 양은 어른보다 적습니다. 아이나 먹을 만한 그 정도 양입니다. 안드레와 제자들은 그러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며 어떤 평가를 내립니까?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9, 새번역)
이것을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요까짓 것 가지고 어디다 씁니까?’라는 말입니다. 아주 하찮게 보이는 겁니다. 드리겠다고 나온 건 귀한데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제자들이 보는 것과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것이고 ‘요까짓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을 가지고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쓸 수도 없는 것을 가지고 엄청난 기적을 이루십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이 필요한데 가진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는 것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게 나왔을 때 ‘됐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하겠다.’라고 하셔도 되는데 굳이 그것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왔을 때 ‘여기 주님이 쓰실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주님 앞에 나가게 하면, 주님이 보시고 ‘됐다. 내가 그냥 혼자 알아서 하겠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써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혼자 하실 수 있는 분이 정말 보잘것없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일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0-13절)
여기서 자원을 보존하는 측면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은혜가 되는 말씀이 뭡니까? 저에게는 이것입니다. 11절 뒷부분의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어릴 때 좋아하는 것을 막 먹고 있는데 아빠 엄마가 “야, 그만 먹어.”라고 확 빼앗으면 “으앙” 하고 울지 않습니까? 더 먹고 싶은데 못 먹게 하니까 서러워서 웁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간식을 먹는 게 아닙니다. 먹을 게 없고 주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주시니까 정신없이 먹는 겁니다. ‘더 달라, 더 달라’ 외치며 마구 먹는 겁니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까 배가 부릅니다. 이 사람들이 배가 안 불렀으면 남는 게 있었겠습니까? 남는 게 없죠. 그런데 열두 바구니나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불렀다는 겁니다. 충분히 먹었다는 말입니다.
열두 바구니나 남기는 기적을 통해 가장 놀란 사람, 가장 큰 영적 유익을 누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분명히 제자들일 겁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기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이 음식이 어떻게 늘어났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감사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이 그것을 나누어주었을 텐데, 남자만 5천 명이고 전체가 약 2만 명이니까 꽤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퍼주고 또 퍼주어도 계속 나오니까 나누어주는 제자들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이렇게 이 사건을 보는 이유는, 하나님이 일하실 때 거기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고 사실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부름을 받은 것이 무슨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꺼낸 것도 아니며, 예수님이 주신 것을 그저 받아다 전달해준 것뿐입니다. 중간자의 역할, 분배자의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새로운 삶>에서 배우는 것처럼 ‘청지기’(오이코노모스 Oikonomos)의 역할을 한 겁니다. 그게 너무 풍성하니까, 풍성한 걸 받아서 풍성하게 넘겨준 겁니다. 받아서 넘겨주어 많은 사람이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누어준 사람이 받은 사람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위대하신 주님으로부터 받아서 나누어준 것뿐인데, 바로 그게 사역입니다. 내가 잘나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을 그냥 받아서 전달하는 것, 그것이 사역입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많지만, 특히 요즘 출애굽기 큐티에 나오는 모세 같은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라서 쓰임 받은 게 아닙니다. 40년 동안 이집트의 왕자로서 훈련을 잘 받아서 쓰임 받았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때는 그저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것 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80세가 되어 힘이 다 빠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렇게 희망이 없을 때 하나님이 부르셔서 오히려 그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하시려고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세를 통해 보여주기를 원하셨고, 오늘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니구나.’ 하고 겸손할 수밖에 없는 동시에, 또한 그 높으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함과 함께 자부심과 당당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아주 낮아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아주 높은 권세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모순 같습니다. 나 스스로를 볼 때는 낮아질 수밖에 없지만, 나를 쓰시는 하나님을 볼 때는 높아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 사역자라는 것입니다.
사역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이 헌금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헌금이 필요하셔서 꼭 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모아야 한다며 ‘모으자, 모으자’ 하면서 무엇을 모읍니까? 모았더니 오병이어입니다. 오병이어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봉사하라, 헌금하라, 말씀을 읽어라. 예배하라’ 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돈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아이가 유일하게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이 아이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꺼내 놓는 그 어떤 것도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나는 좋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아이도 그 도시락이 자기에게는 좋은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훌륭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전혀 충분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쓰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내놓고 드려야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일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라는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으셨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안드레가 데리고 오는데, 처음에는 그 아이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에게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자기를 통해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가게 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아무것도 아니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것 같아도, 전 세계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주변 사람들이나 알지, 세계의 사람들은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또 아무리 훌륭해도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 잊히고 맙니다. 그 분야에서나 조금 기억이 될 뿐이지, 아는 사람이나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그렇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방해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그래도 와라. 와라.’ 하고 써주신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왜 굳이 ‘표적’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통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더 세워지고, 주님을 더 따르고, ‘오직 주님만이 내게 필요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 그 자체나 사역이나 어떤 일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주님께는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3. 누가 내 삶의 진짜 주인인가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4-15절)
여기 나오는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는 신명기 18장 15절~18절까지의 말씀에 언급된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모세의 고별설교인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실 것이다”라는 유언 같은 말씀을 남깁니다. 이 유언 속의 ‘나와 같은 선지자’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선지자’(14)입니다. 결국 모세가 예언한 ‘나와 같은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을 모르고 세상의 관점으로 보았습니다. 세상일을 해결하러 오신 해결사 정도로 생각한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저의 영혼을 구원해주십시오. 제가 주님의 제자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자신이 이루고 싶은 욕구를 해결해주는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다 하고 싶은 게 있고, 가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이루어줄 능력을 가진 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자라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니까 나를 도와줄 수 있어서 믿는다. 내 목적을 이루는 데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식입니다.
정말 그 앞에 항복하고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며 무릎 꿇고 듣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부리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경배의 대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지니(Genie)처럼,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램프를 문지르면 요정이 나타나서 물어봅니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능력을 가진 쪽은 주인이 아니라 요정인데, 램프를 가진 사람이 늘 주인입니다. 능력은 요정에게 있듯, 그런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능력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주인은 언제나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아까 부른 찬양곡 중에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는 가사가 있는데, 내가 주인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누가 결정을 하는지 보면 압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갑니다. 모든 결정을 자기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주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이고 마치 하나님이 종인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물론 신앙의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풀리면 이 땅을 팔아서 바치겠습니다.’ ‘자녀를 주시면 제가 헌신하겠습니다.’ ‘이 문제만 풀어주시면, 길만 뚫어주시면 헌신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을 잘 따지고 보면 지금은 없는 건데 없는 것을 주시면 그것으로 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는 안 하고, 지금은 없지만 주시면 그것으로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별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식으로밖에 하나님께 바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원래부터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은 바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생살을 잘라서 내놓을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없는 것을 주시면 그걸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병이어 사건에 담긴 내용입니다. 자신을 떼어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며,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지도 모르고 요구하지도 않는 우리를 먹이시고 백성으로 삼으셔서 우리는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거기에서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참 주인으로 모시며, 정말 보잘것없는 나조차 사용하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